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구(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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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3년 2월 26일[1] (71세)
학력
대경상업고등학교 (졸업)
경력
태평양화학
롯데주조 (1978~1982)
롯데 자이언츠 기획부 부장 (1983~2001)
롯데 자이언츠 단장(2002~2010.2)
롯데그룹 특별 자문(2010.3~2011.2)
NC 다이노스 단장(2011.3~2012.6)
NC 다이노스 부사장(2012.6~2013.2)

1. 소개
2. 경력
2.1. 롯데 시절
2.1.1. 비판
2.2. NC 다이노스



1. 소개[편집]


롯데 자이언츠, NC 다이노스 단장.[2]

경력에서 보면 알겠지만 롯데 자이언츠에서 그의 직장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KBO 리그가 창설된지 2년차인 1983년부터 프로야구판에 몸을 담았던 인물. 당시 현역 프런트 중 야구판에서 가장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인물이었다.[3]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롯데에 입사한 후 롯데 프런트에서 근 30년간을 일했고 8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단장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비밀번호 8888577을 찍은 최악의 성적, 선수 선발 등에서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고, 팀 안팎에서 해체하라는 여론이 높아졌던 최악의 막장 상황으로 팀을 끌고 갔던 장기근속자이자 베테랑이었지만, 성적 부진으로 대변되는 결과와 업무 외 잡음으로 인하여 팬덤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들었다.

NC 다이노스 단장 - 부사장 시절에는 롯데 시절 겪었던 시행착오를 통하여 나름 신생구단인 NC의 밑거름을 다지는 역할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롯데와 마찰을 일으키며 비판을 받았다. 특히 롯데에서 용퇴하고, 바로 자신이 창단을 반대했던 지역 라이벌인 NC 다이노스 단장으로 재취업하는 바람에 더욱 비판을 받았다.

2. 경력[편집]



2.1. 롯데 시절[편집]


파일:attachment/leesangu323.png

본래는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1978년 롯데주조로 이직해 롯데그룹과 연을 맺은 이상구 단장은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몸을 담으며 무려 27년 간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 內 요직에서 근무했다. 이후 서울 기획관리과 차장, 기획부 부장을 거쳐 2002년 4월 롯데 자이언츠의 단장에 취임하고 나서 처음으로 선임한 감독이 바로 백골퍼. 그때 당시만 해도 백인천은 감독으로서 1990년 LG 트윈스의 첫 우승을 이끌고, 삼성 라이온즈이승엽을 키우는 등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던 감독이었기 대문에 그를 선임한 것인데, 그 결과는...

하지만 백골퍼의 영입 후 행적이 개판 오분전이 되고 있다는 건 이상구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전시즌 20홈런 100타점을 기록한 타자를 강제로 트레이드 요청을 해 트레이드를 시켰고 모든 타자들의 타격폼을 똑같이 만들며, 하라는 야구는 안하고 골프만 치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그는 미래에 7관왕의 주인공암흑기 유일한 전국구 에이스를 트레이드 하려고 하자 트레이드 협상을 진행하는 척하면서 차일피일 뒤로 미뤘고 그후 백인천감독의 경질이 되면서 이 모든 트레이드는 중단이 되었다. 기사 중간에 보면 알수 있다.

2004년 짠돌이 구단라는 이미지를 뒤덮을 60억 FA, 이상목(4년 22억) + 정수근 (6년 40억 8천만)듀오를 영입하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으며 이후 전력 보강에 있어서 "마음으로 다가가" 홍성흔을 영입함으로써 "우리도 쓸 땐 쓴다!"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대호, 손민한을 지켜낸 모습들로 보면 선수보는 눈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류현진을 거른 눈은??[4] 해외특별지명에서 이승학송승준 중에서 송승준을 지목해 지금까지 선발진이 탄탄하게 만들수 있었으며[5] 장원준, 조정훈을 크게 봐서 2008년에 있었던 LG의 로베르토 페타지니나, 크리스 옥스프링을 카드로 꺼내며 제안한 트레이드 요청을 "장원준은 "꿈도 꾸지 말고" 조정훈은 "쳐다도 보지 말 것"이며 나승현 급도 "아깝다"라고 거부해 버렸던 일화가 있다.사실 나승현 한 거 보면 나승현으로 줘 버렸어야 했다

이상구 본인과 일부 롯데 팬들이 꼽는 이상구의 최대 업적은 2군 구장인 상동 야구장 건설이다. 퇴임식 때에도 본인이 가장 보람있었을 때가 두번의 우승때가 아닌 상동 2군 연습장의 완공식이었었다고 할정도로 자부심을 가지는 일이기도 했다. 상동구장 건설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한다. 롯데그룹과 지방자치단체를 5년간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250억을 마련할수 있었고 2007년 10월에 상동구장을 완공시켜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구단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 따르면 이러한 내용은 실제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이전부터 상동구장 건설은 추진중이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인물은 바로 전임 단장이었던 이철화 단장이었다. 그리고 상동야구장 건설을 수립하고 실제 진두 지휘한 인물은 이근수 사장이었다. 상동구장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이근수 사장[6]이 롯데 자이언츠 창단 이래 사상 최초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 회장 앞에서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한 사실은 언론 기사에도 보도된 전설적인 일화다. 때문에 롯데 구단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상동구장 건설에 관한 한 이상구는 숟가락만 얹인 것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상동구장 건설에 있어서 절대적인 공이 있는 사람은 이근수 사장이다.

그 밖에 롯데 자이언츠사직 야구장 임대료를 대폭 낮은 금액에 계약했고,[7] 롯데 자이언츠 마케팅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해서 2007년부터 수익이 상승했고[8] 그결과 2010년 법인세 2억 5천만원을 납세하기도 했다.

좀 심하게 미화되긴 했지만 운영왕 이상구라는 게시물을 참조.

2010년 2월 박진웅 사장과 함께 동반 퇴진했다. 그룹 수뇌부에서 구단 운영 전반에 걸쳐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여 '문책성'으로 경질되었다. # 단장에서 경질된 후에는 고문직에 앉게 되었다.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버틴 것도 용하다.


2.1.1. 비판[편집]


팬덤으로부터 명과 암이 분명하다는 평을 듣는데, 단장 시절 전반기는 업적도 있지만 문제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롯데의 암흑기가 이상구 시절에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단장을 하던 시기와 상당 기간이 중첩된다. 다만 기나긴 단장 기간 중에 서서히 (정말 서서히) 단점은 줄어들고 장점은 많아지는 행보를 보인 편이다.

무능했지만 최소한 롯데에 대한 애정은 있었다라는 평가도 있지만, 이런 평가도 심히 의심되는 것이 암흑기 동안 이대호, 손민한 트레이드를 막는 등 최소한의 상식적인 행동을 한 것과 상동 구장에 신경을 쓴 것 이외에는 팀을 최하위권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노력이나 행보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구 단장 시절 신인들은 양, 질이 상당히 좋아서 10년 암흑기를 겪은 LG를 제외한 모든 구단이 내부 육성에 어느 정도 이상 성과를 거뒀다. 상동을 업적으로 내세우지만 2군에 롯데만 투자를 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롯데 프런트에서 나와서 NC 단장으로 간 이후의 행보를 보면 롯데에 대한 어떤 원한이나 증오를 품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무능하기는 했지만, CCTV 사태 때문에 억울하게 물러난 후임 단장 배재후는 구단 관련 행사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등 어느 정도 팀에 대한 애정을 보여 주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에 장기근속한 대표적인 인물일뿐더러 롯데의 전성기인 제리 로이스터 감독 재임 시절의 단장이었기 때문에 고평가 받는 면이 있지만, 그 이전 8888577 2002년~2007년 암흑기 시절의 단장이었다는 점도 명백한 사실이다.
이상구는 2002년에 취임했으니 팀이 풍비박산난 것은 전임인 이철화의 책임이고 이상구는 그 여파를 뒤집어썼다는 말도 통하지 않는 것이, 이상구는 단장이 되기 전에 사실상 단장 바로 아랫급인 운영부장이었다.[9] 롯데의 암흑기는 이를 보다 못한 신동빈 부회장이 직권으로 제리 로이스터를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종료되었다. 만약 로이스터 감독이 선임되지 않았다면 이상구 단장 임기내내 비밀번호를 찍을뻔했다.

이런 KBO 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있으면서 이상구는 단장으로서 거의 아무런 투자나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박용오 KBO 총재가 2002년 시즌 종료 직후 승률 .265라는 참사를 겪고도 어떠한 변화도 없는 롯데구단을 겨냥하여 관중이 찾지 않는데도 경기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일부 구단이 바로 프로야구 부흥의 걸림돌이다. 내년 시즌부터 수준 이하의 경기 내용으로 관중 동원력을 상실한 프로야구단의 경우 구단주 총회의 의견을 모아 강제 퇴출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라는 경고까지 했을 정도. 이 정도면 KBO가 공인한 막장 프런트인 셈. 물론 투자 자금이 주로 모기업으로 나오는 것이니 만큼 투자가 부족했다는 것이 전적으로 이상구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이런 제한된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이상구 단장은 적극적인 개선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10]

단장 재임기간 동안 그가 감독으로 데려온 백인천(2002~2003), 양상문(2004~2005), 강병철(2006~2007)까지 성공한 감독이 없다. 특히 8888의 책임은 금지어 백인천 감독이 거의 다 뒤집어 쓰고 있는 반면, 이상구는 백인천의 손민한과 이대호 트레이드 요구를 막아낸 의인으로 묘사되기까지 하는데, 냉정하게 말해 이 암흑기의 책임은 결국 이상구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백인천을 선임한 것이 이상구 본인이다. 물론 백인천은 롯데를 맡기 전인 LG나 삼성 감독 시절에는 나쁘지 않은 감독이었다. LG 시절에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삼성 시절에는 리빌딩에 어느정도 기여했다는 평을 받은 감독이었다. 문제는 준수한 성적을 냈으나 한성격하는 걸로 유명했던 백인천을 감독으로 영입했으면, 프런트도 감독의 이런 성격을 어느 정도 맞춰줄 준비는 했어야 했다. 다른 팀에서 어쨌든 좋은 성과를 냈던 백인천이 롯데라는 팀을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할 정도로 막장으로 갈등을 빚었던 이상구 단장 측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백인천을 이은 양상문이 4년연속 꼴지를 탈출해 2005년 5위를 기록했음에도 양상문을 잘라 버리고 2회 우승 경력의 강병철을 다시 데려와 꼴빠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기도 했다.[11]

2008년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이 한국롯데 계열사를 챙기기에 나서면서 롯데 자이언츠에도 직접 미국산 외국인 감독을 앉혔는데 만약 이 결정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롯데는 암흑기의 구렁텅이에 이 팀처럼 잃어버린 10년을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른다.

롯데 구단의 짠돌이 이미지 등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한 일등 공신이다. 임기말까지 선수들과 연봉 협상에서 마찰을 빚는다든지 하는 말썽이 있었다. 이대호, 이정훈를 비롯해 선수들과의 연봉 협상 때 마다 크고 작은 잡음으로 논란이 일어났다. 특히 타격 7관을 차지한 이대호와의 연봉 인상 갈등 과정에서 이승엽과 동급으로 대우해줬다고 언플하는 등으로 롯데 구단의 짠돌이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 이대호 뿐만아니라 로이스터 이후 팀 성적이 크게 상승했는데도 선수들 연봉 인상을 박하게 해서 선수단과 갈등을 빚고 사기를 떨어뜨린 것도 이상구의 업적(?)이다.

재임 기간 동안 박정태, 주형광, 염종석 등 롯데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홀대와 반강제 은퇴시켜 팬들로 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예전의 최동원과 사례와 겹쳐서 롯데가 프랜차이즈 스타를 홀대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사실 이상구 단장 이전 롯데는 프랜차이즈 스타를 그렇게 홀대하는 구단은 아니었다. 롯데그룹이 연봉은 박해도 장기근속을 중요시하고 우대하는 문화가 있는 만큼, 최동원을 제외한 김용희, 김용철 등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들에 대해서는 은퇴 후 코치 연수 및 감독으로까지 선임하는 등 나름 대우를 해줬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코치나 프런트로 은퇴한 프랜차이즈들을 너무 철밥통으로 중용한 것이 롯데의 문제였다면 문제. 사실 최동원의 경우는 매년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빚어온데다가 막판에 선수협 문제까지 터져서 구단과 척을 진 경우. 물론 박정태, 주형광, 염종석도 선수 말년 시절 홀대받았다는 것이지 은퇴 후에서는 구단에서 코치로 중용했다.

임수혁 선수에 대한 피해보상 문제에서도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임수혁 가족측은 "롯데와 3년간 재해보상안에 협의를 해왔지만 롯데측과 타협을 못해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고 이에 이상구 단장이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라도 가급적 빠른 시일안에 문제를 매듭짓고싶다."라고 밝혔으나 민사 소송이 시작되자 "소송을 제기한 이상 임수혁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제는 이상구가 물러난 이후 롯데 프런트는 선수단의 연봉인상이나 FA투자 등에 있어서 후하게 돈을 쓰고 있는데도 이상구 시절의 짠돌이, 껌장사, 레전드 홀대 등 막장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아직까지 욕먹고 있다는 점이다.

코치진들에 대한 밥그릇 보장은 철저하다는 비난도 있었는데 팀성적이 개판일때 감독는 갈리는데 코치들인 한문연, 공필성,박영태 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경우는 롯데의 특색이라고도 볼 수 있는게 실제로 박영태는 이후 나갔다지만 그 욕먹는 공필성은 여전히 2013시즌에도 코치로 있다.

이대호, 손민한 트레이드를 막았다는 사례를 들며 이상구가 선수 보는 눈이 뛰어났다는 평도 있으나 사실은 이와 반대에 가깝다. 선수보는 눈이 별로 좋지 않는 편이다. 타자 전향을 한 지 얼마 안 된 이대호의 트레이드를 막은 건 공이라고 봐도 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상구의 선수 보는 눈이 좋다는 평을 내릴 수 없다. [12] 이상구 단장 시절 롯데는 암흑기를 거치며 상위픽을 가져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지만, 그 결과는 대체로 신통치 못했다. 장원준, 조정훈의 성공 사례가 있긴 하지만, 김수화는 문자 그대로 대실패였고, 가장 큰 실책은 류거나이다. 일각에서는 스카우터들의 책임일 뿐이라고 하지만, 롯데 구단의 의사결정 특성상 이상구의 입김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자명하다. 일부 팬들은 류현진은 고등학교 때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이때문에 롯데 이전에 SK가 먼저 걸렀기 때문에 롯데의 판단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쉴드가 있다. 하지만 SK가 거른 것과 롯데가 거른 것은 분명히 다른 상황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SK는 다음 해에 류현진 이상의 평가를 받는 김광현을 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SK는 포수 포지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류현진 대신 또다른 유망주 이재원을 뽑았던 것. 이후 류현진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여 재기에 성공했다. 이에 당시 언론은 롯데가 류현진을 뽑을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런데 류현진을 뽑지 않은 반전이 일어났던 것. 당연히 다음 순위인 한화가 쾌재를 부르며 류현진을 픽했다. 그리고 롯데 프런트가 류현진을 거른 실제 이유가 그의 실력과 부상 경력 때문이 아니라 류현진의 아버지에 대한 소문 때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버지에 대한 소문 때문에 롯데가 걸렀다고 류현진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13] 어쨌든 탈크보급의 재능을 가진 류현진을 패스한 것은 최종 결정권자인 이상구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류현진이 7년동안 KBO리그에서 뛰며 선수로서 거둔 활약은 차치하고도,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팀에 던지고 간 이적료 280억원만으로도 이상구 단장 재임 중의 모든 업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당시에는 점쟁이 말을 믿고 송승준 대신 이승학뽑으려다가[14], 구단 수뇌부에서 '점쟁이 말만 듣고 선수 뽑는 건 말도 안 된다'면 송승준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2.2. NC 다이노스[편집]


KBO 이사회가 NC 다이노스를 정식으로 인가한 2011년 3월 22일, NC 다이노스의 초대 단장으로 선임되었다. KBO 이사회의 승인이 통과된 당일 선임된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NC 창단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롯데그룹 자문 자리에 앉아 월급을 받고 있으면서 사실은 경쟁팀을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 사실 롯데가 작정하고 배임 혐의로 고소해도 할 말이 없다.

NC 재임 이후에는 롯데에서의 오랜 시행 착오를 통한 학습과 교훈을 바탕으로 롯데 시절보다는 성공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본인이 35년간 몸담으면서 온갖 시행착오를 저지르며 망가뜨렸던 롯데 구단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면서 NC 구단의 이미지를 높이려 하고 있다. 롯데의 연고지인 마산을 가져간 라이벌 팀 NC 프런트의 단장으로 간 것 까지는 본인의 밥줄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쳐도[15], 롯데를 집중적으로 까고 공략하는 모습은 팬덤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으며, 게다가 롯데 그룹은 단장을 교체하고 나서도 그를 팽하지 않고 고문 자리를 주어 정년 퇴임 때까지 자리를 유지하도록 배려하기도 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1년 반동안의 NC 단장을 거쳐 2012년 6월 30일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부사장으로 승진된지 불과 반년만인 2013년 2월 시즌 개막과 팀의 1군 데뷔를 한달 앞두고경질되었다. 이후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NC 다이노스가 우승하자 팀 창단 초기에 기틀을 다진 노고를 인정받아 우승반지를 선물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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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NC에서는 부사장으로 승진해 8개월간 역임하기도 했다.[3] 같은 시기에 롯데 자이언츠에 입사한 김태룡 현 두산 베어스 단장이 현재 최장수 프런트이다.[4] 류현진은 고등학교 때 이미 팔꿈치에 칼을 댄 적이 있었으며, 롯데만 거른 것도 아니었고 SK가 먼저 걸렀다. 결과는 안 좋았지만 당시의 판단으로는 틀렸다고 보긴 힘든 경우. 삼성 라이온즈 역시 수술 경력을 이유로 오승환을 거르려 한 적이 있다. 사실 당시에 롯데가 SK급의 성적을 거두는 팀이었다면 류거나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류현진의 경우 똑같이 SK도 걸렀기 때문. 문제는 롯데가 저 당시에 8888577을 찍고 있었던 때라는 것이다.[5] 이승학은 2009년 허리부상으로 인해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되었다.[6] 정수근, 이상목의 FA 계약을 추진했으며 롯데제과의 인기 과자인 빠다코코낫을 유행시킨 인물이다.[7] 1년에 4억 4100만원씩 임대로로 지급한다. 참고로 두산 베어스LG 트윈스는 1년에 30억씩 지출.[8] 2009년에는 광고 수주액만 70억원이 넘었다.[9] 후임인 배재후 단장도 이상구 시절 운영부장이었고 후에 단장으로 승진했다.[10] 당장 2019년 롯데나 2020년 한화가 90패 이상을 찍었을 때 스토브리그에서 고인물 선수들이나 코치진들을 전부 내보내는 사실상의 구조조정을 했다. 팀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는데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까임 대상이다.[11] 2005 시즌이 끝나고 대부분의 롯데 팬들은 "양상문이 재계약 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깨끗하고 청렴했던야갤에서도 강병철이 온다는 소식에 황당하다는 분위기였다.[12] 예를 들자면, 메이저리그 최악의 단장으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데이브 리틀필드, 빌 버베이시 역시 소수의 성공 사례가 존재한다. 리틀필드의 경우 제이슨 베이를 얻어온 트레이드는 성공했고, 버베이시의 경우 에인절스에서 트로이 글로스를 지명한건 명백한 성공 사례이다.[13] 소문 때문에 거르는 것이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 한국의 프로구단은 사실상 기업의 펫스포츠이기 때문에 이미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14] 리틀필드는 무려 앤드류 맥커친을 거르려고 했다가 스카우터진의 반대로 막은 일화가 있다. 괜히 벅스 팬덤의 영원한 금지어가 아니다.[15] 하지만 롯데에서도 이상구를 단장에서 짜른 후(엄밀히 말하면 정년퇴임으로 인한 퇴단이다)에도 고문으로 대우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