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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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우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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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gles_Champion_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9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한화 이글스 등번호 34번
정경훈
(1995)

이영우
(1996~2004)


스미스
(2005)
스미스
(2005)

이영우
(2007~2010)


백승룡
(2011)
한화 이글스 등번호 89번
김호근
(2006~2009)

이영우
(2012~2015)


고바야시
(2016)
{{{#ffffff [[kt wiz|kt wiz]] 등번호 77번}}}
오키
(2014~2015)

이영우
(2016)


강성우
(2017~2020)


A대표팀 참가 경력
[ 펼치기 · 접기 ]






파일:이영우한화.jpg

이영우
李榮雨 | Lee Youngwoo

출생
1973년 11월 27일 (50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남장초 - 선린중 - 선린상고 - 건국대[1]
포지션
좌익수[2], 지명타자[3], 1루수[4]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6년 2차 2라운드 (전체 12번, 한화)
소속팀
한화 이글스 (1996~2010)
지도자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2)[5]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2)[6]
한화 이글스 1군 주루코치 (2012)[7]
한화 이글스 육성군 타격코치 (2013~2015)
kt wiz 2군 타격코치 (2016)
대전제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1~2022)
병역
공익근무요원 (2004~2006)
응원가
클리프 리처드 - Early in the morning [8][9]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이후
5. 여담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41820762.2.jpg
현역 시절. 특유의 농약미소가 인상적이다.

파일:/image/076/2012/05/13/2012051301001058000079271_0_20120513152211.jpg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모습. 그와중에 넋나간 고동진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한화 이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1번 타자로 활약하며 1번 타자는 안타를 치고 도루하는 똑딱이라는 당시의 고정관념에 벗어난 선수로, 류지현, 이순철, 이종범, 장성호, 최익성과 더불어 리드오프 홈런을 많이 치는 타자였다.


2. 선수 경력[편집]


이영우의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편집]


국내 야구계는 예나 지금이나 컨택이 좋고 발이 빠른 쌕쌕이 유형의 1번 타자를 선호하지만, 이영우는 그와는 상당히 판이한 스타일을 가진 선수였다. 사실 절대적인 주력이 느린 선수는 절대 아니지만, 센스가 좋지 않아 도루 실패가 매우 많았고 실제로 112도루 81실패를 기록하고 있다. 흔히 1번 타자하면 떠올리는 "단타 후 도루로 득점권 상황 만들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덮고도 남는, 엄청난 타격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드오프 치고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클린업 트리오에 자리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강타자였으며, 전성기에는 wrc+ 130 이상을 꾸준히 기록하면서 8할 후반~9할 초반의 OPS를 넘나들었다. 3할 이상이 가능한 컨택과 20홈런 이상이 가능한 파워 뿐만아니라 타출갭이 1할에 달할 정도로 선구안도 준수했고, 강타자의 상징으로 꼽히는 3-4-5 슬래시 라인까지 찍어본 적이 있다. [10]

즉 수비는 약하지만 탁월한 컨택과 뛰어난 선구안으로 타석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장성호와 비슷한 유형의 선수였으며, 도루 능력이 특출하지 않지만 3할을 치면서 출루가 쏠쏠한 박한이와도 비슷한 파워형 1번 타자였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11] 양세종, 노상수, 최계훈과 더불어 군 복무 후 급격하게 몰락한 선수다. 특히 30이 넘은 나이에서 군복무를 하는 바람에 군 복무 이후에는 이미 노장 선수 반열에 들어버렸고, 노쇠화와 부상의 여파로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전성기 3시즌의 임팩트는 누구와 비교해도 대단했지만, 계속 꾸준했다면 장성호, 이병규급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선수.


4. 은퇴 이후[편집]


이후 대전광역시에서 자동차 정비센터를 차리고, 선린상고 시절에 함께하였던 감독의 소개를 받아 간간히 대전고에서 인스트럭터로 학생들의 타격을 손 봐 주는 정도에서만 야구에서의 인연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말했지만, 결국 2012년 친정 팀 한화의 2군 타격코치로 복귀했다.

2군 코치라 아직 크게 눈에 띄는 역할이 없는데, 왠지 2군에 갔다온 타자들이 2군에 갔다온 직후 1주일 간 OPS 1.5를 치질 않나, 타율이 8푼까지 떨어졌다가 부활해서 월간 MVP급 성적을 내질 않나, 2년간 속 썩이던 놈이 갑자기 주전급의 성적을 내던가하는 등의 놀라운 변화를 단기간에나마 보여주면서 대체 2군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하고 팬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악동님 이상으로 독하게 선수들을 다룬다는 듯.

그리고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1군과 2군 코치가 변경될 때 1군 코치로 승격되었다.

2014 시즌부터는 육성군 타격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다.

2015 시즌을 끝으로 전종화, 아베 오사무 등의 코치들과 같이 해임 통보를 받았다. 차라리 이상군프런트로 보내 버리던가 정민태를 자르지

이후 kt wiz의 2군 타격코치로 선임되었다.

2016년 시즌 종료 후 재계약하지 않게 되며 kt 유니폼을 벗었다.
2016년 말 부동산 사기에 연루되어 해설 자리에서 하차한 김병준을 대신해, 2017년 시즌부터 김연선 아나운서와 함께 KBS대전방송총국의 라디오 야구 중계 해설을 맡게 되었다. 더불어 KBS청주방송총국에서 이해수 아나운서와 청주구장 한화 이글스의 홈 경기 중계방송 해설도 맡고 있다.

2018년 2월경에 옥천군에 새로 생긴 리틀 야구단에서 총괄 인스트럭터를 맡게 됐다.

2018년 중순에 대전에 한 유소년야구단을 차리게된다. 또한 대전 서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야구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2021년 대전제일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이 되었다.

2023년 2월에 갑자기 감독직에서 물러났는데 대전제일고의 2023 주말리그 전반기 권역 우승이 확정된 뒤에 나온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퇴임 사유가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5. 여담[편집]


  • 일세를 풍미한 공격형 톱타자임에도 주목을 덜 받은 편이다. 그 까닭은 "비인기 지방구단 소속"인 데다가 "하필이면 50홈런이 빵빵 터지던 시대의 중거리형 타자"에 "하필이면 전성기가 프로야구 암흑기"라는 비인기 3종신기를 갖췄기 때문.

  • 소집 해제되어 복귀한 후에는 한국프로야구가 인기를 끌어모으고 있었으나 팀도 막장, 본인도 막장인 탓에 WBC 이후 유입된 팬들에겐 낯선 아저씨가 되었다(...).

  • 통산 안타 갯수는1,275개 순위권이라 하기 민망한 순위이지만 공익 복무로 끌려가기 직전까지 보였던 안타 생산 능력만 놓고 보면 1,700안타도 가능[비슷한]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통산 홈런과 도루를 보면 135홈런, 112도루인데, 공익복무를 끌려가기 직전까지 보였던 홈런과 도루능력을 놓고 보면 150홈런과 150도루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야만없

  • 정수근이 은퇴 후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2007년 시즌 도중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될 뻔했다고 한다. 당시 한화 감독이던 김인식과 롯데 감독 강병철[12] 이영우, 안영명 <-> 정수근을 맞바꾸는 2:1 트레이드에 합의하고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막판에 롯데 쪽에서 없던 일로 하자며 트레이드를 파토내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한다.

  • 타석에서 삼진을 당하건 안타를 치건 잘 웃는 편이다. 타석에서 여유를 찾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이래 왔다고. 타자판 김광현. 이 때문에 농민미소 혹은 농약미소란 별명도 있다.

  • 은퇴 직전에도 언론이 무관심한 편이었다. 하필이면 비슷한 시기에 양준혁, 구대성이 은퇴하는 바람에 은퇴를 발표한 9월 14일 이후 9월 18일 은퇴식까지 인터뷰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 기자들이 구단홍보자료만으로 대충 때웠다. 결국 은퇴일에 일문일답 형식의 인터뷰 하나 달랑 나왔다.#
그리고 이 날 후배들은 11:1로 깨지며 선배가 가는 마지막 길에 거하게 똥칠을 한다.

  • 이영우가 은퇴하면서 한화 이글스에서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현장에서 맛 본 선수는 없게 되었다.[13] 그나마 현역으로 뛰고 있는 이상열도 팀에 없다. '에'에 '이'를 넣는 게 더 맞겠지만

  • 결국 일세를 풍미할 수 있었던 리드오프 장타자가 젊은 날의 과오로 씁쓸하게 끝난 케이스가 됐다. 소리없이 강했던 김한수처럼 될 수 있었지만 서용빈과 같은 엔딩이다.

  • 사람좋은 외모와 달리 꽤 성격이 있는 스타일로, 농구계의 국보급 센터를 배출시킨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중학교 야구부 시절 후배들을 매섭게 갈구곤 했는데 이영우의 1년 후배였던 서장훈이 이를 견디다 못해 전학을 가고 농구를 시작한 것. 이영우의 똥군기가 아니었더라면 서장훈은 농구선수가 아닌 야구선수로 기억됐을지도... 초교땐 야구… 군기 잡는 중학교 선배 싫어 농구로



6.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한화 이글스
114
353
.269
95
21
3
8
39
59
12
51
.414
.360
1997
31
109
.202
22
6
0
3
12
12
2
6
.339
.241
1998
97
297
.273
81
19
1
9
31
34
6
38
.434
.354
1999
128
425
.334
142
33
(5위)
4
13
49
83
16
49
.522
.399
2000
128
478
.318
152
36
(1위)
5
(1위)
25
64
91
7
60
.571
.392
2001
126
381
.286
109
25
3
15
65
72
10
62
.486
.385
2002
133
476
.315
150
26
1
24
52
96
(3위)
13
81
.525
.415
(3위)
2003
133
498
.297
148
28
4
16
71
90
18
86
.466
.399
2004
131
483
.319
154
(5위)
31
(2위)
3
13
61
94
(4위)
20
81
.476
.415
(5위)
2005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2006
2007
97
294
.238
70
14
4
0
28
31
4
37
.313
.320
2008
89
271
.288
78
21
2
2
27
41
2
27
.402
.347
2009
93
260
.277
72
12
3
7
35
32
2
28
.427
.345
2010
12
21
.095
2
0
0
0
0
0
0
0
.095
.095
KBO 리그 통산
(13시즌)

1312
4346
.293
1275
272
33
135
533
735
112
606
.464
.378


7. 관련 문서[편집]


[1] 체육교육과 (1992학번)[2] 선수생활 대부분을 주전 좌익수로 활약했다.[3] 3년차인 98시즌에 1루수도 겸했지만 지명타자로서 가장 많은 경기에 나왔고, 말년엔 점점 지명타자로서 출전 빈도가 많아졌다.[4] 신인시절인 96시즌을 주전 1루수로서 보냈고, 그 이후로도 경기에 가끔 1루수로 나오기도 했다.[5] ~5월 11일[6] 5월 12일~6월 20일[7] 6월 21일~[8] (안!타! 이영우!) 최강한화 이영우~ 최강한화 이영우~ 최강한화 이영우~ (X2)[9] 당시 팬들의 공모로 만들어진 응원가였다.[10] 1999년에는 출루율이 0.399로 아쉽게 실패했다.[11] 장성호는 98~00 해태시절 3년간 1번타자로 53개의 홈런을 쳤다. 박한이는 삼성 특유의 슬러거 타선에 가려진 숨은 중장거리 타자였으나 팀 사정상 1번 타자의 임무를 도맡아야 했다.[비슷한] 타입의 장성호는 2010년까지 1,795안타를 기록하고 2년 후인 2012년 2,000안타 고지를 점령했다.[12] 참고로 이영우가 데뷔하던 당시 한화 감독이 강병철이었고, 리빌딩 차원에서 신인이던 이영우에게 적극 기회를 줬던 바 있다. 반대로 정수근은 OB 신인 시절 김인식 아래에서 주전으로 육성됐다는 점이 있다.[13] 신경현박정진 정도가 당시 선수로 뛰고 있었지만 2군에서 기고 있던 탓에 우승 멤버라고 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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