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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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李相龍 | Yi Sang-Ryong


파일:이상룡_1.jpg

출생
1858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
사망
1932년 6월 15일
중국 지린성 서란 소성자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제강점기 조선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대한민국(임시정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South_Korea_%281984-1997%29.svg.png 대한민국
본관
고성 이씨[1]
별칭
자(字): 만초(萬初)
호(號): 석주(石洲)
보명(譜名): 이상희(李象羲)[2]
직업
정치가, 독립운동가
재임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1925년 9월 ~ 1926년 1월
정당
무소속
종교
유교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와 의병활동
2.2. 계몽운동
2.3.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2.4. 말년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와 의병활동[편집]


이상룡은 1858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안동군 법흥동[3]에서 이승목(李承穆)과 안동 권씨 권진하(權鎭夏)의 딸[4]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속한 고성 이씨 가문은 조선 전기에는 지속적으로 현관을 배출한 유력 가문이었지만, 조선 후기 노론이 집권한 후에는 남인에 속한 그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성 이씨 가문은 안동의 유력한 사족으로서, 학문 및 혈연간의 유대를 강화했으며, 혼인을 통해 인근의 유력한 양반 가문과의 결속을 강하게 형성했다.

가령 이상룡의 조부 이종태(李鍾泰)는 의성 김씨 종손인 김진화(金鎭華)의 딸[5]을 배필로 맞이했다. 또한 이종태의 누이는 김도화에게 시집갔고, 이상룡의 부친 이승목은 안동 권씨 권진하(權鎭夏)의 딸과 결혼해 이상룡을 낳았다. 따라서 을미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권세연은 이상룡의 외숙부이다. 이렇듯 의성 김씨 및 안동 권씨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에, 이상룡이 거주하는 임청각에는 경상도 일대의 이름 높은 유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상룡은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김흥락(金興洛)이었다.

김흥락은 이황, 김성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는 퇴계 학통의 맥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이상룡은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동문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그는 퇴계학설을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별하는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을 지지했으며, 사단칠정론에 있어서도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원리적으로 구별하는 입장을 취했다.

1886년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한 그는 유람을 하다가 1년 후 고향으로 돌아온 후 재야 사족으로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던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안동의 여론은 들끓었고 외숙부인 권세연과 스승 김흥락, 김도화 등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 이상룡은 조부 이종태의 상을 치르는 중이라서 직접 의병에 가담하지는 못하고 막후에서 지원했다. 그는 병법에 조예가 상당했다고 하며, 그가 남긴 유고 가운데 병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무감(武藍)>이라는 저서도 있다.

1896년 2월 외숙부 권세연이 이끄는 안동의진은 관군에게 패했고, 권세연은 김도화에게 대장 직을 맡겼다. 이상룡은 김도화에게 보낸 펀지에서 의병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 진영을 보십시오. 무슨 의지할 방비가 있습니까? 갑옷과 투구가 있습니까? 벌거벗은 맨 몸뚱이의 병졸들이 다만 짧은 총 하나를 가지고 탄환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속으로 달려간다면 비록 사람마다 사마양저와 같은 병법의 대가라고 하더라도 지탱할 수 없을 겁니다.

(중략)

언젠가 진중에서 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모두 세립을 쓰고 짚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세립과 짚신이 어찌 전장에 가당이나 합니까?


이렇듯 의병의 한계를 명확하게 의식한 이상룡이었지만, 그는 유학자로서 비록 승산은 없을 지라도 국혼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사고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1900년에는 서원 복설을 청해 유교 질서의 회복을 설파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의병을 직접 조직하였다. 그는 매부인 박경종과 함께 마련한 15,000금에다가 이규명의 10.000금과 남세기(南世械)의 20두락으로 군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거창의 차성충을 의병장으로 삼아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였다. 이 상룡 · 이규명 · 차성충 등은 가야산을 근거지로 삼고 2년여의 준비 끝에 1908년 거창에서 거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 되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무기를 빼앗기고 군사가 흩어지게 되었다. 이에 차성충은 거창에서 안동으로 피신했다. 이후 이상룡은 신돌석, 김상태 의병장의 부대와 연합 작전을 구사하려 했지만 그들이 살해되거나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그는 <우음(偶哈)>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한탄했다.

오십년간 공맹서를 읽었건마는

누에실같은 얽힌 의리 빠짐없이 분석해 놓았네.

결국에는 빈말에 불과하니 어찌 도움이 되랴

돌아보니 사람 옷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네.

(중략)

둥둥 울리는 저 북소리 우뢰같이 들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의용한 참으로 대단하네.

추초는 결국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아는지라

보내는 장정 수는 날마다 줄어드는구나.



2.2. 계몽운동[편집]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낀 이상룡은 시대가 변했음을 인식하고 서구 근대 사상을 수용했다. 그는 량치차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1907년 이후 관여하던 협동학교에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을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음빙실문집의 <신민설(新民說)>은 자유 · 평둥 · 권리 등 서구 시민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들을 설명한 논설들이다. 이 가운데 <론상무(論尙武)>는 이상룡이 독립운동의 방략을 무장투쟁으로 설정한 것에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상무라는 것은 국민의 원기요 국가의 성립 근거이며 문명이 유지되기 위해 의지하는 바이다. 비스마르크가 말하기를 “천하에 믿을 수 있는 것은 공법(公法)이 아니라 검은 쇠붙이 무기요, 붉은 피 뿐이다"라고 했다.

량치차오, 론상무(論尙武)


이상룡은 이러한 량치차오의 사상을 적극 옹호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무궁화는 떨어지고 기장은 축 늘어졌나니

겁탈이 지나간 산하에는 피와 한이 흐르네.

제국주의가 활개치는 약육강식 세상이요

백성들이 무참히 죽어가는 위급한 시절이네.

백이의 절의 위한 죽음이 무슨 도움 되었나

구천와신상담은 기약할 만한 것이네.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하늘이 필연 도우리니

초라한 오두막에서 웃고 앉아있을 일이 아니네.


이상룡은 이외에도 서구 근대사상가들의 이론을 폭 넓게 수용했다. 정치학설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장 자크 루소, 요한 카스파 블룬칠리의 학설을 받아들였다. 또한 철학 사상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이마누엘 칸트 등 근대 사상가들의 학설에 관심을 뒀다. 특히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대개 두 사람 이상이 하나의 일을 함께 하고자 한다면 피차간에 모두 같은 평등한 자유권이 있은 즉 함께 하나의 약속을 세우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인류의 모임 에서 가장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가족만한 것이 없다. (중략) 대저 가족은 친하기 때문에 신뢰하여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는 것은 이 계약에 의지하는 것이니 하물며 국가겠는가."

합군집설(合群輯說)


그는 한걸음 나아가 블룬칠리의 국가유기체설을 수용했다.

“그저 인민을 모으는 것만으로 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국가라는 것은 유기체인 물건이다. 스스로 그 의지가 있고 스스로 그 행동이 있다."

합군집설(合群輯說)


다만 그는 계약의 주체인 개인을 완전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았고, 입헌군주제가 가장 이상적인 체제라고 여겼다.

‘주권'이라고 하는 것이 공민 전체 에게 있다고 한다면 이른바 공민 전체의 의견은 끝내 가지런하지 못하고 끝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은 의당 국가의 수장에게 맡겨서 헌법 에 의거하여 실행하게 해야 할 따름이다.

합군집설(合群輯說)


이렇듯 서구 사상을 수용한 그는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해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고, 1909년 3월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매월 2회씩 시국강연을 개최해 민중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무리를 모으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니 정사(政事)는 의회(議會)가 있고, 선비들은 교회(敎會)가 있고 농민들은 농회(農會)가 있고 공인들은 공회(工會)가 있다. 그곳에서 시무(時務)를 강습하고 실업을 힘써 연구하여 백성들의 지혜가 날로 열리고 국력이 날로 증진되면 안으로는 부강한 권세를 확장하고 밖으로는 경쟁 세력에 저항할 수 있으니 이는 대게 현세에 통행되는규범 이고 양의(良醫)가 이미 효험을 보았던 처방문이다. 영국 · 미국 · 독일 · 프랑스가 이런 방법을 써서 발홍하였고, 인도 · 베트남 · 유태 · 파키스탄은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아서 망한 것이다.

대한협회 안동지회 취지서


그러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대한협회 본회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국가는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자기 일신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 여러 제하들의 뜻을 감히 추측하렵니다 어찌 우리 회의 당초 목적이 거의 망해가는 판국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고 실은 망해 버린 뒤에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는 데 있는 만큼 오늘의 사변은 진실로 예측한 것 입니다. 무익한 말을 함부로 떠들어 갖은 방해 만 자초하는 것보다 차라리 분을 머금고 아픔을 참으며 후일을도모하기로기약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한일 병합 선포 후 대한협회가 강제로 해산된 뒤, 이상룡은 자택에 은거하면서 만주 지도를 펴놓고 고심했다. 그러던 중 주진수로부터 신민회가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그는 1911년 1월 양기탁과 협의한 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과 많은 토지와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 망명을 단행했다. 그는 후에 자신이 만주로 망명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무엇 때문에 양전옥답과 가택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궁벽하고 황폐한 간도 땅으로 가려고 하는가? 작년 가을에 나라의 일이 그릇되었다. 이 7척 단신을 돌아보니 다시 도모할 만한 일이 없는데, 아직 결행하지 못한 것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든 바른 길을 택한다"는 것은 우리 유가에서 외우다시피 해온 말이다. 마음에 연연한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니며, 두려운 바가 있어서 결행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다만 대장부의 철석과 같은 의지로써 정녕 백번 꺾이더 라도 굽히지 않는 태도가 필요할 뿐이다.

서사록(西徒錄)



2.3. 만주에서의 독립운동[편집]


만주에 도착한 이상룡은 처남인 김대락과 함께 조선이 패망한 원인에 대해 토론하고 한국의 역사책과 만주의 지리지를 읽었다. 그는 <보관사(輔慣史)>, <부여사(夫餘史)>, <본국사>, <고구려사>, <신라사>, <만주지리>, <발해사> 등을 읽었다. 또한 그는 만주를 돌아다닐 때 시를 지어 단군조선과 백두산을 노래하였고, 지린성에 이르러 고구려와 발해의 옛 터전을 돌아볼 때에는 한성의 종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1911년 4월, 이상룡은 봉천성 유하현으로 이동한 뒤 산중에서 개최된 노천대회에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과 진로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경학사(耕學社)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고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김대락 등의 추천을 받고 경학사장에 추대되었다. 경학사는 내무, 농무, 재무, 교무 등 4개 부서를 갖추고 만주로 이주한 한인 교민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고 교육을 통해 실력을 계발하기 위한 목표를 수립했다.

이상룡은 경학사장으로서 다방면으로 여러가지 노력을 수행했다. 먼저, 그는 중국 당국에 교민들을 민적에 편입시켜달라는 요청서를 유하현 지사에게 보냈다. 그는 한인들이 유하현 내의 가옥을 임차하고 중국식으로 머리를 깎고 복장을 바꾸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끊고 살아갈 테니, 민적에 편입시켜 달라고 청했다. 그는 개인 차원에서 솔선하여 중국식 복장을 하고 귀화 수속을 밟았으며, 한인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그는 유하현 지사에게 또다시 요청서를 보내 한인 이주민에게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신흥학교를 인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그는 만주를 단군과 고구려로 이어지는 우리의 옛 땅으로 인식하고 그곳에 의리적 명분을 부여하려 애썼다. 그에게 만주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역사적,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동포들과 함께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땅이었다. 그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만주에서 젊은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기 위해 1911년 6월 무렵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11년 11월 18일 신흥강습소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참석한 그는 거처를 학교 근처로 옮겼다. 신흥강습소는 뒤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로 바꾸고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1913년 4월 요령성 의회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토지 소유, 전매, 조차를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시켰다. 이에 이상룡은 유하현 지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여 법안 추진을 미루게 한 뒤 중화민국 국회에 건의서를 보내, 재만한인이 당면하고 있는 처지를 밝혀 귀화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재만한인이 지켜야 할 중국인과의 관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자세 등을 재만한인에게 호소하는 <경고남만주교거동포>를 발표했다. 이어 1914년 <존화양이변(尊華壤夷辨)>을 발표해 종래의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하면서, 우리도 교육만 잘 받으면 문명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17년에는 지린성의 총독과 재만한인의 권익 확보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뒤, 그는 3.1 운동이 실패했다고 보고 그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내적 역량이 충분하지 못했고, 둘째는 시기를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쓸만한 인재가 충분하지 않았고, 쓸만한 재정이 부족했으며, 시기도 우리를 돕거나 일본이 약한 때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장 투쟁만이 해답이라고 판단했고, 필요한 것으로는 인재와 재정, 그리고 시기라고 봤다. 이후 5월에 군정부가 조직되었을 때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군정부를 임시정부 직할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임정을 지지했다. 그는 서로군정서의 독판(督辦)을 역임했다.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해 관전현 삼도항에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개최, 서간도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다.

그러던 중 박용만, 이회영이 성준용(成俊用)을 이상룡에게 보내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촉성회를 열기로 했으니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이상룡은 1921년 1월 11일 베이징에 도착하여 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회의가 진행되고 있던 4월 하순경, 군사통일촉성회 내부에서 임시정부 불승인과 미국 정부에게 한국의 위임통치를 요청한 이승만에 대한 성토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상룡은 이에 대해 임시정부를 불승인하고 독자적인 군사기관을 조직하는 것은 분열을 촉진할 뿐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군사통일회의 주도 세력은 임정 전면 불승인과 독자적인 군정부 수립을 밀어붙였다.

1921년 6월 만주로 돌아간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부독판 여준, 한족회 간부 김동삼 등과 함께 의논한 결과 임정에서 이탈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22년 8월 환인현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배천택(裵天澤), 이진산(李震山), 김동삼 등을 파견했다. 그러나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이 심화되자, 이들 세 사람은 서로군정서 및 한족회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이미 5,6개월 동안 분쟁이 극에 달해 소기의 목적인 통일을 도외시하는 이상 상해에 머물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내온 소환통고서를 제출하고 사임했다.


2.4. 말년[편집]


이후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이상룡은 1925년 임시정부 임시대통령 박은식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무령에 취임했다. 그는 국무위원으로 남북 만주의 주요 인사들을 두루 임명했으며, 평안, 함경도의 서북 일대가 임시정부를 장악하던 폐단을 수정하기 위해 기호와 영남 출신 인사들도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이들이 취임을 거부하면서 내각은 구성되지 못했고, 결국 이상룡은 국무령 직을 사임했다.

그 후 화전현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69세인 고령이었던 데다 자신이 국무령으로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찍 사임한 것에 깊은 자책을 느껴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한발짝 물러났다. 이후 그는 <광의(廣義)>를 저술해 인류 역사 발전과정을 서술하면서, 사회진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본래 평등하였으나 불평등이 생긴 것은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다. 대개 세계에 인류가 생긴 후부터 경쟁이 없을 수 없다. 경쟁이 있으면 강자와 약자가 있고, 경쟁이 있으면 승패가 없을 수 없다. 강하여 승리한 자는 행복을 얻고, 약하여 패한 자는 그 행복을 잃으니 이것은 대개 자연의 이치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인류 역사를 통치자의 성격 에 따라 다군지세(多君之世), 일군지세(一君之世), 민주지세(民主之世)로 나누었다. 다군지세는 서주시대와 봉건시대로 구분했으며, 두번째 일군시대는 군주전제시대와 입헌준주시대로 나눠봤다. 세번째 민주지세는 총통시대와 무총통시대로 나눠봤다. 그는 미국이 모범적으로 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중국도 수천년 전제 시대에서 민정으로 바뀌었다고 봤다. 또한 무총통시대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러시아의 노농정부(勞農政府)를 들었다. 이상룡은 러시아의 노농정부를 <춘추>의 태평세에 가까운 것으로 봤다. 이상룡은 <광의>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이상사회는 대동사회라고 봤으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토지와 자본의 공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봤다. 즉, 그는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공산주의가 이상사회에 근접한 것으로 여겼다.

이후 지린성 서란 소성자에서 여생을 보내던 이상룡은 1932년 6월 15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후 30년 후인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1996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했다.


3. 여담[편집]


자손들도 독립 운동가였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이준형(李濬衡[6], 1875년 ~ 1942년)과 손자 이병화(李炳華[7], 1906년 ~ 1952년) 또한 독립 운동가였다.

한편 이상룡이 태어나서 자란 임청각의 경우 일제가 고의적으로 중앙선 철로를 임청각 마당을 관통하도록 건설하면서 훼손했다고 한다. 다행히 중앙선 복선 전철화 공사를 통해 선로를 이설하게 되면 임청각 또한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에 대한 일화가 2017년 11월 12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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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술할 보명(譜名)인 이상희(李象羲)가 참판공파 30세 희(羲)자 항렬을 쓴다.[2]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들이다. 이미지:이상룡 족보 1.png이미지:이상룡 족보 2.png이미지:이상룡 족보 3.png[3] 고성 이씨 탑동파 집성촌이다. 이상룡의 생가인 임청각도 이 곳에 있다.[4]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이미지:이승목 족보 1.png이미지:이승목 족보 2.png[5]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이미지:이종태 족보 1.png이미지:이종태 족보 2.png[6]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이미지:이준형 족보 1.png이미지:이준형 족보 2.png[7] 다음은 츌처 사진들이다. 이미지:이병화 족보 1.png이미지:이병화 족보 2.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