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이오시프 스탈린



[ 펼치기 · 접기 ]



1. 어린 시절
2. 은행강도 혁명가
3. 권력을 획득하다
6.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소전쟁
7. 냉전
8. 우상화의 절정
9. 말년
10. 사망
11. 장례식



1. 어린 시절[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Stalin_1894.jpg
1894년, 15살 소년기의 스탈린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러시아 제국 조지아 동부의 고리(გორი, Gori)시의 오세트계 제화공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재봉사 케케 겔라제의 슬하 삼남으로 태어났다.[1][2] 스탈린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는데, 위로 미헤일과 기오르기 두 형이 있었는데 모두 태어난 지 몇 달 안돼서 죽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통적인 구두공이었던 스탈린의 아버지는 자신이 하던 구두공 일이 잘 되지 않자 큰 상심에 빠졌고, 슬픔을 잊기 위해 술을 과음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은 아주 어릴 적에는 어느 정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성장하면서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자랐다.
파일:external/burusi.files.wordpress.com/e18391e18394e183a1e18390e183a0e18398e1839de1839c-e183afe183a3e183a6e18390e183a8e18395e18398e1839ae18398.jpg
파일:external/burusi.files.wordpress.com/e18393e18394e18393e18390-e28093-e18394e18399e18390e183a2e18394e183a0e18398e1839ce18394-e18399e18394e18399e18394-e18392e18394e1839a.jpg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3]
어머니 케케 겔라제[4]
스탈린의 아버지인 베사리온은 제화공이었으며 소작 농노 집안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케케 역시 농노의 딸이었다. 둘 다 문맹이었고 농가 출신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벨기에의 역사학자이자 노동당 당수인 뤼도 마르턴스(Ludo Martens)는 스탈린이 몇 명 안 되는 평민 출신의 볼셰비키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고 주장했다.[5] 베사리온은 술주정뱅이에 성질이 매우 거칠어 아내와 아들에게 폭력을 일삼았다.[6] 그러나 머리는 꽤 좋아 조지아어, 러시아어, 아르메니아어, 튀르키예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술주정뱅이가 되기 전에는 인간적 매력도 상당했고, 가정적이었으며 사업도 잘 되어 부유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결혼을 시기한 마을 여성들의 악질적인 소문과[7] 돈 대신 술을 내는 조지아 특유의 관습 탓에 나날이 과음하여 결국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렸다.

결국 베사리온은 1883년에는 미친 사람으로 불리며 걸핏하면 싸움을 일삼는 망나니가 되었다. 이런 아버지를 어린 스탈린은 두려워하며 피했고, 이에 분노한 베사리온은 스탈린을 쥐 잡듯이 패고 트집 잡으며 사생아라 욕했다.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는데, 언젠가는 맞아 피투성이가 된 스탈린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경찰을 데리고 오거나 칼을 던져 막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겨우 스탈린이 만 4살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 베사리온의 알코올 중독은 더 악화되어[8] 나중에는 벨트를 팔아 술을 사먹는 지경으로 전락해[9] 이곳 저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즈음에 스탈린은 마차에 치여 왼팔을 다쳤고 평생 왼팔이 불편한 장애가 남는다.

1884년, 베사리온은 스탈린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아내 케케의 주장을 무시하고 스탈린에게 제화 기술을 가르쳤으나, 이로 인해 스탈린은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곰보가 생긴다. 베사리온은 스탈린이 낫자마자 바로 집을 나가버리고는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케케는 재봉사 일을 하며 여러 지인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스탈린을 키웠다. 이후 케케는 스탈린을 정교회 주교로 만들기 위해 신학교에 보내려 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베사리온에 의해 스탈린이 구두 공장으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10] 다행히 신학교와 여러 고위 관료들이 도와줘 스탈린은 신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스탈린은 평생 아버지를 증오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이 보여준 성격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가정 폭력을 꼽는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 베사리온처럼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특별한 사례가 아니었다는 것. 베사리온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이미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가정 폭력은 일상적인 모습이었으며, 따라서 특별한 원인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스탈린의 어머니, 케케 겔라제는 폭력적인 남편과는 반대로 매우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으며 비록 엄격한 체벌을 하기도 했지만 자식에게 헌신적이며 따뜻한 어머니였다.[11][12] 케케는 어린 스탈린을 초등학교에 다니게 하고 신학교로 진학시켰다. 시작은 매우 좋았다. 그 시기 스탈린의 성적은 매우 우수했다. 당시 스탈린은 지도자로서 아이들을 이끌고 싶어했고, 카리스마를 보여 12살에 18살 상급생을 부하로 거느렸었다.

[성적표]
5점이 만점이다.

이후 스탈린은 다윈의 책 등을 접하며 점차 무신론, 반정부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13] 《Stalin, Man of History》라는 책을 쓴 이안 그레이(Ian Grey)에 따르면, 1897년에 학교의 부 지도 주임은 주가슈빌리가 샤를 르투르노(Charles Letourneau)의 《세계 여러 민족들의 문학의 발전(Literary Evolution of the Nations)》을 읽는 것을 적발했다고 썼는데, 이전에 주가슈빌리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바다의 노동자(Toiler of the sea)》, 이후에는 위고의 《93(Ninety-three)》을 읽다가 적발되었으며, 총 13번이나 금서를 읽다가 적발되었다고 한다.[14] 그리고 고리 신학교가 파업으로 폐쇄되자 힘들게 트빌리시 신학교[15]로 전학을 갔으나, 억압적이며 조지아 문화 대신 러시아 문화를 강요하고, 차르에게 복종하라는 학교에 반항해 혁명과 조지아 독립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면서 걸핏하면 학교에 안 나오는 등 학업에 소홀해지자 장학금이 끊어졌고, 결국 스탈린은 마지막 학년에 학교를 자퇴한다. 기록상으로는 수업료 미지불로 인한 제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로버트 서비스 등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장학금 480루블은 안 돌려줘도 되니 제발 돌아와만 달라는 학교의 수 차례에 걸친 요청을 거부했고, 덤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책까지 털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시인으로도 활동했는데, 교외 활동을 금지한 교장에게 들키지 않도록 소셀로(სოსელო, '작은 소소')란 필명을 사용해서 1895년부터 1896년 사이 6편의 시를 발표했다. 시의 주 내용은 조지아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데뷔작인 〈달에게 보내는 편지(მთვარეს)〉는 일리아 차브차바제(ილია ჭავჭავაძე, 1837년 11월 8일 ~ 1907년 9월 12일) 공이 창간한 주간신문《이베리아(ივერია)》의 지면으로 실린다.

〈달에게 보내는 편지〉

지상의 비밀스런 먹구름 위를

예전처럼 거침없이 부유하라.

그대의 은빛 광채로

짙은 안개의 어두움을 흩날리라.

잠에 취해 몽롱한 대지에

보드라운 미소로 고개를 기울여

캅카스 최고봉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라.

그대를 향해 높이 솟은 얼음 봉우리에게.

그러나 언젠가 박해당해 유골이 된 이도

시인들이 잠든 그 신성한 언덕에 올라

희망의 날갯짓으로 날아오를 수 있음을

분명히 알라.

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라.

창백한 빛으로 뛰놀라.

예전처럼 한결같은 빛으로

나의 조국을 비추라.

나는 그대에게 가슴을 열고

마주 향해 손을 내밀고

또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밝은 그대를 보겠노라.

 
또 다른 시 〈아침(დილა)〉은 당시 조지아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어체로 쓰여졌다.

〈아침〉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

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

꽃이여, 아 나의 조지아여!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친구들이여 노력해

빛내라, 조국을!

이아코브 고게바슈빌리(იაკობ გოგებაშვილი, 1840년 10월 15일 ~ 1912년 6월 1일)라는 조지아의 유명 교육자[16]는 그가 집필한 교과서에 이 시를 넣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조지아 귀족들의 선집에까지 시가 실리는 등 당대 스탈린은 조지아의 명망 있는 문학가였다.[17]

2. 은행강도 혁명가[편집]


파일:ZiemeLc.jpg
젊은 시절의 스탈린

스탈린은 자퇴 후 방황하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글을 접했고, 이에 감명받아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에 입당하였다. 당시 혁명 세력 중 가장 과격한 부류였던 볼셰비키에서 스탈린이 맡은 일은 자금 조달이었는데, 좋게 말하면 자금 조달이고, 실상은 강도질이였으며 위험하고 범죄였기에 누구 하나 맡으려 하지 않았다.[18] 그러나 스탈린은 자금 조달에 자원했다.[19]

이후 스탈린은 은행강도질을 하거나, 현금 수송차를 털거나, 인질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거나, 파업을 선동하는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고, 스탈린도 이를 자랑스럽지 않게 생각했는지 이때의 행적은 잘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일 레프 트로츠키에게 '우리가 혁명하는 동안 놀고 먹던 잉여'라는 투의 비난을 받았고, 최근까지 정설로 알려졌으나 일부 학자들에 의해 조지아 문서 보관소에 잠들어 있던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스탈린의 젊은 시절 활약들이 밝혀졌다. 다만 뒤집혔다고 해서 스탈린은 혁명에 공헌했는데 트로츠키는 알고 보니 잉여였다는 식으로 뒤집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사실 10월 혁명의 전후 과정을 보면 트로츠키의 활약이 스탈린보다 화려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잉여라는 트로츠키의 주장과는 달리 스탈린 역시 볼셰비키의 지도자로써 상당한 활약상이 있었음이 밝혀졌다.[20][21] 그런데 트로츠키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설령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활동 내역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공적도 없는 잉여라고 까는 것을 그만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lin%27s_Mug_Shot.jpg
1900년에 찍은 머그샷.
아무튼 이런 범죄 행각 때문에 1급 수배자가 된 스탈린은 7번이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방만한 관리와 스탈린의 정치력 덕에[22] 유형지에서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고, 스탈린은 전부 다 빠져나갔다.[23] 또한 이 7번의 도주 탓에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에게 '너 사실 러시아 제국의 프락치 아니냐'라는 투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24]

1900년 5월 1일, 스탈린은 티플리스 위쪽의 산속에서 500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불법 집회에 나가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이후 세 달 동안 티플리스의 여러 공장과 철도 회사에서 파업이 발발한 파업에서 스탈린은 주요한 선동 인사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티플리스에서는 2000명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이 폭력적으로 개입하여 진압됐다. 6개월 후인 11월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최초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바툼으로 파견되었고, 1902년 2월 그 도시의 주요 공장들에서 11개의 비밀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다음 해인 1902년 2월 29일에 정유 공장의 6000명의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행진했다. 물론 이것도 군대가 발포하여 15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스탈린 본인도 체포되어 4월까지 투옥된 후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 유형 3년을 선고받았다. 물론 탈출하여 1904년 2월에 티플리스로 다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이 사회주의 혁명가로써 시작한 첫 번째 유형 생활이었다.

1905년 12월 25일, 스탈린은 핀란드 대공국 탐페레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25]에서 레닌을 처음 만났다.[26] 이후 스톡홀름의 당대회에 참여해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만나 친구가 되었고, 런던에 갔다가 항구 노동자들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 맞던 걸 구해진 계기로 막심 리트비노프와도 인연이 생긴다.[27] 이때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스탈린이 아니고 그냥 주가슈빌리였다.

또 당시 스탈린의 혁명 동료인 알레크산드레 (알리오샤) 스바니제(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ალიოშა) სვანიძე, 1886년 ~ 1941년 8월 20일)의 남매인 에카테리나 (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 1885년 4월 2일 ~ 1907년 11월 22일)와 만나 결혼도 하여 아들 야코프 주가슈빌리를 두었으나, 잦은 도피 생활 때문에 제대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결국 카토는 남편을 대신해 홀로 아들을 키우다 22세의 나이에 티푸스로 요절했다. 장례식에 참가한 스탈린은 매우 우울해 했으며, "아내는 단단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줬는데... 아내는 내 마지막 인간적인 감정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라고 말했다. 장례식 막바지에 아내의 무덤으로 뛰어들어 자기도 함께 묻어버리라고 오열했다. 그 순간 오흐라나(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첩자들이 장례식장을 습격하는 난장판이 벌어졌고, 스탈린은 금세 감정을 추스른 뒤 달아났다.


3. 권력을 획득하다[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0px-Ordzhonikidze%2C_Stalin_and_Mikoyan%2C_1925.jpg
1925년의 캅카스 3인방이라 불리었던 3명의 사진.
좌측부터 아나스타스 미코얀[28], 이오시프 스탈린, 세르고 오르조니키제.[29]
캅카스 지역의 멘셰비키에 대한 열렬한 투쟁으로 캅카스의 레닌이란 별명도 얻었고, 1910년대 어간에 프라우다 창간에 참여하여 첫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될 정도로 세간의 인식과 달리 혁명가로써 두각을 보이던 스탈린이었지만, 오흐라나에게 체포되면서 그의 혁명가 이력은 한 방에 훅 갈 위기에 처한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끌려가 무려 4년이나 썩어야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신검까지 끌려가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될 위기에 처했다가 왼팔 부상 때문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와중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제국 정부가 무너진 후에야 시베리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그 중요한 제국 붕괴 시기에 스탈린이 한 일이 없었던 것은 당연했고 그 영향으로 스탈린은 10월 혁명에 대한 유명한 미국인 사회주의자 존 리드의 르포 <세계를 뒤흔든 열흘(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에서도 이름만 겨우 두 번 언급될 정도였다.[30]

거기에 4년이 넘는 시베리아 유형 사이에 스탈린은 완전히 잊혀서 명색이 전직 중앙위원인데도 인정받지 못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던 사람 정도로 소개받아 말단 취급을 받는 굴욕을 당했다. 보다 못한 레닌이 스탈린의 신원을 보증해줬을 정도.[31] 거기다가 스탈린 본인도(트로츠키와는 달리) 스스로도 내성적이라 나서기를 꺼렸고, 이러한 정황이나 훗날 권력에서 밀려난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눈에 안 띄는 듣보잡 정도로 묘사한 것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한때 스탈린이 혁명 중에 한 일이라곤 없는 그저 레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주된 묘사였으며 위에서 봤듯이 심지어 프락치라는 의혹도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저술한 스탈린 전기에 나온 것처럼 잉여 인사가 아니라 오히려 은행강도 등으로 단련된 도시 뒷골목 어둠의 세력과의 커넥션으로 레닌의 망명이나 자금 동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주요 당대회에 참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상기했듯이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첫 편집장이었으므로 언론 활동으로 지명도도 쌓여있었다.

1917년 혁명 직후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스탈린은 레닌, 지노비예프의 뒤를 이은 3위의 득표율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는데, 비록 이 중앙위원회 선거는 트로츠키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스탈린이 혁명가로써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레닌, 트로츠키처럼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뿐만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혁명가는 아니었을지언정 적어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나름 저명 인사였던 것. 혁명가로써 세운 공도, 지명도도 기존의 통설과는 달리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10월 혁명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 간부들이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정부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을 간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러시아 국내의 볼셰비키 대표를 맡았다. 이 입장에서 스탈린은 무장 봉기를 반대했는데, 레닌의 의중이 무장 봉기에 있다는 것을 알자 입장을 급격하게 바꿔 무장 봉기를 지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당초 무장 봉기를 반대했지만 스탈린의 입장상 정상참작이 가능했던 반대였고, 이 입장도 급격히 바꿔 무장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것에 비해 당 내 유력 지도자였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아예 당 밖으로 무장 봉기 사실을 폭로해 버리는 자폭을 한다. 후일 러시아 내전에서 물불 가릴 것 없었던 레닌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폭로를 불문에 부치지만 이 둘은 레닌에게 단단히 찍혀버렸다. 물론 10월 혁명의 가장 큰 수혜자는 레닌과 함께 무장 봉기론을 처음 제기한 트로츠키였지만, 스탈린 입장에서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라는 두 거물이 차기 대권에서 사실상 탈락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이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의 중앙위원회 정치국를 혁명 직후 재선출했는데,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32], 트로츠키 단 4인만이 뽑혔고 스탈린은 이때부터 사실상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으로써 자리매김했다. 당시 레닌과 독대를 할 수 있는 두 명이 러시아 내에 존재했는데, 한 명이 트로츠키이며 다른 한 명이 스탈린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정치장교로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충성을 감독하고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군사적 재능은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내전 초기에 남부전선으로 파견되었고, 백군의 반격으로 볼가강 인근의 차리친, 후에 스탈린그라드가 될 도시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업무를 보게 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심어둔 구 제국군 장교들과 불화를 빚었고, 자신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몇몇을 경질시키고 체포한 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군 전체를 통솔하는 모스크바의 트로츠키는 당연히 이런 스탈린의 행동에 격노하였고, 스탈린-보로실로프 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이 문제를 둘을 중재할 능력이 있는 레닌에게 직접 가져가기에 이른다. 레닌은 스탈린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이고 보로실로프를 우크라이나로 보내 트로츠키의 불만을 일단락시켰다.

스탈린은 1918년 6월 차리친(이후 스탈린그라드, 현재 볼고그라드)으로 파견되어, 병력을 지휘했고, 그 해 10월 우크라이나 전선의 군사회의에 위원으로 임명됐다. 당시 스탈린의 임무는 독일 제국이 만든 우크라이나국을 전복시키는 것이었으며, 콜차크 부대의 전진으로 인해 우랄 지방의 상황이 극적으로 나빠지자 12월에 스탈린은 제3군대의 파국적 상황을 종식시키고 무능한 인민 위원들을 숙청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고 파견됐다. 1919년 5월에는 유데니치 군대에 대항하여 페트로그라드의 방어를 지휘하기 위해 전권을 부여받고 또 다시 파견되었으며, 1919년 10월부터 1920년 3월까지 남부 전선에서 적군을 지휘했고 데니킨을 격퇴시켰다.

거기에 갓 건국된 폴란드가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에 놓인 우크라이나를 원조하기 위해 벌인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때, 스탈린이 지휘-감독하던 붉은 군대는 폴란드군에게 역관광당해 대패했고[33], 소비에트 러시아 측에게 우세했던 전쟁 양상은 폴란드 측으로 흐른다. 이러한 이유로 국방장관 트로츠키와 전선사령관인 미하일 투하쳅스키와는 사이가 엄청나게 나빠지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군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34]

이후 스탈린은 정부로 돌아가서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메리트를 강조하여 민족인민위원[35]에 취임하였다. 원래 정권을 잡기 전까지도 스탈린이 남들에 비해서 비교우위를 갖는 분야는 소수민족 문제 분야였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 일을 많이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자리는 스탈린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 줬는데,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스탈린은 교묘한 정치적 책략과 소련 내 민족 업무에서 보여준 과단성 등으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여러 업무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능력과 식견을 뽐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당시 니콜라이 부하린과는 민족 문제와 관련된 저서를 만들 때 도움을 주며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1922년, 스탈린은 마침내 공산당의 조직 기강을 내세우기 위해서 신설된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에 선출된다. 이때 레닌은 자신이 과거 10차 당대회에서 금지했던 종파 결성조차도 서슴지 않아서 몰로토프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훗날 스탈린은 서기장을 사실상 공산당의 수장으로 만들고, 이에 따라 전 세계 공산당에서 서기장 혹은 제1서기가 당의 수장인 것이 명약관화해지지만 당규약에 서기장의 당의 지도자라는 명확한 규정은 나중에도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기장 = 당수 시스템이 공산권 전체에 자리잡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36] 당시 서기장 직함을 만든 이유는 어디까지나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조직 행정 문제를 효율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서기장은 중요한 자리긴 해도 공산당의 수장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서기장이 되는 걸 이미 스탈린에게 중요한 자리가 너무 많으니 위험하다고 여겨 반대했으며, 스탈린이 서기장에 선출되고 나서는 행정업무만 처리하는 사무원에 불과하다고 막말을 퍼부어댔지만 그냥 분에 이기지 못해서 나온 인지부조화에 가까웠고 서기장은 중요한 자리가 맞다.

그러나 훗날 다니엘스를 비롯한 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스탈린이 서기장 자리에 앉아서 공산당 내부에 자기 측근들을 잔뜩 심어서 당을 장악했다는 주장도, 당시 공산당의 조직 기강은 너무 무너져 있어서 서기장에 앉는다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의문시되고 있다. 스탈린이 수행한 지방당에 대한 통제 강화와 기존 인사의 해임, 신규 인사의 임용 과정은 스탈린 개인의 의사보다는 중앙 정부의 힘을 강화하려는 소련 수뇌부의 명령을 스탈린이 이행한 것에 가깝다는 평도 있다.

어쨌거나 스탈린의 서기장 취임 한 달 만에 레닌은 러시아 내전에서 겪은 총격 후유증과 지병으로 쓰러진다. 레닌은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면서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이때 스탈린의 억압적인 정치 성향과 거친 성격이 드러나게 되어 스탈린은 레닌에게 상당한 반감을 산다. 이를 두고 레닌이 스탈린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어봤다는 평가가 나중에 스탈린 격하가 한때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흥했지만, 사실 레닌이 스탈린의 본성을 꿰뚫어봤다기보다는 레닌의 지나치게 배타적인 성격이 드러난 것이다. 이 때문에 레닌은 트로츠키와 반목하기도 했고,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와도 으르렁댔고 부하린도 기계론자라고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절대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았다. 스탈린도 레닌의 말년에 슬슬 머리가 굵어지면서 레닌의 주장을 반박하기 시작하자 레닌이 뿔이 나서 막말을 퍼부은 것에 가깝다. 사실 레닌은 말년에 중병으로 좀 맛이 가면서 자살을 하기 위해 독극물을 가져오라고 애원하는가 하면, 당 지도부 대부분을 쫓아내야 한다는 둥, 각종 질병으로 골골거리던 당 지도부를 치료하는 외국 의사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둥 말도 안되는 주장을 일삼아서 당내에서 반감을 사고 있었다. 어쨌거나 레닌은 죽기 전 써둔 유언장에서 "스탈린 동지는 너무나 잔인하고 성격이 급하다. 그의 성격은 서기장 자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서기장에서 해임하라"라고 써놨다. 그러나 레닌은 후계자에 대해 암시적이고 모호한 표현만 했지 아주 명백하게 후계자 지명을 언급하지는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거기다가 레닌은 이 유서를 엄중히 봉인하여 비서에게 맡겼는데, 그 비서는 하필 스탈린의 후처 나댜 알릴루예바였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레닌의 유서에 대해 알아버렸다.

혁명의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트로츠키는 영웅주의적으로 보이는 성격과 때문에 당 내 유력 주자들의 시기와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고[37], 스탈린이 사임하면 트로츠키에게 서기장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정치국 위원들은 다소 만만하게 보이는 스탈린의 사임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 유언장은 스탈린이 주재하는 정치국 회의에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이는 30년이나 지나서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와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이때 스탈린의 유임을 강력히 주장한 혁명가들 대부분은 대숙청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되었는데, 이땐 많은 이들이 스탈린의 본질을 깨달았으나 그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레닌의 유언장은 스탈린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트로츠키에 대한 전체적 호평, 그리고 약간의 단점과 그 부분을 다른 동지들이 보좌해서 채워달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써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 (중략) 개인적으로 가장 현재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의 순 관리적인 작업[38]

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년 12월 24일 작성된 부분


조지아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조지아인(스탈린)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39]

라며 비난하고(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그를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이 건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하고 관대하게 대할수록 좋다 말하는 이유다. 이게 바로 이 건에서 노동자 계층의 근본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단순히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억압받는 소국의 노동자의 편에 서서 억압자 대국을 대하는 태도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40]

레닌의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 1922년 12월 31일[41]

스탈린에게 혁명 영웅 트로츠키는 눈엣가시였고, 전 세계의 공산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맞서 러시아 단독으로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펼쳤다. 다만 트로츠키는 거만한 태도 때문에 스탈린 말고도 적이 많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경우 2차 대전 당시 연합국과의 외교 관계를 담당하게 되는 거물이 되지만 당시엔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는 장점이 없는 관료에 불과하다면서 트로츠키가 대놓고 몰로토프를 조롱하였고 이에 몰로토프는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

트로츠키는 공사 구분이 매우 철저했기 때문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상당히 신사적이고 친절해서 미국인 공산주의자 맥스 이스트먼 등은 트로츠키를 만나보고 빠가 되기도 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트로츠키는 가히 악마적 필설로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곤 했다. 이 때문에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트로츠키의 면전에 대고 "나는 동지가 두렵다."라고 하였으며[42],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도 트로츠키는 대면할 때는 예의바르지만 펜을 쥐면 악마가 된다고 평가했다. 얀 루주타크는 트로츠키와 논쟁하던 중 "트로츠키 동지. 나는 그대가 똑똑한 머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머리의 소유주가 당신 같은 무뢰한이라는 것이 유감이군요."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트로츠키의 인기는 영 메롱했기 때문에 1921년 3월, 10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명망에 비해서 형편없는 순위인 10등밖에 못할 정도였다. 그런 반면 그 당시 좀 만만한 감이 있었고[43] 겸손하고 상식적이라는 인상을 주변에 주고 있던 스탈린은 혁명 동지들에게 마치 모두의 합의를 도출할 만한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다만 스탈린이 무색무취한 일벌레라는 것은 트로츠키의 일방적인 주장에 가깝고, 스탈린도 열렬한 토론을 꽤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서류 작업에 싫증을 내면서 일하다 말고 탈출하기도 하였다.

레닌은 애초에 스탈린에게 경계심을 품다가, 볼셰비키가 초심을 잃고 소련의 군소 가맹국들에게 깡패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반성하던 터라 약소국에 가혹한 면모를 내비치는 스탈린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레닌은 스탈린을 절대로 후계자로 삼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여러 서찰을 남겼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 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는지 자신이 난타당하는 중앙위원회에 불출석하고 문필 활동에만 전념하면서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연합을 더러 '정치국 안의 정치국', '중앙위원회 안의 중앙위원회' 운운하며 비난하는 데 열중했으나[44] 당의 절대적 단합을 호소하던 스탈린 때문에 분파주의자로 몰릴 뿐이었다. 자세한 것은 레프 트로츠키 문서 참조.[45]

권력 투쟁 과정에서 패한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그냥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 했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연속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런저런 핑계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당시 스탈린과 협력한 지노비예프는 트로츠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추방으로 처리했는데, 트로츠키가 아무리 실각했다고 해도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추방당한 후에도 반스탈린 활동을 계속 펼치자 훗날 멕시코로 요원을 보내 암살하기도 했다. 대체로 스탈린에게 숙청된 인물들은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복권되었지만, 자신이 세운 소련 체제를 "퇴보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 트로츠키는 흐루쇼프도 외면했고 암살자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결국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몰아내는데 협력한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손을 잡고 트로이카 체제를 수립했지만, 이번에는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사이가 삐걱거렸다. 이들은 트로츠키가 주장한 당 내 민주주의 문제를 들고 와 스탈린을 비난했고, '부자 되시오' 발언으로 충격을 안긴 부하린 역시 스탈린을 자본주의를 우습게 안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나가리된 트로츠키까지 끌어들인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연합은 스탈린-부하린 연합에게 다시 분파주의자로 몰려서 신명나게 두들겨 맞고 나란히 당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최종적으로는 부하린까지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당 내의 유일 지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스탈린은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무척이나 영민하게 행동했다. 앞선 경쟁자들이 트로츠키를 몰아내기 위해 연합했을 때 처음에는 침묵했고, 다른 경쟁자들은 스탈린에게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몰아내자고 의견을 물었다. 외적으로는 스탈린은 정적 숙청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으나, 실질적으로 경쟁자들을 몰아내는 결정을 하는 권력은 스탈린에게 쥐어진 셈이었다. 이후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연합하여 부하린의 사회주의 우파 세력과 대립하자 스탈린은 부하린을 지원했다.

하나씩 하나씩 정적을 지능적으로 치워버린 스탈린은 이후 대숙청을 실시하여 이렇게 권력 투쟁 과정에서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밉보인 인간들은 모조리 트로츠키주의자나 파시스트 첩자로 몰아서 처형했다. 심지어 스탈린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옆집에 살던 부하린마저도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련의 지도적 혁명가들은 스탈린을 잘못 평가한 대가를 죽음으로써 치르게 되었다.

어쨌든 이 유언장으로 인해 스탈린은 자신의 영웅이며 모범이었던 레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셈이 되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레닌을 믿고 따랐던 스탈린은 레닌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고,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터득하게 되었다.

레닌의 유언장이 공개된 중앙위원회에 참석했던 한 당원은 후일 이렇게 회상하였다.

모든 사람은 심한 당혹감에 마비된 듯했다. 단상 위에 앉아있는 스탈린의 모습은 그렇게 작고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애써 자제하는 듯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자 했지만, 그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음은 명백했다.


4. 피와 공포의 숙청 시대[편집]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받아야 될 사람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레닌이 오래 살았다면 그도 감옥으로 갔을 것이다.

나데즈다 크룹스카야[46]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버린 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버렸잖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47]

그렇게 자신을 디스하던 이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절대권력 확립을 위하여 스탈린은 전대미문의 대숙청을 실시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5.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편집]


당시 소련의 실태는 동물농장에서 비판되기도 했다. 스탈린의 의심과 불안이 소련 사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였고, 결국 스탈린은 대숙청이라는 사상 최대의 마녀사냥을 발생시킨다.[48] 실제로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스탈린 집권기를 공식적으로 대공포(大恐怖, Great Terror)기로 정의하고 있을 정도이며, 동물농장과 1984의 저자인 조지 오웰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음에도 스탈린과 소련식 정책을 증오하며 그들을 신랄하게 까는 저 두 책을 썼다. 이에 관해선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내의 통합 마르크스주의 노동자당(POUM)들을 박멸시키기 위하여 NKVD로 하여금 스탈린주의자(PCE)를 부추겨 공화파를 후원하기는 커녕 분열을 조장했다는 이유도 있는데, 당시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 중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스탈린은 나치 독일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개전 이후 독일과 함께 폴란드사이좋게 갈라먹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았던 조약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일이었다. 스탈린도 언젠가 독일이 뒤통수를 후려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때문에 1939년의 폴란드 분할 이후 새로운 독일-소련 국경선에 "스탈린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다만 이전의 소련-폴란드 국경선에 있었던 방어선을 뜯어다가 새 방어선을 만들려고 한 게 문제였다.

나중에 스탈린이 죽고 난 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발언 중에는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긴 것이다."라는 것이 있다. 다만 흐루쇼프의 평가는 전쟁 지휘에 대한 부분에 한정해서 본다면 맞을지 몰라도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소련이 독소전에서 이기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이 무렵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통해 중국 혁명에 깊숙히 개입했으며, 중국 공산당에게 오랫동안 중국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유지하라고 교시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을 숙청하고 국민당을 공산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틀어졌다. 이후 갑작스럽게 중국 공산당의 무력 봉기를 지시하면서 노선을 거꾸로 뒤집었으나, 그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취추바이 노선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이후 리리싼 노선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스탈린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좌경모험주의를 범한 것이라고 책임을 떠넘겨 그들을 숙청했다.

1929년에는 중동로 사건, 봉소전쟁을 통해 장쉐량과도 부딪혔으나 정작 승리를 거둔 바실리 블류헤르를 대숙청 중인 1938년에 가차없이 숙청해 버렸다.

6.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소전쟁[편집]


1934년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이 집권한 이후 노골적으로 소련을 디스하며 주변의 소국을 병합,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게 된다. 이에 소련은 안보적 위기를 느끼게 되었으며 대숙청 와중에도 꾸준히 국방력을 증진하기 위해 병력을 늘리고 무기를 생산했다.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고 히틀러를 막아보려 했으나, 두 국가는 소련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49] 독일에게 침략당해도 소련의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폴란드의 고집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결국 스탈린은 서방 각국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때 히틀러는 서방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소련과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 유럽을 독소가 반분하자는 비밀 조항을 넣은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이후 히틀러가 서방 각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은 비슷하게 폴란드 동부, 발트 3국, 그리고 루마니아 왕국의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핀란드 일부(카렐리야 지방)[50]를 차지해 대가는 톡톡히 챙긴다. 게다가 스탈린은 자신이 배신했을 경우의 상황을 히틀러가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협상하는 자세가 아니라 고압적인 자세로 여러 가지 사항을 요구하여 여러 가지 수많은 이익들을 챙겼다.[51] 그러나 독일이 엄청나게 빠른 시간 만에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를 함락시키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영국군마저 거의 전멸 위기에 놓여 영국의 함락도 거의 코앞에 이르게 되자[52] 스탈린은 깜짝 놀랐다. 이때부터 스탈린의 태도는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히틀러가 요구하는 일들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최대한 협조해 주었다. 그러나 게오르기 주코프를 위시한 소련의 여러 장군들은 이런 스탈린의 태도가 전쟁이라는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며 경계령을 내려주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스탈린 또한 화를 내면서 히틀러를 건드리면 안 되며 그렇게 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53]

스탈린이 히틀러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을 통합하고 독일 내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켰던 모습, 특히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히틀러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의 뒷통수를 쳐도 전혀 죄책감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또라이가 아니라면 적어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양면전쟁을 벌이다가 패망한 독일을 이끌어 영국과 전쟁이 끝나기 전에 소련을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몰로토프가 전쟁 준비에 몰두하던 스탈린에게서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히틀러가 바로 그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또라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탈린이 히틀러의 침공 대비를 전혀 안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 본 것이지, 히틀러가 소련을 방치할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 숫자는 증강됐는데,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8년 당시 150만 명이던 붉은 군대는 1941년이 되면 숫자가 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하게 될 T-34 전차나 보로실로프 전차 등도 이 시기에 처음 제작되었다.

그러나 "설마 1941년에 들어오겠느냐?"라고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러시아를 침공하려는 사람들이나 이를 막아내려는 러시아 사람들이나 동장군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계산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겨울이 올 때까지 침략할 시간이 충분한 봄에 침공을 하는 게 유리하다는 것 역시 양쪽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1941년의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 침공 때문에 한여름이 될 때까지 침략을 하지 못했기에 언젠가 전쟁은 하겠지만 올해는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강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모두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렸고, 결국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한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전쟁에 휘말린 소련군은 개전 몇 시간 만에 전투기 1,200대가 이륙하지도 못하고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고, 소련의 전방 보급기지들은 인근 부대에 탄약을 공급하기도 전에 점령되었다. 독일군은 그날 단 하루 만에 발트 3국으로부터 60~80km, 벨라루스로 40~60km, 우크라이나로 10~20km까지 진격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진격 속도에 혼란에 빠진 소련군은 지금 독일군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부랴부랴 동원된 부대들은 새로운 숙영지로 이동 중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거나, 전선에 도달한 직후 제대로 된 정보 없이 무턱대고 싸우다가 몇 시간 만에 사라졌다. 대숙청으로 부대 지휘에서 보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소련군은 겨울전쟁에서 보여준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군은 포로로 잡힌 병력만 수백만 명이라는 굴욕을 당하고 와해 직전까지 몰렸다.

주코프의 회고와 독소전쟁 개전 상황을 다룬 챠콥스키의 '봉쇄'에 따르면 당일 크렘린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개전 당일 주코프와 여러 장군들은 새벽 3시 30분부터 국경에서 폭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들은 스탈린의 측근들에게 스탈린을 깨워서 모스크바에 데려오도록 했다. 한편 잠자고 있던 스탈린은 독일군이 소련 도시들을 공습하고 있다는 주코프의 전화를 받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주코프에게 그 어떠한 전투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리무진을 타고 모스크바로 간 스탈린은 이미 회의를 하고 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주코프 같은 최측근과 장군들과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망연자실하였고 매우 창백하고 당황한 얼굴로 빈 파이프를 뻐끔거리면서 이 상황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조차 이 공격이 단지 제한된 도발이라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 세묜 티모셴코가 '우리의 도시를 공습하는 걸 그냥 도발이라고 할 순 없다'라고 말하자 스탈린은 "그렇다면 독일의 장군들이 자신의 도시를 폭격해서 도발을 했을 것이다"이라면서 독일 지도자 히틀러가 그럴 위인이 아니라고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고 "히틀러는 분명히 이 상황을 모를 거야."라고 푸념하듯이 말하면서 히틀러전쟁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일개 장군들이 음모를 일으킨 것이거나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끝까지 믿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지휘부의 누군가가 "히틀러는 이 도발에 대해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독일 측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스탈린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몰로토프를 독일 대사관에 파견했다. 독일 대사관에 도착한 몰로토프는 그곳에서 만난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54]

에게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몰로토프는 그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며 "우리가 귀국에 그럴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몸에 힘이 빠졌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뒤 오랫동안 견딜 수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소련 지도부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코프가 독일군을 저지해 보겠다고 여러 가지 전략들을 이야기했지만, 이반 코네프"저지가 아니라 전멸이겠지."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별개의 인터뷰를 통해 주코프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고 까면서 자신은 슐렌부르크에게 그런 감상적인 말을 한 적도 없고, 그가 제시한 정치국 회의 시간도 틀렸다고 하면서 주코프가 회고록에서 자신을 과시하려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몰로토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주코프의 보고를 듣고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해서 보고할 것, 그리고 선동적 보고를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고 지시하였고 한다.

한편 챠콥스키 등은 전쟁 발발로 충격을 받은 스탈린이 열흘 이상 집무를 보지 않고 은둔했다고 주장했다. 세묜 티모셴코는 스탈린에게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야 되겠냐를 물어보기 위해 스탈린을 만났지만 스탈린은 그를 못 본 척했다고 한다. 그는 그 와중에도 오로지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정치부 회의에 참석했다.[55] 방송 연설은 몰로토프에게 맡겨놓았는데,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자신을 위협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업무를 맡겼다. 그나마 스탈린은 다음 날부터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며칠 후에는 하루에 14시간 정도를 일하면서 전쟁을 지휘할 정도로 괜찮아졌다고 한다. 소련 지도부는 일단 적이 코앞에 와있었기 때문에 일단 어찌저찌 전열을 정비하고 독일군과 싸우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던 스탈린에 의해 소련군이 입은 피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많은 사람들은 점점 "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서 전쟁 역할을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수수께끼 같은 행동을 벌이게 된다. 1941년 6월 29일부터 측근과 장군들은 스탈린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스탈린이 실종된 것이다. 당황한 사람들이 스탈린의 행방을 알아보니 스탈린은 며칠간 출근하지도 않고 관저에 숨죽이며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갔기에 소련 지휘부는 일단 스탈린이 없는 가운데에 할 일을 계속 했지만, 스탈린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그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겼다. 그들은 항상 스탈린에게 명령을 받아 움직였으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서 스탈린이 갑자기 돌아온 뒤 자신들을 무슨 트집을 잡아 숙청시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몰로토프 등의 심복들은 스탈린의 관저로 가서 스탈린에게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냐고 요구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먼저 스탈린을 설득하기로 하고[56] 스탈린의 관저로 찾아갔다. 그들이 본 관저에 있던 스탈린은 축 늘어져서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자신들이 오자 "무슨 일이오?"라고 물었다. 나중에 출판된 미코얀의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갑자기 찾아온 측근들을 경계하는 눈치였으며 굉장히 나약하고 의기소침해 보이는 모습이어서 그런 스탈린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스탈린을 찾아간 간부들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이끌 사람의 필요성을 이야기했고, 그러자 스탈린은 "그래서 누가 전쟁을 지휘할 것인가?"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심복들은 "당신이 전쟁을 지휘해 주시오."라고 이야기했고, 스탈린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 제안을 승낙하여 전쟁을 지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들은 굉장히 유명하지만 신빙성이 의심된다. 미코얀의 회고록에는 스탈린이 측근들이 스탈린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줄 알았다는 눈치라고 생각했다고 적혀있었고, 이 때문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 등 여러 저명한 연구자들의 저서에도 스탈린이 체포를 두려워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었으나 이는 사실 미코얀의 아들인 세르고 미코얀(Sergo Mikoyan, 1929~2010)이 아버지의 회고록을 멋대로 조작한 내용이었고 미코얀이 직접 기술한 회고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이는 나중에 미코얀의 회고록 초판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그리고 이후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스탈린의 근무 기록도 발굴되었는데, 6월 29일과 6월 30일 이틀을 제외하고 스탈린은 전쟁이 발발한 6월 22일부터 매우 바쁘게 전쟁을 지휘한 것이 확인되었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의기소침해서 은거했다는 챠콥스키의 주장에 대해서 황당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당시 스탈린이 굉장히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것은 몰로토프도 인정했는데, 스탈린이 "레닌이 남겨준 소련을 말아먹었어"라고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에 몰로토프는 스탈린을 진정시키려 했다고 하는데, 라브렌티 베리야"스탈린의 나약한 모습을 본 미코얀과 몰로토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라는 섬뜩한 예언을 했다.[57]

어쨌거나 스탈린은 매우 열정적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이것이 지나쳐서 몇몇 군사작전에 개입했다가 수백만의 병력을 날려먹긴 했지만, 자신이 개입해 봐야 별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직업군인이 짠 작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와 반대로 전쟁에 더욱 개입해서 안 그래도 시궁창이었던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58][59]

1941년 11월 7일 모스크바 10월 혁명 퍼레이드 중, 스탈린은 행진하는 부대를 향해 레닌의 묘소에서 짧은 연설을 했다.

앞으로 몇 개월 안에, 반년이나 어쩌면 1년 이내에, 히틀러의 독일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의 무게로 인해 붕괴할 것입니다.

--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p.375

가장 큰 위기는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전투였는데, 스탈린은 정부 부서를 모두 동쪽으로 피난시켰으면서도 시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공방전 내내 모스크바를 지키면서 방위전을 독려했다. 이후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활약으로 모스크바는 성공적으로 사수되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은 수십만 이상의 병력과 1,300대의 탱크 2,500문의 대포 및 1만 5,000대 이상의 차량과 훨씬 더 많은 군수품을 잃었는데, 개전 이래 6개월 만에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받은 가장 큰 피해였다.[60] 이후 스탈린은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에게 작전 지도를 맡기고, 자신은 자는 시간을 빼놓고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행정을 총괄했다. 스탈린은 전쟁 전부터 총괄하던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군 업무로부터 군수 생산, 그리고 서방의 원조까지 거의 모든 방면의 세부 사항을 직접 관리하면서 실무진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고, 이들은 저승사자였던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죽어라 일을 했다. 실제로 이 당시 대숙청 기간은 아니었으나 스탈린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자는 굴라그로 가거나 혹은 처형되었다. 이런 면에서 스탈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의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작업은 스탈린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켰는데, 주코프가 회상하기를 스탈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얼굴은 쭈글쭈글해졌으며, 눈은 심하게 쳐지고 몸동작도 느려졌으며 머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얘졌다고 한다. 실제로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때와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6년밖에 안 지났는데 스탈린의 머리나 수염이 모두 새하얘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각 항목에 사진이 있으니 참조할 것.

주코프가 작전 계획을 짜는 동안 스탈린은 정치가들을 이용하여 군수물자의 생산을 늘리도록 했고, 1942년 소련은 놀라운 성과를 달생했다. 소련의 경제는 1942년 후반 여섯 달 동안 독일이 그해를 통틀어 얻을 수 있었던 생산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에 성공적으로 헌신했고 그 수치는 주목할 만했는데, 그 반년 동안 소련은 1만 5,000대의 항공기와 1만 3,000대의 탱크를 생산해냈다. 즉 탱크와 항공기 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려 독일군의 침략을 상대했던 것이다.[61]

어쨌든 붉은 군대는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레닌그라드 포위전, 바그라티온 작전을 비롯한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베를린을 함락시킴으로써 1945년 5월 9일 마침내 주코프는 독일 국방군 총참모장 빌헬름 카이텔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아냈다. 마침내 4년 간의 지옥 같던 독소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종전된 것이었다. 당시 소련인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다. 모스크바에서는 축포가 1000여 발이나 발사되었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졌으며, 무엇보다도 모두들 엄청나게 마셔댔다. 비록 본진이 탈탈 털려서 식량은 없었지만 보드카는 넘쳐나서 술은 잔뜩 마실 수 있었으며 경찰들은 사람들이 고성방가를 하거나 오줌을 벽에다가 싸는 것도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스탈린을 연구한 학자 제프리 로버츠는 전시지도자로서의 스탈린이 매우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로버츠는 스탈린은 매우 유능하고 대단히 성공적인 전쟁 지도자였다. 스탈린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62] 수많은 인민의 죽음을 야기했지만, 그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소련은 나치 독일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처칠, 히틀러, 무솔리니, 루스벨트, 그들은 모두 군사 지도자로서 보자면 대체 가능한 인물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고 저서에서 주장했다.[63] 앞에서 언급한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베를린 공방전까지 스탈린이 지휘한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64] 결과론적인 말이긴 하나 연합국들 중 가장 많은 독일군과 추축군의 병기와 병력들을 파괴하는데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스탈린이 전시지도자로서 발휘한 탁월한 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가슴 벅찬 승리에 스탈린 자신도 대단한 감명을 받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전승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어 "드디어 우리가 이겼어요!"라며 축하의 인사를 건냈다. 스탈린 또한 이날만큼은 딸에 대한 나쁜 감정을 잊어버리고 감동과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래, 우리가 이겼구나."라는 말로 화답하였다. 그런데 정작 스베틀라나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부하들로부터 승전을 축하하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지금 한가하게 전화나 하고 있을 때란 말이오?"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해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역사적인 전승 기념 개선식이 벌어졌다.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의 오래된 전통에 의하면 개선식의 첫 장면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 사령관이 백마를 타고 그림처럼 달려나가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론 여기서 최고 사령관은 주코프가 아니라 스탈린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완성될 수 없었는데, 기병대 정치위원을 하던 것도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고 몸도 예전같지 않아 말을 다루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연습을 위해 멋들어진 아랍산 백마에 올라타자 놀란 말은 앞다리를 치켜 들어 스탈린을 땅바닥에 굴려버렸다. 머리와 어깨를 다친데다 기분까지 상한 스탈린은 "주코프더러 행렬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오. 그는 노련한 기병이니까."라고 하면서 주코프를 다시 호출했다. 주코프는 스탈린으로부터 말을 잘 다루냐는 질문을 받았고[65], 이 독재자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코프는 본능에 가까운 아부로 당연히 스탈린이 최고사령관으로 행렬에 선두에 서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은 너무 늙어서 힘들다며 주코프에게 선두에 설 것을 명령했고, 가장 높은 곳에서 말을 타고 가는 주코프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파일:/pds/201405/10/60/f0205060_536dbd5c58c0f.jpg
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하는 주코프. 원래는 스탈린이 타고 있었어야 할 장면이었다.[66]

어쨌든 그렇게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 이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던 스탈린은 이제 '승리의 지도자'라는 업적까지 더해지면서 소련에서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것들이 종교화의 레벨까지 이르러 반종교를 표방하는 프라우다지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자신의 일이 잘 안 될 때, 그분(즉 스탈린)에게 기원하면 모든 게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사설을 쓸 정도였다. 아래는 당시 프라우다지의 사설.

당신의 작업이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혹은 자신의 능력이 의심스러울 때,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확신을 얻게 될 것이오.

당신이 기운을 차려야 할 때 피곤함을 느끼거든,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일이 수월해 질 것이오.

당신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자 할 때,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오.

스탈린이 말한 것은 인민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민들이 말한 것은 스탈린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오...

-

1950년 6월 20일자 프라우다 기사에서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스탈린은 1945년 5월, 크렘린에서 벌어진 독소전쟁 축하연 연설에서 "우리의 승리에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한 것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아래는 당시 연설 중 일부.

우리는 1941년과 1942년 사이의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정부는 인민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독일과 강화를 맺기 위해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한다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인민은 이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졌던 모든 러시아 인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 연설이 스탈린이 한 연설 중에서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스탈린은 "나치를 정리하고 3개월 뒤에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럽에 있던 붉은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에 태워 극동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9일, 150만 명이 넘는 소련군이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와 함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은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이후에도 진격을 계속하여 21일부터 23일 사이 원산함흥, 그리고 평양은 물론 개성까지 진주했다.[67] 또한 극동의 소련군은 1945년 8월 18일 사할린 섬을 차지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러일전쟁에서 잃었던 남사할린을 다시 되찾았고 쿠릴 열도까지 차지했다.

7. 냉전[편집]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지만, 추축국 동맹을 패퇴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미국과 소련은 전후 질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했다. 스탈린은 영미와의 흥정으로 동유럽을 차지할 수 있었고, 소련의 건국 당시부터 숙원이던 완충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제 1세계 vs 제 2세계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냉전이라고 한다.

일단 전쟁이 끝난 후 스탈린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1945년 6월 28일에는 자신이 영웅시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처럼 대원수의 지위에 오른 스탈린은 전쟁 당시 주춤했던 세뇌 및 숙청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일단 전쟁 중 독일 점령지에 있던 배신자들이 우선적인 숙청 대상이 되었다. 캅카스발트 3국에 있던 여러 반소 분자들은 총살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소련군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277만 5700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었다는 이유로 여과 수용소라는 곳으로 보내졌으며, 이 중 절반은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68] 전쟁이 끝났다는 이유로 국민들을 느슨하게 다루는 것은 강철의 대원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다시 강조되었고, 국민들은 당과 정부에 충성을 바쳐야만 했다. 비밀경찰은 다시 바빠졌고, 소련의 어용 언론들의 세뇌와 선전은 다시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나치 독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종전 3년 만에 전쟁 전 수준으로 생산량을 회복한다. 다만 전쟁의 상흔에서 온전한 복구가 이루어진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후 복구 과정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성공적이었다. 제4차 5개년 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 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스탈린의 소련은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 현상을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전후 복구 과정에서 소비재 생산도 발전하면서 1947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에서 배급제가 폐지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배급제를 실행했던 영국보다 7년이나 빠른 속도였고 일본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대조국전쟁을 거치면서 나치 독일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되었지만, 1948년 전후 재건의 성과로 공업 생산량은 1940년의 공업 생산량을 넘어섰을 정도다. 1950년의 공업 생산량은 1940년 공업 생산량을 73% 능가했고, 소비재 생산도 23% 증가했으며 자본재의 생산은 두 배로 증가했다. 1951년에서 1955년까지 매년 12%의 공업 성장률을 보였고, 5년 동안 자본재가 80%의 성장을 보였고, 소비재 생산도 65%라는 눈에 띄는 성장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스탈린 또한 전후 재건 과정에선 성장 및 생활 개선에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1946년 스탈린의 요약 연설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상품의 원가를 줄이고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연구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소비재의 생산량 증가와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 향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1949년 소련은 핵 실험을 하여 소련은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끝내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스탈린은 핵을 지닌 채로 공산권 위성국들을 거느린 초강대국의 지도자로 등극한다.

냉전 시대에 스탈린이 세계 공산주의 적화의 야욕이 있었다는 식의 서방측 선전이 넘쳐났었지만, 실제로 스탈린은 세계 혁명에 대해 적극적인 노선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발트3국과 핀란드, 폴란드가 소비에트 치하에 포함되지 못하면서 세계혁명론에 대해 뼈져린 한계를 느낀 베테랑 정치인으로 레닌 집권 말기때부터 자신이 집권했을 때도 일국사회주의론을 내세웠던 인물이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소련의 동유럽 팽창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반파시즘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로써 국한된 것이지, 소련이 외압을 가한 경우는 동유럽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뿐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어쨌거나 철저한 레닌주의자였던 스탈린은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에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알아서 망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1차 세계 대전 이후처럼 대공황이 닥쳐와 영국과 미국의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했고 앉아서 어부지리를 취하면 될 것으로 여겼다.[69]

그래서 타국의 혁명에 개입할 때에 그 혁명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소련의 이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과감히 행했고, 전쟁 이후엔 혁명이 벌어지더라도 소련의 이익이 침해되거나 미국과 대결하는 것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혁명들은 피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군에서 아나키스트와 독립공산당이 득세하자, 소련은 NKVD를 보내 공화파에서 이들을 때려잡는데 힘을 쓰다가 적전 분열을 일으켜 결국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승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베를린 위기 때도 도로는 봉쇄했을지언정 미국의 공중 수송은 막지 않았고, 국공내전 때도 인민해방군이 승리하기 직전까지 개입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중화민국과의 외교를 끊지 않으면서 구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서 가졌던 이권을 되찾는데 집중하였다.

그리스 내전도 마찬가지다. 스탈린은 그리스 내전에서 소극적인 지원[70]만 했을 뿐이었으며,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그리스 정부에 군사고문단 및 무기 지원을 하는데도 내버려 두었다. 그 결과 미군 고문단이 지원한 그리스 정부군은 이들의 지원 아래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25년 동안 군사독재 정부가 그리스에 들어섰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호찌민을 지원한 것도 1950년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스탈린은 호치민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OSS와 협력했던 것과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을 의심해서 호찌민을 당혹스럽게 만든 적이 있었다.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의 독립 선언으로 탄생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스탈린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반면,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지도자 수카르노는 1947년에 소련으로부터 외교적으로 승인받았다. 그래도 호찌민이 요구한 한 가지는 확실하게 들어주었는데,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한 것이었다. 1950년 1월 30일 소련은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공식적인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6.25 전쟁에서도 소련군은 비밀리에 참전한 공군을 제외하면 끝까지 참전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며, 김일성박헌영의 남침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오히려 마오쩌둥에게 김일성을 원조하라는 말을 한 이후에 '쟤가 개입 안 하겠다고 하면 우리 이웃으로 미군을 놔도 상관없다'라고 하였다.[71] 그래서 정치학자들은 스탈린을 20세기 최고의 정치현실주의자로 평가한다.

스탈린이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러시아 혁명기와 내전 당시의 뼈져린 경험에다가 직접 독소전쟁을 지휘하면서 미국의 높은 생산성과 국력을 몸소 체험했고, 동시에 전쟁과정에서 소련 전체 인구의 15% 가량이 살상당할 정도로 인구손실이 막중했던 탓에 당장 미국과 일대일로 맞붙는 것이 소련 입장에서는 엄청난 무리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소련의 서기장이자 소련군 통수권자, 그리고 연합국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서 미국이 행한 가진 것이라고는 명분밖에 없는 키다리 지도자에게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차 수십, 수백량 이상을 제공하는 미칠 지경의 USA Loan, 미국이 수행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을 대상으로 한 양면전쟁, 그리고 미국의 섬 반도 반동 분자들을 단번에 박살낸 악마의 폭탄 투하를 생생히 전달받을 수 있었던 인물이다. 소련 서기장 스탈린이 아니라 삼척동자가 봐도 신생국가 소련이 핵무기 기술까지 독점했던 미국과 충돌할 경우 남는 것은 자멸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소 전쟁이 소련이 미국이 가진 것 이상의 핵 전력을 보유하지 못한 스탈린 생전에 벌어졌다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던 소련이 본토와 생산력, 경제력이 멀쩡히 살아있었던 미국을 이겼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무기대여법 등을 통한 다양한 자원과 경공업, 군사적 지원, 배후에 있던 일본 제국을 미국이 박살내고 있었던 상황 등으로 인해 소련이 마음 놓고 중화학 군사 산업을 육성하고 독소전쟁에 모든 것을 올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미국과 소련이 전쟁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런 지원은 당연히 없는 것이고, 소련은 독소전쟁 이상의 패널티를 가지고 전쟁을 했어야 함이 당연하다.

물론 미국의 핵개발 비화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본에 떨어뜨린 핵폭탄 두 개를 소진한 후 다음 핵무기의 준비까지 미국에게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핵이 없었다고 해서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국제역학적으로 보아도 소련에게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던 것이, 일단 영국만 해도 윈스턴 처칠철의 장막이라고 언급할 정도로[72]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독일 쪽에서 보아도 독소전쟁나치의 대 소련 프로파간다, 소련군의 약탈, 미소 분할 점령 등으로 인해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프랑스는 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유 프랑스는 미국에게 진 이 엄청났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을 묵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영프독으로 대표되는 기존 열강들이 소련에 친화적이지 않고 미국의 편을 들 것이 분명한 상황이다. 일본의 경우 반미 감정이야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소련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일단 일본은 확실히 GHQ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고, 이것은 서유럽을 확실히 지배하지 못한 소련과 서유럽을 확실히 지배한 미국의 극단적인 차이이다.[73] 또한 일본과 소련은 러시아 제국, 러시아 내전 시절부터 서로 치고받고 싸운 앙숙 관계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넘어 양면전쟁을 했던 만큼 소련을 동서로 나누어 공격할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다만 양면 공격의 대상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서 소련 서부, 동부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당시 미 해군은 태평양 전쟁을 통해 세계 3위 일본 해군을 상대하면서 급격히 팽창해 명불허전 세계 1위의 해양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송 능력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공군의 전력 또한 마찬가지. 베를린 봉쇄에서 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로지 공군의 공중 수송을 통해 서베를린이라는 대도시를 지탱한 것이 미군의 수준. 이런 상황에서 대서양에서 주구장창 미군을 괴롭히던 나치 독일의 유보트와 일본 제국의 잠수함들마저 없어졌으니 상황은 더 나았다. 미국이 이런 해군력의 압도적 우세를 이용해 베링 해협과 대서양을 막아버리고 소련의 동쪽과 서쪽에서 양면 공세를 벌인다면 소련 입장에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소련의 의미있는 군항은 죄다 동유럽, 러시아 서쪽에 집중되어 있어 애초에 소련 해군이 약하지만 모항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74] 때문에 일본 제국이 당했던 것처럼 소련 역시 미국의 본토를 공격할 엄두도 못 낸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샌드백이 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소련군이 서진해 서유럽을 위협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독일을 완전히 합병하려 한다면 그것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적어도 스탈린 생전의 소련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보기도 어렵고. 이런 점을 모두 종합하면 스탈린이 세계 적화를 추구하며 공격적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지상전에서 미국에게 상당한 출혈을 강요할 수는 있을지언정 소련과 미국은 기본적으로 바다로 인해 이격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소련군이 진주한 나라에서는 소련식으로 사회를 개조하려 했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위성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런 제국주의적인 태도는 나중에 동유럽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의 독자적인 혁명으로 집권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에 반발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스탈린 사후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소련의 간섭을 벗어나려는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동유럽과는 약간 다르지만 마오쩌둥이나 김일성, 엔베르 호자는 이전의 소련 꼬붕을 했던 노선을 폐기하고 독자 노선을 천명하게 된다.

8. 우상화의 절정[편집]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 아첨하는 무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독재자답게 단순히 아첨에만 그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바쳐진 것은 그냥 아첨이 아니라 거의 숭배 수준이었다.[75] 사실 스탈린 자신은 지나친 숭배 의식과 열풍에 당혹스럽다며 선전에 도가 지나치다고 불평했다. 그렇다고 선전과 숭배 의식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당시 이러한 숭배 의식을 만들어낸 건 결국 스탈린 본인의 절대자적인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숭배 의식을 비판한 것은 당연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이긴 영광을 독차지한 스탈린은 후일 흐루쇼프가 개인 숭배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우상화를 가속화해나갔다.

아무튼 전후 소련에서는 웃지 못할 스탈린 숭배 열풍이 불었다. 한 번은 1945년에 스탈린 전집이 출간될 때의 일이다. 스탈린은 종이가 부족하니 3만 부만 찍자고 했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대중의 요구가 엄청날 것이라면서 적어도 30만 부는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겸손한 스탈린 동지는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다.[76] 그는 자신의 전기를 읽고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도가 지나친 아첨이 가득한 스탈린 전기를 읽고 "우리에게 우상 숭배자는 필요 없소... 우리에겐 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이 있으니 다른 것은 필요 없소."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탈린 전기가 발간이 취소되지는 않았다. 스탈린을 신성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후계자로 보는 '단기 과정'은 전후 천만부가 발간되었다. 동시에 전기는 100만부 이상, 전집은 50만부 이상 발간되었다. 스탈린의 숭배는 이제 소련 출판계의 사명이었고, 소비에트 언론이 가야할 길이었다. 전쟁전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에 대한 수많은 포스터가 제작되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철저한 세뇌는 미덕이 되었다.

스탈린 우상화는 1920년대부터 레닌과 엮어서 레닌의 계승자로 슬슬 나왔고 1930년대부턴 레닌을 제치고 자체 우상화로 더 심해지더니 대숙청이 시작되자 열광적으로 변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하자 신격화되기 이른다. 1940년대 소련 지도를 보면 독소전쟁때 유명한 격전지 스탈린그라드 뿐만 아니라 '스탈린스크', '스탈리노고르스키', '스탈린스키', '스탈리노그라트', '스탈리나바드', '스탈리노'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심지어는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 혹은 스탈린다르(스탈린의 선물)로 바꾸자는 아부성 청원이 나왔고 역법을 예수 태어난 연도 따위하면서 서기 연도를 대체하여 스탈린 생일을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두가지는 겸손한 스탈린 동지도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지 사양한다.[77][78][79]

영화 <베를린 함락>에서는 감독이 스탈린 홀로 히틀러의 패배를 궁리하며 참모부 지도를 주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시 신화 속엔 스탈린이 홀로 전쟁영웅-정치인의 실체가 되었다고 믿을 판이었다. 1948년 소련 예술상 출품작 중에 단 두 편만이 위대한 스탈린을 묘사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새로운 노래나 출판물은 말할것도 없었다. 노래야 손발이 오그라드는 스탈린 찬양 내용이 주를 이었고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은 겨우 1000만부 정도나 팔렸지만[80] 스탈린의 저작들은 총 7억 600만부가 팔렸다. 레닌의 저작은 2억 7,900만부,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은 꼴랑 650만부가 판매 되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셀러작가가 되었던 스탈린 동지의 기록은 마오쩌둥에게 곧 깨진다. 마오주석 어록은 44억부가 출판되었다. 역시나 대륙의 기상이다.[81]

레닌이 사망한 이후 공산당은 레닌의 유품과 사진을 전시했는데, 스탈린은 권력이 커질수록 자신의 초상화를 레닌의 초상화와 동등한 위치에 걸도록 했으며, 그 크기도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다. 소련 곳곳에 걸린 포스터와 그림에서 스탈린은 항상 머리를 꼿꼿이 치켜세운 위엄있는 모습이거나, 동료들보다 어깨를 추켜세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빌딩벽과 모든 가정, 사무실에는 스탈린의 사진이 걸렸다.

스탈린은 그 누구와도 영광을 함께 나누길 원하지 않았다. 전쟁 기간 중 총사령관의 제복을 입었던 그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죽을 때까지 그 제복을 입었다. 주코프와 같이 승리에 큰 공을 세운 장군들도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공개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스탈린이 사실상 권력의 전면에 서기 시작한 1929년 50살 생일에서 받았던 찬사는 이후 터무니없이 변해갔다. "그는 우리들의 경애하는 아버지이자 우리의 절친한 안내자요 교사이며 모든 시대, 모든 인간들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 시인들과 작곡가들은 작품을 통해 스탈린을 찬양하였고, 그리스 정교회의 대주교는 그를 신의 선택된 아들이라고 칭송하였다.

스탈린은 어디에나 있었다. 공개적인 장소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리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극장에서도 스크린의 양쪽 끝에는 스탈린과 레닌의 실루엣이 비춰졌다. 스탈린의 조각상은 산꼭대기와 깊은 숲속에까지 세워졌다. 1951년 볼가-돈 운하에 36피트 높이의 청동 33톤이 소비된 거대한 스탈린의 동상이 세워졌다. 탈스탈린화가 진행되던 1961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 있던 스탈린의 초상화들이 제거되었는데 그 양이 너무 엄청나서 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해야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과 그 외 중요한 사건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대 해석하는 방향으로 모든 역사책과 백과사전을 새로 집필하도록 명령했다. 다른 사람들의 업적은 하향 평가되었으며,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자들의 기록은 모두 삭제되었다. 이들은 존재했던 사실 자체가 말살되기도 하였다. 소련 혁명은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만의 역사로 수정되었고,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동분자들의 모습은 모든 사진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스탈린은 자신의 공식적인 전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직접 덧붙였다.

그는 당과 인민의 지도자로서 주어진 과업을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또한 전 소비에트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있었지만, 스탈린은 결코 조금의 자만심이나 자부심 혹은 자기 과시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지도자 신격화를 어디의 선전물에서 많이 본 것 같다면 절대 기분 탓이 아니다. 북한의 모든 선전, 선동 기법은 스탈린 식 선전선동 기법의 철저한 모방화 - 이후 민족주의 주입에 있었다. 당연히 스탈린을 찬양하는 포스터에서 북한 냄새가 나더라도 그게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북한 선전물에서 스탈린 시절의 소련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게 앞뒤가 맞는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은 스탈린의 방식대로 체제만 유지하고 그를 숭배했던 것에 대해 흑역사 취급하는 분위기로 흐른 반면, 북한의 김일성 숭배는 더욱 막장화되면서 소련에서 자기네들이 세워 준 정권인 북한의 김일성 숭배 선전물을 보며 비웃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82][83]

이 시절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사람이 위대한 스탈린 동지의 영도력 안에서 행복을 느꼈다. 아니라면 느껴야만 했다. 소비에트 안에서 좋은 일은 모두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어떠한 작품도 그의 천재성을 언급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었다. 역사와 정치학, 경제학, 지리학, 화학, 물리, 유전학 까지도 '스탈린 동지'의 지도적 사상을 통합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심지어 요리책에까지 '스탈린 동지'의 말이 인용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을 게재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 마차 사고로 온전하지 못한 왼쪽 팔과 얼굴의 천연두 자국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진보다 초상화를 많이 선호했다. 2차대전 후에는 너무 나이든 초상화를 거부해서 보통 그 이전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모든 초상화는 '스탈린 동지'가 인정한 작품만이 공개될 수 있었다. 계속되는 선전세뇌는 억압적 독재 정권하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독소전 이후의 상황과 연계되어 스탈린은 구국의 영웅으로 승격되었다. 이제 많은 소비에트 인민들이 실제로 '스탈린 동지'를 사랑했다. 아마 초기에는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굴라그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그를 숭배하는 사람이 많았고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실제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허나, 스탈린 숭배는 흐루쇼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이후에 스탈린은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고, 이 기조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붕괴 이후로 소련에 대한 향수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스탈린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심지어는 정교회에서 스탈린 이콘이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초기에는 정교회를 비롯하여 종교 자체를 말살하려 했던 스탈린이지만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소련 인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정교회를 거꾸로 밀어 주었기 때문.

9. 말년[편집]


파일:attachment/마오쩌둥/1949_Mao_and_Stalin.jpg
1949년, 스탈린의 생일파티 당시 모습[84]

당시 영상.[85]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1949년, 스탈린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70살 노인이 되었다. 그의 70세 생일은 마오쩌둥, 호찌민 등등 전 세계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모두 참여한 화려한 기념식이었다. 단순한 생일 파티를 넘어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소련의 위광을 드러냄과 동시에 스탈린이 공산주의 세계의 황제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거대한 정치 행사나 다름없었다. 보통 굉장히 미화된 초상화와 사진을 통해서 스탈린을 알고 있던 각국의 지도자와 참석자들은 이날 스탈린의 노쇠한 모습에 굉장히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스탈린은 초상화와 달리 나이를 먹는 인간이었으니까.

말년이 되자 스탈린의 정신과 육체는 점차 쇠약해져갔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업무는 스탈린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다. 결국 정부의 기능은 점차 마비되어갔다. 스탈린은 점차 게을러지고, 행동이 조잡스러워졌으며 자주 화를 냈다. 스탈린은 스스로를 무례한 늙은이라고 불렀다.

스탈린의 집무실에는 밤새도록 창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왔으나, 그것은 인민들에게 그가 아직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술책이었다. 스탈린은 점차 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가 크렘린을 떠날 때면 늘 3,000명 이상의 경호원이 따라붙었다. 5대의 리무진에는 철판을 대고 방탄 유리를 끼웠으며, 차창에는 항상 커튼이 늘어져 있었다.

원래 스탈린은 의심이 많았던 독재자이지만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의심도 배로 더 늘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충실한 충복들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까 의심했고[86] 그들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스탈린의 모든 주변인들은 스탈린이 너무 늙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의심 많은 스탈린 앞에서 정신이 머리에서 가출하지 않는 이상 감히 후계자 이야기를 꺼내는 무모하고 정신 나간 인간들은 없었다. 특히 그 누구든지 자신을 위협할 권력을 가질 경우 이 늙은 콧수염 대마왕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심지어 후계자를 노릴 만한 권력을 갖지 못한 측근들도 항상 스탈린이 자신을 숙청할지 몰라 살얼음판을 걷는 생활을 했다. 사실 말년의 스탈린은 격무에 지쳤기에 은퇴해서 쉬고 싶었지만, 은퇴할 경우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워낙 대숙청으로 수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쓸어버린 그였기에 이러한 불안은 사실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잡고 있지 않는다면 무슨 보복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물론 이렇게 일을 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매우 지치고 늙은 상태였기 때문에 옛날처럼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기는 힘들어서 말년에는 일도 대충대충 하고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만찬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말년에 주변 인물들을 떠보기 위해 자주 은퇴를 거론하긴 했다. 하지만 그가 은퇴의 뜻을 비치면 아첨이 예술에 경지에 이른 측근들은 펄쩍 뛰면서 스탈린이 없는 소련은 존재할 수가 없다면서 그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그러나 가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인간도 있었는데, 주치의였던 비노그라도프가 건강을 위해 은퇴를 제안하자 격노한 스탈린이 그를 처벌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러면서도 스탈린은 자신의 은퇴를 계속 의제로 삼고 회의를 했다. 스탈린 강철 권력에 의하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손 안에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과 같았다는 서술을 했다.

한편 스탈린은 미코얀, 몰로토프, 흐루쇼프, 베리야 등의 여러 고위 정치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숙청될 수 있음을 계속 경고했다. 특히 베리야는 자신이 전임자들처럼 숙청될 것이라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유대인으로서 반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여러 가지 경고를 통해 스탈린은 자신의 주변에서도 공포 정치를 유지했다. 특히 독소전쟁 이후 회복되지 않는 민생 경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자 스탈린은 이를 구실로 군부 내부의 숙청을 감행했고 레닌그라드 사건을 일으켜 전 국가계획위원장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 등을 총살했으며, 이스라엘이 친미로 돌아서자 시오니즘 음모론 운운하면서 소련 내부의 유대인 거물들을 차례로 숙청해 버렸는데 소련 반파시즘 유대인 위원회의 위원장 솔로몬 미호옐스를 자동차로 들이받아 버리고 나머지 유대인 지도자들도 줄줄이 총살시켜 버리는 등 스탈린의 공포 정치는 끝을 몰랐다. 나중에는 최측근인 경호 책임자 블라시크와 비서실장 포스크레비셰프마저 숙청당했다.

지금 처칠네, 트루먼네, 번스네의 칭찬을 들으면 아이처럼 기뻐 어쩔 줄 몰라하고, 거꾸로 이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뒤에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많은 이들이 권위 있는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우리 대열 속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무조건 비굴하게 구는 노예 근성을 낳기 때문에 위험한 태도입니다. 외국인들에게 굽실거리는 이 노예 근성에 맞서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말년에는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서방에 너무 나약하다는 이유로 그들이 서방 스파이라는 망상에 시달렸고 그들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코얀과 몰로토프와 친했던 흐루쇼프와 동료들은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숙청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탈린이 자신의 최측근들만을 불러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 그들을 동참시켜 다시 스탈린의 신임을 얻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스탈린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는데, 스탈린은 특별히 누군가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말렌코프를 노려보며 "우리가 영화를 관람할 때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오는 이유를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당장 그만둬! 또 다시 그런 짓을 했다간,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어!"라면서 그들에게 화를 냈고, 결국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모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선 스탈린이 독소전쟁 발발 때 저택에서 자신의 허약한 모습을 본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거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본 것이 싫어서 그랬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여튼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싫어졌던 이유는 위에서 베리야가 말했던 대로 스탈린의 나약한 모습을 본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자서전에서 밝혔던 대로 그 이후에 스탈린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지 않았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숙청당했을 것이다.

이 밖에 스탈린의 말년에 대한 내용은 흐루쇼프가 회상한 스탈린의 말년 글에 잘 나와있다.

스탈린의 이러한 의심은 외국 지도자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 루돌프 슬란스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미국 간첩으로 몰려서 백주대낮에 총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헝가리 근로인민당 서기장 라코시 마차시는 스탈린의 휴가에 매번 따라온다는 이유로 감히 스탈린에 대한 정보를 캐고 다니는 불순한 놈으로 스탈린의 의심을 샀는데 사실 라코시는 그냥 소련 공산당에 스탈린이 어딨냐고 물었고, 서기국이 솔직하게 말해준 것 뿐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의심이 극에 달한 스탈린은 자신의 주치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왜 갑자기 스탈린이 주치의들을 의심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아마도 몽골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죽음이 꽤나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1952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는데, 그를 무척이나 아꼈던 스탈린은 처이발상의 죽음은 주치의들이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스탈린이 의사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다가 위에서 말했듯이 주치의였던 비노그라도프가 자신의 하야를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스탈린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고, 스탈린은 그들을 숙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흐루쇼프는 그때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스탈린은 우리들에게 티마슈크라는 여의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주었다. 내용은 즈다노프가 고의적으로 부당한 진료를 받아 사망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 편지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편지 내용이 단 10%라도 진실이라면, 그 전체를 사실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른바 '흰 가운을 입은 암살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크렘린 소속 의사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스탈린은 당시 국가보안상인 세묜 이그나티예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들겨 패! 두들겨 패! 두들겨 패라고! 그놈들을 가루가 되도록 짓이겨버려! 만약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머리 하나만큼 네놈의 키를 줄여주겠어!"[87]

저딴 식으로 스탈린이 갈궈대니 의사들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는 뻔히 알 만하다. 결국 소련의 의료 엘리트들은 차례대로 체포되었고, 이들은 고문을 못 견디고 있지도 않은 음모를 자백했다.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비롯한 정치국 위원들을 불러모아 의사들의 거짓 자백서를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끼들아. 너희는 눈이 멀었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나. 너희가 적을 구분할 줄도 몰라서 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은 제2의 대숙청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었지만 스탈린의 사망으로 인해 크게 번지지는 못했다. 이렇게 주치의들을 숙청해서 스탈린의 명줄이 더 짧아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스탈린의 뇌출혈은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며 잘해봐야 정무도 제대로 못보는 상태로 조금 더 산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10. 사망[편집]



스탈린은 말년에 관저보다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고[88], 이곳에서 그는 편지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이 별장에는 당구장, 영화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인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요리와 술, 그리고 담배가 준비되었다. 스탈린은 마음 내키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지냈다. 물론 그들은 대개 스탈린의 충실한 종이었다. 1953년 2월 28일 저녁, 스탈린은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브렌티 베리야, 니콜라이 불가닌, 니키타 흐루쇼프를 호출하여 여느 때처럼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영화를 본 스탈린은 측근 4인방을 데리고 그의 별장인 블리즈나야로 데려가 연회에 초대했다. 베리야를 포함한 고위 당원들은 콧수염 대마왕의 피바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연회가 가시방석 같았겠지만 그렇다고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연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몇 사람들을 숙청했기 때문이다.

만찬은 다음 날인 3월 1일 새벽 4시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스탈린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모두 심각하게 취한 상태였다. 스탈린은 이날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고,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면서 참석자들을 배웅하고 농담을 늘어놓으며 참석자들을 애칭으로 불렀다. 스탈린이 이렇게 기분 좋게 그들을 배웅하는 일은 언제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흐루쇼프 등도 기분 좋게 귀가했다. 측근들이 돌아가자 스탈린은 경호원들에게 자신이 부를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한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3월 1일 아침에 경호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매일 아침 10시마다 경호원들을 불러 보고를 받던 스탈린이 아무리 기다려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경호원들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경우 자칫 큰 재앙을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좌불안석이 되어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다가 오후 6시 반에 별장 안에 불이 켜지자 경호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방에서 아무런 명령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경호원들은 누군가는 들어가 봐야 한다고 싸웠지만 아무도 감히 스탈린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후 밤 10시쯤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사무실에서 스탈린에게 소포가 도착하자, 11시에 이 소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때 파벨 로즈가쇼프, 혹은 미하일 스타로스틴은 별장에 들어가 식당에 불을 켰다가 스탈린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스탈린은 의식은 있었지만 말은 못하는 상태였고, 손을 심하게 떨고 소변을 잔뜩 흘린 상태였다. 스탈린은 손을 흔들며 도움을 요청했고, 그래서 나머지 경호원들이 몰려와 스탈린을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들은 누구도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또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로봇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위급한 상황일 때 오히려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의료진을 모조리 감옥에 가둔 상태라 의사도 곁에 없었다. 결국 스탈린은 자신이 뿌린 행동 때문에 자멸해 버린 자승자박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경호원들은 먼저 국가보안부 장관 세묜 이그나티예프에게 연락했고, 이그나티예프는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부르라고 했다. 베리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말렌코프와 겨우 연락이 닿을 수 있었는데, 말렌코프는 베리야, 흐루쇼프, 불가닌을 모두 불러서 다 같이 별장으로 갔다. 말렌코프가 혼자서 스탈린의 별장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경호원들로부터 스탈린이 오줌을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 말을 듣고 경악한 측근들은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보내 조심스럽게 스탈린의 상태를 살폈다. 스탈린이 깰까 봐 말렌코프는 구두를 벗고 양말 바람으로 스탈린에게 다가가 그가 코를 골고 있는 걸 확인했다.[89] 스탈린의 관저에서 나온 베리야는 스탈린은 그저 잘 뿐인데 법석을 떨었다고 경호원들에게 각오하라고 질책을 했다. 경호원들은 몇 시간 전에는 사태가 더 위중했다고 해명을 시도했지만 측근들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스탈린과 별장에 남은 경호원들은 스탈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호소했다. 이에 측근들은 마침내 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사무국을 소집해서 의사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진료했을 때 곧 스탈린의 상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오른쪽 팔다리는 마비되었고, 피를 토했으며, 체인-스톡스 호흡(Cheyne–Stokes respiration)이라는 불규칙한 호흡[90]을 했다.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나 뇌경색일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탈린의 부검 결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스탈린이 살아나면 곤란한 베리야를 비롯한 고위 당간부들이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기밀 문서가 해금되면서 이런 음모론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예를 들어 2011년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스탈린의 사인은 확실하게 뇌출혈이라고 판명이 났다. 스탈린의 측근들이 스탈린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음모론도 그들의 당시 행동의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설득력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아무튼 당 지도부는 스탈린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만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사악한 배신자로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던 전문의들을 찾아갔다. 의사들은 자신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공손하게 돌변한 데에 굉장히 놀랐다. 당지도부는 그들에게 체인-스톡스 호흡을 한다는 환자가 어떻게 되는지 질문했고, 의사들은 사망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당 지도부원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포스트 스탈린 시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몰로토프는 한때 스탈린의 후계자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스탈린의 공격을 받은 상태로 실권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최고 권력을 얻겠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2인자 따위는 키우지 않았기 때문. 따라서 이제 새로운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스탈린의 정치국원들은 3월 4일에서 3월 5일로 넘어가는 심야, 당중앙위원회 간부회 사무국 회의를 소집하여 사무국을 폐지하고 19차 당대회 이전의 정치국처럼 작은 규모로 간부회를 축소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5일, 당중앙위원회, 소련 장관회의,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연합회의가 개최되어 스탈린을 건강상의 이유로 수상에서 해임하고 말렌코프를 수상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몰로토프, 베리야, 불가닌, 카가노비치를 제1부수상에 임명하고 내무부와 국가보안부를 통합하여 베리야를 장관에 임명하였다. 스탈린은 혼수상태에서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났는데, 그가 죽기 70분 전의 일이었다.

결국 적기를 놓친 상태에서 무의미한 치료가 계속되다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음악으로 들은 뒤[91]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발표된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 말년의 스탈린은 이중 삼중으로 경비를 세웠고, 항상 자신이 자는 방을 수시로 바꿀 정도로 암살이나 테러를 두려워했다. 특히 의심병에 빠져 위급 시에 자신을 돌봐줄 의사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수많은 인민들과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공포 정치를 휘두르던 강철의 사나이 스탈린도 공포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11. 장례식[편집]


파일:external/media2.wnyc.org/stalin_funeral.jpg

파일:external/pds22.egloos.com/a0048039_4d968822ad59e.jpg

파일:external/pds19.egloos.com/a0048039_4d968de25e10d.jpg

파일:external/seanmunger.files.wordpress.com/zombie-stalin.jpg

"그를 보니 5개년 계획공포정치, 대조국전쟁 등 그들의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스탈린은 그들이 집단적으로 걸어온 길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소비에트 국가를 강화하고, 군사력과 산업 생산력을 높이고, 영토를 확장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며 함께 노력한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스탈린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의 지성과 경험을 존경하기도 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때조차 그들을 매혹했다. 그가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동안, 어떤 초인의 능력으로도 그가 다시 일어나 소련의 공적 생활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스탈린의 지도하에 수백만을 굴라그에 처넣었던 사람들이 의식을 반쯤 잃고 마비된 늙은이를 보면서 벌벌 떨었다. 그가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설사 한순간일지라도, 그가 벌떡 일어나 모두를 파멸시키라고 명령할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들은 죽어가는 스탈린에게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도자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몇몇 사람이 서로의 품에 쓰러졌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슬픔에 정신을 잃고 흐루쇼프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시종들도 들어와 주검을 보게 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스탈린 사후의 정치를 논의했던 간부회 지도자들도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그들의 인생뿐만 아니라, 이 나라 역사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 스탈린 강철 권력


1953년 3월 6일 아침, 소련 인민들은 다음 소식을 접하게 된다.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요. 그의 계승자였으며, 공산당과 소련 인민의 현명한 지도자이자 교사로서 우리 곁에 있던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의 심장이 박동을 멈추었다!"


그의 죽음이 발표되자 소련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오랜 숭배 의식으로 이미 신격화가 철저히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 수많은 인민들이 대성통곡을 했고 공황 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몇 년 간 그가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소련 각지에서 그를 숭배하던 국민들이 몰려들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들은 모두 만원이었고, 경찰의 통제가 필요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스탈린은 그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레닌과 비슷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를 계획이었다. 이집트파라오처럼 방부 처리가 된 시신은 유리관 속에 넣어져 레닌 영묘에 함께 안장될 예정이었다. 독재자가 현직에서 죽으면 대체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파일:external/globetrotterblogdotnet.files.wordpress.com/image69.jpg

사후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영묘에 합장되었다. 레닌과 같이 스탈린도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방문객이 관람할 수 있었고 당시 영묘 입구에도 레닌과 스탈린의 이름이 동시에 쓰여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1961년에 다시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92] 히더 프링글의 저서 <미라>에 따르면 엠바밍을 주도한 이는 세르게이 데보프(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Дебов, 1919~1995)[93]였는데, 그는 곰보 자국까지 없애가며 방부처리를 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관 옆에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고 외치는 휘장이 쳐졌다. 스탈린 동지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특기를 끝까지 발휘했다. 3월 8일 그의 시신을 보려는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서 수백명이 깔려 죽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참사는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소련 체제에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한 소련 지도부가 은폐하기로 결정하면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로버트 서비스는 스탈린이 죽어서까지 죽음을 부르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고 촌평했고 올레크 흘레브뉴크는 이 참사가 외국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라는 음모론이 나타난 것을 지적하며 스탈린이 인민들을 잘 교육시켜놨다고 촌평했다.

스탈린의 죽음에 대해서 많은 인민들이 그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했지만 노골적인 증오와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국가보안부는 스탈린에 대해 불경한 발언을 한 인민들을 체포하여 처벌했다.

여담으로 스탈린과 바로 같은 날에 소련의 대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스탈린의 죽음에 그대로 묻혀 버렸는데, 스탈린의 죽음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조화를 사가는 바람에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쓸 수 있는 조화가 단 한개도 없었다는 것.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조화 없이 장례식을 치뤘다.

1953년 3월 9일, 스탈린의 장례식이 끝났다. 이제 레닌-스탈린 영묘로 이름을 바꾼 레닌 영묘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원히 잠들었다.

자유 진영의 거두 미국, 영국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고위급의 인사로 구성된 조문단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세계의 언론들은 스탈린의 죽음을 알리며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사악한 독재자로도 평가했지만, 그가 농업국가 러시아를 원자력 소련으로 현대화했으며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의 지도자이자, 무엇보다도 아돌프 히틀러에 맞서 싸운 최고사령관 중 하나였다는 것에 경의를 표했다.

많은 인민들이 흐느껴 울면서 스탈린이 없는 소비에트 연방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소설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Шолохов)는 이렇게 애도하였다.

잘 가시오! 아버지!

뜻밖에 고아가 되어 버린 슬픔을 지울 수 없나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스탈린의 이름은 차츰 신문에서 사라져갔다. 그의 후계자들도 스탈린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4월 4일, 프라우다지는 의사들의 음모가 전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고 발표하였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는 공산당 제 20차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의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는 장시간의 연설을 하였다. 1961년 10월의 제 22차 전당대회에서는 더욱 더 통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흐루쇼프에 이어 연단에 오른 도라 라주르키나는 꿈에서 레닌의 영혼이 나타나 혼자 쉴 수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제 레닌 묘에 함께 안치되어 있던 스탈린의 시체는 크렘린의 지하실로 쫓겨났다. 스탈린의 초상화와 기념품들도 차츰 사라졌다. 이렇게 독재자는 차츰 잊혀져갔다.

스탈린의 통치 기간 소비에트 연방은 나무 쟁기밖에 없는 후진적인 농업 국가에서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의 초강대국이자 강력한 산업 국가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벌인 세기의 대결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스탈린은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 혁명, 대숙청, 대조국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소련 인민의 1/10이 희생되었다. 스탈린이 이뤄낸 위대한 업적이, 그 과정에서 강요된 희생을 모두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그의 무덤을 두겹,

세겹으로 둘러싸라!

그리하여

그의 체취마저 새어 나오지 않도록,

그의 과거가 영원히 잠들도록!

[1] 러시아의 시인 오시프 만델시탐의 1933년 풍자시 "크렘린의 높으신 분"(Кремлёвский горец)에 보면 "Что ни казнь у него - то малина / И широкая грудь осетина"(그가 내리는 처벌은 달콤하기 그지없고 / 그의 오세트인 가슴은 참으로 넓도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항목 참조.[2] 1938년 소련에서 출판된 스탈린 전기는 그의 생일을 1879년 12월 21일로 표기해놓고 있다.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조지아에 가서 문서를 확인해본 결과 그가 태어난 해는 1878년 12월 18일이 맞다고 한다.[3] 베사리온 이바네스 제 주가슈빌리(ბესარიონ ივანე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Besarion Ivanes dze Jughashvili). 1850. (월일 불명) ~ 1909. 8. 25. 베사리온은 생년밖에 기록이 없다. 그나마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아버지, 즉 스탈린의 친할아버지가 이바네(ივანე, Ivane)라는 것이다(또는 에드바르트 라진스키의 자료를 따라서 바노·Вано). 조지아어에서는 자녀의 이름 뒤 아버지의 이름에 관형격 조사와 '제(ძე, dze)'가 붙기 때문. 스탈린의 초명이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인 것은 '주가슈빌리 가문 베사리온의 아들 이오세브'임을 뜻하는 것처럼, 베사리온의 이름은 '주가슈빌리 가문 이바네(바노)의 아들 베사리온'임을 뜻한다. 그래서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의 조지아어식 이름 또한 이아코브 이오세비스 제 주가슈빌리가 된다.[4] 에카테리네 (케케) 기오르기스 아술리 겔라제(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კეკე) გიორგის ასული გელაძე, Ekaterine (Keke) Giorgis asuli Geladze. 1858. 2. 5. ~ 1937. 6. 4.[5] Another View of Stalin, Ludo Martens, 1996 p.15[6] 하도 학대당했던 나머지 스탈린은 언젠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벼른 적이 있었고 실제로 자신을 때린 아버지에게 단검을 던졌다. 결국 스탈린은 가출해야 했고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이웃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스탈린 강철권력'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그 당시 스탈린이 겪은 무차별 폭력이 스탈린의 성격과 인간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7] 스탈린의 친부는 다른 사람이다 카더라~ 류의 소문. 실제로 스탈린도 사석에서 사실 자신의 친아버지는 어린 자신과 어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마을 성직자가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붕어빵 같은 부자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시피 농담일 가능성이 높다.[8] 이 때문에 사망했을 때의 사인이 간경화였다. 일설에서는 술에 가득 취하여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화난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9] 조지아가 속한 캅카스 지역에서 벨트를 판다는 것은 인생 막장을 의미한다.[10] 베사리온은 집을 나가 떠돌다가 구두 공장에 취직했는데 아들인 스탈린도 같이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11] 그래서 스탈린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특히 나중에 서기장이 된 스탈린은 어머니를 트빌리시의 옛 캅카스 총독 관저에 살게 하고 경호원들까지 붙여줄 정도로 특별 대우를 해주었으며, (말년에는 뜸해지긴 했지만) 주기적으로 어머니랑 편지도 주고받고 때때로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트빌리시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기장으로서 열심히 종교를 탄압하던 스탈린이었지만 어머니한테는 차마 신앙을 버렸다고 고백을 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독실한 신자 행세를 했다고 한다.[12] 1935년 10월에 스탈린은 오랜만에 어머니와 재회했는데, 이때 스탈린은 "왜 저를 그렇게 세게 때리셨습니까?"라고 물었고 그때 케케는 "그렇기에 너가 잘 자랐단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뒤 케케는 "이오세브, 요즘 뭐하고 지내니?"라고 안부를 물었고, 스탈린은 "차르를 기억하십니까? 제가 일종의 차르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케케는 아들이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성적표]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서 발췌함.[13] 뤼도 마르턴스에 따르면 스탈린이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비밀 단체를 알게 된 때는 15살 당시 신학교 2학년 과정에 있었던 때라고 한다.[14] Ian Grey, 《Stalin: Man of History》, New York: Doubleday & Co, 1979, p.20~21.[15] 참고로 이 학교는 억압적인 학교로 유명했다.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1884년엔 학생 한 명이 교장을 폭행해 퇴학당했고, 1886년엔 학생이 교장을 찔러 죽이는 사건까지 벌어졌다.[16] 조지아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이끈 민족주의 성향의 운동가로 아동문학가로도 유명하다. 소련 시절에도 일부 저작물이 재간행 되기도 하였으며 1940년 조지아 최고 예술인과 유명인들이 묻히는 므타츠민다 판테온의 묘지로 이장되었다.[17] 소련의 절대 권력자가 된 이후에야 시가 아니라 발언 한 마디 한 마디가 교과서에 들어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지만, 무명의 일개 학생이던 시절에 쓴 시가 교과서나 선집에 실릴 정도였다는 것은 정치가 아닌 순수하게 문학에 매진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조지아 내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길 만한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에도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고등학생 수준 정도로 그리 높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조지아어 구사 능력은 탁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상습 결석에 책까지 털어간 불량 학생에게 장학금 안 돌려줘도 되니 학교로 돌아와만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요청했다는 학교 측의 태도 역시 스탈린의 이런 재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스탈린이 혁명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로는 주로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을 했고, 서기장에 등극한 이후에는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러시아어를 쓰며 보내다 보니 모국어인 조지아어는 다소 서툴러졌다고 한다.[18] 멘셰비키는 이를 이유로 볼셰비키를 범죄 집단이라 비난했고, 훗날 레닌은 자금줄이 안정화되는 대로 이 일을 중단시켰다.[19] 당시 조지아에서는 부르주아를 털어먹는 건 도둑질이 아닌 의적이라 칭송했기에 스탈린도 자신의 행위는 도둑이 아니라 의적이라 생각하고 임했다는 설이 있다.[20] 러시아 혁명 당시 트로츠키는 엄밀히 말하면 레닌파에 속한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작지만 독립적인 정파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따라서 후세인들이 10월 혁명을 당연히 레닌이(레닌파가) 주도했다고 여기는 것과는 달리 당대인들은 오히려 레닌파와 트로츠키파가 연합하여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볼셰비키 정부를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부"라고 부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당시 트로츠키는 레닌과 대충 동급이라 쳐줄 수 있는 정치인으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스탈린은 레닌의 하급자 내지는 부하라 해야 할 확고한 레닌파 정치인으로써 주로 '눈에 띄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실무담당자' 역할, 특히 그중에서도 위험하고 지저분해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입장이었기에 레닌의 신임을 얻었다. 결국 트로츠키의 이름값이 스탈린과 비할 수 없이 높았던 것도 맞지만 스탈린 역시 레닌의 유언장에 거론된 후계자 다섯 명 중 하나, 즉 유일한 2인자인 트로츠키만 빼면 3인자이자 네 명 중 하나라는 입지를 얻은 것은 그에 상응하는 실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21] 흔히 스탈린의 맞수들이 스탈린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쟁쟁한 인물들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조지아 촌놈' 스탈린에 대비하여 '레닌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이자 코민테른 의장'이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대회 의장이자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이던 레프 카메네프, '당 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자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 전문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거꾸로 보면 그 '조지아 촌놈'이 서기장(총비서)이라는 시시해보이는 직책에서 담당하던 역할이 딱 봐도 삐까번쩍한 저런 직함들에 전혀 뒤지지 않았기에 라이벌 구도가 성립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스탈린은 혁명 과정에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던 잉여 백수라는 트로츠키의 디스 역시 (트로츠키 개인의 오만한 성격 이전에)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한 분석이나 증언이 아니라 정적에 대한 공격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에는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을 이기기 위해, 이후에는 자신을 실각시키고 추방한 스탈린에게 보복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정치적 공격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 트로츠키의 처지였고, 당 내 장악력과 실무 능력에서 우위였던 스탈린에 비해 트로츠키의 우위는 대중적 지명도나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활약상에 있었으니 자신이 우위인 부분을 내세워 스탈린이 자신만 못하다고 공격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를 '스탈린의 행적이 가진 객관적 약점'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적절하겠느냐는 것. 결국 이러한 문제는 이후 소련의 절대 권력자로 떠오른 스탈린 역시 한때 여러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의 분석이 제기되었으나, 오히려 이런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해석 역시 등장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22] 죄수들을 선동해 싸움을 붙인다거나 주변 여인과 눈이 맞아 연애를 했다는 등 링크[23] 스탈린은 집권 후 이때 편의를 봐준 간수와 마차에 태워준 마부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24] 사실 이 역시 상당 부분은 까기 위해 이유를 찾아낸 정치적 공세라고 봐야 할 것이, 러시아 제국 당시 시베리아 유형지에서의 탈출은 현대의 교도소와는 비교하기 무의미할 정도로 어렵지 않았다. 유형의 목적 자체가 귀찮은 정치범을 정치의 중심인 수도에서 떼어놓는다+시베리아 오지의 개발 인력 충당 정도라 별다른 감시가 없었기 때문. 7회면 좀 많은 편이긴 하나 유명 러시아 혁명가치고 시베리아 유형 갔다가 탈출 한두 번 못해본 인물은 드물고, 서너 번쯤 탈출 성공도 찾기 어렵지 않다.[25] conference. 대회(congress)와는 다르다.[26] 대표자회 장소가 페트로그라드에서 탐페레로 변경된 것을 전달받지 못해서 페트로그라드로 갔다가 탐페레까지 갈 기차표 값이 없어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여비와 식대를 빈대붙었다고 한다.[27] 후일 리트비노프는 스탈린이 자기를 숙청하지 않은 건 그때 자기가 구해줘서 그런 거라는 내용의 농담을 종종 했다.[28] 그의 동생인 아르툠 미코얀은 미하일 구레비치와 함께 미그 사를 창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인도 1930년대에 무역장관으로 활약했으며 이때 도넛이나 팝콘 등의 서방 음식을 소련에 소개, 도입하기도 했다.[29] 생몰년도 : 1886년 10월 24일 ~ 1937년 2월 18일, 조지아 출신의 혁명가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 몸담았으며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대숙청 당시 숙청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으며, 덕분에 본인은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고 두 형과 큰 형의 형수가 사형당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가족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다만 자살한 게 맞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고 한다.[30] 이에 반해 레닌은 물론 트로츠키나 지노비예프는 거의 매 장마다 언급되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책에 자신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고 레온 트로츠키의 이름이 더 많이 나왔다는 이유로 레닌이 만국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읽으라고 서문을 써 준 이 책을 금서로 만들어서 소련 인민의 접근을 차단했다.[31] 사실 레닌조차 스탈린의 이름을 잊어먹고 그의 별명인 '코바'만 기억하고 있어서 "코바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나는 사람?" 하고 주변에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32] 미하일 칼리닌 이전 진짜로 국가수반 역할을 하던 소비에트 러시아의 주석이다.[33] 트로츠키의 회고록에서는 이 패배를 권한을 넘어선 스탈린의 지휘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나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트로츠키도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설이며, 이 패배는 스탈린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이다. 폴란드 주변의 혁명 운동을 퍼뜨리고 폴란드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혁명 고취를 위해 잘 나가던 진격을 무리하게 옆으로 돌리게 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이 명령은 레닌이 거의 억지로 밀어붙여서 만든 당 차원의 권고였고 민족 문제에 정통한 스탈린은 여기에 반대했다가 레닌이 폴란드 침공을 강하게 주장하자 찬성으로 돌아섰다. 트로츠키는 강하게 반대한 축이었다.[34] 폴란드와의 전쟁을 스탈린의 책임으로 100% 물어버리고 당 차원의 추방을 논한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이전에도 스탈린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35] 당시 인민위원은 오늘날로 따지면 장관을 의미한다.[36] 헝가리, 폴란드, 중국, 베트남, 북한은 당중앙위원회 위원장(혹은 주석)을 당수로 내세운 적이 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나중에 서기장 제도를 폐지하고 당중앙위원회 총재로 대체하였다.[37] 실제로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을 본보기로 행동했는데, 군인 출신인 나폴레옹이 제정을 세워서 혁명 정신에 역행한 것을 보면서 '아 우리도 군인들을 가만 내비두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여 태생부터 군인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소련에서 까인 군사 관련 인물이 한둘이 아닌데, 투하쳅스키도 그 중 한 명이었다.[38] 이 표현은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관용구라서 관료적인 작업이라고 오독하기 쉬운데, 사실은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관료주의와는 반대 개념에 가깝고(관료주의는 오히려 서기장 스탈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문제나 갈등을 그 배경과 상황에 맞춰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만 관리해서 해결하려 드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의 특징에 비춰서 설명한다면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건 레닌도 알고 트로츠키도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당연히 트로츠키의 주장이 대체적으로 옳고 다른 주장은 틀린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굳이 토론이니 공감이니 합의니 하는 데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냥 아가리 파이트로 상대를 밟아버리고 자기 주장대로 하게끔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39] 소수민족의 입장을 소련의 이익보다 앞에 놓는 것. 쉽게 말해 소비에트 밑으로 안 들어오는 놈들은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깡패스럽고 폭압적인 논리로, 당시 소수민족위원회 의장이었던 스탈린이 남을 비난할 때 남용하던 단어다. 심지어 조지아는 스탈린의 모국이었다.[40] 레닌은 좀 더 그들을 달래가며 타협을 해가야 한다고 느낀 것이고, 그런 문제에서도 폭압적이며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스탈린은 지도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41] 조금 더 나중 시점에 쓴 서한에서는 스탈린은 소련의 소수민족 문제에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함께 계속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 평가를 보면 대강 레닌이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이 나온다.[42] 이에 대한 트로츠키의 대답은 "나는 동지가 두렵지 않다."였다.[43] 후일의 이미지에선 전혀 틀린 말이지만, 이 당시의 스탈린은 그냥 평판은 좋은데 말이 없고 존재감도 그다지 없는 사람이었다.[44] 다만 트로츠키의 주장이 완전히 구라라고 보기는 어렵고, 이미 레닌 시대부터 공산당에서는 민주집중제에서 민주는 사라지고 수령과 그 측근들간의 밀실 합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레닌조차도 1922년 11차 당대회 직전 자신이 충복이라 믿은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자신이 금지했던 종파 결성을 시도해서 몰로토프나 스탈린이 모두 "아 이건 좀..." 이라고 난색을 표하기까지 했다. 스탈린 시기에 가면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당 내 이단아로 왕따당하던 트로츠키 입장에선 정치국에서 뭔 회의를 하려고 오면 다른 정치국원들이 회의 이전에 쑥덕거려서 다 합의해 놓고 그걸 강요하는 꼴이 열불 터지긴 했을 것이다.[45]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어떤 사상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나쁜 놈으로 낙인찍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는 소련이나 동구권 내에서는 그냥 '무지무지 나빠서 타도해야 하는데 파시스트나 자본주의자라고는 부르지 못하는 놈'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트로츠키주의가 극좌 모험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서구권의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극좌 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일 뿐이다. 이 점은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서로를 '극우 수정주의자'와 '극좌 모험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트로츠키스트'라고 매도한 점이나, 노동조합이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좌익 반대파를 탄압한 트로츠키의 노선을 스탈린이 '우익적이고 독재적이다'라고 비판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46] 블라디미르 레닌의 아내. 1936년 8월의 모스크바 재판을 방청한 후 남긴 말이다. 참고로 크룹스카야는 스탈린과는 죽을 때까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크룹스카야가 1939년 사망했을 당시 스탈린이 그녀를 독살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도 나돌았다.[47] 자신을 비난하는 스탈린에게 내뱉은 말. 식사 도중 스탈린이 보로실로프에게 겨울전쟁의 졸전에 대해 비판하자 이렇게 항의하며 그릇들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 강철의 스탈린도 여기에 여간 찔렸던 게 아니었는지 이런 불경한 발언을 한 보로실로프를 그냥 해임하는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천생 정치인인 스탈린은 군인 출신 보로실로프의 도움이 없으면 붉은 군대를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스탈린이 러시아 내전 당시 정치적 위기에 있을 때 보로실로프는 열심히 스탈린을 보살펴주기도 해서 둘은 그야말로 베스트 프렌드였다. 이런 보로실로프인 만큼 저렇게 대놓고 스탈린의 면전에서 스탈린을 비난할 수도 있었다.[48] 이에 대해 스탈린의 딸은 "아버지는 어디에서든 적을 찾아내려 했으며 고독감과 절망감으로 가득한 탄압 매니아였다."라고 술회했다.[49] 뮌헨 협정 이후 독일에 대한 불신과 1938~1939년 들어 폴란드 위기가 번질 때 영불 대사가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대면해서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스탈린은 "만일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 독일을 공격한다면 소련은 200개 사단을 동원할 용의가 있다. 영불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이에 영국 대사는 영국 본토에 육군사단 3~5개를 원정군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드립을 쳤고 프랑스 대사는 전쟁 의지에 대해 머뭇거렸다. 이에 스탈린은 "이런 도둑놈들! 우리는 200개 사단이나 동원하는데 저놈들은 손도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네?"라는 반응을 보이며 서방이 이이제이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한층 더 강화했다. 다만 프랑스는 몰라도 영국에 대해 실드를 칠 여지는 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에서 전쟁이 터질 거라 예상되면 육군 사단보다는 해공군 투자 혹은 전쟁에 쓸 재원 마련에 집중했기 때문.[50] 사실 핀란드도 통째로 꿀꺽하려고 했지만 겨울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카렐리야 지방만 점령하는 선에서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손바닥만한 나라에게 얻어터진 스탈린은 1939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51] 이러한 태도는 히틀러를 화나게 만들기도 해서 히틀러는 스탈린을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라고 비유했다.[52] 당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영국조차도 한 번에 독일에게 점령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을 수립해 영국 본토를 점령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이 발발했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영국 점령에 실패했다.[53] 2015년 KBS에서 광복 70주년에 맞춰 방영했던 '세계 대전'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교수에 따르면 당시 스탈린은 "영국도 굴복시키지 못하는 히틀러가 설마 우리 소련을 치겠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54] 베르너 폰 슐렌부르크 백작(1875년 11월 20일~1944년 11월 10일) 나치 독일의 마지막 소련 대사. 독일 제국 시절부터 활약한 외교관으로, 독소전쟁 발발 이후 몇 주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송환을 위해 튀르키예로 보내졌다.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참고로 암살자 그룹의 내각 계획에 외무장관으로 포함되어 있었다.[55] 스탈린의 이 멘탈붕괴는 인간 스탈린의 나약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현 정세에 임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하게 비춰질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임을 일단 언급하지만, 일단 스탈린은 그 전부터 히틀러에 대해서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효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자신처럼 정세에 대한 계산이 가능하며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정치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은 1선 장군들이 뻔히 보이는 전쟁의 전조를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계산이 서는 날카로운 정치가인 히틀러에 대한 판단을 중시했기에 무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이 엄청난 위력으로 서유럽의 전통적 육군 강국이던 프랑스를 단 6주 만에 점령하고 영국을 수세에 몰리게 하며 히틀러는 완벽한 계산 하에 전쟁을 일으킨 대단한 효웅이고, 독일의 전력은 대단하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이러한 까닭에 스탈린은 양면전쟁의 한계와 러시아 기후의 무서움을 히틀러가 계산하고 있을 것이라 여겨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 버리자 히틀러에 대한 고평가는 역으로 '러시아를 이길 만해서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닐까? 우리의 정보가 잘못됐었나? 독일이 신기술을 개발했나? 하여간 우린 끝이야!' 와 같은 사고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경우 충격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는 지도자도 역사 속에 종종 있으나, 스탈린은 어쨌건 일단은 싸울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금세 충격에서 일어선 편이다.[56] 이때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는 만약에 그래도 스탈린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스탈린이 아니라 몰로토프에게 전쟁 지휘권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7] 그러나 미코얀과 몰로토프 모두 정치적 굴곡은 있었을지언정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각각 1978년과 1986년에 사망) 오히려 스탈린 시절의 악행으로 모두에게 원한을 산 베리야는 1953년 총살형을 당하면서 제 명에 못 죽은 셈이 되었다.[58] 스탈린과 히틀러의 군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비교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성채 작전 당시 히틀러는 군사작전과 행정에 온갖 간섭을 하여 혼란과 비효율성을 이끌어냈고, 막판에는 서부 연합의 이탈리아 침공이 이뤄지자 이탈리아의 중요성을 장성들에게 역설하며 그나마 조금씩 성과를 내던 작전을 취소시켜 버렸다.[59] 반면 소련은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군사 회의에서 한 개의 돌파구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스탈린과,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돌파구를 열어 독일군에게 혼란과 피해를 강요해야 한다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로코솝스키에게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며 그를 두 번이나 돌려세웠으나, 로코솝스키가 계속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스탈린은 로코솝스키에게 다가가 어깨 위에 손을 얹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스탈린이 로코솝스키의 계급장을 떼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네의 타당한 판단이 자네의 자신감을 받쳐주는 것이겠지."라며 로코솝스키의 제안을 따랐다. 그리고 작전은 대성공.[60] K. K. Rokossovsky, A Soldier's Duty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5), p. 87[61] 스탈린 강철권력 p.714~15를 참조[62] 227호 명령,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교전 금지 등[63]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역, <스탈린의 전쟁>, 열린책들, 2022, p.7.[64]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역, <스탈린의 전쟁>, 열린책들, 2022, p.45~46.[65] 물론 주코프는 러시아 내전 당시 기병 장교였으니 이런 질문은 물을 가치조차 없었다.[66] 옆에 있는 동료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로코솝스키는 저때 흑마를 타고 반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 두 사람이 나란히 달리기도 했지만 로코솝스키는 흑마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위 사진에서 뒤를 따르는 인물은 로코솝스키일 수 없다.[67] 개성은 엄밀히 말하면 38도선 이남이었지만 미군이 진주하는 9월 초까지, 그 이후로도 소련군이 월경했던 곳이다.[68] 이들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모두 복권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일부는 공적이 인정되어 영웅 칭호를 받는다.[69] 스탈린 선집에 있는 '소련의 사회주의와 경제적 제문제'를 보면, 스탈린은 이러한 관점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들이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단결성을 무시한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즉, 미국이나 서방이 마셜 플랜과 같은 일을 해도, 사회주의 우방의 단결과 연대를 통해, 자본주의 맞서 사회주의를 확산하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70] 불가리아를 통해 소량의 무기와 장비만 보냈다.[71] 6.25 전쟁 당시 스탈린은 영국인 첩자를 통해 미국의 핵 능력을 잘 파악했고 늘 두려워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경멸했으며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도와주지 않았다.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도록 내버려두라"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할 생각이었는데, 왜냐하면 미국이 중국에게 패배하면 압도적인 핵 전력을 보유한 미국(1950년에 원폭 300개 소유)이 중국과 소련(당시 원폭 5개 소유)에 핵 공격을 퍼부어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72] 발언 당시에는 야당 대표로 말한 것이지만 발언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처칠인 만큼 흘려듣기는 어렵다. 물론 영국 정부는 전 동맹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윈스턴 처칠)는 일개 민간인이며 그의 발언은 영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는 개드립을 쳤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73] 즉 미국은 일본이 미국을 지지하도록 강제할 수 있지만,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강제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74] 이는 이후 냉전에서도 드러난다. 소련 해군이 미 해군의 수준을 넘은 적은 소련의 성립부터 해체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75] 이는 당 대회에서도 드러나는데 1930년에 열린 제16차 당 대회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열렬한 환호'를 받더니, 대숙청 이후에 열린 제 18차 당 대회에서는 아예 당 대회 조직위가 '우리의 지도자이며 교사이고 친구이신 스탈린 동지 만세'라는 노래를 준비했다. 전쟁 발발 2년 전인 1939년이 이 정도인데 승전 후인 1950년대는 오죽하겠는가(...) [76] 이런 식의 이른바 충성 경쟁은 스탈린 정권에서 흔한 일이었다. 스탈린 스스로가 사치나 허영과는 거리가 먼 것도 한 몫했겠지만, 이렇게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어서, 상대방에게 충성심을 드러내 보일 것을 강요하는 것은 정권 당시에는 일종의 의례였다. 의도 자체는 러시아나, 2015년 시진핑 주도의 열병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스탈린은 이를 일상화했다. 스탈린이 가진 인간에 대한 편집증적 불신이 드러나는 부분이다.[77] 사람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인지, 대한민국에서도 이승만의 호인 '우남'을 따서 서울특별시를 우남특별시로 개명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낯은지럽다고 생각했는지 이 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북한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김일성 사후 김일성의 생일연도(1912년)를 따라 주체연도로 쓴다. 왕조국가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우상화는 여기가 한 수 위.[78] 스탈리노다르로 개명하자고 한 것은 다름아닌 니콜라이 예조프로 자신의 숙청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것을 감지하고 살아보려고 발악한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개명에 대해 좋아하긴커녕 오히려 너무 노골적이라고 느꼈는지 불쾌하단 반응을 보였고 예조프는 1940년에 처형된다.[79] 비슷하게 히틀러도 만슈타인에게 불쾌감을 보인 적 있다. 만슈타인이 히틀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데 히틀러 만세를 외치자 너무 속보이는 아부라고 느꼈는지 오히려 핀잔을 준 적 있다. 히틀러는 자기 앞에서 자신감 있게 자기의견을 내는 부류의 인물들을 좋아했다.[80] 대부분은 국비로 결혼하는 부부에 증정한 것이다.[81] 스탈린과 마오의 저서들이 독재자가 쓴 불쏘시개쯤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들의 저서들은 히틀러의 대표작과 달리 '스탈린과 마오쩌둥이라는 중요 역사인물들의 1차 사료라는 점을 배제하고' 저작 자체로만 평가해도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저서들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자국민들에게 오직 자신들의 사상만이 옳은 것이고 나머지는 다 틀린 것이라고 자신의 이념을 절대화하면서 강요했고 그걸 거부하면 코렁탕을 먹인 것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히틀러가 모두 마찬가지였으나 사상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꽤나 있었던 것이다.[82] 권력의 세습여부가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 사후 생전에 그를 숭배하듯 모셨던 부하들에 의해 격하되는 것을 제대로 지켜보았고 이 때문에 세습 카드를 꺼내들었다.[83] 여담으로 소련 내에서 이 김일성 숭배 선전물들은 요즘 말로 하면 무려 유료 구독제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는데,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의 중산층들이 밥상머리에서 가족끼리 읽으며 같이 웃을 만한 유머 잡지쯤으로 쓰려는 수요가 꽤 많아서 북한에서 직접 정기적으로 돈 받고 팔았다고(...).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는 이게 소련에도 먹힐 줄 알았는지 선전물들을 당대 최고의 인쇄 기술을 동원해 만들어 종이의 품질이나 잉크 등이 대단히 우수했으며 이를 상당히 저렴한 구독료로 팔았다고 한다.[84] 오른쪽부터 몽골 인민 공화국의 당 서기장 욤자깅 체뎅발, 독일민주공화국의 부수상 발터 울브리히트, 그리고 본인, 소련의 국방장관이자 총리인 니콜라이 불가닌,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인 마오쩌둥,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 스저(师哲).[85] 연단에 앉아있는 사람은 맨 앞부터 정치국 위원인 니키타 흐루쇼프, 스탈린 본인, 중국의 마오쩌둥,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의 1서기인 라자르 카가노비치 [86] 실제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죽고 후임 서기장이 된 후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하면서 제대로 배신을 했다.[87]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이 발언을 20차 당대회에서 공개하자 대회장 전체가 분노로 술렁였다. 다만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말년에 누구도 믿지 않고 맛이 갔다는 분석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스탈린이 이런 막말을 했다는 흐루쇼프의 주장에 대해서는 자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사실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표했다. 물론 몰로토프가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였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88] 흑해 연안에 스탈린의 별장이 다수 있으나 사망한 곳인 죽음의 미로가 있는 별장은 모스크바 서쪽 외곽에 떨어져 있는 별장이다.[89] 정말 코를 골고 있었다기보다는 스탈린이 깰까 봐 두려워 불도 켜지 못한 상황에서 들어가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상황이었기에 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한 측근들이 체인-스톡스 호흡(호흡 이상)을 코 고는 소리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90] 호흡이 점차 깊어지다가(동시에 더 빨라지는 경우도 있다) 다시 천천히 호흡이 얕아지고(호흡이 점차 빨라지던 경우엔 이때 속도 역시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호흡 상태가 잠시간 지속되고, 그 이후 다시 한 사이클이 반복된다. 간격은 약 30초에서 2분.[91] 스탈린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고 특히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매우 좋아했으며, 특히 마리아 유디나가 연주한 버전을 선호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유디나 본인은 스탈린을 매우 경멸했다고.#[92] 파일:5d5e43b785600a246244d236.jpg 이마저도 초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초라한 모습이었으나, 1970년대 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가 어느 정도 이루어 지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93] 그는 1969년에 사망한 호찌민의 시신도 방부처리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이오시프 스탈린 문서의 r1338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이오시프 스탈린 문서의 r1338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10:47:54에 나무위키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