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고히토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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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一期一振
1. 일본도 태도 중 하나
2. 도검난무의 등장 캐릭터


1. 일본도 태도 중 하나[편집]


파일:Ichigohitofuri.png

사진은 게임 내 본체 모형을 본뜬 레플리카. 이치고히토후리 진검은 황실어물이라 세간에 공개되지 않는다.

이치고히토후리(一期一振)
도공
아와타구치 요시미츠(粟田口吉光)
도파
아와타구치(粟田口)
제작 시기
가마쿠라 시대
종류
타치
길이
86 ㎝ → 69 ㎝
현존 여부
일본 황실 산노마루쇼조칸(三の丸尚蔵館)
명문
吉光
문화재 등록
-[1]

이름의 뜻은 '일생에(一期) 단 한 자루(一振)'. 이치고히토후리를 만든 장인인 아와타구치 요시미츠(粟田口吉光)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마사무네, 고우노요시히로와 함께 '천하의 세 명인'으로 일컬어지는 명공이었는데, 단도 제작의 명수였다. 그런 그가 일평생 만든 태도 중 최고 명작의 태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시미츠가 만든 작품 중 후기의 것이라 한다. 요시미츠의 정확한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마쿠라 중기(13세기) 인물이므로 만들어진 시기는 대충 그쯤으로 예상할 수 있다.

원래 아사쿠라 가문 소유였지만 아사쿠라씨 멸망 후 모리 가문의 소유가 되었고, 모리 테루모토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은 체구에 맞추어 원래 2척 8촌 3분(약 86 ㎝)였던 검신을 2척 2촌 7분(약 69 ㎝)로 다듬었다[2]. 히데요시 사후에는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3]에서 불탄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거두어 복원하였다.[4] 그 뒤 오와리 도쿠가와 가에서 보관하다가 1863년 황실에 헌상되어 어물(御物)이 되었다.[5]

몇몇 문서에서 텐카히토후리 요시미츠(天下一振吉光)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텐카히토후리 요시미츠와 이치고히토후리가 같은 검인지는 이견이 갈린다.

텐카히토후리 요시미츠는 본래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헌상한 검이다.[6] 이는 상기에 기재된 이치고히토후리의 이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7]
텐카히토후리 요시미츠가 이치고히토후리와 동일검이라는 확실한 언급도 특별히는 없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요시미츠의 태도가 이치고히토후리 한 자루라 생각했다는 점이나, 그 당시 유명했던 요시미츠의 태도가 이치고히토후리 한 자루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치고히토후리가 텐카히토후리가 아닌가 하는 설이 제시된 듯하다.

무로마치 시대 전의 기록에 텐카히토후리 요시미츠가 오니마루 쿠니츠나대신 천하오검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건 이에 대해 기록한 문헌이 하나 뿐인데다가 그마저도 동일 작가가 나중에 쓴 책에선 전혀 그러한 내용이 없기에 실수라는 의견이 정설이다. 아마도 오니마루를 만든 도공인 쿠니츠나와 텐카히토후리 요시미츠의 도공이 같은 아와타구치파의 도공이라는 점에서 온 혼동인 듯하다.

결론적으로 이치고히토후리와 텐카히토후리 요시미츠가 같은 검이라는 증거는 딱히 없다.


2. 도검난무의 등장 캐릭터[편집]


이치고히토후리(도검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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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황실의 소유물이란 이유로 문화재보호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2] 다만 여러 가지 사실 관계를 토대로 검증하면 도신을 짧게 다듬은 때는 히데요시 사후인 듯하다. 아예 도신을 줄였다는 말 자체가 자체가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 도신의 명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에 그의 키에 맞추어 다듬을 이유가 없는 것, 다른 장수들의 검들도 이치고히토후리와 비슷한 길이였다는 점 등을 따져 보면 현재는 원래부터 지금의 길이였다는 설이 거의 확실시된다.[3]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에서 불탔다고도 하나, 대화재 당시 소실품에 대한 기록과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기록에 의하면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불탄 것이 확실하다. 오기재된 것은 이치고의 우츠시가 불탄 데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4] 한번 재담금질하여 복원된 칼은 강도가 약화되어 사물을 베는 원래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5] 그렇기 때문에 문화재보호법의 보호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일본의 국보중요문화재가 아니라는 얘기...[6] 足利季世記(아시카가 키세키) 기록[7] 아사쿠라씨 멸망은 1573년이므로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아사쿠라 가문에 이 검을 하사하였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 어떤 기록도 없어 확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