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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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엔터테인먼트 그룹 소속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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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프로듀서
이수만
프로듀서
Kenzie
유영진
Hitchhi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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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연도
2011년
이름
이수만
분야
가수
은관문화훈장(2등급)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이수만
李秀滿 | Lee Soo-Man
[1]

파일:이수만.jpg

본관
전주 이씨[2]
출생
1952년 6월 18일 (71세)
경상남도 부산시
(現 파일:부산광역시 휘장.svg 부산광역시 파일:동래구 CI.svg 동래구)[3]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현직
파일:SM엔터테인먼트 로고.svg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파일:KAIST_emblem.svg 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부 초빙석학교수
신체
A형
형제자매
3남 중 막내[4]
배우자
김은진[5]
자녀
장남 이현규(1994년 9월생), 차남 이명규(1996년 12월생)[6]
학력
파일:서울청운초등학교.jpg 서울청운국민학교 (졸업)
경복중학교 (졸업)
파일:kyungbokhsclear.png 경복고등학교 (졸업)
파일:서울대학교 로고.svg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업기계학 / 학사)
파일:CSUNS.svg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노스리지캠퍼스 대학원 (컴퓨터공학 / 석사)
병역
불명[7]
종교
개신교
데뷔
1972년 4월과 5월 1집 'Oasis Folk Festival Vol.1'
별명
COWMAN[8], 수만리, 수만아버지, 수만쌤, 수만할배, 큐티수만, 수만 공주님, 앙큼수만이

1. 개요
2. 상세
3. 가수 활동
4. 프로듀서
6.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가수, SM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이자 총괄 프로듀서.


2. 상세[편집]


6.25 전쟁 당시인 1952년 6월 18일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동래구)[9]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0년대부터 가수이자 MC로 맹활약했기 때문에 이수만과 동년배이거나 이수만보다 나이가 많은 노년층에게는 가수로 더 유명하기도 하다.[10] 전직 가수였고 지금은 기업인에 가깝지만 사실 이수만을 설명하는 단어는 프로듀서이다.

대한민국 음반 시장에 역사를 쓴 초특급 아이돌 그룹들의 아버지이자 한국 음반 시장에 아이돌 문화를 정착시킨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이수만이다.

이수만은 아이돌이라는 말이 익숙치 않던 시절부터 앞으로 아이돌 가수 시대가 올 것을 일찍이 예측하고 철저히 기획된 아이돌 팀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는 SM 소속 아이돌 가수들은 모두 이수만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수만이 비리 혐의로 해외에서 도피 중이던 2000년대 초반에는 SM에서 나온 아이돌들의 흥행 성적이 떨어졌다.

굳이 SM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K-POP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으로, 이수만 덕분에 SM 소속 인기 아이돌뿐만 아니라 타사의 여러 인기 아이돌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DSP 사장 이호연이 H.O.T.의 성공을 보고 강성훈, 은지원의 듀엣 그룹에 급하게 고지용, 이재진, 김재덕, 장수명 4명을 추가 영입해 젝스키스를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걸그룹도 S.E.S.가 청순 컨셉으로 데뷔와 동시에 신드롬을 일으키자, 김준희를 필두로 제작 예정이었던 힙합 걸그룹을 청순 컨셉으로 전면 수정해 핑클을 만든 일화도 유명하다.

DSP는 'SM 아이돌에 +1' 전략으로 각각 젝스키스, 핑클(vs S.E.S.), 클릭비(vs 신화)를 배출하며 라이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됐고,[11] 이호연사장이 2010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DSP는 크게 쇠퇴했다. 이후 한동안 이수만의 라이벌은 JYP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과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으로 대표되었다.

2012년대에는 EXO를 데뷔시키면서 아이돌 시장에 본격적으로 세계관 문화를 도입, 성공시키면서 역시나 트렌드를 이끌어간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연예 기획사들의 인수 합병, 중소기획사들의 발전으로 인해 과거에 비해 이수만의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SM Rookies를 통해 연습생들을 데뷔 전부터 공개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 역시 연예계 전반의 트렌드가 되었지만, 정작 루키즈를 통해 공개됐던 여자 연습생들은 이미지 소모만 크게 한 뒤 과반 이상이 데뷔하지 못한 채 SM을 퇴사하거나 연예계를 떠났다.

루키즈를 만든 이유나 다름 없었던, H.O.T. 시절부터 끊임없이 시도한 끝에 20년 만에 데뷔시킨 로테이션형 그룹 NCT는 초반 몇 년간 자리를 잡지 못했었고, 걸그룹은 히트작 중 하나인 레드벨벳이 데뷔한 이후 6년이 지나서야 에스파가 데뷔했다. f(x)는 2015년 이후 그룹 활동을 전혀 시키지 않으면서 무대응으로 일관하다 모든 멤버들이 떠나는 사실상 해체 상태에 놓였다. 다만 이 기간 동안 태연, 규현, 태민, 헨리 등의 기존 그룹의 멤버들을 솔로 아티스트로 성공시키는 행보가 있었다.

최초의 한류 진출을 염두에 둔 아이돌 그룹을 만든 선구자격 제작자이기도 하다. H.O.T.중국일본, 동남아 등에서도 인기를 얻자 이후 거의 최초로 기획부터 철저히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아이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사례가 걸그룹 S.E.S.다. 당시 남자는 군입대 문제가 있었기에 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걸그룹으로 해외진출 시도를 꾀했던 것이다. 재미교포 출신의 유진, 재일 교포 출신의 , 중국어를 담당할 예정이었지만 학업을 사유로 사퇴한 소이 등의 구성으로 역대 한국 가수 최초로 제작 당시부터 해외 시장을 염두로 다국적 멤버를 구성하는 시도를 S.E.S.를 통해서 실현했다. 일본어가 가능한 때문에 일본 진출을 하였고, 대만 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걸그룹으로 한류 열풍의 주역에 섰다. 이후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둔 보아나 중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중국인 멤버까지 도입했던 SUPER JUNIOR 등의 아이돌은 이수만이 기획하기 전, 과거 한국에는 볼 수 없는 가수들이었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지금의 철저한 기획형 아이돌의 전성기를 이끄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프로듀서라 할 수 있다.

1970~1980년대에 활동했던 옛날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활동하는 아이돌들을 키우는 사람인지라 어린 학생들도 이수만이 누구인지 대부분 알고 있다. 다만 이문세, 유열과 같이 마삼트리오로서 대한민국 발라드 가수를 대표하는 삼대장으로서보다는 의 사장님으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현재 나이가 한국 나이로 70세인 관계로 고령인지라 그룹을 운영할 후임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 SM 매각설이 2021년부터 돌고 있다. 다만 본인의 직무중 일부는 이미 강타가 대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3. 가수 활동[편집]


1972년 밴드 '4월과 5월'의 멤버로 데뷔하였으나 건강 이상으로 중도 탈퇴하였다. # 이후 경복고등학교(46회)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과[12]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노스리지에서 컴퓨터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디 시절에는 농생대 소속 동아리인 '샌드페블즈' 초창기 멤버로서 활동하는 등 정통 락을 기반으로 음악을 갈고 닦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수만이 샌드페블즈였는데, 왜 대학가요제는 나가지 않았나?" 라고 묻는 부분이 있다. 1977년 첫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샌드페블즈는 기수로 6기였다. 이수만은 2기. 그리고 바로 윗선배(1기)가 김동만 씨인데 이분의 아들이 지금 톡식의 김정우. 어쨌든 이수만은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맡은데 이어 1998년까지 이효리에 이은 최다 MC로 활약했다.(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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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과 365일 1집. 1980년 발매된 이 앨범에서는 정통 록을 확실하게 시도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좋은 노래들이 상당 수록되어 있지만 당대에 워낙 쟁쟁한 가수가 많아서 큰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다.

라디오 DJ를 하기도 했었는데, TBC의 비바 팝스(일레븐 팝스)를 제외하고는 MBC가 주 활동무대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을 맡기도 했고[13] 1980년대 후반에는 '젊음의 음악캠프'를 맡았으며 이는 '팝스 투나잇'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젊음의 음악캠프 이수만과 함께'가 된다. 어디서 많이 본 단어가 느껴졌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이수만의 뒤를 이어 배철수30여년간 계속 맡아온 그 프로그램의 전신이다.[14][15]

당시 MBC 라디오의 가수출신 DJ로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 "젊음의 음악캠프" 유열과 함께 마상트리오(馬相 Trio)[16]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015년 12월 4일 응답하라 1988 9화에서 이문세가 이수만의 곡을 소개하면서 대놓고 「마상트리오」 인증했다.

당시 앞의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인지도 있는 가수였다. 그러나 점차 연예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포크/록 가수로서 최정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상실감과 정상에 서고 싶다는 욕망 등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가운데 미국 유학 시절 MTV를 보고 틴에이져 아이돌들과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보며 왜 우리 가수는 해외에서 인기를 끌만한 가수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해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설립한 것이 SM기획(현 SM엔터테인먼트)이다.이수만 "미래 한류는 한중일 합작"

이로 인해 조영남은 2006년 GQ 인터뷰에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문세 또한 샤이니가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에 출연하여 이수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도록 해요. 별로 안 좋아하거든." 이라며 말을 했지만 2015년에도 이수만, 유열과 아직도 정기적으로 가족동석 식사를 한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친분이 있으니 반농담식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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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처음 발매한 곡. 대한민국 최초로 테크노음악, 즉 오늘 날에는 컴퓨터 음악인 MIDI로 불리는 프로듀싱 방식을 들여왔다. 이때부터 화려하고 아티스틱한 앨범 패키징을 선호했다.

본인부터 1989년 10집 뉴에이지 이후 아예 음악 활동을 끊었으니 미련은 없는 듯. 그래도 별이 빛나는 밤에 1만회 특집에서는 랩을 이문세와 같이 하기도 했다. 별밤 40주년 기념 특집방송에서 주철환 전 MBC PD(현 JTBC 콘텐츠본부장)와 샤이니가 같이 출연했을 때 기념삼아 틀어줬다. 별밤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제공되니 그 현란한 래핑을 확인해보자. 또한, 이 시절에는 모 주스의 모델을 맡기도 했는데 당시의 CF가 발굴되면서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4. 프로듀서[편집]


음악 활동을 접을 무렵 MC로 진출하기도 했으며[17] 이때부터 가수 현진영의 2집 제작을 총지휘하는 등 매니지먼트 사업 행보가 시작됐다. 이후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수많은 아이돌 그룹들을 배출하였고 자신이 제작한 아이돌 그룹을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국내 최고의 연예 기획사로 성장하게 된다.

보아동방신기일본 현지화를 통해 대성공을 거두고 SUPER JUNIOR-M을 통해 한국 아이돌 그룹 최초로 중국 현지화를 시도했다. 정형화된 아이돌 구성을 굳히면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한 것도 큰 특징인데 샤이니f(x)의 경우 천편일률적인 아이돌 그룹과는 다르다는 게 그룹 콘셉트였고 대중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 음악적으로 평가될 발판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한 해외 시장 공략으로 일찍이 눈을 돌린 것도 이수만과 SM이었는데 하술할 SM의 파리 콘서트 이후 국내 기획사들이 유튜브를 중요시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각종 음악방송도 순위 집계에 유튜브 점수를 반영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류 3단계론을 제시하였다. 한류 1단계는 보아동방신기처럼 한국 가수의 해외 시장 진출, 2단계는 SUPER JUNIOR, f(x)처럼 외국인 멤버를 그룹에 넣어 현지에서의 한류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고 한류를 이어가는 것이고 마지막 3단계는 철저한 현지 가수 육성 단계다. 현지 회사와의 합작을 통해 시장을 공략하고 현지 시장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토대로 한류 1, 2단계 가수들까지 해외로 계속 진출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인데 전세계 현지화팀 데뷔 프로젝트인 NCT 프로젝트가 이에 해당한다. #1 #2

2000년대 당시만 해도 한류 3단계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주를 이루다가, 2010년대 초중반까진 한중 합작 컨텐트 제작사가 늘어나고 한국의 컨텐츠 제작자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현지 회사와 제작 초기부터 참여하는 등 이수만의 안목이 얼추 맞아들어 가기는 했다. 이수만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의 자본력을 이길 수 있는 회사와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 컨텐츠 제작에 한국이 참여하는 식으로 수익을 내게 되면 국가 경제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한다.[18]

그러나 이러한 판단이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드러났는데, 바로 중국이란 국가의 특수성과 규모 때문이다. 중국인 멤버를 가장 먼저, 그리고 본격적으로 채용한 것이 SM이었는데 정작 중국인 멤버들은 한국에서의 활동을 그저 인지도 쌓는 발판으로만 이용하다가 중국 본토로 넘어가 버리곤 했고, 홍콩 민주화 운동 같은 정치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중국 편에 서는 일이 비일비재해진 것이 문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인 멤버 입장에선 한국에서 그룹 활동을 하는 것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혼자 활동하는 것이 수익이나 인지도 확보 면에서도 월등히 좋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치적 문제에 얽혀들어 홍콩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거나, 이른바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는 아티스트들이 대거 늘어나면서 소속 그룹은 물론 기획사 자체의 이미지 하락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19]

이수만이 제창한 한류 3단계론에도 다소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났는데, 굳이 타국 현지화 없이, 외국인 멤버 없이 해외에서 막대한 수익과 인기를 거둬들이는 케이스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연예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굳이 외국인 멤버에 연연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겨나고 있다. 이수만의 한류 3단계론은 2010년대 이전까지는 잘 맞아 떨어지는 플랜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후반부터 유튜브가 떠오르고, 그 여파로 국가 간의 문화 교류가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현지화 전략 없이 다이렉트로 해외에 매력을 어필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 사실이다.

다만 한류 3단계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지론이라고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타국의 특수성, 국가 간 트러블 등으로 인해 SM이 이미지 타격을 받았다 해도 거대한 중국 시장에 K-POP의 위상을 퍼트리고 한류의 불씨를 계속 이어나갔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 박진영이 방송 출연에서 말했듯, 외국인 멤버가 K-POP을 하는 것도 한류고 외국에서 자체적으로 K-POP 그룹이 나타나는 것도 한류다. 이수만의 한류 3단계론을 통해 K-POP의 저변과 스펙트럼을 넓혀나가야 한다는 목적성을 제시했고, 지금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로 인해 진통을 겪는 과정이라 보는 것이 옳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SM의 해외 공략은 연이어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1년 6월 10일 프랑스 파리 콘서트를 통해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현지 팬덤이 형성되었고 대형 플래시몹과 서명문 통지를 통해 2012년 슈퍼주니어의 단독 콘서트 투어인 SUPER SHOW 4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심지어 이 떡밥으로 광고도 찍었다! 그만큼 이 콘서트는 당시 연예면과 시사면 양쪽에서 화제가 되었으며[20] 뒤이어 2013년 10월 19일 베이징 콘서트에서는 7만 명의 관중을 모으면서 K-POP의 세계 시장으로의 가능성을 다시금 보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 멤버를 영입하는 전략을 토대로 중화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상술한 SUPER JUNIOREXO. EXO의 경우 현지화 도중 중국인 이 탈퇴하는 바람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2020년 무한 확장 콘셉트로 활동하는 보이그룹 NCTSuperM을 통해 현지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2022년 9월 15일 SM 측에 2022년 말 프로듀싱 계약 조기 종료를 통보했다. 훌륭한 후배 프로듀서들이 큰 어려움 없이 잘 꾸려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현 상황에서 물러나라는 소액주주들의 의견 또한 대주주로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이며 현 시점이 계약을 종료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는 의견을 강력히 피력했다고 밝혔다. SM 입장문 9월 16일 추가 입장문
이에 SM 내부는 경영진와 소속 아티스트들도 당혹스러워하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라고 하며 엔터업계에서는 이수만이 SM 콘텐츠의 완성도에 끼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인 만큼 SM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면 타격이 매우 클 것이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기사1 기사2
다만 이러한 기사는 신빙성이 모자르므로 걸러들을 필요성은 있어보인다. 참고로 팬들과 대중들의 반응은 "이수만이 나가니 시원섭섭하다" 라는 반응과 함께 "나갈사람이 드디어 나간다"며 반기는 반응이 함께하고 있다. 여하튼 이수만이 떠난 SM이 어떠한 방식으로 돌아갈지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것이다.[21]

그런데 위의 찬반론이 좀 무의미한 것이 이수만은 현재도 SM의 최대주주다. 직접적 영향력은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고, 2022년 후반기 카카오가 역대 최악의 행보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주식 매각도 거의 실패로 돌아가는 상태라 계속 SM의 리더로 남을 것이다. 제발 강타랑 보아한테 회사 넘기고 광야덕질이나 하세요

5. 비판 및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수만/비판 및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SM 1세대 가수 출신 현진영의 회고에 따르면 잔소리가 꽤 심하다고 한다. 식사할 때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시에 든다고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고.

  • 1세대 아이돌그룹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립싱크가 보편화되면서 가창력 논란이 일던 시절[22], 방송에서 "H.O.T.를 가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기꺼이 동의할 용의가 있다", "TV 엔터테이너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 "립싱크도 장르다"라는 주장과 함께 립싱크 옹호론을 펼쳐 PC통신 등에서 비난을 받았다. 여기에 대해 이수만은 칼럼이나 인터뷰로 구구절절 자신의 의견을 다시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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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6월에 샤토 무통 로쉴드로부터 와인 기사작위를 받았다. 결국 와인 사업에 진출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진을 근거로 이수만이 프리메이슨에게 기사작위를 받았다는 루머가 인터넷에 퍼지기도 했다.

  • 세월호 참사 피해 당시 10억원을 기부했다.

  • EMOS라는 브랜드의 와인을 만들었고 소속가수들의 특별한 행사 등이 있으면 선물로 보내주고 SM내 임직원들도 결혼이나 여러 이벤트 등지에서 EMOS 와인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마셔본 사람 말로는 생각보다 괜찮은 와인이라고 한다.

  • 이수만 소유의 10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도 본인 소유의 대저택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 소녀시대써니가 형의 딸 즉 그의 조카다. 써니에게는 삼촌. 또한 써니의 언니도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던 스타월드 소속의 슈가, 아유미 매니저를 한 적 있는 등 엔터 직종에서 일했다. 관계가 관계인 데다, 써니소녀시대에는 제일 늦게 들어가서 가장 짧은 연습생 기간을 거쳐 얼마 되지 않아 데뷔했기 때문에 대중들 사이에서 낙하산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써니는 방송에서 "사실을 숨기고 오디션을 봤기 때문에 사장님은 몰랐었다"고 밝혔다.

  • 기갑창세기 모스피다의 한국어 비디오판 오프닝 곡을 부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었으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신촌블루스의 이정선이라는 가수라고 한다.

  • 코갤에서의 별명은 흰수만. SM 소속 가수의 팬들이 그의 생일에 축하와 함께 '이수만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리플을 줄줄이 단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는 대한민국 연예계에서의 이수만의 입지가 마치 원피스에서의 에드워드 뉴게이트와 흡사해서 지어진 별명이다.

  • 이수만은 현재 SM의 지분 24.43%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2,100억원 어치의 주식을 소유한 연예계 최대 주식 부자였었다. 양현석은 2012년 초 지분가치 1,400억원으로 2위였으나 싸이의 초대박으로 주가가 상승하여 2012년 9월 24일 계속된 주가 상승으로 양현석의 지분 가치는 3,000억원을 넘어 부동의 1위에 올랐다. 배용준이 315억원으로 3위를 차지한 것을 비교해보면 넘사벽 수준. 2016년 기준 다시 이수만이 주식부자 1위에 올랐다. 양현석은 강남스타일 고점 이후 YG의 주가 하락과 루이비통, 텐센트 등지에 개인 지분을 넘겨 다시 2위가 되었다. 이수만이 약 1,800억원, 양현석이 약 1,500억원이다.

  • 한편 1986년에 서세원이 감독한 <납자루떼>라는 컬트적이고 괴상한 영화의 OST를 만들었던 흑역사가 있다. 1987년 이현세 원작의 만화를 영화화 한 "지옥의 링"의 주제가도 그가 불렀다.

  • 2011년 SM 파리 콘서트를 성공시킨 쯤 해서 KB투자증권의 TV CF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 미얀마의 민주화운동가 아웅산 수치 여사를 다룬 프랑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The Lady'의 미국 시사회에 참가, 뤽 베송 감독과 주연배우 양자경,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사진을 찍었다. 애초에 이는 이수만이 힐러리에게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으로, 이 기묘한 인연은 힐러리가 한국에서 미얀마로 출국할 때, 이수만이 힐러리에게 'The Lady'의 DVD를 구해다 주어 성립한 것이다.

  • 한국 매니지먼트 사업의 선구자로서 이수만을 재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SHINee, f(x)의 몇몇 앨범들이 음악적으로도 호평을 받으면서 프로듀서인 이수만을 다시 보게 된 것. 실제로 '피노키오'의 기획안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이수만의 지시로 한번 엎고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복귀한 이후에 런칭한 모든 그룹들이 성공하였으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역시 아시아에서 크나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 경영자 이수만보단 기획자 이수만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의 SM프로듀서 Hitchhiker의 인터뷰에 따르면 SM에서 발표되는 모든 앨범의 타이틀곡은 이수만이 결정하고 앨범 수록곡의 가사 한 줄까지 들어보고 결정한다고 한다. 태티서의 Twinkle 역시 이수만과 A&R 팀 사이에서 수없이 많은 의견 교환으로 가사와 기타리프가 정해졌다고 한다.


  • 2014년 9월 30일에 배우자인 김은진이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은 소장암으로 판명되었다. 이사직을 맡고 있는 강타가 참여한 프로젝트 그룹 S의 '하고 싶은 거 다'가 이를 모티브로 제작한 곡.


  • SM 설립 초기부터 대마파문 등 여러 사건 사고를 일으킨 소위 '병크 멤버'들이 많았지만, 탈퇴시키지는 않았다. TRAX처럼 수익이 나지 않는 팀이라도 뮤지컬, 드라마, OST 등 여러 활동에 참여시키고 오히려 개인수입을 인상시키는 등 계약 관계와 관련하여 SM에게 소송을 걸지 않는 이상 욕을 먹더라도 무조건 안고 가는 편. 당연히 반응은 좋지 않다. SUPER JUNIOR 강인성민의 경우 이 때문에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팀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일부 중국인 멤버들도 공작실에 개인활동을 위탁시키는 형식으로 활동시켜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 바다가 데뷔 전 부모님의 병원비와 대학 진학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점, 현진영이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당시 현진영의 부모님까지 챙겼던 걸 보면 일단 자신의 사람에 대한 지원만큼은 확실한 듯. 나중에 현진영 본인이 직접 유튜브 방송에서 밝혔는데, 당시 기준 1억이 넘는 현진영 아버지의 신부전증 병원비까지 이수만이 납부해 주었다고 한다.

  • 굳이 연예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어쨌든 거두어 준다.[23] 그 일례가 바로 현재 쏘스뮤직 대표로 있는 소성진이다. 신화의 매니저였던 소성진은 성실하고 일을 잘해서 이수만은 신화가 SM을 떠나자 소성진을 다른 연예인의 매니저로 옮겨주는 게 아니라 프로듀싱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직책으로 진급시켰다. 그리고 소성진이 이수만의 밑에서 떠나서 독립하려 하자 이수만은 소성진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 결과 소성진은 중소 출신 아이돌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걸그룹을 키워냈다. 아주 바람직한 청출어람인 셈이다. 덧붙여서 매니저로 출발한 정창환 역시 매니저, 콘서트 연출가, SM C&C 이사가 되었으며 평범한 직원으로 입사했던 민희진 역시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능력 있는 스탭은 확실히 밀어준다. 그러나 민희진은 현재 HYBE 이사가 되어서 보아의 매니저였던 플레디스 사장 한성수와 한 지붕 아래 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건 전술한 소성진과도 같은 지붕 아래에 있게 된 셈이다.

  •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실은 아니지만 이수만 평전이 출시될 당시 자료 조사를 했던 작가의 주장으로는 동방신기 분열 당시 이수만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장에 무리가 왔고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나이가 60세인 걸 감안하면 고령의 나이에 극도의 스트레스가 당연히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등장하는 이수만의 모습은 몸 관리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 어깨와 허리도 굽지 않고 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만 늘어나 있다.

  • 라이벌 기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의 수장 박진영SM엔터테인먼트에 오디션을 보러 갔지만 떨어졌다고 방송에서 수차레 밝혔다. 당시 박진영은 자작곡 '날 떠나지마'로 오디션을 봤는데 박진영의 퍼포먼스를 본 이수만은 뭔가 좀 아닌 거 같다는 심사평과 함께 그를 탈락시켰고 실망한 박진영이 오디션장을 터덜터덜 걸어나가려는 찰나 이수만이 뒤에서 잠깐! 하고 박진영을 부르더니 "곡만 안팔래?" 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화난 박진영이 "안 팔아요!" 하고 소리치고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연예인들의 외모를 매우 중시하긴 하지만, 박진영이 데뷔할 당시엔 SM뿐만 아니라 당시 연예계 자체가 더욱 외모를, 그것도 귀공자 꽃미남 형태의 외모를 선호했다. 그리하여 매우 개성적인 외모였던 박진영을 이수만 입장에서는 실력과 외모의 괴리가 너무 커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2020년 보아의 유튜브 채널에 직접 출연하여 이 에피소드에 대해 언급하면서 "오디션에 한번만 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 본인이 다시 안 온 것이다. 지금이라도 오디션 다시 보러 오면 받아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24]


  • SM엔터테인먼트의 믹싱, 녹음 엔지니어인 구종필 기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로 믹싱 작업에서도 이수만이 직접 듣고 총괄한다고 한다. 전문 믹싱 엔지니어만큼 잘 알아서 깐깐하다고. 과거에 한 방송 영상에서도 아시아인의 성대에서 나오는 배음이 서양인과 다르다는 식의 음향학적 얘기를 한 적도 있고 마스터링시 유의해야 할 점과 대역에 따른 소리의 차이, 그리고 SM 만의 믹싱 노하우 등을 이수만이 직접 이야기한 인터뷰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미국 유학 당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면서 음향학 공부를 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석사 과정까지 이수했으니 수준이야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업계 최고의 녹음실과 엔지니어, 작곡가들과 함께 '좋은 소리'가 뭔지 항상 들었던 사람이라... 이성수 이사, 프로듀서 히치하이커의 발언들을 봐도 이수만이 실제적으로 음악 기획과 프로듀싱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참고로 구종필 엔지니어가 믹스를 했던 뮤지션들은 김동률, 이승환, 윤도현밴드, 윤하, 빅마마 등이 있었고 영화 '왕의 남자', '괴물', '장화,홍련' 등의 믹스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SM전속 믹싱, 녹음 엔지니어가 되었다.

  • IT 분야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 본인이 경복고-서울대-캘리포니아 주립대 대학원 '컴퓨터공학' 출신의 고학력자이기도 하며, 홍종화 같은 뮤지션을 발굴하여 당시에 전자음악을 하겠다며 CPU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SM 내부에 IT 관련 부서 인력이 상당하며 클라우드 도입이라던가 Vyrl ,에브리싱 등의 앱개발 등 엔터테인먼트 업체로서는 보기 드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문화 콘텐츠 포럼에서도 'AI 스피커'라고 할 수 있는 챗봇과 로봇을 통해서, AI가 우리의 생활 속에 밀접하게 자리잡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여전한 IT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에 이미 "로봇과 셀레브리티가 오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고 SM 내 유명 연예인들과 A.I 컨텐츠 제공에서도 사업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한국경제의 인터뷰에 따르면 셀레브리티와 로봇이 오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한 전문은 여기로. 또한 온라인을 통한 공연 스트리밍에도 관심이 많아서, 문화기술 개발 목적으로 홀로그램 콘서트를 계획하기도 했으며 네이버와의 합작으로 온라인 콘서트 플랫폼인 Beyond LIVE를 열기도 했으며 이를 a-nation[25]에도 역수출하기도 했다.

  • SM 출신 연예인들이 하는 성대모사의 대상 중 하나이다. 특유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꼭 흉내내곤 한다.

  • 2017년 스웨덴에 '에코 뮤직 라이츠(http://www.ekkomusicrights.com/)' 라는 퍼블리싱 회사를 설립하고 회사 CEO로 전 유니버셜 유럽 총괄 부사장 펠레 리델을 영입했다. 점차 늘어가는 K-POP 의 수요를 예측하고 그간 세계적인 음반사를 통한 퍼블리싱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접근하고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프로듀서->유니버셜->SM 단계보다는 프로듀서->SM 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물론 경제적으로 해외 대형 퍼블리셔 수수료 절감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이수만의 사업적 안목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크리스브라운, 갈란티스 같은 팝뮤지션들과 아무로 나미에, E-girls 등 제이팝 아티스트들의 곡들도 퍼블리싱하고 있다. Ekko 뮤직 라이츠를 통한 퍼블리싱으로 K-POP 아티스트인 TWICE, 빅스의 곡들도 발표되었다.

  • 사실상 EXO 이후 3~3.5세대 아이돌 판에서는 이제 프로듀서보다 일선에서 물러난 한 기획사의 수장으로서의 이미지가 컸는데, 2017년 9월 14일자 방송된 해피투게더에서 소속 걸그룹 레드벨벳이 2017년 크게 히트 친 여름 미니 앨범 'The Red Summer'의 모든 프로듀싱을 이수만이 담당했음[26]을 밝히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전작인 레드벨벳의 네 번째 미니 앨범 'Rookie'는 레드벨벳 특유의 컨셉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전보다 저조한 성적으로 아쉬움을 샀는데, '빨간 맛'이 여름은 물론이고 2017년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기 때문. 고령의 나이로 현 가요계의 한 계절을 휩쓸었으니 물밑에 가려진 그의 실력과 센스를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다. Zimzalabim 등 몇몇 곡이 선곡 미스라는 평을 받으며 감이 떨어졌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어김없이 'Psycho' 등 후속 활동에서 죽지 않은 프로듀싱 능력을 보여주며 다시금 대중들에게 인정받았다.

  • 2019년 10월 대한민국 국회는 'SM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의혹’에 대해 질의하기 위해 여야 합의로 이수만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했고, 출석을 요구했으나 미국 해외출장으로 국감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 지난 2016년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감에도 참고인으로 채택됐으나 외국 출장으로 불출석했다. 한편 이 때문에 설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27]


  • 2000년대 중반에 보아를 통해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가 크게 실패하고 한동안 미국시장에 관심이 없어진듯 보였으나,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1위와 미국 시장 성공에 자극을 받은듯 2018년을 기점으로 미국 진출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고 있다. 미국병/미국 진출 참조.

  • 2005년에 한류스타 병역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줘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연예계 병역비리 논란들 때문에 이 얘기를 했다가 엄청난 비난 여론이 일었는데, 개나 소나 해주자는 게 아니라 해외에서 K-POP을 알리는 데에 공을 세운 이들을 주자는 얘기이다. "오피니언 리더[28]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10명 정도 선에서 군 복무를 면제해주는 것도 한 방안이다. 모든 연예인이 국내 1등 보다는 해외에서 1등 할 수 있게 토양을 만들어 줘야 할 때다."라고 답변했었다. 당시 동방신기오리콘 차트에서 7위를 기록했고, 중국 진출을 앞두고 있었는데 하필 군대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H.O.T.의 중국 진출도 당시 박지원김한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29]의 푸시가 있었기 때문에 멀티 여권으로 가능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쉬웠던 모양. 이 당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30] 이후 약 15년이 지난 2020년 방탄소년단Dynamite빌보드 차트 Hot 100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1위를 달성하자,[31] 다시 한 번 군대 문제에 대한 병역혜택을 줘야 한다는 얘기가 거론되었고 실제로 SM을 포함한 여러 엔터사들이 모여 병례특례법과 관련해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 모임은 유례없는 신기록을 세운 방탄소년단의 소속사 빅히트는 참석하지 않은 자리에서 진행되었고, 방탄소년단이 차린 밥상에 이수만과 기타 엔터사들이 숟가락을 얹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 2021년 3월, 미국 A뉴스의 한국지국장인 한국인 여성 기자[32] J씨(52)[33]에게 청담동 고급 빌라를 증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빌라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전용면적 196.42㎡ 규모 상지리츠빌 카일룸 3차 아파트로 최근 거래가는 약 50억 원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현재 SM 측은 "회사와 전혀 관련 없는 개인적 사안으로, 확인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 이수만은 aespa 세계관에 등장하는 주요단어 KWANGYAnævis의 상표권 등록을 마쳤다. 이를 통해 SM에스파 세계관에 진심임을 알 수 있는 대목. 이수만이 춘 넥스트레벨 디귿춤은 그 표정이 워낙 절묘해서 짤방으로 남았다.


  • 다른 가수나 아이돌들의 프로듀싱에 제작총괄로 이름을 올려주기도 하는데, 김세정, 청하, 이진솔, 이달의 소녀 등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2022년 2월, KAIST에서 이수만을 전산학부 초빙석학교수로 초빙하였다. 임기는 2025년까지로 3년이다.

[1] 이 영상에서는 CAWMAN이라 나온다.[2] 효령대군파 44세손 '秀'자 항렬. 두 아들은 45세손 '揆'자 항렬이다.[3]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이지만, 6.25 전쟁 당시 부모님이 잠시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 동래구에 있는 피난지에서 태어났다.#[4] 친형들은 2명이 있고 1명이 소녀시대써니의 아버지이다.(본인은 써니의 작은아버지다.)또 다른형은 부인이 오세훈 서울시장의 은사이다.[5] 2014년에 소장암 재발로 별세했다.[6] 이경규의 아명과 동명이인이다. 심지어 본관도 항렬도 동일하다.[7] 병역면제로 추정. 군복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72년에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미국 유학 생활까지 이력은 상세히 알려져 있으며 군복무 기간없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8] 실제로 이수만이 미국에 있을 때 만들어진 별명으로, "수"와 발음이 비슷한 "소"의 영어인 COW MAN을 합쳐서 만들었다. 이는 SMCU 에피소드 영상의 주요 기법인 CAWMAN을 작명하는 데 영향을 준다.[9] 1952년 당시의 부산은 직할시가 아니였고 구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부산에 구제가 시행된건 1957년, 직할시 승격은 1963년에 이뤄졌다.[10] 워낙 오래 전부터 연예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연예계에서도 최고참급 선배 스타들은 스스럼없이 '수만이'라고 부른다. 제일 대표적인 사례가 꽃보다 할배 대만 편인데 이수만의 조카이자 소녀시대의 멤버인 써니가 스케줄 때문에 대만을 떠나야 할 상황이 되자 당시 출연한 은 대뜸 "우리가 책임질테니 수만이한테 전화 걸어!"라고 말하기도 했다.[11] H.O.T.와 젝스키스도 따지고 보면 H.O.T.가 확고한 1인자, 젝스키스가 확고한 1.5인자의 위치였다. S.E.S.와 핑클도 S.E.S.가 압도적이었다. S.E.S.가 당시 가수의 가장 성공 척도인 음반 판매량에서 무려 121만 장이라는 넘사벽이라는 차이로 앞섰고, 1위 맞대결이나 시상식 여성그룹 부문 수상 대결도 항상 이겼다. 핑클은 예능이라는 예능은 안 가리고 다 나오며 개그테이너 걸그룹으로 더 활약했다. 대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핑클의 음반 판매량은 59만 장으로 대상받을 성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개된 1999년 SBS 가요대전 점수 항목 지표에서도 대상을 탈만한 지표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당시 SBS는 대성기획과 친밀한 관계였고, SM은 그해 SBS와 싸우고 있어서 방송 금지를 당하고 시상식에서도 보이콧을 당해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않는 등 피해를 본 상황이었다. 이후 동방신기와 SS501도 라이벌로 묶였지만, H.O.T. vs 젝스키스와 같은 위치였다. 이후의 그룹들에서 굳이 엮자면 소녀시대와 카라가 있지만, 소녀시대의 최대 라이벌은 JYP의 원더걸스이다. 카라는 일본 진출이라는 제3의 길로 성공한 케이스.[12] 現 농업생명과학대학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바이오시스템공학전공으로 당시 농공학과는 농업토목전공과 농업기계전공으로 나뉘어 있었다.[13] 12대 별밤지기, 이문세가 14대였다. 재밌는 점은 현재 별밤지기(25대)가 강타, SM이라는 한 회사의 대표와 이사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경력을 나란히 가진 이례적인 케이스라서 잠깐 화제가 되었었다.[14] 실제로 2013년 배철수가 진행 도중에 이수만 선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15] 참고로 이수만 이전에는 강석손석희가 맡기도 했다.[16] 얼굴형이 긴 탓에 말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마상트리오가 됐다. 긴 얼굴의 3인방이라고 해서 마삼트리오(馬三 Trio)라고도 부른다. 제1회 MBC 강변가요제 금상을 탔던 홍삼트리오의 이름에서 파생되기도 했다.[17] 사실 가수로 활발히 활동할 때부터 MC를 여러 번 맡았다. MBC 대학가요제에서는 1977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한동안 고정 MC로 활동한 바 있고 이상은의 데뷔 무대로 알려진 MBC 강변가요제에서도 사회를 봤다.[18] 13억의 중국, 1억 2천만의 일본에 비해 5천만명의 한국이 이득이 가장 높기 때문.[19] 입장 바꿔 생각해 보자면, 중국 국적을 달고 있는 이상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 순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세계적 규모의 기업인 알리바바를 이끄는 마윈 회장마저도 공산당에게 눈도장을 잘못 찍혔다가 곤욕을 치루는 걸 보면, 일개 개인으로선 중국 공산당이 은연중으로 가해오는 압력을 버티고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는 건 너무도 무모한 짓이다. 물론 이러한 특수성이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못한다.[20]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21] 프로듀서 이수만은 한국 가요계에 혁신을 가져온 아이콘이자 70이 넘는 나이에도 트렌디함을 유지하는 유능한 이미지이지만, 기업인 이수만은 자신이 하는 트렌디한 음악과는 달리 낡아빠진 경영 방식을 고수하고, 상장까지 한 회사의 자산을 사유재산처럼 여기며 무리한 사업확장을 하다가 말아먹은 것이 한두건이 아니며, 주주들을 개무시하며 자신의 개인회사로 수익을 돌려막기 한 최악의 기업인이다. 심지어 기업인 이수만은 횡령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노무현 정부때 겨우 사면된 적 있는 경제사범이다.[22] 당시 노래를 못하는 아이돌의 존재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굉장히 커서, 음악방송들은 자체적으로 립싱크하는 무대에 립싱크중이라고 마크를 달거나 아예 립싱크를 없애고 강제 라이브를 시킬 정도였다. 유튜브에 공개된 90년대 말~00년대 초반 음악방송은 대부분 이런 형태이다.[23] 후일담으로 박명수의 라디오쇼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수만이 정말 대우를 잘 해줬다고 한다. 현재도 SM과 박명수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다.[24] 박진영 입장에서는 오디션 재도전 시 탈락 내지 가수가 아닌 프로듀서로서의 영입으로 인해 '날 떠나지마'를 비롯한 자신의 자작곡들까지 빼앗길 것을 염려한 듯 하다.[25] 일본은 일찍부터 소니의 Livespire 등 콘서트 실황 중계 시스템이 발달해 있다.[26] 멜로디라인과 리듬을 비롯한 믹싱 작업은 물론이고 안무까지 맡았다고 한다.[27] 물론 그렇다고 이수만이 생전의 설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28] 문화평론가, 소속사 대표, 문화부장관 등의 연예계에 정통한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의미였다.[29]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문화관광부 장관이였다.[30] 가끔 스티브유가 이 때 얘기를 하긴 하는데, 스티브유는 국내에서나 유명했던 가수지, 해외에서는 듣보잡이였다. 그래서 한류가수라고 뻥쳤다가 욕 먹었던 것이다.[31] 종전 기록은 싸이 강남스타일의 2위.[32] 국내 기자일 경우 김영란법이 적용되지만, 한국지부 외신기자는 해당되지 않는다.[33] 한국인으로 미국 유수 언론사의 한국지국장에 오른 사례가 매우 드물어 국내 방송에 다수 출연한 유명인이다. 에스파의 멤버 지젤과 깊은 친분이 있는 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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