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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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이소룡

1. 개요
2. 어린 시절
3. 도미(渡美) 후
4.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
5. 홍콩 귀국과 대성공
6. 사망
6.1. 죽음과 그에 얽힌 소문


1. 개요[편집]


이소룡의 생애와 관련된 내용이다.


2. 어린 시절[편집]


파일:Bruce Lee as a Baby with his Parents.jpg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영국 혼혈[1][2]인 어머니 하애유(何愛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 가족 중 하나인 하동가족(何東家族)[3][4]의 자손 중 하나로 명문가의 자손인 셈이다.

출생 이후에는 부모님의 고향인 홍콩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직업 덕분에 이소룡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 영화 금문녀에 나온 이후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5] 예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소해천이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친구가 길을 지나다가 길거리 경극 공연에서, "...대룡이 소룡을 낳으니 곧 이어지는구나!"라는 대사를 듣고, 대룡이 이해천이라면 진번은 소룡이 어떻겠느냐고 권해서 지었다고 한다.

성인이 된 이후의 강인한 이미지와는 달리 어릴 적에는 몸이 몹시 연약해서 잔병을 달고 살다시피 했다고 하며, 7살 되던 무렵 신체 단련을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술에 입문하게 됐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이 과거 홍가권을 배웠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무술의 기본이 된 영춘권엽문에게 배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엽문에게 배운 적이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상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가르쳤던 이는 엽문의 제자인 황순량(黃淳樑)이었다. 그리고 이소룡을 영춘권에 입문시킨 사람은 황순량의 사제(師弟)인 장탁경(張卓慶)이었다.[6] 황순량이 이소룡보다 5살 연상이었기에, 노사(老師)라기보다는 사형(師兄)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그 외 같은 남권계열로 광동성의 유명한 권법이었던 채리불권(蔡李佛拳)을 익혔다. 원래 남권 유파들은 예부터 가족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풍속이 있던 분위기라서, 영춘권과 가까웠던 채리불권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이소룡의 하단 공격기술들은 영춘권이 아니라 채리불권의 초식에 가깝다는 말도 있다.

다만 쿵후의 고수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렸을 때는 끈기가 없어 금방 싫증을 내곤 하여 한 무술을 오래 배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나마 오래 한 무술은 영춘권 정도였는데, 13세에 영춘권에 입문했으니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약 4년 배웠다. 근시라서 접근전에 유용한 무술을 찾다 보니 극단적으로 접근전 위주의 권법인 영춘권을 택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릴 때는 TV 등에서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해서 인기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골목대장에 가까웠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부모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는 불량학생이며, 매일같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탈은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 삼합회 간부의 아들과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경찰이 찾아와서, “한 번만 더 당신 아들이 싸움을 벌인다면, 녀석을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7] 그래서 1959년 4월, 부모는 이소룡에게 100달러를 쥐어주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이해천의 누나, 이추봉(李秋鳳, Agnes Lee)에게 보냈다고 한다.[8] 그리고 미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이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미국 시민권이 있었다는 까닭도 있었다.


3. 도미(渡美) 후[편집]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로 옮겨가 에디슨 기술 고등학교에서 과정을 이수하였고, 그의 아버지와 친구였던 이충침(李忠琛)의 아내가 운영한 Ruby Chow라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9] 고교 과정을 마치고, 1961년, 워싱턴 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간다. 출처 이 때부터 이후 알려진 독서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는지, 철학, 심리학 서적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영춘권을 비교적 오래 수련했을 뿐, 다른 무술들은 금방 싫증을 내곤 했던 어릴 때와는 좀 다르게 더 본격적으로 복싱, 유도, 사바트, 태권도, 가라테, 말레이시아 권법 등 여러 무술을 접해 나아갔다.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고, 좋게 말하면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그의 면이 특정 무술의 형태나 한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신체 특성이나 스타일에 맞는 프리스타일 파이팅을 추구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고, 나중에 절권도의 이념이 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59년부터 본인의 이름을 딴 진번쿵후(振藩功夫, Jun Fan Gung Fu)라는 간판을 내걸고 무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당시 인근에 있던 가필드 고등학교라는 학교에 무술 시범 차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 학교 여고생들 중 린다 C. 에머리(Linda C. Emery, 1945~)가 있었다. 그녀는 이소룡의 쿵후 제자가 된 이후 교사가 되려고 이소룡과 같은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1964년 8월 17일에 그와 결혼하면서 졸업까지 불과 몇 학점만을 남겨둔 채로 대학을 중퇴하게 된다. 출처 그리고 이소룡이 사망하고 1988년, 톰 블리커와 재혼했다가 1990년에 이혼, 1991년에는 브루스 캐드웰(Bruce Cadwell)과 결혼, 지금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이름은 린다 리 캐드웰(Linda Lee Cadwell)이다.

이소룡의 20대 초반 시절, 진번쿵후의 주요 골격은 영춘권을 기반으로 채리불권, 홍가권 등등의 남권에 기반하고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대의 다양한 무술에 비해 건설적인 변화와 발전이 부족했던 중국의 남파권법을 크게 개신(改新)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어 기존의 체계를 없애 버리고 새로 절권도를 만들 때는, 펜싱과 복싱, 레슬링을 조합한 서양 무술 위주의 뼈대를 바탕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4.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편집]


상술되었듯 이소룡은 아버지의 직업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연극을 택할 정도로 배우를 꿈꾼 인물이다. 그러나 1959~1964년까지 열심히 노력했으나 끼니를 걱정하게 될 정도로 난항이 거듭되어 1964년에는 마침내 꿈을 포기하고 무술에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자신의 무술을 홍보하려 인맥을 동원해 롱 비치 가라테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초청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무술 시범을 눈여겨본 윌리엄 도지어(William McElroy Dozier)라는 인물이 1964년 그의 기획 《Number One Son》의 배역에 오디션을 보게 도와 준다. 이 시도는 최종적으로 불발되었으나, 밴 윌리엄스(Van Willams)와 함께 TV 시리즈 《그린 호넷》의 케이토(Kato, 加藤)[10] 역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아 배역을 따 낸다. 이 드라마는 1966~1967년까지 단 한 시즌만 방영되었을 정도로 반응이 신통찮았으나 《배트맨》과의 크로스오버 에피소드에 몇 번 더 출연할 수 있었고, 이후 TV의 《아이언사이드(Ironside)》(1967), 《신부들이 온다(Here Come the Brides)》(1969), 《블론디(Blondie)》(1969)의 찬조출연(guest appearance)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이소룡의 제자들 중 할리우드 각본가 스털링 실리펀트[11]와 배우 제임스 코번이 있었는데, 이 둘은 이소룡과 함께 1969년 《소리 없는 피리(The Silent Flute)》 각본을 쓰고, 인도로 촬영지 답사를 가기도 했다. 이 각본은 무산됐지만 1978년 데이비드 캐러딘 주연의 《서클 오브 아이언(Circle of Iron)》에서 활용되었다. 1969년, 이소룡은 스털링이 각본에 참여한 덕에 《말로우(Marlowe)》[12]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주인공의 사무실로 찾아와 깽판을 치는 장면에서 감독은 이소룡의 재량에 맡겨 적당히 깽판을 부려 달라고 주문했고, 이에 곧이곧대로 따른 이소룡은 맹렬한 날아차기로 전등을 박살내고 주먹질로 책상을 반토막 내는 등 방 안에 있는 기물들을 짐승같은 몸놀림으로 박살내며 필요 이상으로 그 역할을 잘 수행해 냈다. 이 때 감독, 촬영 스탭, 배우들 등등 모든 인원들이 듣도보도 못한 방식으로 아스트랄하고 과격하게 기물들을 때려 부수는 모습에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 3분 34초부터

그리고 딘 마틴, 샤론 테이트 주연에 척 노리스도 잠시 나오는 《The Wrecking Crew》에서, 실리펀트의 도움으로 무술지도를 맡을 수 있었고, 역시 실리펀트가 각본을 쓴 덕에 잉그리드 버그먼, 앤서니 퀸 주연의 《봄비 속을(A Walk in the Spring Rain)》(1970)의 격투장면 연출도 맡을 수 있었다. 1971년 TV 시리즈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주연 마이크 롱스트리트(제임스 프랜시스커스 분)의 무술교사로 얼굴을 내밀었다. 제자인 실리펀트가 각본을 맡았기에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 철학을 일부나마 자신의 대사로 넣을 수 있었다.

이소룡이나 린다 리 캐드웰에 의하면 1971년 이소룡은 《전사(The Warrior)》라는 제목의 TV 시리즈를 구상했고, 이는 워너 브라더스도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1971년 12월 9일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의 주장에 의하면, 파라마운트워너 브라더스는 서구적인 부분이 결여되었으니 그런 면을 더 넣어서 현대적으로 다듬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소룡의 그 구상은 이후 다듬어져 《쿵푸(Kung-Fu)》로 개명되었지만 워너 브라더스는 이소룡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너 측의 말은 공식 입장은 이와 다른데, ‘그들이 우리 작품과 동일한 컨셉을 잠시 구상했기는 했지만 우리 작품은 다른 각본가들과 제작자들, 즉 에드 스필먼(Ed Spielman)과 하워드 프리들랜더(Howard Friedlander)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여러 증언들과 증거들을 검토해 보면 이소룡이 캐스팅되지 못한 것은 그가 동아시아인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주된 원인은 그의 투박한 영어 발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부시대의 소림승 역할은 데이비드 캐러딘에게 돌아갔다는 것. 그러나 이소룡 본인은 크게 기분나빠하지 않았던 듯하다.《The Pierre Berton Show》에 출연해서 이 일화에 대해 '자신은 워너 브라더스의 입장을 이해하며,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으니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만약 미국인 스타가 홍콩으로 왔는데 내가 제작비를 대는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 그런 걱정을 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이렇듯 이소룡은 인맥을 동원하고 각본을 쓰는 등 여러 가지로 애를 썼지만, 조연이나 찬조출연이 전부였기에 실망하고 좌절하던 차였다. 이를 계속 지켜보던 제작자 프레드 웨인트라웁(Fred Weintraub)은, 이소룡에게 무작정 기반 없이 활동하려 하기보다는 홍콩으로 돌아가서 할리우드 제작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찍어 와 보라고 충고한다. 쉽게 말하자면 더 나은 환경에서 커리어를 쌓고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결국 홍콩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이소룡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머지않아 신의 한 수가 된다.


5. 홍콩 귀국과 대성공[편집]


당시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는 왕우(王羽) 주연의 《용호투(龍虎鬪, The Chinese Boxer)》(1970)가 대성공하며 이전의 무협영화, 검술영화가 아닌 맨손, 맨몸으로 싸우는 무술영화가 뜨고 있었다. 친구인 소기린도 이소룡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홍콩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 호넷》의 케이토 역이 중국인이라는 것이 홍보되었기에 인기가 없어 한 시즌 방영에 그친 미국과는 달리, 중국식 제목은 《청봉협(青蜂侠)》이었지만 홍콩에서 비공식적으로는 《Kato Show》로 알려질 정도로 성공했었다. 이소룡은 이후 자신이 막 홍콩에 돌아왔을 때 홍콩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서 놀랐다고 술회했다.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이소룡은 홍콩 최대의 영화사인 쇼 브라더스(Shaw Brothers: 소씨제편창邵氏製片廠)로 가서 면접을 보았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웬 바짝 마른 건달 비슷한 놈이 미국물 먹었답시고 예의도 안 차리고 건들거리면서 들어와서는 자기를 주연으로 해서 영화 찍으라고 해대니 사장이 불쾌해 하면서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 이소룡을 잡은 게 쇼 브라더스에서 독립해 나와 가화오락유한공사(嘉禾娛樂有限公司), 즉 추문회(鄒文懷)가 세운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와 두 편의 영화계약을 체결했다.[13]

그의 첫 작품인 《당산대형》(1971)으로 흥행기록을 세워 스타가 되었고 연이어 《정무문》(1972)으로 그 기록을 경신했다. 골든하베스트와 계약을 마무리한 뒤에는 협화전영공사를 설립해 스스로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을 맡은 《맹룡과강》(1972)으로 다시 신기록을 세웠다.

1972년에는 골든하베스트와 함께 《사망유희》를 기획하려던 그때 워너 브라더스에서 《용쟁호투》를 골든하베스트와 합작으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스타시즈(Starseas) 영화사와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던 이소룡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소기린[14] 주연의 영화 《기린장(麒麟掌, Fist of Unicorn)》의 무술지도를 도와주기로 슬쩍 동의만 해주었는데 이 영화를 제작사가 마치 이소룡 주연인 것처럼 홍보하자 당연히 주연으로 계약한 자신을 개무시했으니 소기린 역시 이에 분노했다고 한다. 소기린은 배우로서 조연배우로 좀 활동하고 되려, 이소룡 친구로서 이런 점으로 알려졌을 뿐, 배우로서 이미지나 여러 모로 듣보잡이었다. 기린장만 봐도 제작자가 왜 저런 짓을 했는지, 소기린이 미덥지 못해 저런 것이라고 이해한다는 의견까지 있을 정도였다.[15]


6. 사망[편집]


《용쟁호투》 촬영을 마무리하고 몇 개월 후, 7월 26일 개봉을 6일 앞둔 1973년 7월 20일, 그의 애인으로 소문이 파다했던 여배우 정패(丁珮 Betty Ting Pei)의 집 침대 위에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16] 정패는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해서 진통제를 주었는데, 이소룡이 그걸 먹은 후 잠든 뒤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6.1. 죽음과 그에 얽힌 소문[편집]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부검의나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등 상당히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복상사라느니 마약중독사라느니 등등 각종 소문이 무지하게 많지만, 공식적인 사인은 복용 약품 부작용과 그로 인한 뇌부종이다.

상당히 신화적인 인물이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려서 허황된 음모론들이 양산됐다. 아래는 그 중 일부.

  • 중국 무술계 또는 삼합회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 복상사다.[17]
  • 이소룡 가문의 저주다.[18]
  • 이소룡의 친구였던 이준구는 누군가[19]가 그를 살해한 거라고 주장했다.
  • 쇼 브라더스에 스카우트되었다가 나중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한 정창화 감독은, 이소룡을 붙잡아 두기 위해 제작자 레이몬드 초우가 미인계와 마약까지 사용하다 부작용으로 숨졌다고 주장했다.
  • 아시아인이 할리우드에서 주연으로 성공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할리우드 백인우월주의자가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맥락의 얘기는 《고르고13》에서도 나온다.

이소룡이 자신이 오래가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을 예상했다는 주장도 있다. 《용쟁호투》 기획 이전부터 심한 두통을 호소했고, 만성적인 간질로 인해 기절해서 몇 시간씩 정신을 못 차린 적도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용쟁호투》 출연 당시 악당 두목 한을 맡은 석견에게 "아저씨[20], 아무래도 제가 아저씨보다 먼저 죽을 것 같아요." 라고 했다고 한다. 아내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죽기 몇 달 전에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었고 아내에게는 내가 죽으면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My Way》, 블러드, 스웻 & 티어스(Blood, Sweat & Tears)의 《And When I Die》[21] 등등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장례식 때 틀어달라고 했다. 실제 장례식 때 그가 좋아하던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2006년, 의학계 일각에서, '돌발성 간질로 인한 급사'(SUDEP)를 그의 사인으로 내세운 적도 있다. SUDEP는 그가 쓰러진 지 22년 뒤인 1995년 의학계에 처음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사망 당시에는 제시되지 않았다.#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소룡은 무술가로서 생명이 끊길 정도의 허리부상[22]을 극복하기 위해 코르티손이라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주기적으로 주입하였고[23], 이것이 부신성 위기를 초래하여 뇌혈관이 터져 사망에 이르렀다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부검 결과가 발표되었다.

2022년에는 이소룡이 수분 과섭취로 인한 저나트륨 증세로 사망했다는 설이 의사들 사이에서 유력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궁금해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고 싶다.(People still wonder about the way he died. I prefer to remember the way he lived)"[24]



파일:external/bruceleefansite.com/brandonlee.jpg

미국 시애틀 레이크 뷰 공원묘지에 위치한 이소룡의 무덤.[25] 묘비명은 절권도의 창시자(Founder of Jeet Kune Do).
오른쪽은 그의 아들 브랜든 리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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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애유의 아버지인 하감당은 중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영국계인데 하감당의 정부였다. 하지만 하애유가 태어나자 다른 정부였었던 장경선이 양모가 되었다고 한다(장경선이 영국계인 것이 아니다). 한때는 하애유가 독일계 혼혈로 알려져 있었으나 하애유의 증언과 추가 조사에 따르면 영국계가 맞다고 한다. 이해천 부부가 미국 투어를 떠났다가 홍콩으로 돌아왔을 때 일본이 홍콩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하애유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영국계라고 제출했지만 홍콩에 돌아왔을 때는 독일계라고 제출했다고 한다. 이는 일본이 독일과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신변의 위기를 느껴 거짓 보고를 한 것인데, 이것이 독일계라고 잘못 알려진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2] 당시 '순수 한족이 아니면 중국 권법을 배울 수 없다'는 보수적인 중국 무술계의 이념 때문에, 이러한 이소룡의 출생 배경은 그가 영춘권을 배울 때 선배들로부터 구박받는 이유가 되었다.[3] 홍콩에 정착하며 하사문(何仕文)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 네덜란드의 무역상 보스만(Bosman)이 이 가문의 선조이며, 그의 자손들도 사업을 번성시키며 명문가문으로 성장한다. 다만 하애유의 아버지인 하감당은 하동가족의 친아들이 아니며 중국인이라고 한다.[4] 나머지 세 곳은 나문금(羅文錦), 고가녕(高可寧), 이희신(利希慎) 또는 부노용(傅老榕)이다. 이중 하동가족이 제일 세가 크다. 여기서 하동가족은 하계동(何啟東)이라 불리기도 한다.[5] 다큐멘터리 《I AM BRUCE LEE》에 의하면 당시로서는 맥컬리 컬킨의 리즈시절 정도였다고도 하지만 근거는 약하다. 과거 자료들을 조사해 보더라도 어린 이소룡이 주연급으로 나온 작품은 많지 않고, 있어도 흥행하지 못한 작품들이며, 대부분 조연이나 단역 정도에 불과했다.[6] 다큐멘터리 영화, 《李小龙的生与死, Bruce Lee The Man and the Legend》(1973)에 나온 황순량은 이소룡에 대해, 그가 스승과 기술을 독점하려고 속임수를 썼던 이야기를 한다. 일찍 수련하러 나와서 입구에서 다른 수련생들이 오길 기다렸다가, 오늘은 노사께서 안 계시니 수업이 없다며 돌려보내는 걸 반복한 것이다. 이를 알아챈 황순량은 다른 수련생들을 모아서 소규모의 시합을 갖게 했는데, 이소룡은 1회전에서 다른 수련생에게 엉망으로 얻어터졌고, 기가 꺾인 이소룡을 다독이며 훈계했다고 한다. Fortune Star 출시 DVD판 기준, 25:00~27:35[7] Bruce Lee: the immortal Dragon, January 29, 2002, A&E Television Networks[8] 영화 《드래곤: 브루스 리 스토리》에서는 무도회장에서 술 먹고 난동을 부리던 영국 해군을 두들겨 팬 것으로 나오지만, 이 영화 자체가 이소룡 가문의 저주가 어쩌고 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뒤섞인 오락 영화일 뿐 다큐멘터리가 아니므로 신빙성은 없다.[9] 미국에 오고 한동안은 당시 미국에 살던 대부분의 동양인과 다를 바 없이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버스로 출퇴근을 했다.[10] 일본식 이름이고 설정상으로도 일본인이니 카토 혹은 가토로 불러야 맞겠지만, 알파벳 표기인 Kato를 미국식 영어로 케이토라고 읽는 탓에 다들 케이토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11] Stirling Silliphant,1918~1996. 타워링 각본으로도 유명했다. 여담인데 미스터리 과학 극장 3000에 나온 영화 마노스 운명의 손을 감독한 할 워렌이 바로 이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눠서 도박으로 돈을 번 워렌이 생전 처음, 영화감독, 주연, 편집 등으로 영화를 만들어 길이길이 남을 괴작이 탄생해버린 게 바로 이 마노스였다... 실리펀트는 이 영화에 대하여 그 어떤 말도 하지않고 워렌에 대하여 입을 다물었다고.[12] 하드보일드 류의 전설이 된 필립 말로 시리즈가 영화화된 것들 중 하나.[13] 이후 쇼 브라더스는 성룡에게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성룡을 붙잡아 적극 후원한 것도 추문회였다. 쇼 브라더스는 두 마리 용을 다 놓치고, 추문회는 두 마리 용을 다 붙잡은 셈이다. 여배우 정패에 대해서도 좀 더 알 수 있다.[14] 1940~1987. 《맹룡과강》에서 이소룡을 처음에는 못마땅해 하며 얕보던 식당 종업원으로 나온다. 정무문에서도 조역으로 나왔었다. 아무튼 배우로 활동했으나 주연인 영화 기린장은 링크된 곳 정보를 봐도 잊혀진 아류작 신세이며 조연으로 좀 나오다가 말레이시아로 가서 살다가 1987년 교통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15] 여담으로 기린장 촬영감독인 위해봉은 광동소노호(廣東小老虎, 1971)를 만든 인물인데, 바로 성룡이 처음으로 주연했으나 그 허접성에 성룡도 언급을 꺼리고 2년 동안 개봉도 못했던 영화이다. 73년에서야 개봉해 철저하게 묻혀진 걸 취권이 대박을 거두면서 1979년 금흠 감독에 의해 조수괴초(刁手怪招)라는 제목으로 재편집했다. 이젠 대스타가 되어버린 성룡을 쓸 수 없으니 대역을 눈을 가리고 싸우게 하는 투로 재촬영하여 섞여놓았던 괴작으로 한국에서 1986년쯤에 삼화비디오에서 "영웅아용"이란 제목으로 비디오를 낸 것을 1989년 취권 개봉 10주년이라며 조수괴초란 제목으로 개봉해 욕만 쳐먹었다. 당시 영화월간지 로드쇼에서 독자 감상란으로 대역을 성룡이라고 나오게 하는 씬이 참 허접이고 성룡 아니라는 거 다 드러났다라고 엄청 분노어린 악평을 할 정도였다. 서울관객 2만 3천여명을 기록하며 흥행은 실패했다. 그리고, 2015년에 조수괴초란 제목으로 또 난데없이 재개봉했는데 딱 1개관에서 상영해 관객 4명을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16] 병원 이송 중에 사망했다는 설도 존재한다.[17] 이소룡의 정부(情婦)로 소문난 정패의 집 침대 위에서 숨져서 이런 소문이 돌았고, 정패는 이소룡의 팬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18] 아들인 이국호, 즉 브랜든 리가 영화 《크로우》 촬영 중 총기 오발 사고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영화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의 캐릭터가 사경을 헤맨 것과 같은 방식이라서 저주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풍수신동이던 소년(성링루 : 1917~1929. 향년 12세)이 죽으면서 자신의 자리엔 그 누구도 와선 안된다고 예언했지만 이소룡의 할아버지가 이 곳에 묻히고 난 뒤 풍수신동의 영혼이 나타나 이소룡의 아버지는 64세에 죽고, 이소룡은 32세에 죽는다 예언한 뒤 이소룡의 아들까지 단명하여 이소룡 가의 직계손은 끊어진다는 저주를 남겼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소룡은 연 나이로 예언보다 1년 더 살았다. 이 저주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고, 프리한 19 '하늘의 별이 된 우리들의 스타 19'편에서도 소개되었다.[19] 예를 들어 그의 출연으로 인기가 떨어진 홍콩배우가 독살했다든지, 경쟁 영화사가 살해했다든지 등의 주장이다. 다만 이준구는 암살 주체를 누군가로 딱 집어서 지칭한 적은 없다고 한다.[20] 석견은 이소룡 아버지와 친구였다.[21] 이 제목도 암시적이다.[22] 척추 부상에 관해서 이소룡의 부인인 린다의 증언이 있는데, 1970년 8월 13일, 이소룡은 61kg이라는 과도한 중량으로 굿모닝 리프트 운동을 하다가 척추4번 천골신경에 심각한 손상이 왔다고 한다. 이로 인해 6개월간 입원하는 등 고통을 겪었고, 주위에 그 운동의 위험성을 열성으로 전파했다고 한다. 상당히 큰 부상이었던 듯한데, 주치의로부터 다시는 발차기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23] 코르티코 스테로이드로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이 근육 붙이려고 맞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는 다르며, 심한 염증과 통증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24] 이소룡의 전기 영화 《드래곤: 브루스 리 스토리》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아내 린다의 독백이다. 린다가 실제로도 이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영화에만 나오는 대사인지는 확인 요망.[25] 영문 이름은 Bruce Lee, 한자 이름은 본명인 이진번(李振藩)으로 비석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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