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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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차돈 표준영정.jpg

관등
내사(內史)
직위
사인(舍人)[1]
성씨
박(朴)[2] / 김(金)[3] / 석(昔)[4]
이름
이차돈(異次頓) / 이처도(異處道)[5]
염촉(猒髑)[6]
염촉(厭髑) / 염도(厭覩) / 이처(伊處)[7]
거차돈(居次頓)[8]
아버지
김습보
종교
불교
생몰년
504년 또는 506년
~ 527년 또는 528년 또는 529년[9]

1. 개요
2. 생애
3. 관련 기록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신라승려로, 이름은 염촉(厭髑) 혹은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불린다. 속성(俗姓)은 박(朴)씨 또는 김(金)씨인데, 일반인들은 아마도 다들 성이 이씨고 이름이 차돈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지만[10]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대로라면 성이 박 또는 김이고 이름이 이차돈인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이사부가 있다.

신라가 불교 국가가 되고 이후 시대에도 계속 한국 불교가 이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신라 당대에도 신라십성 중 한 명이기도 했다.


2. 생애[편집]


신라 법흥왕 시대의 인물로,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사인(舍人) 직책을 맡고 법흥왕의 측근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되기 전 신라에는 고유 신앙이 강하고 폭넓게 자리잡혀 있었다. 박혁거세김알지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계룡이 지켜줬다는 신화에서 신라에 천신 신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하늘의 후손이라는 사상은 배타적인 선민사상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고, 신라의 정복으로 복속된 피정복민들은 신라에 공감하고 흡수되기 어려웠다. 신라가 경주영남을 넘어 큰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불교를 국교화하려는 법흥왕에 맞서 신라 귀족층의 절대 다수는 기존의 토착신앙을 고수하며 외래 종교인 불교를 반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차돈은 귀족 계층 중에서는 사실상 혼자서 불교 도입을 지지하였다.[11] 그러나 귀족들이 불교 도입을 워낙 반대하는 통에 골머리를 심하게 앓았다. 여기까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일치하나 이후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 삼국유사에서는 527년에 22세였던 이차돈이 고민하던 왕에게 가서 "저의 목을 베시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민하는 법흥왕에게 "저의 목을 베어 왕의 위엄을 살리면 신하들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조언했다. 결국 법흥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신하들 주위로 군대를 배치해놓고 "왕의 사찰을 짓는데 일부러 지체시키는 자가 누구냐?" 하고 하문하자 겁에 질린 신하들이 이차돈을 지목해 이차돈은 왕을 거스른 죄로 목이 베인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쳐 올랐고 하늘을 가리며 온 땅이 흔들리며 꽃비가 내렸다. 그리고 북산[12]의 서쪽 고개에 장사 지내주고 좋은 땅을 골라 이차돈을 위로하는 절인 자추사(刺楸寺)[13]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 삼국사기에서는 528년에 이차돈이 왕에게 "저의 목을 베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불교를 일으키소서."라는 조언을 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왕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불교 도입과 관련되어 질문을 하자 신하들이 "중죄를 내려도 우리는 반대할 겁니다."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때 이차돈이 "불교의 심오함을 모르는 신하들이 잘못되었습니다."라며 나섰고 이에 법흥왕이 "여러 사람들의 말이 단단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구나.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라며 목을 베어 버린다. 그리고 목에서 흰 피가 솟자 더 이상 신하들이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고 하였다.
  • 해동고승전에는 529년에 26세였던 이차돈이 법흥왕에게 "소신이 대왕의 명을 구실로 사찰을 건립할 것이니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대왕께서 소신의 목을 치시면 이적이 일어날 것인즉 이로써 불법을 세우소서."라고 진언했다. 이에 법흥왕은 처음에는 "죄 없는 사람을 차마 죽일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결국은 이차돈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그 다음날 이차돈은 "대왕의 명을 받들어 사찰을 짓겠다"고 천경림(天鏡林) 숲의 나무를 마구 베었는데[14] 귀족들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결국 이차돈은 국문을 받았는데 법흥왕은 "네가 왕명을 사칭했으니 마땅히 목을 쳐야 한다"면서 참수형을 내린다. 이차돈은 처형 전에 "내가 죽을 때 이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차돈이 참수되니 그 목에서 흰색 피가 솟아나오고 꽃비가 내리고 땅이 요동치는 등의 이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이 덕분에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한다.
  • 이차돈 순교비에는 염촉이 찾아와 왕을 설득하고 이후 궁궐에 칼을 찬 사람들로 사방을 방비하게 한 위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신하들에게 "내가 불법을 믿고 절을 지으려고 하니까 반역을 꾀한 놈이 있다던데?"라고 물었다. 이에 신하들은 "저희는 절대로 반역을 꾀한 적이 없습니다."라며 벌벌 떠는데 이차돈만은 왕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이에 법흥왕이 이차돈을 불러 불러 목을 베었는데 흰 젖이 하늘로 치솟고 꽃비가 내리며 땅이 울렸다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라한(阿羅漢)이라는 이상(理想)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등 위계(位階)가 있다. 이 때 각 단계별로 많은 신체적 변화와 능력이 생기는데 능엄경의 유가수련증험설(瑜伽修煉證驗說)에는 '3번째 아나함의 경지에 오르면 붉은 피가 하얀 기름으로 변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에 맞추어 불교가 국교화된 뒤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고 후대에 전설이 붙었을 수 있다. 만약 정말로 이차돈의 목에서 흰 액체가 뿜어나왔다면 척수액이나 하얀 음식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5] 고지혈증으로 혈액 내 지방 함량이 높아 굳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추가로 중국발 기사지만 혈액이 흰색에 가까운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 성녀가 참수당할 때 잘린 목에서 피 대신 우유가 솟아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처음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은 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험난했지만,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는 빛의 속도로 독실한 불교 국가로 탈바꿈했다. 법흥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말년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처럼 하고 다녔고, 아들들과 친척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으로 지어버릴 정도였다. 보편 종교의 힘으로 백성들의 사상을 통합해 국왕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행정 군사 체제를 갖출 수 있었으며, 이는 진흥왕 대의 폭발적인 국력 신장과 더 나아가 삼국통일전쟁 승리까지 바라보는 원동력이 됐다. 이런 결과를 보면 이차돈의 순교로 확실하게 역사가 바뀐 셈이다. 9세기 통일신라에서는 이차돈을 성자로 칭송하며 추모하는 결사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기타 문단에 있는 이차돈 순교비 유물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 양촌 권근은 "이차돈이 불교를 위하여 간교한 계략을 꾸며 실행하니 이 때문에 신라의 종교 문제가 커졌다"고 부정적으로동국사략》에 기록했다. 반면 고려시대부터 승려 일연을 비롯한 불교계 측에서는 불교 이전 신라의 수준 낮은 토착 신앙을 비판하며 불교 신앙을 받아들였음을 긍정적으로 평했다. 역시 종교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해석이 각양각색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19년 8월 TBC의 보도에서 소금강산 백률사 인근 100여 m 떨어진 지점에서 이차돈의 무덤과 사당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다. 무덤 안은 이미 도굴되었고 관 안에 있던 시신 또한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래도 15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을 감안하면 그나마라도 발견했음이 다행이다.


3. 관련 기록[편집]


국왕은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가슴이 미어지듯 하늘을 우러러 부처를 부르며, "아아, 어찌하리오. 천하에 나 혼자이니,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법을 남기리오."라고 하였다.

이때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염촉(猒髑)이었다. 그는 왕의 얼굴을 우러러 쳐다보고 울분이 나서 먹는 것도 잊은 채 엎드려 왕에게 천천히 아뢰었다. "보잘것없는 제가 생각건대 임금께서 큰 뜻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비천한 사람에게도 계책을 물어본다고 하였으니, 제게도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곧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얘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라고 하였다. 염촉이 정중하게 답하여 말하기를, "임금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불법(佛法)이 되어야 옳은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곧 천천히 일어나 탄식하듯 말하였다. "어린 사람도 이와 같은데, 어찌 옳지 않겠는가. 만약 내가 천하에 불교를 유행시킨다면, 벌레 같은 무리도 인간세계나 천상 세계로 상승할 수 있으며, 나라는 풍요롭고 백성은 평안하여 가히 삼한(三韓)에 통할 수 있고 또한 사해(四海)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 염촉이 말하기를, "왕과 신하가 말다툼을 하다가 고의로 잘못을 범하여 ... 저의 목을 (벤다면) 신하와 백성들의 오해가 풀릴 것이니, 어찌 감히 왕명을 어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비록 (명분이) 있다고는 하나, 어찌 감히 무고한 목숨을 (죽이겠느냐?)"라고 하였다. 염촉이 말하였다. "천하의 ...에 ...보다 ...한 것이 없고, 불자(佛子)의 ...에 죽음보다 ...한 것은 없습니다. 제가 비록 죽더라도 불법이 유행하게 된다면, 작은 ...에 비기겠습니까?"

왕이 말하기를, "작은 것을 잊고 큰 것을 가히…" 하며 깨달은 듯 탄식하였다. 염촉이 말하였다. "...는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를 품고 ...은 백성에게 있고 마음은 왕에게…" 왕이 말하였다. "…만약 이와 같은 자라면, 가히 대사(大士)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 정전(正殿)에서 ... 칼 찬 무사를 사방에서 방비케 하며, ... 왕이 이에 묻기를, "그대들은 내가 불법을 믿어서 탑을 세우고자 한다고 여겨 반역을 꾸몄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말하기를, "신들은 절대로 반역할 뜻이 없습니다. 만약 ...가 있다면 ... 맹세합니다." 왕이 (염촉을) 부르자 ... 대답이 없었다. 왕이 관리에게 고하여 염촉을 (참수형에 처하게) 하였다. (염촉은) ...하면서 눈물을 뿌리며 북쪽을 향하였다. 관리가 곧 관을 벗기고 그 손을 뒤로 묶은 다음 관아의 뜰로 끌고 가서 큰 소리로 목숨을 거두겠다고 고하였다.

목을 벴을 때 목 가운데에서 흰 이 한 장(丈)이나 솟구치니,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서글프게 울었고 동요하면서 불안해 하였다. 길에는 곡소리가 이어졌고 우물에는 완전히 발길이 멎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장례를 치루었다. 시신은 북산(北山)에 안장하고 서산(西山)에 사당을 세웠다.

이차돈 순교비〉 中 # #


법흥왕 15년(528년)에 불법(佛法)이 비로소 유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 역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러쿵저러쿵하며 불평을 늘어놓았으므로 왕이 난감해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異次頓)[원주1]

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저의 목을 베어 뭇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인데,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道)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물으니 모두들 말하였다. "지금 들을 보니 박박 깎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떳떳한 도리가 아닙니다.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중죄를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이차돈이 홀로 말하였다.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연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아마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 없다.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을 다 따를 수는 없다."

마침내 관리가 장차 이차돈의 목을 베려고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장(刑場)에 나아가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그 빛깔이 우유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에서 행하는 일에 대해 헐뜯지 않았다.[원주2]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법흥왕#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이르기를, "법흥대왕 즉위 14년(527년)에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없앴다"고 하였으니, 바로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년으로 서축달마가 금릉(金陵)에 왔던 해이다. 이 해에 낭지(朗智)법사가 역시 처음으로 영취산(靈鷲山)에서 불법을 열었으니, 대교(大敎)의 흥하고 쇠하는 것은 반드시 원근이 서로 동시에 감응한다는 것을 여기서 믿을 수 있다. 원화 연간(806년~820년)에 남간사(南澗寺)의 사문 일념(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사실을 매우 자세히 실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옛날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殿)에서 즉위하고 동방의 땅을 굽어 살펴보고 말씀하셨다. "옛적 한나라 명제가 꿈에 감응받아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왔다. 과인은 즉위하면서부터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만들려고 염원해왔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원주3]

은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을 준수했을 뿐, 절을 세우겠다는 신성한 계획은 따르지 않았다.

대왕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아아, 과인은 덕이 없이 왕업을 계승하여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훼손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거움이 없으므로, 정무의 여가에 마음을 불도에 두고자 하지만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내양(內養)한 자가 있어 성은 박(朴), 자는 염촉(厭髑)이었다.[원주4]

그의 아버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할아버지는 아진(阿珍) 종(宗)으로, 곧 습보(習寶) 갈문왕의 아들이다.[원주5] 그는 대나무잣나무처럼 곧은 자질을 가졌고 거울처럼 맑은 뜻을 품었으며, 선을 쌓은 이의 증손으로서 조정의 인재로 촉망되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 태평성대의 시종이 되기를 바랐다. 그때 나이 스물두 살로 사인(舍人)[원주6]의 직책에 있었다. 용안을 우러러 왕의 뜻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옛사람은 비천한 사람에게도 계책을 물었다고 하니, 죄를 무릅쓰고 대왕의 뜻을 여쭙기를 원합니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인이 말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왕명을 잘못 전달하였다고 해서 신을 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지시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살을 베어 저울에 달더라도 한 마리 새를 살리려고 했고, 피를 뿌리고 목숨을 끊어서라도 일곱 마리의 짐승을 스스로 가엾게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네가 비록 공덕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죄를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사인이 말하였다. "모든 것이 버리기 어렵지만 제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大敎)가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난새와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기러기와 따오기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바다를 건널 기세를 품었다고 하더니 네가 이와 같구나. 가히 대사(大士)의 행동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의(威儀)를 갖춰 동서에는 바람 같은 칼을, 남북에는 서릿발 같은 곤장을 늘어 놓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그대들은 내가 정사(精舍)를 지으려고 하는데 고의로 지체시키는가?"[원주7]

이에 여러 신하들이 전전긍긍하며 황급히 맹세하고 손가락으로 동서를 가리켰다. 왕이 사인을 불러 힐문하니, 사인은 낯빛이 변하면서 대답할 말이 없었다.

대왕이 분노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니, 관리가 그를 묶어 관아로 끌고 왔다. 사인이 맹세하여 소원을 세운 뒤 옥리(獄吏)가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장(丈)이나 솟아올랐다.[원주8]

하늘은 사방이 컴컴해지며 볕은 기울어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면서 꽃비가 내렸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옷을 적셨고, 재상은 근심하여 조관(朝冠)에까지 땀이 흘렀다.

샘물이 갑자기 마르매 고기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가 떼를 지어 울었다. 춘궁(春宮)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했던 친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듯 이별을 애석해하였다. 상여를 바라보며 장송곡을 듣는 이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모두들 말하였다. "개자추가 다리 살을 벤 것[16]

도 이 굳은 절개에 비할 수 없고,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17]인들 어찌 이 장렬함에 견주랴. 이는 곧 임금님의 신앙력을 붙들어 아도의 불심을 이룬 성자(聖者)로다."

드디어 북산(北山)의 서쪽 고개[원주9]

에 장사지냈다. 나인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터를 잡아서 사원을 짓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하였다. 이에 집집마다 예를 하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사람마다 도를 닦으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깨닫게 되었다.

삼국유사》 권3 〈흥법〉 원종흥법 염촉멸신 中 #


(법흥왕은) 왕위에 오른 뒤로 항상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런저런 말이 많았으므로 왕은 그것을 어렵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도의 지극한 서원을 생각하여 신하들을 불러 묻기를, "성조(聖祖) 미추왕께서는 아도와 함께 처음으로 불교를 펴려고 하셨지만 큰 공을 이루시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묘한 교화가 막히어 행해지지 못하였으니 나는 매우 슬프게 생각한다. 마땅히 큰 가람을 세우고 다시 불상을 조성하여 선왕의 공적을 따르려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대신(大臣) 공알(恭謁) 등은 간언했다. "근자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한데다가 이웃 나라의 군사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쉬지 않고 있는데, 여유가 어디 있다고 백성을 괴롭히는 공사를 일으켜 쓸데없는 집을 지으려 하십니까?" 왕은 좌우 신하들이 믿음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탄식하여 말했다. "과인이 부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왕위를 이어 받으니 음양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이 편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내 뜻을 거슬러 따르지 않으니, 누가 능히 묘한 법의 방편으로써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랫동안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법흥왕 16년(529년)에 이르러 내사(內史) 사인(舍人)인 박염촉(朴厭觸)[원주10]

은 나이가 26세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진실하고 생각이 깊어서 의로운 것을 보면 용기를 떨쳤다. 왕의 큰 소원을 돕고자 하여 가만히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청하옵건대 신이 거짓으로 왕명이라 하여 관리에게 '왕께서 불사(佛事)를 창건하려 하신다.'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신하들은 반드시 간언할 것이니, 이때 왕께서는 바로 칙령을 내려 '나는 그런 영을 내린 일이 없는데 누가 거짓으로 왕명이라 꾸며대었는가?'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신의 죄를 추궁할 것입니다. 그때에 만일 왕께서 그 신하들의 아룀이 옳다고 하신다면 그들은 복종할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그들은 이미 완고하고 오만하니, 비록 그대를 죽인다 한들 어찌 복종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염촉이 아뢰었다. "대성(大聖)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바이오니, 만약 소신을 베시면 마땅히 천지의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이변이 있다면 누가 감히 오만스럽게 거역하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본래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려 하거늘, 도리어 충신을 해한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염촉이 대답하였다. "몸을 희생하여 (仁)을 이룸은 신하된 자의 큰 절개이거늘, 하물며 불일(佛日)이 항상 밝고 빛나고 왕조의 기초가 더욱 오래 감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죽는 날이 바로 다시 태어나는 해가 될 것입니다." 왕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베옷을 입었지만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라고 하며 염촉과 함께 깊은 서원을 맺었다.

드디어 (염촉이) 그 뜻을 전해 말하였다. "천경림(天鏡林)에 을 짓고자 하니 집사들은 칙령을 받들어 일을 일으켜라." 조정의 신하들은 과연 왕의 면전에서 그 일에 관해 쟁론하였다. 왕은 "내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염촉은 크게 외쳤다. "신이 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약 이 법을 행하면 온 나라가 태평할 것입니다. 경제에 유익함이 있다면 비록 거짓으로 국령(國令)을 꾸며냈다 하더라도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이에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이 일에 대해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지금 승려들을 보면 아이 머리에 해진 옷을 입고 괴기한 의론을 일삼으니, 정상의 도(道)가 아닙니다. 만일 경솔히 그 말을 따른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죽을 죄를 범할지라도 감히 칙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염촉은 분연히 말하였다.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대개 비상한 사람이 있는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법입니다. 신이 듣자오니, 불교는 그 진리가 심오하다 하니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제비참새 따위가 어찌 기러기고니의 뜻을 알겠습니까?"

이에 왕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말은 완강하여 깨뜨릴 수가 없고 너는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말을 다 들을 수가 없구나."라고 한 뒤 드디어 염촉을 형리에게 넘겨 목을 베라 하였다. 염촉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나는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아가지만 부디 정의와 이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함이 있다면 신이 죽을 때에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지고, 목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흰 젖이 용솟음쳐 높이 수십 장(丈)으로 솟아올랐다. 햇빛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내렸으며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임금신하백성들은 모두 위로는 하늘의 변괴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사인(舍人)이 법을 존중하여 목숨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서로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 그리고는 시신을 받들어 금강산에 장사하고 예배하였다. 그때 임금과 신하들이 맹세하였다. "지금부터는 부처님을 받들고 승려에게 귀의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긴다면 밝으신 신령은 우리를 죽이소서."

군자[18]

는 말하였다. "대성은 천백 년의 운수에 응한다. 인(仁)은 길상을 발하고 의(義)는 상서를 움직인다. 그것은 천지에 통하지 않음이 없고 일월에까지 뻗쳤으며 귀신을 감동시켰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무릇 스스로 불도를 믿는다면 천지도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功)은 이룸에서 귀하고 업(業)은 넓힘에서 귀한 것이니, 진실로 큰 원(願)이 있으면 태산도 기러기 깃털보다 가볍게 된다. 장하구나, 그의 죽음은 그곳을 얻었도다." 이 해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였다.[원주11]

해동고승전》 권1 석법공 中 #



4. 기타[편집]


  • 파일:external/www.wonkwangsa.kr/1tGnafEzLVeUFVl78pSGC.png
국립경주박물관에 이차돈의 목이 잘리고 흰 피가 솟는 모습을 조각한, 헌덕왕 10년(818년)에 만들어진 이차돈 순교비가 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7년 5월 5일 KBS1 부처님오신날 특집드라마 〈이차돈〉[19]에서는 배우 김기복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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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유사》에 인용된 김용행(金用行)의 〈아도비(阿道碑)〉에 언급되는 관직으로 삼국사기에서는 기록되지 않았다.[2]삼국유사》, 《해동고승전》의 기록.[3]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지증왕의 아버지 습보갈문왕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4] 역시 삼국유사에 기록된 아도비에 따르면 석씨 마지막 임금인 걸해대왕(乞解大王)에게 공한(功漢)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으며, 공한의 아들이 길승(吉升)이고 길승의 아들이 바로 이차돈이라고 한다. # 삼국사기에서는 흘해의 아들이 없어서 내물 마립간이 뒤를 이었다고 하는데, 아도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훗날의 소지 마립간에게 분명히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5] 이상 《삼국사기》의 기록. 이외에도 908년경 최치원이 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는 발음이 같은 이처도(伊處道)로 나온다.[6] 이차돈이 활동하던 당대와 가장 가까운 헌강왕 시기에 건립된 〈이차돈 순교비(817)〉의 기록.[7] 이상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의 각주에서는 "뒤에 붙는 촉(髑),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기록하는 사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조사(助辭)에 해당한다"며 "이차(異次)는 방언이며, 한자로 쓰면 염(厭)이 된다"고 기록해 두었다. '염()'은 '싫어하다'라는 의미이고 중세 국어의 '잋다'라는 말이 '피곤해하다'라는 의미임을 생각해 보면, '이차(異次)'는 어간 '잋-'의 옛 어형에 해당될 수 있다. 즉 '차(次)'는 '잋-'의 음절 끝 [tsʰ\] 발음을 나타내는 표기인 것. '싫어하다'와 '피곤해하다'의 의미가 미묘하게 다르기는 하지만, 영어에서도 tired가 두 가지 뜻으로 모두 쓰이는 것을 보면 둘을 연관짓는 것 또한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다.[8]해동고승전》의 기록.[9]해동고승전》에 따르면 이차돈은 529년에 26세로 순교했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527년에 22세로 순교했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528년에 순교했다. 또한 최치원의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는 법흥왕율령을 마련한 지 8년째인 528년에 존귀한 신하가 제 몸을 바쳐 불교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이차돈의 순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10] 당장 이 문서 제일 위의 그림 파일명도 'pic_leechadon_01.jpg'로 되어 있다. 성씨를 이씨로 보아 '이(李)'에 해당되는 가장 흔한 로마자 표기인 'Lee'를 써서 옮긴 것.[11] 소지 마립간사금갑 설화에 등장하는 승려나 고구려 출신 승려 묵호자 혹은 아도와 같이 법흥왕 이전에도 신라 일부, 특히 왕실에는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들어온 뒤였다.[12]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 서쪽고개에 떨어졌다고 한다.[13] 오늘날 백률사로 추정된다.[14] 삼국유사에서는 천경림의 나무를 벤 때가 527년이라고 기록하고 이차돈의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서술했다.[15] IS의 많은 참살 영상 중 피가 아니라 하얀색 액체가 먼저 뿜어져 나오는 영상도 있었다. 어떻게 아는거야[원주1] 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한다.[원주2] 이는 김대문이 《계림잡전(鷄林雜傳)》에 기록한 바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 한나마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원주3] 향전(鄕傳)에서는 공목(工目), 알공(謁恭) 등이라고 하였다.[원주4] 이차(異次)라고도 하고 이처(伊處)라고도 하니, 방언의 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번역하면 염()이 된다. 촉(髑),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곧 조사(助辭)이다. 이제 윗자만 번역하고 아랫자는 번역하지 않았으므로 염촉(厭髑) 또는 염도(厭覩) 등이라고 한 것이다.[원주5] 신라의 관작은 모두 17등급인데, 그 네 번째는 파진찬(波珍喰) 또는 아진찬(阿珍喰)이라고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고, 습보도 이름이다. 신라인은 대체로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했는데, 그 실상은 사신도 역시 자세히 모른다고 하였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살펴보면, 사인(舍人)은 그때 나이가 스물여섯 살이며,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고 하였다.[원주6] 신라 관작에는 대사(大舍)와 소사(小舍) 등이 있는데, 대개 하사(下士)의 관직이다.[원주7] 향전에서는 "염촉이 왕명이라고 하면서 공사를 일으켜 을 창건한다는 뜻을 전했더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하였다. 왕은 이에 노하여 염촉을 책망하고,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전하였다고 하여 형벌을 가하였다."라고 하였다.[원주8] 향전에서는 사인이 맹세하기를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므로 저는 신명을 돌보지 않고 인연을 모두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사람들에게 두루 보여주소서."라고 하자, 그의 머리가 날아가서 금강산(金剛山) 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하였다.[16] 중국 춘추시대 (晉)나라의 명군 문공(文公)이 즉위 이전 방랑하던 시절, 그를 따르던 신하들 중 두수(頭須)라는 자가 식량을 챙기고 달아나자 문공 일행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보다 못한 신하 개자추가 직접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문공에게 먹게 함으로써 겨우 죽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17] 기원전 660년, (衛)나라 의공(懿公)의 신하였던 홍연은 타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적인(狄人)에게 습격당해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된 의공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장사를 지낼 마땅한 상황이 되지 않았던 터라, 홍연은 스스로 할복하고 자신의 몸을 관 삼아 그 간을 담고는 순절했다.[원주9]금강산이다. 전(傳)에서는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밝히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원주10] 이차돈(異次頓) 또는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한다.[18]해동고승전》을 편찬한 승려 각훈(覺訓) 본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원주11]국사(國史)》 및 여러 옛 전기를 참고하고 생각하여 지었다.[19] 극본 김운경, 연출 이종한 PD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