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팔레스타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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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로마 제국 시대
2.3. 중세
2.4. 근세
2.5. 근대
2.6. 현대
3. 상호 교류, 교통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팔레스타인이집트의 관계. 이집트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에게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는것을 보면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의 관계와 비슷한듯 하다.(파키스탄과 이집트는 겉모습으론 친미국가, 팔레스타인과 아프가니스탄은 강경 반미적 이슬람 군사적 국가)


2. 역사적 관계[편집]



2.1. 고대[편집]


가나안 일대는 아시아 대륙에서 이집트로 들어오는 길목에 해당하였고 이러한 연유로 양 지역 사이에는 고대부터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대 이집트나일 강의 비옥한 델타 지대에서 풍족한 양의 소출을 얻을 수 있었으나 대신 목재와 같은 생필품이 극히 부족하였는데, 이집트에 필요한 목재를 수출, 공급하느라 레바논 일대의 백향목 삼림지대가 고대 당시 이미 황폐화되었을 정도였다. 한 편 이집트를 서쪽에서 위협하던 고대 리비아인들, 남쪽에서 위협하던 흑인들은 이집트에 비해서 문명도가 뒤떨어졌으나, 아시아 방면에서 위협을 가하는 히타이트 제국, 신아시리아 제국 등은 이집트 입장에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집트의 지배세력들은 자국의 내정이 안정되는데로 시나이 반도를 넘어 가나안/팔레스타인 일대를 자주 침공, 병합을 시도하였다. 고대 이집트 역시 가나안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전쟁을 치루었던 바 있다. 한 편 이집트 입장에서는 가나안 일대는 아시아 세력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발흥한 세력들이 이집트를 침공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한 때 이집트를 침공하여 심각한 위협에 빠트렸던 바다 민족 중 한 갈래인 블레셋인들은 크레타 섬 일대에서 발흥한 민족 집단으로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의 기원이기도 했다.

가나안 일대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지역이다보니, 교역에도 유리하였다. 지중해 세계의 무역이 페니키아 상인들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디아스포라에 의해 활성화되면서, 이집트 입장에서 가나안 일대가 갖는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한 이집트의 확장 전략은 헬레니즘 제국 시대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세에도 지속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가나안 일대를 차지하기 위하여 셀레우코스 제국과 잦은 전쟁을 벌임은 물론 예루살렘 일대의 유대인 상당수를 납치하여, 신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정착시켰던 바 있다.[1]

2.2. 로마 제국 시대[편집]


고대 로마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차례로 병합한 것을 계기로 양 지역은 모두 로마 제국의 속주로 전락하였다. 로마 제국은 3차례에 걸친 유대 반란을 진압한 이후, 유다이아 속주의 명칭을 유대인들이 적대하던 블레셋의 이름을 따서 시리아-팔레스티나 속주로 명명하였다.[2] 로마 제국 초반 당시 반란 진압 이외에는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유다이아(시리아-팔레스티나) 속주의 위상은 제국이 콘스탄티누스 대제밀라노 칙령,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에 의해 성지로 격상되었다. 로마 제국의 다섯 개의 총대주교구 중 하나는 예루살렘,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해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 내에서 손에 꼽히던 대도시였을지는 몰라도, 로마 제국 내에서는 예루살렘보다 더 번성하는 도시[3]가 수도 없이 널려 있었음에도 불구, 기독교의 발흥지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속주의 위상이 상승하는 것과 반비례해 팔레스티나 속주 내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유대교는 같은 뿌리를 둔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의 경쟁 상대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서기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유대교를 대대적으로 박해하면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와 팔레스티나 일대의 유대교 공동체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2.3. 중세[편집]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는 정통 칼리파 시대 당시 아랍인들에게 정복되어 아랍-이슬람화되었다. 이슬람 제국이라는 단일 제국의 영토로 묶여 있었던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일대는 압바스 칼리프조 내에서 지방 군벌들이 발흥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별개의 국가들로 쪼개지게 되었다.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일대에서 발흥한 이스마일파 세력인 파티마 왕조는 이집트를 정복한 뒤 대외적으로 칼리파라는 권위를 내세우고 팔레스타인 일대를 자주 침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방향에서 발흥한 셀주크 제국과 대대적으로 충돌하였다.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제국 사이의 전쟁은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끝을 맺는다. 십자군들이 레반트 일대를 침공하여 현지 튀르크 군벌 세력을 몰아내고 예루살렘 왕국십자군 국가들이 들어서는데, 전쟁 와중 살라흐 앗 딘이 십자군들에게 제대로 대처하기 못하던 파티마 왕조를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이집트는 아이유브 왕조가 들어섰다. 이후 십자군 전쟁은 이집트에 기반한 이슬람 왕조들과 팔레스타인 일대의 십자군 국가들 사이의 지난한 분쟁의 연속이 되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몰락하고 이집트에는 맘루크 왕조가 들어섰다. 맘루크들이 십자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전역이 맘루크 왕조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맘루크들은 예루살렘은 종교적 중요성 때문에 전후 바로 복원하였으나, 십자군들이 재차 레반트 지역에 눌러앉을 것을 우려하여, 아크레와 야파[4] 같은 항구도시들은 재건하지 않고 방치하였다. 이를 계기로 팔레스타인 해안지대 일대는 한동안 궁벽한 어촌 지대로 전락하였다.


2.4. 근세[편집]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격파한 이후, 이 지역은 맘루크 왕조 대신 아랍인 현지 토후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다만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의 기존 통치권을 사실상 대부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2.5. 근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 농민반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근대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가 케디브 왕조를 건국하면서 이집트 농민들을 군인으로 징집하여 훈련시킨 이후 1831년 팔레스타인 일대로 진출하였으나 신생 케디브 왕조가 오스만 제국을 무너트릴 경우 생길 혼란을 고려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케디브 왕조에게 압력을 넣는다. 결국 이집트 케디브 왕조는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철수한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토를 대거 상실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일대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집트는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보호국 형태로 전락하였다.


2.6. 현대[편집]


이집트는 1952년에 본격적으로 독립되어 공화국을 수립했고, 팔레스타인은 1948년에 영국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제1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북부의 가나안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팔레스타인 아랍계 주민들과 이집트를 비롯한 그 외 아랍국들이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스라엘에 패배하여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점령했다. 1949년 정전조약 이래 1967년까지 가자지구는 이집트에 속해 있었다.

제3차 중동전쟁 시기,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상실했고 1975년까지 수에즈 운하를 경계로 하여 분쟁이 일어났으나 1982년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는 대신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인정하면서 수교를 맺기로 했다. 하지만 이집트 국민들과 팔레스타인 유민들은 당연히 이를 반대하였고, 이로 인한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집트 정부와의 갈등도 있었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1988년 PLO의 수장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는 11월 15일에 서안지구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의 영역으로 정하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아라파트는 이집트 출신의 아랍인으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수장이 되었다.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 팔레스타인의 정치에도 이집트 혁명의 영향이 미쳤다. #

2021년 6월 4일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파괴된 가자지구에 재건할 장비와 인력을 보냈다.#


3. 상호 교류, 교통 교류[편집]


두 나라들은 이슬람권에다 아랍계 국가들이다보니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력기구에 가입되어 있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이 접해있기에 여러 교류들도 활발하다. 그러나 이집트와 가자지구 국경에서는 하마스 문제로 인해 국경이 삼엄하기도 하다. 두 나라들은 국장도 비슷하다.

팔레스타인 항공은 이집트 아리시에 본사를 두었으며, 이집트 카이로, 엘 아리시와 항공 노선이 이어져 있다.

민간차원에서는 매우 우호적인 편으로 이집트 축구선수들은 인스타그램 프로필 사진을 팔레스타인 국기로 바꾸는 등 팔레스타인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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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유다이아 일대의 유대인들은 주로 양치기나 농민이었다면, 알렉산드리아로 납치된 유대인들은 시내에서 상공업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지혜서집회서에서 보듯 도시화되고 헬레니즘화된 유대인 사회와 전통적인 반농반목민의 삶을 영위하던 유대인 집단 사이의 문화 갈등으로도 이어졌다.[2] 유대인들은 유다이아 속주 이외에도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키프로스에서도 로마인들이나 그리스인들과 분쟁을 벌이며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 제국 위정자들은 유대인들을 골칫거리로 여겼던 것이다.[3]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나 이베리아 반도의 타라고나[4] 오늘날 텔아비브에 해당하는 야파(Jaffa)가 역사가 유구한 항구임에도 불구하고 볼 만한 역사 유적이 별로 없는 편인데, 십자군 시대의 기독교 유적이나 이슬람 시대 건물들이 유대인 입장에선 절대 즐거운 기억이 아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방치하거나 밀어버리고 그 위에 새 건물을 지은 게 많아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