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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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璘
1911년 1월 5일 ~ 1986년 8월 21일[1] (향년 75세)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법조인, 교육자이다. 본관은 우봉(牛峰)[2] , 아호가 심당(心堂)이다.
2. 생애[편집]
1911년 1월 5일 경기도 지평군 하북면 산음리(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에서 한의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이명구(李鳴九, 1878. 11. 22 ~ 1926. 9. 18)[3] 와 어머니 고흥 류씨(高興 柳氏) 류영랑(柳寧娘, 1876. 6. 25 ~ 1940. 5. 28)[4]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연천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한 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경기도 공도보통학교(현 안성공도초등학교) 훈도, 1935년부터 1938년까지 경성매동보통학교(現 서울매동초등학교) 훈도로 재직하였으며,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경성상업실수학교(現 덕수고등학교) 교유를 겸하기도 하였다.#
1940년 8월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1942년에는 함경북도 청진부에서 개업하였고 1945년에는 경기도 경성부에서 개업하는 등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법회정리위원회(法會整理委員會) 위원,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총무,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거쳐 제13대(1965년 5월 ~ 1966년 5월), 제17대(1968년 5월 ~ 1969년 5월)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서울법률학원을 설립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후원회 이사를 지내는 등 후진 양성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편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법조단 후보로 서울 성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홍용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4년 11월 27일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에 참여, 대표위원이 되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장으로서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 위원을 하던 1975년 1월 17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통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법원의 공소기각으로 석방되었다.
1986년 8월 21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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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7월 16일.[2] 참판공파(參判公派) 25세 병(丙) 항렬.[3] 호는 윤고(允皐). 유인석의 저서 《소의신편(昭義新篇)》에 화서학파 문인에 기재되어 있으며#, 경기도 의사면허 1676번으로 1926년 10월 25일 별세하여 면허증이 반납된 사실이 확인된다.#[4] 류제항(柳濟恒)의 딸이다. 의병대장 유인석의 증손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