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쿠라 도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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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대 외무경

일본 제국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
岩倉具視 | Iwakura Tomomi


파일:Iwakura_tomomi.jpg

출생
1825년 10월 26일
야마시로국 교토
(현 교토부 교토시)
사망
1883년 7월 20일 (향년 57세)
교토부 교토시
재임기간
제2대 외무경
1871년 8월 29일 ~ 1871년 12월 15일
우대신
1871년 11월 20일 ~ 1883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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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
가네마루(周丸)
법명
유잔(友山)[1]
아호
다이가쿠(対岳)
신체
160cm[2]
부모
양부 도모야스
생부 호리카와 야스치카
배우자
전처 세이코
후처 마키코
자녀
장남 도모요시
장녀 마스코
차남 도모사다
차녀 이토코
삼남 도모츠네
삼녀 토다 키와코
사남 미치토모
사녀 하루코
오녀 요시다 야스코
육녀 모리 히로코
주요 업적
메이지 유신
이와쿠라 사절단

1. 소개
2. 생애
2.1. 초기
2.2. 개혁
2.3. 메이지 유신
2.4. 사망
3. 평가
4. 여담



1. 소개[편집]


파일:Sasa_Rindō_inverted.png
이와쿠라 가문
일본의 공가(公家) 귀족, 정치인. 이와쿠라 사절단의 대표로서도 유명하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호리카와 야스치카(堀河康親, 1797 ~ 1859)의 차남으로 현재의 교토부 교토시에서 출생하였다. 귀족인 공가 출신이었으나, 행색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은 유학을 배웠으며 1838년 8월 8일, 이와쿠라 토모야스(岩倉具慶, 1807 ~ 1873)의 양자가 되어 "도모미"라는 이름을 썼다. 10월 28일에는 작위를 수여받아, 궁중에 등록하고 이듬해 출사하게 되었다.

호리카와(堀河)는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타카쿠라류(高倉流)로, 히구치(樋口)도 여기에 속하며, 이와쿠라(岩倉)는 호리카와처럼 우림가에 속한 무라카미 천황(村上天皇)의 후손인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에 속하는 가문으로 청화가(清華家)의 분가다.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전상(殿上)에 오르는 것이 허락된 공가 중에서 우림가(羽林家)에 속하던 가문으로, 섭가(摂家)-청화가(清華家)-대신가(大臣家) 다음가는 4번째 서열이자 명가(名家)와는 동렬이고 반가(伴家)보다 위였다. 그 이하의 지하가는 전상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하급 귀족이다. 정작 이들의 본가인 타카쿠라(高倉)는 이들보다 격이 낮은 반가에 속했다.

대신(大臣) 다음인 대납언(大納言)까지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공경(公卿) 중에서는 아래지만 귀족 전체로서는 상위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벼슬직의 이야기고, 하위 공가는 막부 시대 이후로 실권과 경제력을 잃으면서 유신 이후에는 웬만한 다이묘보다 밑의 작위를 받는 경우가 많았고 호리카와와 이와쿠라도 마찬가지로 자작가에 속했다.

이와쿠라 가문은 하급 공가였기 때문에 그렇게 유복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사실 막부 말기까지 덴노나 공가가 풍족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막부가 일본의 유일한 군주 대접을 해주고 해마다 막부가 있는 에도에 덴노의 이름으로 칙사를 보내는 등 나름 예우도 받았다고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고, 덴노(天皇)나 공가(公家)들은 무로마치 막부 이래로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려 황실 보물들을 교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1] 공가 인물들은 부업으로 꽃꽂이나 다도, 고서 필사 등을 하면서 돈을 벌었고, 심지어 귀족들의 집은 검문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의 저택을 도박장으로 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2.2. 개혁[편집]


1853년, 관백이었던 타카츠카사 마사미치(鷹司政通, 1789 ~ 1868)의 유파로 들어가게 되면서, 조정에 대한 발언권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조정개혁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가쿠슈인의 확대, 인재육성과 실력주의에 의한 등용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이 큰 정치 이슈가 되자, 여기에 반발하여 공가 인사 88명의 반조약체결파를 집결하여 관백에게 항의하는 사건을 일으킨다.(88공경 사건; 1858년 3월 12일) 고메이 덴노는 이에, 어느 정도 호응하여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이 늦춰지게 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여기에서 첫 정치적인 승리를 얻었다.

기세를 몰아, 정치의견서를 조정에 건의한다. 그 내용으로는 미일화친조약에 따른 개항 항구수를 하나로 줄이고[2], 기독교의 포교를 반대하고 아울러 서구에 대해서 알기 위하여 조사단을 파견하며,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정과 막부로 나뉘어진 정부를 하나로 합쳐야한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관점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이와쿠라 도모미의 식견은 매우 높았으며 정확했다. 그는 이때부터 대정봉환이와쿠라 사절단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안세이 5년(1858년) 6월 19일, 막부 가로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고메이 덴노는 이에 격노하고 존황양이파가 크게 준동하기 시작한다. 이이 나오스케는 여기에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킨다. 당시 이와쿠라 도모미는 대옥의 칼끝이 공가에 미칠까 두려워하여 친막부 노선에 선다.

이후,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통하여 암살당하고 막부 내에서 공무합체파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막부는 이 일환으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和宮親子内親王)과 혼인시키려고 추진한다. 문제는, 고메이 덴노가 이 상황에 그리 탐탁치 않아 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와쿠라 도모미는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의 혼인에 관한 상신서"를 천황에게 제출한다. 그는 천황에게 이 혼인이야말로, 진정으로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 답이며 이 기회에 정치적 결정은 조정이, 그 집행은 막부가 하는 "대정 위임론"을 확고히 해야하고, 정 내치기 않는다면 막부에게 미일수호통상조약의 파기와 양이를 조건으로 내세우면 된다고 주장하였다.[3] 고메이 덴노는 이를 받아들여 혼인에 응하게 된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이때 모든 혼인 절차를 주관하였고 천황과 독대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는 막부에게 "당장 조약파기와 양이를 하겠다는 쇼군의 친필서명을 제출해라" 등의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일련의 일이 끝나자 고메이 천황은 그를 절대적으로 잠깐이나마 신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이때부터 천황을 자신의 권력 의지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천황의 지령인 듯 각종 "비밀칙서"를 꾸며 각 번에 하달하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랬다. 천황의 말이 곧 내말

혼인을 통하여, 조정과 막부가 화해무드로 접어들자 존황양이파는 조정의 행동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조슈 번은 이와쿠라 도모미가 가운데에서 장난질 치며, 사실은 막부측 인사인 좌막파라고 주장하였다. 계속되는 상서에 급기야 고메이 덴노마저도 이와쿠라 도모미를 의심하게 되고 관직 사퇴와 출가를 명한다. 도모미는 아무런 항변도 없이 깨끗하게 물러난다.

그는 권력에서 물러나기 했지만, 토사 번다케치 한페이타 등은 그를 귀양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극단적인 존황양이파들은 그의 집에 당장 교토에서 나가지 않으면 머리를 잘라 강가에 전시하겠다는 천벌 예고문[4]까지 보냈다. 이쯤되자, 이와쿠라 도모미는 자택에서 나와 레이겐지로 숨어들어 오랜기간 중 노릇을 하게 된다. 강제 출가행

무념[5]

절치(切歯)[6]가 끊이질 않는다.
이번 사건, 실제로 꿈인지 현실인지 어렵고, 어떤 숙연(宿緣)의 결과인지 조금도 납득할 수 없다

당시 그의 일기는, 이에 대해 분함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1864년 7월 19일 금문의 변이 발생하여 교토 내 존황양이 극단파가 제거되어 이와쿠라 도모미의 무고죄가 입증되었으나, 사면은 되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사쓰마 번 인사, 과거 조정 대신들과 연락을 취하여 각종 정치의견서를 여기저기 제출하며 활동을 개시한다.[7] 또한, 기존의 공무합체파 노선을 조금 수정하여 도막파의 입장에 선다.

1866년에 접어들어, 막부의 조슈 정벌도 실패로 돌아가고 전황은 점차 도막파에게 유리하게 조성되고 있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조정을 까면서 묘하게 사쓰마 번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12월 25일에는 고메이 덴노가 돌연사하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천연두이지만 당대에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독살했다는 루머가 존재한다.[8][9]


2.3. 메이지 유신[편집]


게이오 3년(1867년) 1월 9일, 메이지 덴노가 15세로 즉위하고 10월 14일에는 대정봉환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이와쿠라 도모미는 특기인 비밀칙서 남발을 감행, 각 웅번에게 막부 타도를 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정봉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잠시 그 계략은 정지되었다가 1868년 1월 3일에 왕정복고령을 선포하도록 한다. 이후 고고쇼 회의에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관직과 영지를 반납하라는 주장을 반복, 이를 관철시킨다.

혼란스런 와중에 보신 전쟁이 발생, 막부는 대역죄인으로 찍히고 도막파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정부기구의 개편이 행해진다. 미국의 정치제도를 참고로 하여 행정부, 입헌부, 사법부로 나뉜 권력 분립형 정부로 이행하였다. 이와쿠라는 이때 행정관 중의 보상(輔相)이라고 하는 국내행정 전반과 궁중의 서무를 감독하는 역할로 취임하게 된다.

산조 사네토미와 같이 2인체재로 취임하였지만, 산조는 도쿠가와 가의 처분의 전권을 맡아 사이고 다카모리를 거느리고 에도로 나와있었기 때문에 이와쿠라가 실질적인 수반이 되었다. 이와쿠라는 취임 하자마자 한 궁중 개혁을 감행한다. 또한 에도(도쿄)로의 황거 변경을 추진하다가 반발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갑자기 병을 이유로 보상(補相)의 사직을 요구한다. 오쿠보 도시미치기도 다카요시는 만류하였지만, 끝내 사퇴하고 만다.

이와쿠라가 사퇴한 후, 신정부에 의하여 판적봉환폐번치현이 검토에 들어간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재야의 신분으로 각종 정치의견서를 제출하여 이 두가지 행정 규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한다. 폐번치현이 이루어지고 이와쿠라 도모미는 외무대신에 취임한다.

외무대신으로서 그의 주된 과업은 이이 나오스케가 불평등한 조건으로 맺어놓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신정부는 유럽과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 일본이 여전히 문명개화하지 않은 것을 전하고 각 나라에 근대화의 모습을 시찰 한 뒤 귀국 후 그것을 일본에 도입하여 문명개화를 성취한 단계에서 조약교섭을 하도록 요청하여 조약 개정 교섭을 늘리도록 하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정하였다. 외무대신인 이와쿠라 자신이 특별 전권 대사로 대표되고 여기에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가 멤버로 참가하여 이와쿠라 사절단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메이지 4년(1871년) 11월에 요코하마 항을 떠나, 1년 10개월에 걸쳐 유럽과 미국 여러 나라를 돌며 각국 원수와 만나 국서를 직접 건넸지만 조약 개정의 실마리는 잡을 수 없었다. 와중에,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구권을 둘러보면서 일대 쇼크를 받아, 조약 개정보다도 유학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이들은 선진화된 서구권을 둘러보면서 일본에 미래를 다시 설계하기 시작하였다.

1873년 9월, 일본으로 돌아온 이와쿠라 도모미는 선진화된 서구를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내정 중심으로 기조를 잡는다. 이와쿠라가 해외를 떠돌고 있을 때, 사다 하쿠보정한론이 한창 대두되고 있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이 조선에 사절로 가서 국왕을 모욕해 목이 잘리면 이를 계기로 조선을 치자고 스스로를 제물로 내놓았지만, 이와쿠라는 돌아오자마자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이를 분쇄한다. 이 과정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실각하고, 낙향하여 후에 서남전쟁을 일으킨다.

1875년 4월 14일에 메이지 덴노가 헌법 체계를 수립하라는 조서를 하달한다. 사실은 오쿠보 도시미치 생각 처음에, 이와쿠라 도모미는 입헌을 거부하였으나 자유민권운동오쿠보 도시미치의 끈질간 설득으로, 생각을 바꾸어 헌법제정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태정관 우대신을 맡던 1877년 3월 29일에는 후대의 '독도 무주지 선점론'이 허구임을 알려주는 '태정관 지령'을 작성하여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전달했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마차에서 돌연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당한다. 이와쿠라는 오쿠보의 유지를 이어가기로 결심. 독일헌법을 모티브로 한 의원내각제를 따오면서, 덴노의 권위를 인정하는 헌법을 주장하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헌법 제정의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이토의 정적이자,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는 오쿠마 시게노부를 각종 방법을 통하여 날려버린다. 결국, 1882년 3월 14일 이토가 헌법조사를 위해 유럽 각국에 파견가는데 성공한다.


2.4. 사망[편집]


파일:이와쿠라 도모미 병문안.jpg
투병 중인 이와쿠라를 방문한 메이지 덴노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1883년부터 인두암 증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을 들은 메이지 덴노는 칙명을 내려 도쿄대학 의학부 교수인 에르빈 폰 발츠[10]를 교토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메이지 덴노로부터 위문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하였고, 7월 20일 일본 헌법 제정을 눈앞에 두고 사망했다.[11] 향년 58세. 7월 25일에 국장이 거행되었다.


3. 평가[편집]


어찌보면, 전형적인 일본식 정치를 추구한 노회한 정치가이다. 일선에 나서기 싫어하고 늘 막후에서 활약하기 좋아하였다. 천황의 이름으로 비밀칙서를 남발하여 정국을 지배하려고 했었고, 정적들에게 집중포화를 맞게되면 여지없이 야인 신분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막후 노릇을 즐겨했다.

때문에, 간신으로 찍히거나 음험한 정치인의 대명사로 취급되기도 한다. 고메이 덴노 독살설에 그가 연루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일본의 혼란기에 그의 안목과 식견은 탁월한 수준으로, 대정봉환, 신정부 수립, 정한론 논쟁, 헌법 제정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관여하였고 그 결과는 특기할 만하다.

수완도 여타 일본 정치인이 그래했듯 당대 아시아의 정점이라 불릴 만했으며, 그의 정적들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고 언제든지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당대 유신지사들은 암살되는 게 트렌드였는데, 용케 안 죽고 살아남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12]

여러모로 일본의 기틀을 바로잡으며 근대 일본을 성립시킨 인물이다. 오늘날 일본에서도 이점을 높이 사는지, 1984년 이전까지는 일본 엔화의 500엔 지폐의 주인공이었다.


4. 여담[편집]


  • 성격은 대체로 냉정, 침착하였으나 간혹 물불 안가릴 때가 있었다고 한다. 멘탈도 은근히 약한 편이라서 자주 삐지기도 했다고 한다.


  •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까지, "일본인의 혼"이라고 주장하며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먼저 미국 유학 중이던 셋째 아들 이와쿠라 도모사다에게 설득당하여 시카고에서 잘랐다고 한다. 그래서 유신 시절 인사들을 기록한 그림을 보면 다른 이들은 서양식 군복이나 정장을 입는데 이와쿠라 혼자만 상투에 일본 전통 관복을 입고 있다.

  • 의사에게 암 선고를 받은 최초의 일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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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화 히카루의 바둑에서도 작중 후지와라노 사이의 대사로 이를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된 에피소드가 있다.[2] 조약으로 인하여 시모다와 하코다테의 2개의 항구가 개항되었다.[3] 야사에서는 그가 막부 고위층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상소문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4] 이른바 천주라고 하는 것으로, 존황양이파들은 자신의 암살 행동을 이렇게 지칭하였다. 이런식으로 미리 경고하거나 사람 죽여놓고 천벌이라고 적어 놓은 글자를 폼나게 던져놓고 갔다.[5] 無念(むねん)은 일본어에서 원통하다는 뜻으로 쓰인다.[6] 가만히 있어도 위아래 이가 서로 맞부딪치는, 그러니까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상황을 말한다.[7] 이 시기에 그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8] 고메이 덴노는 단지, 막부를 찍어눌러 천황가의 위신을 세우는데 족했으나 도막파는 완벽한 막부의 타도를 바랬다. 고메이 덴노는 집권 후기에 들어설수록 막부에 대한 관대한 조치를 취하는데 이것이 존황양이파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이른바 "고메이 덴노 독살설"은 여기에서 그 동기가 발생한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과 가까웠고, 이 시기 사쓰마 번의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에, 독살 방법에 대한 가능성 또한 상존한다. 하지만 정확한 증거는 없으며 음모론에 그치고 있다.[9] 이 음모론은 조선에서도 퍼졌는데, 이와쿠라 토모미 대신 이토 히로부미고메이 덴노를 암살했다고 퍼졌다. 이 루머는 안중근의 귀에도 들어가서 훗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내세우는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 중의 하나가 된다.[10] 몽고반점을 의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하고 이름붙인 사람이다. 쿠사츠 온천을 재발견하기도 했다.[11] 발츠의 일기에 따르면 헌법 제정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해 죽음을 눈 앞에 둔 와중에도 이토 히로부미를 애타게 찾다가 그가 없자 이노우에 가오루를 불러 헌법에 관한 유언을 헐떡이며 남겼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발츠는 '그의 육신은 강철같은 의지 그 자체였다.' 라고 기록했다.[12] 물론 위협은 몇 번이나 존재했었다. 유명한 일화로 메이지 6년 정변 직후 1874년 1월 14일, 퇴근길에 정한파 잔당 9명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 즉시 궁성 해자로 몸을 던져 암살 미수에 그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담으로 이때 경시청이 최신 수사 기법을 도입해 단 사흘 만에 범인 9명을 모두 검거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