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타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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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역대 수상자 목록
4. 학교별 수상 기록
5.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
5.1. 프로에서 성공한 사례
5.2. 이영민 타격상의 맹점
5.3. 외국의 경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야구의 원조 레전드 타자라 할 수 있는 이영민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1958년에 제정한 상이다.


2. 상세[편집]


매년 고교야구 주말리그, 대통령배 등 전국고교야구대회, 전국체육대회 등에서 15경기 이상 출전하고 60타석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주말리그 도입 전에는 9개의 전국고교야구대회[1] 중 5개 대회 이상, 15경기 이상, 60타석 이상 출전한 타자 중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이에게 수여되었다.

고교 야구의 특성상 에이스 투수가 4번 타자까지 함께 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고도 정작 프로에는 투수로 진출하는 사례[2]가 있었지만 지명타자제가 도입되면서 그런 현상은 사라졌다.


3. 역대 수상자 목록[편집]


프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는 굵은 색으로 표시. 이름 뒤는 프로에서 활동했던 연도와 팀.

연도
이름
당시 소속 학교
프로 활동
1958년
김동주[3]
경남고

1959년
백인천
경동고
도에이-다이헤이요-롯데 오리온즈-긴테쓰-MBC-삼미 (1962~1984)
1960년
최관수[4]
동산고

1961년
조정일
성동고

1962년
정인성
광주 살레시오고

1963년
이철화[5]
부산고

1964년
김영생
대구상고

1965년
이광환
중앙고

1966년
박용해
대구상고

1967년
오영복
대전고

1968년
김영신[6]
대구상고

1969년
정장헌
선린상고

1970년
신중국
부산고

1971년
정현발
경북고
삼성-태평양 (1982~1988)
1972년
정순명
충암고
MBC(1982~1985)
1973년
김일권
군산상고
해태-태평양-LG (1982~1991)
1974년
박명선
인천고

1975년
이효헌
마산상고

1976년
임정면
마산상고
해태-빙그레 (1982~1988)
1977년
이만수
대구상고
삼성 (1982~1997)
1978년
김남수
신일고

1979년
김이수
부산상고
삼성 (1984~1986)
1980년
김건우
선린상고
MBC-LG (1986~1993, 1997)
1981년
구윤
경북고
삼성-태평양 (1986~1994)
1982년
김성범[7]
포철공고

1983년
한경수
군산상고

1984년
주은현
광주일고

1985년
김경기
인천고
태평양-현대-SK (1990~2001)
1986년
김현철
경북고

1987년
김훈
경남상고

1988년
곽상선
군산상고

1989년
정진식
경남고
한화-롯데 (1994~2001)
1990년
강준기[8]
공주고
LG (1995~1996)
1991년
강혁
신일고
두산-SK (1999~2007)
1992년
노상진
배명고
한화 (1997~1998)
1993년
조현
신일고
LG-해태-한화 (1995~2002)
1994년
김건덕
경남상고

1995년
박현철
광주일고

1996년
박진형 [9]
경동고
LG (2001)
1997년
신민기[10]
경남고
한화 (2003~2009)
1998년
1999년
백정훈[11]
광주상고
KIA (2005~2006)
2000년
수상 대상자 없음
2001년
황성용[12]
부산고
롯데 (2006~2015)
2002년
서정[13]
광주일고
한화 (2007~2010)
2003년
박정태[14]
부산고
KIA-삼성-롯데 (2004~2019)
2004년
최정
유신고
SK-SSG (2005~)
2005년
김현수
신일고
두산(2006~2016) - 볼티모어(2016~2017) - LG(2018~)
2006년
전동수[15]
덕수정보고
넥센-KT-LG-NC (2008~2022)
2007년
김경한[16]
장충고

2008년
이창진[17]
인천고
롯데-KT-KIA (2014~)
2009년
하주석[18]
신일고
한화 (2012~)
2010년
유재혁
제물포고
KIA (2011~2015)
2011년
박민우
휘문고
NC (2012~)
2012년
김민준
북일고
넥센 (2013~2017) - SK (2020)
2013년
조영우
제주고
한화-SK-KT (2014~)
2014년
송성문
장충고
넥센-키움 (2015~)
2015년
최원준
서울고
KIA (2016~)
2016년
김혜성
동산고
넥센-키움 (2017~)
2017년
배지환
경북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19]-피츠버그 파이리츠 (2018~)
2018년
최정원
청주고
NC (2019~)
2019년
박정우[20]
광명공고

2020년
김범진[21]
유신고

2021년
송현우[22]
인상고

2022년
김민석
휘문고
롯데 (2023~)
2023년
박지완
도개고



4. 학교별 수상 기록[편집]




5.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야구계의 저주들

고교에서 가장 뛰어난 타격을 보인 이에게 수여하는 상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는 뚜렷한 활약을 보인 수상자를 찾아보기 힘들며, 도리어 그 중에는 비운의 스타들이 더 많다.

1991년 수상자 강혁은 고교 시절 초고교급 천재 타자로 불렸으나 이중등록과 음주운전, 병역비리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끝에 쓸쓸히 은퇴해야 했고, 1993년 수상자이자 '제2의 김재현'이라 불리던 조현은 나무배트에 적응하지 못한 데다 스윙의 약점도 극복하지 못하면서 여러 팀을 전전하다가 결국 방출되었으며, 국제 대회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국내외의 큰 기대를 모으던 김건덕은 고교시절 혹사로 인해 어깨가 망가져서 은퇴해야 했으며,[23] 고교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던 신민기는 프로에 와서 통산 타율 1할조차 치지 못한 채 병역비리에 연루되었고 복귀 후 거의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결국 방출되었다.

8,90년대에 이런 일이 반복되자, 항간에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이들은 결국 망가진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는데, 이것이 일명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이다.[24]

2000년대 들어 2004,2005년 수상자인 최정, 김현수[25] 프로야구 정상급 타자로 자리 잡으면서 2000년대에 들어와 드디어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가 풀렸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시궁창. 2006년 수상자인 전동수는 프로에 올라와서 단 한 개의 안타도 치지 못한 채 경찰 야구단에 입단했다가 복귀 후 1년만에 방출되어 새 팀을 구해야 했으며, 2007년 수상자인 김경한과 2008년 수상자인 이창진,송현우는 프로 지명조차 받지 못하고 대학에 진학해야 했다.[26] 2013년 수상자 조영우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 4번 타자 겸 에이스를 했는데, 한화에 입단한 뒤 타자로 1군에 올라가려면 2-3년이 걸리고 투수로 1군에 올라가기가 더 쉽다는 말을 듣고 아예 투수로 전향한 뒤. 송진우 2군 투수코치에게 체인지업을 전수받아 14시즌 1군에 콜업된 뒤 몇 경기 선발출장 뒤 2군으로 내려갔다...

2000년대 이후 최정-김현수 이외 살아남은 사람은 박근홍(개명 전 박정태)과 박민우, 최원준 그리고 2016년 현재 전민수로 개명한 전동수와 송성문, 김혜성 정도다. 2003년도 수상자인 박근홍은 투수로 데뷔해 1군에 좌완 원포인트나 추격조 등으로 자주 비치나 확실한 1군멤버는 아니다. 다행히 2015년에 꽤 쏠쏠한 활약을 하며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2011년 수상자인 박민우는 2014시즌 주전 2루 자리를 꿰차더니 당해 KBO 신인상을 탔다. 그리고 15, 16시즌에는 각각 0.304, 0.343의 고타율과 46, 20도루를 기록하며 NC의 중심 타자가 되었다. 2015년 수상자인 최원준은 데뷔 후 2년간 1군에서 감초 역할로 기용되어 3할 타율을 기록하면서 출중한 포텐셜을 드러내고 있다. 넥센시절 1군에서 안타 하나도 못 친채로 방출되었었던 전동수도 kt에 재입단하여 2016년 현재 1군에서 제법 쏠쏠한 타격실력을 보여주며 붙박이 준주전 외야수로 활약하고 있으니 기대는 해볼만하다. 하주석도 한화 이글스의 주전 유격수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2019 시즌에 이창진이 드디어 포텐이 터지면서 중견수로 쏠쏠한 활약을 하고 있다. 2020년 들어서 싹수가 보이던 김혜성이 만루홈런을 터트리는 등 2루, 유격, 좌익수를 오가며 맹활약중이다.

그러다가 2019년부터 3년 연속으로 프로 미지명 수상자가 나왔다. 다행히 2022년에는 야수최대어이자 롯데 자이언츠의 1라운드 지명을 받은 김민석이 수상하면서 4년만에 프로 지명 수상자가 나왔다.

5.1. 프로에서 성공한 사례[편집]


  • 백인천 : 일본프로야구 1975년 타격왕 수상자이자 KBO 리그 원년 타율 0.412로 역사상 유일무이한 4할 타율을 기록했다.
  • 김일권 : 원조 대도. 워낙 빠른 발과 주루센스가 일군이었지만 3할 타율도 기록할 정도로 컨택 능력이 뛰어났다.
  • 이만수 : 1980년대 KBO 리그를 대표하던 삼성의 슈퍼스타. 역대 최초로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하고, 홈런-타점 1위를 3년 연속으로 해봤고, 3할도 여러번 쳤다.
  • 김건우 :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출신 최초의 신인왕이다. 다만 타자가 아닌 투수로 신인왕에 올랐다. 하지만 프로 2년차 때 당한 교통사고 이후 후유증으로 일찍 내리막길을 탔고 타자와 투수를 오갔다.
  • 김경기 : 미스터 인천. 아버지 김진영의 대를 이어 인천을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고 태평양과 현대에서 중심타선 역할을 잘 해냈다.
  • 최정 :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KBO 리그 역대 최고의 3루수 계보를 잇는 슈퍼스타이다.
  • 김현수 : 타격 기계, 신고선수의 신화. 2021년 .285의 타율이 풀타임 최악의 타율이다. 2012년[27], 2021년, 2022년 이외는 전부 3할 돌파. 2016~2017 시즌에는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했다.
  • 박민우 : 2014년 신인왕으로 같은 시즌 50도루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탁월한 컨택으로 3할을 훌쩍 넘기는 고타율은 물론이고 빠른 발과 뛰어난 주루 센스를 자랑하며 2019년, 2020년 2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NC 다이노스의 간판 타자이자 국가대표 2루수로 활약 했다.
  • 배지환 : 2018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하며 메이저 리그로 진출하였으며 2022년에 메이저로 콜업되어 데뷔전을 치루었고 이후 2023년부터 꾸준히 선발 출장하며 주전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 김혜성 : 2018시즌부터 키움 히어로즈의 주전 내야수로 자리 잡았다. 2021시즌에는 도루왕과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또한 도쿄 올림픽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렸다.


5.2. 이영민 타격상의 맹점[편집]


운만으로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니만큼 역대 수상자들이 뛰어난 실력과 자질을 갖춘 선수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그것이 곧 고교 최고의 타자를 뜻은 아니란 지적이 줄곧 이어져 왔으며, 이를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가 생긴 원인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이유인즉슨, 야구 대회의 수가 적고 경기 자체도 많은 편이 아니다 보니 신뢰할 만한 통계치를 만들기 힘들며, 더욱이 투수마다 실력 편차가 큰 고교 야구의 특성상 실력이 떨어지는 투수한테 한껏 몰아쳐서 타율을 높이는 유형의 타자도 무척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배트를 사용하는 시대에도 이 이슈는 적용되는데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는 시대에는 소표본으로 인한 왜곡효과가 더 컸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이 고교 타율을 무시하는 경향과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28], 실제로도 2000년대부터는 고교 시절 아무리 높은 타율을 유지했다고 해도 주력(走力)이나 파워 같은 부분이 부족하면 아예 지명조차 받지 못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이럴 경우에는 육성선수로 입단할 것을 권유 받는 일이 많다고 한다. 김현수가 대표적. 그나마 고졸 선수들의 육성선수 입단이 사실상 막혀버렸기에......


5.3. 외국의 경우[편집]


사실 프로선수와 고교선수간에 수준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고교시절 타격을 잘했다고 프로에서 못하는건 너무나 흔해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또한 학창 시절 대회 성적을 정말로 타격 실력이라고 하기에는 샘플이 너무 적어서 나타난 성적이 진짜 실력을 의미하는지도 확실치 않다.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저주라는 말도 옳지 않다. 이건 그냥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비슷한 환경에서 야구를 하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고교야구인 고시엔은 개인 표창이 없으니 일본의 대학야구대회인 전일본대학야구선수권대회의 역대 수위 타자상 수상자들을 한 번 살펴보자.[29]

연도
이름
대학 타율
프로 출장수[30]
프로 타율
2001
후지와라 도오루
.545
60
.111
2002
오니자키 도모치카
.500
x
x
2003
와키야 료타
.556
850
.255
2004
다나카 케이지
.556
x
x
2005
오사키 유타로
.647
444
.257
2006
도미나카 유우야
.533
x
x
2007
우에모토 히로키
.583
673
.267
2008
사사키 다이스케
.500
x
x
2009
다키 히로후미
.667
x
x
2010
이시미네 쇼타
.667
448
.242
2011
사토 오미치
.500
x
x
2012
후루모토 다케루
.500
16
.167
2013
이토하라 켄토
.500
352
.274
2014
오시로 다쿠미
.533
x
x
2015
모기 에이고로
.615
461
.277
2016
야마자키 요시타카
.471
x
x
2017
아카기 리쿠야
.467
x
x
2018
카와이 다이키
.636
x
x

보다시피 고등학생보다 선수로서 완성된 대학 타격왕 출신들도 성공한 프로야구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며[31], 아예 프로 데뷔조차 하지 못한 타자들이 부지기수다. 대학에서는 5할 타자들이 프로 투수의 공에는 손도 못대는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NCAA 디비전 1 대학야구리그에서 가장 강한 리그 중 하나로 평가받는 Pac-12에서 날리던 타자들도 프로에서는 마이너리그 싱글 A조차 돌파못하고 은퇴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대학야구 최고의 선수 축에 드는 골든 스파이크 어워드자니 벤치 상 수상자들 중에도 프로에서 실패한 선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은 한국 야구라고 다를 바 없다. 때문에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라고 프로에서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래서 각 구단 스카우트와 단장 들은 학창 시절 성적을 잘 믿지 않는다. 최근 머니볼 이후 아마추어 성적을 보는 경향이 좀 늘어나긴 했지만[32], 그래도 여전히 고교 야구 성적보다 선수의 발전가능성을 더 중시 여기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1] 청룡기, 황금사자기, 화랑대기, 대통령배, 봉황대기, 대붕기, 무등기, 미추홀기, 전국체육대회.[2] 박근홍으로 개명한 박정태가 대표 사례.[3] 두산 베어스김동주와는 동명이인.[4] 후에 군산상고 초대 감독을 맡으며 군산상고를 고교야구 최고의 팀중 하나로 만든다.[5] 롯데 자이언츠 단장 역임.[6]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이자, 전 OB 베어스 포수였던 김영신과 동명이인.[7] 당시 2학년.[8] 동국대 졸업 후 LG에 입단했지만 김동수, 김정민 등 기존 포수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은퇴 후 공주중 감독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사망.[9] 롯데 자이언츠 소속 투수인 박진형과는 동명이인.[10] 유일무이한 2년 연속 수상/수상 당시 2~3학년[11] 당시 2학년. 성균관대 졸업 후 KIA에 입단했으나 프로에서는 별 활약 없이 은퇴. 발은 빨랐다고 한다.[12] 부산고 졸업 후 성균관대 입학. 2013시즌 종료 후 황동채로 개명했다.[13] 김대우, 고우석, 이대형과 함께 대통령배-청룡기 우승 멤버로 활약했다. 우익수였으며 성균관대로 진학했다.[14] 롯데 자이언츠박정태와는 별개의 동명이인으로 2012년 박근홍으로 개명했다.[15] 당시 2학년. 2012년 말 전민수로 개명[16] 당시 2학년.[17] 당시 2학년. 건국대 졸업 후 롯데 자이언츠 입단. 그리고, 이창진 이후로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고 대학으로 진학한 야구선수는 2020년 수상자인 박정우(광명공고) 전까지 없었다.[18] 당시 1학년.[19]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계약 후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불법 계약 건으로 논란이 있었고, 결국 계약이 무산되었다. 해당 문서로. [20]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성균관대로 진학하였다.[21]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고려대로 진학하였다. 대학 2학년 때 시행하는 2023년도 신인 드래프트부터 얼리 드래프트가 도입되면서 드래프트 참가 신청을 했으나 이번에도 지명을 받지 못했다.[22]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한양대로 진학하였다.[23] 실제 보직은 투수였으나 타자로서도 크게 활약했다. 사실 대학 진학 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재활이 가능한 수준이었으나(한양대 진학 당시 1년 동안은 마운드에 서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재활 중 국가대표로 뽑히면서 다시 공을 던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때 어깨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24] 1985년(김경기)부터 2004년(최정) 사이 수상자 중 성공한 선수가 없다. 그나마 투수 박근홍이 나은 경우다.[25] 다만, 김현수도 결국 프로 지명은 받지 못했다. 자세한 건 김현수 문서를 참조하자.[26] 김경한은 원광대로 진학했으나 1년만에 야구를 그만두었으며, 건국대로 진학한 이창진은 2014년도 신인드래프트에서 롯데에 2차 6라운드로 지명되어 뒤늦게나마 프로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KT를 거쳐 KIA에서 2019년부터 1번타자 중견수로 활약중이다.[27] 타율 0.291[28] 그렇다고 스카우트들이 기록 자체를 아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실적이 없거나 미약할 경우 선수들의 기량이나 장래성을 판단하기가 매우 곤란하기 때문이다.[29] 한국은 프로 미지명자들이 대학을 가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이나 일본은 군대 문제가 없어서 프로구단에 드래프트가 되었어도 대학에 가는 경우가 상당히 흔하다.(정확히 말하면 한국은 고교 선수 거의 전원이 엘리트 선수에 졸업 예정자가 이 시기까지만 해도 전원 자동 지명 대상이지만 일본은 예전부터 엘리트 선수의 비중이 높지 않고 그마저도 프로에 갈 생각이 없는 선수들이 절대 다수여서 신청자에 한해서만 드래프트를 진행했다. 현재는 한국도 신청자에 한해서만 드래프트에 참가한다.) 어차피 바로 1군 데뷔를 못하니 2군에서 기량을 쌓아야 하는데 그럴바엔 기왕이면 대학 졸업장을 따고 대학야구리그에서 기량을 쌓는 편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30] 프로 기록은 일본프로야구 커리어 통산 1군 기록을 의미. 성적은 2019년 말 기준.[31] 그나마 라쿠텐에 지명된 모기 에이고로가 유격수로 저 성적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에 오르는 등 상당히 성공했다. 2016년 프로에 데뷔해 2019년까지 줄곧 라쿠텐의 주전 유격수 겸 1번 타자를 맡고 있다. 한신에 지명된 이토하라 켄토도 성공한 편이나 홈런은 시즌 세 개를 넘겨본적 없는 똑딱이고 2루수로 수비실력이 너무 안좋은데다가 2022년에는 타율 2할 5푼도 간당간당한 성적으로 죽쑤고 있다. [32] 실적이 아예 없거나 극히 부족한 경우 선수들의 기량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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