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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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공사 국제부 PD
이한영[* 원래 북한에서의 본명은 리일남. 처음 낳은 아들, 첫째가는 남자가 되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다. '이한영'은 한국으로 귀순한 이후에 안기부 직원이 지어준 이름으로
국에서 원히 살라는 뜻이다.]
李韓永 | Lee Han-young

파일:Lee Han-young.jpg
출생
1960년 4월 2일[1]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2]
사망
1997년 2월 25일 (향년 36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분당차병원
묘소
경기도 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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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종교
개신교 (장로회)[1]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학력
대동국민학교 (졸업)
만경대혁명학원 (중퇴)
모스크바 종합대학 예비학부 (수료)
모스크바 외국어대학 (어문학부 / 중퇴)
스위스 제네바 어학연수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 / 학사)
경력
KBS 국제부 러시아어 담당 PD
(1987년 12월 - 1990년 4월)
가족
리태순
성혜랑 (1936년 - )
여동생 리남옥
이모 성혜림 (1937년 - 2002년)
이모부 김정일 (1942년 - 2011년), 이평[2]
외삼촌 성일기
이종사촌 김정남
당조카 김한솔
아내 김종은(1969년생)
장녀 이예인(1990년 2월 21일생)

1. 개요
2. 가계도
4. 여담




1. 개요[편집]


파일:42222.jpg
위 사진은 김씨 3대의 가계도인데, 과거 북한 로얄패밀리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던 시절의 내용으로 보아 업데이트가 필요해 보인다. 이한영은 1960년생, 김정일은 1941년생, 김한솔은 1995년생이다. 또한 고용희가 고영희, 고용숙이 고영숙으로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다.[3] 그리고 성혜랑은 김정은과는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으므로 김정은의 이모가 아니며, 따라서 이한영 남매도 김정은과 사촌이 아니다. 이 외에도 성혜랑은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 거주 중이며, 2017년 김정남은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당했다.

김정일의 처조카이자 최측근이다.[4] 1982년 9월 28일 만 22살 소련 유학 중이던 시기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우연한 기회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5] 1997년 2월 15일 대한민국에서 북한 간첩에게 저격당하여 열흘후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3대 가문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한영은 김정일의 처조카였으며 황장엽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대 최고위급 귀순자이자 성혜랑의 아들이다. 엄마인 성혜랑과는 사이가 좋고 서로를 그리워 했다.

2. 가계도[편집]


  • 외할아버지 성유경(1905 ~ 1982) / 외할머니 김원주(1907 ~ 1994)
    • 외삼촌 성일기 (1933년생)
    • 어머니 성혜랑 (1935년생) / 아버지 리태순 (1928 ~ 1968)
      • 리일남(이한영) (1960 ~ 1997) / 妻 김종은 (1969년생)
        • 딸 이예인 (1990년생)
      • 리남옥 (1966년생)
    • 이모 성혜림 (1937 ~ 2002) / 김정일 (1941 ~ 2011)


3. 이한영 암살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한영 암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여담[편집]


  • 모델 출신의 한국인 아내 김씨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태어난 딸이 있다. 아내와 딸은 이한영 암살 사건 이후 한 민간단체의 주선으로 미국뉴질랜드로 이사하여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8년 12월부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았으나, 2017년 2월 김정남 피살 사건이 일어난 후 당시 뉴스에 의하면 "남한 사회도 믿을 수 없다"며 다시 거처를 옮겼다고 하며 한국해외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28살이었던 이한영의 딸은 해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안전문제로 직장을 구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 이씨는 냉면을 특히 좋아해서 분당 옥류관에서 자신이 출석했던 교회 담임목사와 자주 만나 냉면을 먹을 때면 "나는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을 좋아한다. 북한의 후계자는 김정남이다" 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 사기혐의로 감옥에 있던 당시, 무단 방북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황석영 작가와 만난 일이 있다. 황석영 작가는 이한영으로부터, 본인이 망명이 아닌 납치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얘길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한영 본인도 자서전에 "그때는 정말 억울하고, 신세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한국에 자의적으로 온 것이 아닌, 납치되어 왔다는 것을 합리화시켜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는 맥락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자세한 내용은 황석영 여담 문단 참조.

  • 생전 이한영은 국정원측에 "우리(북한)쪽에서 김철수란 가명으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독 동포가 있다. 주의해 살펴 보라" 는 정보를 주었고 이에 국정원측은 제보를 받고 내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국정원은 김철수의 정체로 내재적 접근론을 주장한 독일 뮌스터대의 송두율 교수를 지목, 그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간첩으로 구속해서 조사했으나 송두율이 다소 친북적인 시각은 가졌을지언정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엄청난 지위에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혐의였고 1심에서 7년형이 선고됐으나 2심에선 결국 간첩 혐의가 무혐의 처분되면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형량이 대폭 낮아졌다. 송두율은 자신을 김철수로 지목한 황장엽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했으나 이는 패소했다.[6]

  • 95년 새해부터 재정지원이 끊긴 이한영이 정부에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하자 1995년 10월17일 정부 당국은 생활비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공식 통보해 왔다. 그 후 10월20일 사흘 만에 이한영이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를 찾아가 "성혜림씨 전화번호 알고 있어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 이모(성혜림. 김정일 국방위원장 전처) 예전 모스크바 방 전화번호 알긴 알아요" 라고 말했다. 안기부는 이한영과 <월간조선>을 연결시켜 성혜림 자매 망명 공작에 나선 직후 몇 차례 이한영에게 모스크바 측과 통화하게 한 뒤 이한영의 외삼촌 성일기(成日耆)씨(성씨자매의 오빠) 등을 모스크바에 보내 성씨 자매의 망명 공작을 추진했다. 북한 최고특권층 중의 특권층인 이씨의 가족을 한국에 오게하는 것은 다양하고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을수있는 기회이기에 외교적인 관점에서 정부로써도, 그리고 안기부로써도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월간조선>측이 성혜림의 모스크바 정보를 대가로 이한영에게 500만원을 줬다 한다. 이 돈은 안기부측에서 <월간조선>측에게 나중에 갚아주었다. 안기부의 사전 작업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다. <신동아>는 <월간조선>보다 한달 빨리 이한영과 접촉했으나 이씨의 신변 문제상 일이 흐지부지됐으며, 이한영이 동아일보 취재망에 잡힌 것은 95년 11월말. 그는 <신동아> 취재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았고, 취재진은 이씨의 신분을 확인한 뒤 본격 취재에 나서 이씨의 이모 성혜림과 이씨의 어머니 성혜랑 자매가 망명 의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감지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 당국이 <동아일보>에 보도 자제를 요청해 왔다. <동아일보>는 성씨 자매의 신변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다음해 2월13일 조선일보가 이씨와 성씨 자매의 망명 관련 움직임을 공개하게 된 것이다.

  • 이미 기자들이 이씨의 신분을 확인한 이상 '북한 로열패밀리' 에 관한 책이 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씨 본인의 입으로 "돈 때문에 수기 집필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며 95년 10월 월간조선과 접선하기에 앞서 KBS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기의 소개로 95년 9월 신동아를 방문했다고 자서전에서 이미 밝혔다. 안기부와도 수기에 대해 의논했고 안기부 측에서도 이를 승인했다. 신변 노출 이후 이씨는 안기부가 제공한 안전가옥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수기내용 중 안기부에 관한 일부 내용의 삭제 요청을 거부하면서 마찰이 생겨 그만 안가에서도 나오게 됐다. 그리고 그 후 거주하던 분당 아파트도 채권자 손에 넘어가면서 가족들을 처가에 보내고 자신은 일정한 주거지 없이 친구 집 전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대학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선배 집 한 칸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가끔 들르며 지내던 중 피살된다.

  •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은 일부 안기부 검열을 거쳐 <동아일보>에서 1996년 6월 출간되었다. 솔직한 성격의 이한영은 이 책에서 안기부에 관한 자신의 부정적인 시각을 자신이 느꼈던 그대로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맘먹고 쓰고 싶은대로 썼다면 그런 내용이 무조건적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안기부의 '협조 요청' 에 따라 <동아일보> 측이 일부 내용을 가감삭제하면서 책이 출간되었으나, 이씨는 끝내 안기부에 관한 비밀스러운 에피소드를 자서전에 넣게되며 이것이 그가 안가에서 나오게 된 원인이다. 이씨가 참변을 당한후 경찰의 한 관계자는 "이씨가 안기부의 특별관리대상으로 분류됐으면서도 안기부가 신변도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을 정도로 버림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전했으며, 검찰의 일선 수사관계자는 "이씨는 자신이 성혜림의 조카라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떠들고 다녔다. 안기부로서도 이씨의 정보가치가 약해진데다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일으켜 관리대상에서 사실상 제외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전했다.

  • 김현희가 자살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전향하자 김정일북한에 남아있던 김현희의 가족들을 모두 연좌제를 적용해 요덕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이씨의 어머니 성혜랑이 이씨와의 전화통화에서 얘기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당시 신문 기사. 또한 김정일은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전향한 김현희 소식을 듣고 여자는 요물이다는 독설과 함께 김현희가 속했던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에서 여성 공작원들을 모두 방출하고 김현희를 교육한 노동당 조사부간부들까지 요덕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김현희의 육촌 친척까지 평양에서 지방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안기부 직원의 말을 빌리자면 82년 이씨 귀순 직후 안기부 측에서 이씨에게 30만원 가량 금액을 예산으로 잡고 의류를 공급해 주기 위해 백화점에 데리고 갔는데, "옷을 사줄테니 골라보라" 말을 한 후 쇼핑을 시키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예산의 10배 정도가 더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국내의 대졸자 평균 월급이 약 22만원 수준이었으니, 한번에 대졸자 평균 연봉보다 큰 규모로 쇼핑을 했던 셈. 김정일 못지 않게 그에 버금가는 초호화 생활을 하며 수 만달러쯤은 우습게 여기던 이한영에게 이것은 그저 하루 쇼핑하는 정도이자 빙산의 일각이지만, 유일한 탈북자 출신의 김씨 일가 로열패밀리의 일원이었던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척도가 되겠다.

  • 총 3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북한에서의 본명은 리일남, 귀순 이전에 해외에서 사용했던 북한 외교관 여권에 등록된 가명은 김영철[7], 한국으로 귀순한 이후에 새로 지은 이름은 이한영이다.

  • 북한의 고위 계층 인물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한국으로 귀순한 이유는 미국 여행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8] 더 크게 보면 자유를 갈망한 것.

  • 여동생 리남옥은 프랑스로 망명한 후 프랑스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으며, 외삼촌 성일기는 한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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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민등록상 출생일은 1961년 9월 28일. 9월 28일은 이한영이 한국대사관에 망명신청을 한 날이다.[2] 주민등록상 출생지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3] 원래 고영희로 알려졌으나 김정은 집권 이후 친모에 대한 우상화 과정에서 '고용희'가 맞다고 확인되었다.[4]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처조카가 최측근이라는 사실에 조금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처조카였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 김정남의 보호자이자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5] 영어가 유창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 여행을 갈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언어가 통하는 주 스위스 제네바 한국 대사관에 문의했다가 대사관 대표부의 설득에 의해 거의 우발적으로 급박하게 탈북하여 총 3일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다만 이만갑 519회에서 김길선은 처음부터 탈북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을 것이며 '귀순'을 의도한 것이라고 하면 다들 위험해지니까 미국 여행이라는 핑계를 댔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6] 다만 황장엽과의 법정 다툼 중에서는 노동당에 입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2004년에 1973년에 입북하여 조선로동당에 가입했던 사실을 실토하면서 국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7] 해외에서는 보안상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8] 소련 모스크바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북한 외교관 여권으로 동유럽, 중국 등을 여행할 수 있었지만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가 미국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