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이라크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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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상호 교류
2.1. 고대
2.2. 고대 말
2.3. 중세
2.4. 근세
2.5. 근대
2.6. 20세기
2.7. 21세기
2.7.1. 2000년대
2.7.2. 2010년대
2.7.3. 2020년대
3. 교통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이집트이라크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양국은 아랍 연맹, 이슬람 협력기구에 가입돼 있다.


2. 역사적 관계, 상호 교류[편집]



2.1. 고대[편집]


양국 둘 다 역사적으로 유구한 문명의 발상지이며[1] 고대부터 양 지역은 레반트 지역을 사이에 두고 활발한 교역을 이어나갔다.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제국나람신이 이집트를 침공해서 이집트의 파라오을 전사시킨 경우도 있었으며, 신아시리아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한 역사 등등 다른 지역이 선사시대였을 때 이미 양국 간의 교류 관련한 기록이 활발한 편이었다.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나타난 신바빌로니아 역시 시리아에서 이집트-아시리아 동맹군들을 격파하고 시리아를 재점령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오리엔트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키루스 대왕이 오늘날에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을 정복하고, 2대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양국은 한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정복 과정에서 양국은 알렉산드로스 제국으로 편입되었고, 제국이 해체하면서 이라크 일대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를 그리고 이집트 일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헬레니즘 제국들이 붕괴되고 고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이라크의 북부와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라크 남부와 동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파르티아 그리고 사산 왕조페르시아계 왕조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2.2. 고대 말[편집]


서기 4세기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것을 계기로 이라크 북서부와 이집트에는 기독교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서기 5세기 들어서 이집트와 이라크 북서부에는 키릴루스합성론 신학이 유행하였던 반면, 사산조 페르시아가 통치하는 지역에 아시리아인들 사이에서는 동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네스토리우스파가 유행하였다.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의 갈등에서 보듯 합성론과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고, 이는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 그리고 이라크 일대의 지역 감정으로 이어졌다.

서기 7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흐르바라즈가 이집트를 잠시 정복하면서 이라크와 이집트가 잠시 다시 한 국가의 통치를 받게 되기도 하였으나, 동로마 제국 군대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면서 이집트를 다시 재수복하였다.

2.3. 중세[편집]


훗날 두 지역들은 정통 칼리파 시대 아랍 무슬림들의 정복으로 인해 급속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콥트어 그리고 이라크 일대에서 사용되던 아람어는 아랍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하는 언어였고, 우마이야 왕조 들어서 현지어가 점차 아랍어로 대체되면서 아랍화가 진행되었다.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하고 압바스 칼리파조이슬람 제국을 이어받았다. 북아프리카 튀니지 일대에서 발흥하여 이집트를 장악한 이스마일파 이슬람을 믿는 파티마 왕조바그다드사마라를 중심으로 한 압바스 칼리파조와 대립하였다.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이집트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붕괴하고 순니파 아이유브 왕조가 들어섰다. 이를 계기로 이집트와 이라크는 모두 다시 순니파 지역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라크와 이란 일대는 몽골 제국의 침략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압바스 칼리파가 몽골군에게 시해당한다. 몽골군은 시리아 일대까지 침략하였으나, 맘루크에게 저지당한다.

이라크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몽골계 일 칸국은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맘루크 왕조와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고, 맘루크 왕조는 일 칸국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일 칸국은 근세 들어서면서 분열되어 멸망하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근세까지 이어졌다.

2.4. 근세[편집]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병합한 것을 계기로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 정복 이후에도 맘루크 왕조를 존치시키고 일정 수준의 수입만 거두었다. 오스만 제국은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북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라크 남부 지역을 정복하는데는 실패하였고, 이라크 남부는 시아파 근본주의 성향의 사파비 제국에게 정복당하였다. 사파비 제국은 점령지의 주민들을 시아파로 강제개종시키는 정책을 진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이라크 남부 주민 대다수는 시아파가 되었다. 이집트의 경우는 상술한 것처럼 중세 일정 기간 동안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있으나 파티마 왕조의 경우 강제개종 정책을 펼치지는 않았고, 아이유브 왕조 그리고 맘루크 왕조가 시아파를 탄압하면서 무슬림 인구 절대다수가 순니파인 지역이 되었다.

2.5. 근대[편집]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집트를 침공한 것에 충격을 받은 영국은,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세력권을 안정적으로 다지고자 이집트의 케디브 왕조에 접근하였다. 이집트의 케디브 왕조 군대가 오스만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시리아 일대로 북진하자 영국은 양자를 중재하고 이후 1841년에는 이집트를 실질적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시켰다. 1882년부로 이집트는 이른바 영국 치하 이집트 시대라 해서 영국의 보호국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은 19세기 당시에 아직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카자르 왕조의 영토로 분할되어 있었다. 영국은 이란의 부패한 카자르 왕조를 사실상 보호국 수준으로 예속화한 이후 이라크 일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20세기 초반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이란 이름으로 이라크를 통치하게 되었다. 즉 이집트와 이라크 모두 근현대사 과정에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2.6. 20세기[편집]


현대에는 이라크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평화 구상을 비난하여 양국 관계가 결렬되는 등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이라크와 이란의 전쟁 당시에 이라크에게 물질적, 외교적 지원을 하여 관계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1990년 걸프 전쟁 때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다시 관계가 악화되어가다가 최근에는 지속적으로 관계가 개선되어 양국은 서로 주요 무역 파트너 중 하나이다.

걸프 전쟁 중인 1991년 이집트는 미국과 서방동맹국의 이라크 공습이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

1994년 이라크가 아랍권 국가들과 화해하기 위해 카이로에서 아랍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을 촉구했으며 이집트는 이라크가 화해의사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고 이라크의 제의를 검토했다. #

1995년 이라크는 이집트 외교관 증원 합의를 했다. #

이집트는 이라크주권 침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


2.7. 21세기[편집]



2.7.1. 2000년대[편집]


이집트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다음에는 이집트와 수단이 될 것이라며 이집트 시민들의 반미 시위가 열렸다. #

2002년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 아랍권의 분노를 폭발시킬 것이라며 경고했다. #

2002년과 2003년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 및 전 세계에서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으며 이집트 국민들은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 #, #, #, #, #, #

2003년 3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라크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촉구했다. #

2003년 4월 이집트는 이라크 평화안 마련을 촉구했다. #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호스니 무바라크는 아랍권에서 처음으로 공식성명을 내고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국민들이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라크의 자손들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이라크의 안정을 보장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 #

2003년 5월 이라크에서 1991년 사망한 이집트인 근로자 유해들이 집단 발굴되었다. #

2004년에는 이라크에 있던 이집트인들이 피랍되었다가 풀려났다. #, #, #, #, #

2004년 7월 22일 알라위 이라크 총리는 이집트에 파병을 요청했다. #, #

2005년 3월 19일 이라크에서는 이집트인 2명이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 #

2005년 이집트에서는 이라크 전쟁 2주년을 맞아 반미, 반정부 시위와 친정부 시위가 동시에 일어났다. #

이라크 주재 이집트 대사가 피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 #, #

알카에다가 이라크 주재 이집트 대사를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

이집트의 이라크주재대사가 끝내 피살되자 이집트는 바그다드공관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

이라크의 미군이 이집트 대사를 살해한 용의자들을 체포했다. #

2008년 이라크는 아랍국가들에 대사관 재개설을 요구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쿠웨이트, 이집트 등이 긍정적인 의사를 표명했다. #

2009년 3월, 이집트는 이라크에 20억 달러 부채 상환을 요구했다. #


2.7.2. 2010년대[편집]


2010년 4월 이라크에서 이란, 독일, 이집트 등 외국대사관을 겨냥한 연쇄테러가 나타났다. #, #, #

2011년 1월 30일, 2월 1일 2011 이집트 혁명 시기 이라크 정부는 이집트를 탈출하려는 자국민들을 소개하기 위해 항공기를 동원할 방침이라고 AP 통신이 전했다. #, #, #, #

이집트 혁명이 성공되자 이라크 의원들은 이집트에 축하 인사를 전했다. #

이라크 부총리는 이집트가 겪고 있는 위기가 안전하고 부드러우면서 평화스럽게 정리되기를 희망한다고 설명했다. #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혁명의 영향으로 이라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

2013년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이집트 과도정부의 법 집행을 지지했다. #

2019년 10월 이라크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집트에서도 시위가 다시 일어나기도 했었다. #, #, #


2.7.3. 2020년대[편집]


2020년 1월 이집트항공은 안보 불안정이라는 이유로 이라크 바그다드 운항을 사흘간 중단하겠다고 했다. #, #

3. 교통 교류[편집]


두 나라들을 잇는 항공 노선이 존재한다.


4. 관련 문서[편집]



[1] 이라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는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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