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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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변호사, 정치인이다. 본관은 양성(陽城)[1] , 호는 향만(香晩)이다.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범래가 그의 사위이다.
2. 생애[편집]
1917년 9월 13일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아버지 이내학(李來鶴, 1876. 4. 15 ~ 1922. 7. 8)과 어머니 전주 최씨 최주영(崔周榮)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작은아버지 이내길(李來吉, 1888. 4. 23 ~ 1978. 7. 8)에 입양되었다.
1936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을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42년 만주 대동학원을 졸업하였다. 만주 대동학원 재학 중이던 1941년 만주국 고등관고시에 합격하였고, 이어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충청북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 1947년 청주상과대학 강사로 근무하다가 충청북도청 인사처장 서리에 임명되어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자유당 정운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가 각각 민주공화당 오원선, 이정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증평군 분리 전)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원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6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때 김영삼 총재 편에 섰다. 이후 같은 해 9월 치러진 신민당 수습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영삼과 거리를 두고 이철승 대표최고위원과 가까워졌다. 한편 자신의 계보인 혁진회를 조직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오용운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후보를 지지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으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그리고 변호사 업무에 전념하였다.
3. 선거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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