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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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왕자
회안대군 | 懷安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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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태조의 황자
회안대군 | 懷安大君


조선 개국공신
마한공 | 馬韓公



회안대군묘 전경
출생
1364년(공민왕 13년) 8월 7일(음력 7월 2일)
사망
1421년(세종 3년) 4월 10일(음력 3월 9일)
(향년 58세)
능묘
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1]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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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방간(芳幹)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신의고황후 한씨
형제
8남 5녀 중 4남
배우자
정부인 -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
(三韓國大夫人 驪興 閔氏)
계부인 - 삼한국대부인 밀양 황씨
(三韓國大夫人 密陽 黃氏)
2계부인 - 금릉부부인 김포 금씨
(金陵府夫人 金浦 琴氏)
자녀
슬하 4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의령군 민씨 소생
차남 - 창녕군 황씨 소생
3남 - 금성군 이선(金城君 李善, 1409 ~ ?) 금씨 소생
4남 - 금산군 이중군(金山君 李仲窘) 금씨 소생
장녀 - 성혜옹주(誠惠翁主, ? ~1431) 민씨 소생
차녀 - 신혜옹주(信惠翁主)

아호
망우당(忘牛堂)
봉호
회안군(懷安君)[1]
→ 회안공(懷安公)[2]
회안대군
시호
양희(良僖)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가족 관계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초기의 왕족. 태조 이성계의 4남으로 형은 2대 국왕인 정종 이방과이고 동생은 3대 국왕인 태종 이방원이다. 박포가 2등공신에 불만을 품고 마침 아래 동생인 이방원왕위에 오르는 걸 싫어하던 회안군 이방간을 꼬드겨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아들과 함께 귀양을 간 인물이다.


2. 생애[편집]


민선의 딸인 민씨와 혼인하였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회안군(懷安君)에 봉해졌다. 이후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과 함께 이방석 등 이복동생들과 정도전, 남은 등 그들을 지지하는 중신들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같은 해 작위 제도 개정으로 회안공(懷安公)이 되었다. 동생 이방원을 지지해 약간의 권력(?)을 얻었으나 1400년 박포의 거짓 밀고를 믿고 군사를 모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나름대로 명분 및 지지를 얻을 의도로 당시 정안공 이방원을 증오하던 상왕인 아버지 이성계에게 상장군 오용권을 보내어 각각 그 상황을 알렸는데 정종실록 2년 1월 28일 실록의 내용이 대략 이러했다. (전문)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靖安公謀欲害我(정 안 공 모 욕 해 아 我不得已起兵攻之(아 부 득 이 기 병 공 지 請上勿驚(청 상 물 경"

(정종에게) "정안공이 저를 해하고자 꾀하니, 제가 부득이 거병코자 하나이다. 청컨대 주상께옵서는 부디 놀라지 마소서."

"靖安將害臣(정 안 장 해 신 臣不可空死(신 불 가 공 사 故發兵應變(고 발 병 응 변"

(태조에게) "정안이 장차 소신을 해하겠으니, 소신이 헛되이 죽을 수 없으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하고자 하나이다."


이에 대한 두 사람의 답은 대략 이렇다.

"爾惑聽亂言(이 혹 청 난 언 謀戕同氣(모 장 동 기 狂悖甚矣(광 패 심 의 爾其釋兵(이 기 석 병 單騎赴闕(단 기 부 궐 予將保全之(예 장 보 전 지"

정종: "(주상께서 크게 노하시기를) 네가 헛소리에 홀려서 형제를 해치고자 꾀하니, 네 광기와 패악함이 심각하구나. 네가 스스로 군사를 해산하고 혼자서 대궐로 오면 내가 보호해 주겠다."

"汝於靖安(여 어 정 안 異父乎(이 부 호 異母乎(이 모 호 彼如(피 여牛人(우 인 何乃至此耶(하 내 지 차 야"

태조: "(태상왕께서 대노하여 말하시기를)네놈이 정안아비가 다르더냐, 어미다르더냐? 같은 녀석[2]

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결국은 실패하고 거짓 밀고를 보낸 박포는 사형되었다. 이방간은 처음에는 황해도 토산군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인 1401년, 작위 제도 개정으로 회안대군(懷安大君)이 되었다. 이후 안산, 익산, 순천 등으로 귀양지를 수차례나 옮겨다녔고, 최종적으로는 본관전주에 정착한다.[3] 전적이 있었기에 조정에서는 귀양을 간 이후에도 이방간을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고 태종에게 끊임없이 이방간을 죽일 것을 간언하였으나, 태종은 그 때마다 물리쳤다. 그런 태종이 1416년, 이방간의 공신 녹권과 직첩을 회수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방간이 태조의 사위인 심종(?~1418)[4]과 은밀히 거사를 도모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1413년 이방간이 심종에게 개인적으로 생강을 선물한 일이 있었는데, 심종이 조정에 보고하지 않은 것을 두고 3년 뒤에 문제삼고 나선 것. 조정에서 처벌을 요청하자 처음에는 듣지 않았으나 공신 녹권과 직첩을 회수하는 선에서 사건을 덮었으며, 심종 역시 녹권과 직첩을 회수당하고 토산군으로 유배되어 1418년, 그 곳에서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방간과 심종이 사통(私通)하였다는 표현을 쓰며 죄줄 것을 청했지만 생강을 주고 받았다는 것 외에는 이방간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서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인척끼리 주고 받은 선물을 두고 트집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태종은 이방간의 녹권과 직첩을 거두면서 조정에서 죄를 주라고 여러 번 떠들어서 어쩔 수 없이 특권을 거둘 뿐 편하게 살라며 따로 언질을 주었으며, 심종 역시 유배지를 스스로 고를 수 있게 하여 토산군으로 보내주었다. 이후 전주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동생 태종이 승하하기 1년 전인 1421년, 와병 중에 태종의 명에 의해 홍주(현재의 충청남도 홍성군)로 거처를 옮겼고 그 곳에서 사망하였으며, 시호로는 '양희(良僖)'가 내려졌다.

묘지는 전라북도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 자락에 위치해 있고,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으로 가는 길목에 표지판이 걸려 있다. 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의 가족들을 염탐까지 해가며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도운 아들 이맹종은 당연히 아버지를 따라 귀양지에서 지냈으나, 두고두고 후환이 될 수 있다고 본 세종에 의해 자진하라는 명을 받고 스스로 자살한다. 그래도 맹종의 시체부관참시하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거부했으며, 맹종의 유족들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아서 혈통이 끊기는 일은 겨우 면했다.

하지만 후손들은 형식적으로만 왕족 대우를 받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그 이름들을 올리지 못해 실질적으로는 왕족 대우를 받지 못해서 면세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었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노역의 의무를 행하는게 맞다"고 결론을 내려서[5] 후손은 자기들끼리만 왕족이라고 주장한 셈이 되어버렸다.왕위, 아니 왕족 요구자 선조 말기부터 꾸준히 복권을 주장하였으나, 정식으로 왕족의 지위를 되찾은 건 숙종 때였다.[6]


3. 평가[편집]


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이방원이 내세운 명분은 "어리고 공훈이 없는 막내가 감히 형들을 제치고 세자 자리를 가로채서 바로잡는다."였다. 그래서 이방원은 막내인 이방석과 우유부단하게 가만히 있던 이방번까지 몰아내서 한꺼번에 없앴다. 그러나 이방원의 위에는 이방과 외에도 이방의와 이방간이란 형들이 두 명이나 더 있어서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 싶어도 일단 참아야 했다. 왕위에 대놓고 눈독들였다가는 이방의와 이방간이 "지가 형들을 제치고 왕위를 가로채면 안 된다고 말한 건 잊어버렸냐?"라고 트집잡았을 때 명분상 반박도 못하고 궁지에 몰릴 수 있기 때문. 그나마 셋째 이방의는 왕위에 욕심이 없었지만, 넷째 이방간은 이방원처럼 왕위에 대한 욕심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이방간이 난을 일으켜버렸으니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형을 몰아낼 명분이 저절로 굴어들어온 셈. 만약 이방간이 난을 일으키지 않아 이방원의 형 위치에 머물고 있었다면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도 골치아픈 사안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소수 주장으로 '이방원이 판을 깔고 이방간이 난을 일으키도록 유도한건 아닐까?'라는 추측도 나온다.

다만 이방원은 형 정종의 양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이고, 애시당초 왕위를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형한테 잠시 보위를 맡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방원은 초대 임금아버지를 상대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에서 승리했으며 양자로 들어가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도 "오늘부터 동생을 자식처럼 생각하면 되지 않냐?"며 정종이 이방원을 두둔해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조준, 하륜, 이숙번 등 조정도 이미 이방원 측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된 상황으로 명분에 밀려 옥좌에 앉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인 임금 노릇은 이방원이 이미 다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서열이 빠른 형이라는 것만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용의 눈물>에서도 이방간이 난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은 이성계가 "이방원을 견제할 자가 없어졌다."라며 탄식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나마 이성계이방과가 자기 편이라도 들어줬다면 모를까, 이 둘은 오히려 절규하다시피 이방간을 꾸짖으며 뜯어말렸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들사위까지 잃으면서 이방원을 증오하기로는 당시 누구에도 밀리지 않던 이성계의 입장에서도 이방간의 난은 아둔하고 사리사욕과 같은 욕심만 가득한 행위였고[7] 이방과의 입장에서도 이복형제간의 골육상쟁을 벌인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며 자신 또한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줄 징검다리로서 즉위하면서 가시방석에 앉은 꼴이었는데 이번에는 친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일으키려는 이방간이 한심해서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성계와 이방과 모두 이방간이 어차피 이방원의 상대도 못 된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이방원은 이방간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즉각 대응한 게 아니라 "어떻게 형제끼리 싸우냐?"면서 밍기적대다 이화의 설득에 나왔고, 군사를 이끌고 갈 때도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를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고 결과도 그러했다.[8]


4. 가족 관계[편집]



  • 정실: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三韓國大夫人 驪興 閔氏) - 민선(閔璿)의 딸
    • 장남: 의령군 이맹중(義寧君 李孟衆)
    • 며느리: 개성 왕씨[9](開城 王氏) - 정원부원군 왕균(定原府院君 王鈞)의 딸
    • 며느리: 청주 한씨(淸州 韓氏) - 주부 한기(韓琦)의 딸
      • 손자: 영평정 이온(永平正 李温)
      • 손부: 동래 정씨(東萊 鄭氏)
  • 1계실: 삼한국대부인 밀양 황씨(三韓國大夫人 密陽 黃氏) - 황형(黃亨)의 딸
    • 차남: 창녕군 이태(昌寧君 李泰)
    • 며느리: 밀양 박씨(密陽 朴氏) - 판관 박무현(朴武賢)의 딸
      • 손자: 덕림정 이백(德林正 李栢)
      • 손부: 장성 노씨(長城魯氏)
      • 손자: 호산정 이회(湖山正 李檜)
      • 손부: 장성 노씨(長城魯氏)
    • 장녀: 성혜옹주(誠惠翁主)
    • 사위: 상호군 조신언(上護軍 趙慎言)
      • 외손자: 조묵
    • 차녀: 신혜옹주(信惠翁主)
    • 사위: 군수 이대성(郡守 李大成)
    • 3녀: 양혜옹주(陽惠翁主)
    • 사위: 부사 박경무(朴景武)
    • 4녀: 전주 이씨(全州李氏)
    • 5녀: 전주 이씨(全州李氏)
  • 2계실: 금릉부부인 김포 금씨(金陵府夫人 金浦 琴氏) - 금인배(琴仁排)의 딸
    • 3남: 금성군 이선(金城君 李善)
    • 며느리: 장흥 조씨(長興 曺氏)
      • 손자: 장산정 이형(長山正 李衡)
      • 손부: 문화 류씨(文化 柳氏)
      • 손자: 평산정 이말동(平山正 李末同)
      • 손부: 장수 황씨(長水黃氏)
    • 4남: 금산군 이중군(金山君 李仲窘)
    • 며느리: 장흥 조씨(長興 曺氏) - 예조정량 조연(曺延)의 딸
    • 6녀: 전주 이씨(全州李氏)
  • 첩부인: 춘천 박씨(春川 朴氏) - 충주 목사 박도간의 딸
  • 첩부인: 성씨미상(노비출신)
    • 서자: 백종(白終)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김주영[10]이 연기했다. 세자 책봉 문제와 사병 혁파 문제로 이방원과 함께 이성계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큰 불만을 나타내며 1차 왕자의 난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이복동생인 이방번을 참살한다.[11] 하지만 권력욕이 커서 둘째 형 이방과가 왕위에 오르자 대놓고 "다음 후계자 얼른 정합시다."라는 눈치없는 말을 내뱉어 형제들 사이를 갑분싸하게 만든다. 결국 나중에는 귀양길에 처해 불만이 컸던 박포와 손을 잡아 대대적인 준비 이후에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12][13] 이방원에게 패하고 결국은 유배길에 처해진다.[14] 차마 동복동생인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빌 수 없어서 자결까지 하겠다고는 했으나 아버지는 물론 형들인 이방과이방의가 함께 설득하고 참교육을 실천해주는 바람에[15] 결국 그들의 말대로 하여 이복동생들과는 달리 이방원의 배려로 그나마 끝까지 천수를 누릴 수가 있었다. 정안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정종의 부탁으로 상복을 입도록 허락받은 모습으로 짧게 재등장하며 나레이션에서 이후 어떻게 됐나 간략하게 언급된다. 최종 화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와 함께 죽어있는 모습으로 작중에서 완전히 퇴장하며 이방원을 제외한 모든 형제들이 세상을 떠난다. 잘 생각해보면 짜증나는 캐릭터일 수도 있는데 이방간이 스스로 밝히는 자기가 집권해야 하는 이유라고는 "난 이방원의 형이야!"이거나 기껏해야 1차 왕자의 난 때 뒤늦게 참여하며 대궐로 달려온 정도였다. 왕위에 앉을만한 명분으로 서열말고는 아무 근거도 생각한 적 없는 듯.

그러나 그 평가와 별개로 이방간의 성향과 위치는 이성계에게 있어선 매우 중요하기도 했었다. 세습이 그 적장자와 그 순서에 맞추는 것인만큼 그나마 나은 정종에게 물려주고 싶었으나, 그 스스로가 자기 자식들을 절로 보내 세습을 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마찬가지로 왕위를 스스로 포기한 이방의를 제외하면 남은 건 이제 방간과 방원 뿐이었다.[16] 방원의 능력과 공을 인정한 정종이 왕위를 물려주고자 해도 방간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으니 왕위를 못 주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는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이성계에게는 좋은 견제책이기도 했으나, 결국은 싸움에 패해 물러나게 되자 이성계에겐 진짜 좋든 싫든 왕위를 물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그렇게 되자 이방원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아예 자신이 직접 나서는 계기가 되고 만다.
물론 앞선 평가는 상술된 내용과 별개로 배포나 능력 자체가 그냥 꼬장부리듯 나왔다가 무시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작중에서 일어나는 무시는 이방원과 비교를 할 때의 모습이었고, 상술했듯 2차 왕자의 난이 철두철미한 계획하에 일어난 반란인 것으로 묘사되듯이 능력은 꽤 뛰어나고 왕족으로서의 권위 또한 자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왕자의 난 직전 사병 혁파나 진법 훈련 때 왕족이라도 무시하고 행하는 행동들에 대해서 이방원과 더불어 유이하게 무언으로나마 저항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퉁두란도 이방간이 배포가 꽤 있다고 칭찬했고, 이방원과 더불어 손을 잡고 정도전 일파를 척결할 계획을 세울 때는 정도전 일파는 이방간은 다른 대군들과는 다르게 행동력이 있으니 염려했으며 신덕왕후는 다른 아들들은 어찌해도 좋으니 적어도 이방원하고 이방간은 꼭 죽여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약간 무협의 느낌도 가지고 있던 시대상 이방간의 포지션은 능력은 있으나 아우보다는 부족해 그 능력을 시기하는 형에 더 가깝게 나온다.[17]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강신효[18]가 연기했다. 도리깨나 철퇴같은 둔기를 주로 사용하는 과격한 무인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정몽주를 참살한 조영규에게 "너 손맛 좀 봤다며?"라고 하는 장면으로 첫 등장했다.[19] 무인정사 때는 이근을 붙잡고 박포에게 이름을 물어보고는 박포가 이근이라고 대답하자 철퇴로 때려죽이고 이방원에게 이근이라고 알려준다. 이때 대사도 압권인데 이근을 알아보지 못해 박포에게 "야! 이 아새끼 누구네?" 라고 묻고 박포가 이근임을 알려주자 때려죽이고 "방원아! 이근이란다하하하!" 라고 광기를 드러낸다. 무인정사 이후에는 이방원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모습을 보여줘 2차 왕자의 난을 암시했다. 이후 역사대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데 난을 일으키는 장면조차 없이 붙잡혀있는 장면부터 등장하여 이방원에게 호탕하고 당당하게 "제발 날 좀 살려다오!"라고 외친다. 이방원은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않냐"고 어이없어했고 이방간은 이에 "동북면 사나이의 기백을 버릴 수는 없지 않냐"고 답한다.[20] 역시나 실제 역사대로 이방과에게 "무식한 놈"이라고 디스당한다.

  • 2019년 JTBC 드라마 <나의 나라>에서는 배우 이현균[21]이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는 <용의 눈물> 이후로 오랜만에 2차 왕자의 난이 중요하게 다뤄져서 비중이 상당히 큰 편인데 이전 작들의 이방간 캐릭터와는 달리 무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교활하기까지 한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훨씬 더 뛰어난 동생 이방원과 주인공 서휘 등에 의해 패하고 역사대로 하차하게 된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조순창[22][23]이 연기했다. 이방간과 이방원의 갈등이 보통 대중매체에서는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이 눈 앞에 보이면서 드러나는 반면 여기서는 처음부터 이방간이 이방원을 시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방과는 이런 동생의 모습을 보고 답답해한다. 자세한 것은 이방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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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라북도 기념물 123호 지정[2] 의역이 아니다. 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실록에도 소 우자가 쓰여 있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2차 왕자의 난 소식을 들은 이성계가 이 표현을 쓰는 대사가 나오며, 이방원과 이방간을 모두 욕하면서도 나라의 이름있는 가문들이 이걸 보고 얼마나 비웃을지 한탄스럽다고 덧붙인다.[3] 이방원이 이방간을 살려준 것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는데,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왕실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바 있던 마당에 동복형제들까지 죽였다가는 아무리 진압의 명분이 정당하다 해도 민심이 흉흉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으로 이방원 본인의 집권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전체의 정통성에도 흠집이 날 수 있었고, 후대에도 비도덕적인 짓거리라며 두고두고 손가락질 당해도 싼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임을 마침 주모자였던 박포에게 난의 책임을 다 몰아버리고 왕족이자 혈육인 형 이방간의 목숨은 살려준 것. 이성계(태조)와 이방과(정종)가 동의한 것도 가족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이 부분도 있었다. 게다가 동생들인 방석과 방번과 달리 방간은 본인보다 바로 위의 형인 것도 있다.[4] 태조의 둘째 딸인 경선공주의 남편이었던 심종은 심덕부의 육남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동생이었다.[5] 중종 시기의 일이다.[6] 중종 때 복권을 청했다가 이후 선조 때 다시 청해서 허락받았지만 1년 뒤 선조가 죽자 광해군에게 다시 청했으나 광해군은 무시했었다. 수십 년 뒤 인조 말년에 다시 청했는데 이 때 족보에는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노역은 면제받았다. 숙종 때 여러 개로 나뉘어 있던 족보를 통폐합해 새로이 족보를 만들려는 때에 청해서 겨우 족보에 편입될 수 있었다.[7] 비록 이성계가 당시 가장 증오하던 존재가 이방원이라고는 하나, 이방간 또한 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에게 적극 가세했다는 점을 보면 이방간이라 해서 딱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다. 정도만 다를 뿐 수준이 똑같은 놈들로 보일 수밖에 없고, 그런만큼 이복형제들을 죽여버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동복형제들끼리 싸우는 작태 자체가 한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방간이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면 둘이 공멸할 정도로만 적당히 거들어줬겠지만, 둘의 능력, 명분, 세력 모두 넘사벽으로 차이가 났다. 그 이전에 자기가 뒤통수 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찌질하게 아버지한테 도와달라며 염치없이 손을 내민 점을 통해 이방간이 얼마나 눈치 없는 인간인지도 바로 짐작할 수 있다.[8] 어느 정도는 진심일텐데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골육상쟁을 펼치며 이복동생들을 살해했는데, 또 골육상쟁을 통해 같은 어머니를 둔 동복형까지 죽인다면 왕실의 명성에 흠집이 얼마나 클지는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 년 안 지나서는 궁궐에서 벗어난 아버지가 조사의를 앞세워 그동안 갈아두던 복수의 칼날을 겨누는 일까지 벌어졌다.[9] 공양왕의 누이[10] 아버지 이성계 역의 배우 김무생과 마찬가지로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 이어 2번째로 같은 역을 맡았는데 전작과는 달리 비중있게 등장한다. 배우 김주영은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조민수를 연기했는데 조민수는 이성계에게 숙청됐다. 그런데 <정도전>에서 이성계를 연기한 배우는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연기했던 유동근이다.[11] 형식상으로는 이방원이 말리지만 전혀 말릴 생각이 없었다.[12] 작품 속 2차 왕자의 난의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과 다르게 정말 만만치 않은 반란으로 묘사가 될 정도로 철두철미한 준비로 묘사되었다. 이는 이방간을 작중 이방원 입장에서 중간 보스 보정을 주면서 어느 정도는 고증을 희생해서다.[13]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와 정종은 방간이 실패할 것을 어느 정도 내다봤다. 극중 이성계는 방원이라면 치를 떨고 심지어 정종에게 방원이를 죽여달라고 할 정도인데 방간이가 자신에게 지지를 요청하자 어째 동복형제를 죽이려 하냐면서 소같은 놈 이라고 화를 냈다. 상황상 방간이 방원이를 죽이는것에 분개한 것보다는 딱 봐도 더 모자란 놈이 괜히 일을 크게 만들어 오히려 잡아먹힐 것 같으니 한심해서 그런 것이라는 점이 느껴진다.[14] 이에 이성계는 그나마 이방원을 견제하던 이가 사라졌음에 더욱 분노했고 퉁두란이 이방원의 편을 들고 이성계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를 떠나게 되면서 혼자 고립된 이성계가 속으로 더 분노와 고통에 곪다가 내부적으로 더 큰 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15] 이방과에게 계속 "전하"라고 호칭하자 인내심이 폭발한 이방과가 "이 놈아, 전하는 무슨 전하냐! 난 지금 네 형으로서 널 살리려고 온거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 놈아!"라고 일갈한다.[16] 물론 이성계 입장에서 둘은 가장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은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한 명은 이복동생들을 참살하자는 주동자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자기가 직접 베어죽여버렸으니 말이다.[17] 그렇다고 마냥 동생인 이방원을 죽일 듯이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2차 왕자의 난 직전에도 동생을 안 죽이고 반란을 성공할 방법은 없는지 그 방도를 찾으며 고뇌하기도 했다.[18] 강신효는 1989년생으로 실제로는 동생인 이방원 역의 배우 유아인보다 3살 어리다.[19] 조영규가 정몽주를 죽일 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방간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 중 하나인 도리깨였기 때문이다.[20] 결국 개그 캐릭터 확정.[21] 훗날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선 아예 방원의 측근인 박은을 연기하게 된다.[22] 공교롭게도 <육룡이 나르샤>처럼 이방원을 연기하는 실제 배우보다 연하인데 이 쪽은 2살이나 어리다.[23]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숙번 역. 배우개그로 두 역할의 실존인물들은 다 태종한테 쫓겨나 유배지에서 여생을 보내게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