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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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데뷔 전
3. 전성기
4. 한국 재진출
5. 다리 부상과 활동 중단
6. 그 후


1. 개요[편집]


이박사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데뷔 전[편집]


국악인이었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박사의 아버지인 이 모 씨는 근동에서 유명한 국악인이며, 이박사의 어머니도 목청이 좋을 정도로 소리를 잘 낸 국악인이었다고 한다. 이박사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세는나이 기준으로 61살이었으며,[1] 아버지의 별세도 객지에서, 그것도 이박사가 갓난아기 시기에 맞이해서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민요를 배우기 시작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15살 때부터 록 음악에 심취하더니 부모님으로부터 경기도 민요까지 접하였다가, 결국 19세에 들어서 뽕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관광객들에게 안내와 더불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이 때 버스에서 노래를 해야 하는데, 반주가 없어서 자기가 노래 전주를 외워서 입으로 부르면서 노래했다고 한다. 그 시대의 관광버스에는 리듬 박스라는 일종의 드럼머신이 장치된 경우가 많았는데[2] 이걸 틀어놓고 그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이박사가 부르는 노래가 전자 음악과 잘 어울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는 경우도 있다. 키보디스트 김수일 씨와 자주 활동하는데 그 당시 사용하던 야마하, 인켈 키보드에는 간소화된 드럼머신 기능이 내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그것을 활용하여 bpm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공연을 했을 가능성이 큰데 키보드, 신디사이저 연주로 음악을 시작했으니 전자음악에 대한 조예와 느낌을 체득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유년기 시절부터 경기 민요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노래 중간 중간에 독특한 추임새를 넣어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이러한 특유의 추임새는 현재까지도 '이박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그 만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보통 뽕짝이라 칭하는 구전 트로트 스타일 + 민요에서는 짤막한 추임새를 가끔 넣으면서 흥을 이끄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박사는 이 단편적인 추임새를 기반으로 추임새 자체로 "싱잉"(?)을 하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과 그루브를 보여주었고 한창 이박사가 유명세를 타던 시절 방송에서 이박사 모창을 시도한 연예인, 일반인들이 있었지만 근처에도 따라가지 못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1989년 11월 13일자 MBC <인간시대> '신바람 이박사(연출 이석형)' 편[3]에서 그의 일상을 다룬 적이 있는데, 머리 속에 넣고 있는 노래가 3,000개였다고. 또, 이박사의 노래를 틀어 놓고 즉석에서 도너츠를 반죽해서 만드는 분의 사연도 '춤추는 도너츠'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적이 있는데 방송은 이쪽이 먼저다. 영상에서 청주 캬바레 면접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이 부분은 댓글에 따르면 실제 이야기가 아니고 사전에 연출된 장면이라고 한다. 캬바레 사장으로 등장한 인물이 이박사 1집을 제작해준 손오현이고, 몸무게가 어떻게 되냐고 묻는 밴드마스터는 현재까지도 이박사와 함께 작업하는 키보디스트 김수일이다.

이박사 본인이 회고하길 이 방송 촬영 당시 NG를 많이 냈으며, PD가 '슬픈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했지만 슬픈 표정이 나오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을 하기 전에는 세는 나이로 17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요릿집(요정)에서 3개월 동안 잔심부름일을 하였고 양복점 시다 3년을 했다. 그 후 이발소 시다, 우체국 편지배달, 중국집 음식배달, 다방 심부름, 당구장 등의 일을 전전했다. 세는 나이로 20살, 만 19세가 된 해인 1973년 5월 KBS에서 민속백일장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지역예선에 입상을 해 서울로 올라가 본선 참가를 했지만 본선에서 망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1년을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내려가 양복점 시다와 요정 아가씨를 상대로 창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976년 이후 아예 양복점을 세차례나 경영하면서 두차례 망해서 남의 양복점에 가서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세번째 양복점을 개업했는데, 영 재미가 없어서 자신이 개업한 양복점을 남한테 넘기고, 친구의 빚을 갚아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일할 수 있는 관광버스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위키백과 문서에 1977년 군 전역 후 관광버스 가이드 생활을 시작했었다고 나온 적이 있었지만 이박사가 병역을 마치고 관광버스 가이드 생활을 시작했다는 내용은 방위병 복무만으로 보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4]

자서전에 쓰인 내용을 보면, 일본의 러브콜을 받은 1995년에는 관광버스 가이드를 그만두고 요릿집에서 창을 하거나 연회장에서 초대가수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3. 전성기[편집]



살충제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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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뮤직에서 제작한 포스터[5]

1989년가수데뷔한 그는 맘모스 태광음반 손오현 사장의 도움으로 신바람 이박사 Vol.1 을 출시한다. 기존 고속도로 뽕짝과는 사뭇 다른 노래들로 테이프 판매량 1백만 장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인기의 여파로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며, 그 이후 19개의 앨범을 내고, 앨범마다 큰 인기를 얻으며 고속도로에서 신바람나게 팔려나갔다.

메들리 스타로 인기를 모으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995년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음반시장을 가진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정확히는 1995년 이박사의 메들리 테이프를 일본의 인디 레이블이 수입해서 팔았는데 이것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고, 당시 굴지의 레이블인 일본 소니 관계자가 한국 남대문시장을 관광하다 우연히 그의 음악을 들었던 것. 그는 이박사의 노래에서 ‘대박’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여담으로 이때 소니뮤직에서 제의한 계약금만으로도 이박사 일가가 집을 하나 살 정도였다고 한다. 이박사는 당시 재혼한 지 3개월째였는데, 계약을 하고 나서 아내와 둘이 믿을 수 없어 몇 번씩이나 재차 확인했다고.

그들은 처음에 일본어 음반을 내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한국에서 하던 스타일 그대로를 고집했다. 계약이 파기될 뻔했지만 히트 가능성을 강하게 예감한 일본 관계자가 이박사의 손을 들어줬다.

한류(韓流)란 단어도 없던 시절, 현란한 복장을 한 한국인이 나와서 일본의 엔카 비슷한 무언가를 사이키델릭하게 부르는 모습은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을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은 금세 이박사에게 열광했다. 소니뮤직과 자회사 큔소니 레이블은 발 빠르게 한국어 앨범을 제작해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

타워, HMV 등 대형 레코드 매장에는 이박사 음반의 판매대가 따로 설치돼 있고 판매량도 일본의 톱가수에 뒤지지 않는다.

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에서부터 촉발된 이박사 선풍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그는 인기 TV프로에 잇따라 출연했고 일본 최대의 제약업체인 긴쵸사는 그를 CF모델로 기용했다. 배경음악으로는 ‘강원도 아리랑’ 메들리가 쓰였다. 일본 3대 음악프로그램 중 하나인 후지 TV의 ‘헤이헤이헤이’에 출연하기도 했다. 최고의 한류스타 보아보다 5년 먼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다.

일부 열성 팬은 이박사와 대화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국에서 중년층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던 그가 일본에서는 20, 30대 젊은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아사히 신문은 4월25일자 석간에서 6단기사로 그의 음악을 소개하면서 『짧은 시간에 젊은이들로부터 열렬한 반응을 얻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박사가 일본에서 발매한 싱글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2」,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 그리고 1990년 일본 최고의 테크노 그룹인 덴키그루브(DENKI GROOVE)와 함께 만든 「이박사&덴키그루브:열려라 뽕짝」 등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다.

일본의 톱가수들도 서기 어렵다는 도쿄 부도칸(무도관)에서 데뷔 공연을 벌였다. 부도칸은 일본 가수들에게도 꿈의 무대다. 1996년 이박사는 ‘일본 가요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부도칸에서 열린 그의 공연 실황.

이박사는 1996년 일본 최고의 명문 도쿄대의 초청을 받고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강의를 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전통 가요는 일본의 엔카에서 비롯됐다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국위 선양이다. 이때 소니뮤직 사장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당시 소니뮤직 사장이 회사 소속 아티스트와 밥을 먹는 일은 정말 드물어 직원들도 놀랍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장은 이박사에게 선물이라며 묵직한 포장지를 하나 내밀었는데, 이박사는 이것이 금두꺼비가 아닐까 하고 기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숙소에서 포장을 뜯자 나온 것은 배추김치 한 포기였다고(...)


이후 1997년, 일본의 전위예술 그룹인 메이와 덴키(명화전기)와의 공동작업으로 オレは宇宙のファンタジー(나는 우주의 환타지)라는 제목부터 우주적인 센스를 가진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 전곡 듣기 이 앨범의 동명의 수록곡은 국내에서 1집 발매 때 테크노 뮤지션인 가재발의 재편곡으로 스페이스 판타지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외에도 의외로 일렉트로니카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임으로써 일본 등지에서는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다. 참고로 한국에 인디음악이 창궐하던 90년대 후반(98년) 일렉트로니카 밴드 볼빨간[6] 1집 '지루박 리믹스 쑈' 앨범에서 이 곡의 오마주인 '나는 육체의 환타지'를 발표한 적이 있다.[7]

특히 1996년 덴키그루브와 함께 '이박사 덴키그루브 : 열려라 뽕짝'이라는 앨범을 작업, 크게 히트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테크노씬에 손을 댄 탓에 당시 국내에서는 흔치 않았던 일본식 테크노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 일렉씬에서도 많이 알아주는, 어쩐지 평가가 묘하게 엇갈리는 가수.


SBS - 이주일의 투나잇 쇼 출연영상 아래 서술하는 무도관 공연 일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 활동이 이박사에겐 정말 힘들었던 경험이라고 한다. 데일리안 인터뷰에서 말하길 너무 힘들었고, 음식도 안 맞아 상해서 버린 김치를 물에 씻어 먹기까지 했을 정도라고... 그래서 그는 소니뮤직과의 전속계약이 끝나자마자 귀국해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

4. 한국 재진출[편집]


이후 2000년 한국 소니 뮤직을 끼고 앨범 ‘스페이스 환타지’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일본 데뷔앨범 Encyclopedia of Pon-Chak과 구성이 동일한데, 명화전기와 함께 만든 트랙 ‘나는 우주의 환타지’를 가재발이 리믹스한 ‘스페이스 환타지’을 추가해서 발표했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고, 김경호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등의 인기를 얻었다.

2001년에는 현대상선의 초청을 받아 3월 14일 금강산 온천에서 한국 가수로써는 최초로 단독콘서트를 진행했다. 그 전까지는 남북 합동 콘서트는 진행되었어도 한국 가수의 단독공연은 이박사가 최초라고 한다. 유람선이 아닌 금강산 현지에서 공연하는 것도 최초였다고 한다.

이후 정규 2집 ‘Pak-Sa Revolution and Emotion’을 발표했다. 해당 앨범은 일본에서 출시했던 곡들을 재편곡하고 국내의 곡들을 추가해서 구성되었다. 그의 대표곡 ‘학교매점 출출해’ 같은 오리지널 곡도 존재한다. 해당 앨범의 수록곡 '애당초', '인생은 60부터', '서울 깜빡이' 세 곡은 이박사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을 하기도 했다.

5. 다리 부상과 활동 중단[편집]


한창 인기있을 때, 집앞의 나무를 다듬다가 다리를 다쳐 몇 년간 활동을 못했다고 한다. 이때 예약되어 있던 공연을 다 취소해서 위약금을 물어주느라 손해를 많이 봤다고 한다. 본인이 밝히기로는 이 부상이 2001년이었다고 한다.[8] 결론적으로 말하면 부상은 사실이지만 정말 부상 때문에 활동을 중단했는지는 미지수이다.

2012년 놀러와에 출연해서 '다리를 다쳤다'고 말했는데, 이후 9월 20일 이데일리 인터뷰에서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2002년도에 왼쪽 다리뼈가 으스러지는 사고가 있었어. 우린 ‘가오’(‘폼’을 속되게 이르는 말)가 있잖아. 외국 갔다고 둘러대고 한 3년 쉬었지. 지금도 비가 오면 다리가 아프고 불편해. 이후 2006년 ‘싼티멘탈’이 든 앨범 한 장을 냈는데 사기당했지 뭐야.”[9]


그런데 이박사와 친한 이박사의 일본 팬 Morris의 블로그에 이 부상에 대한 언급이 존재하는데, 이박사의 말과는 조금 다르다.

イ・パクサが負傷してしまいました。皆様に余計な心配をさせるのではないかと危惧しながら、やはりお伝えすることにします。

先週の豪雨は記憶に新しいことと思います。そn日曜日、パクサが雨で倒れてしまった垣根の薔薇の花壇を補修しているときに、片足の靭帯が切れるという事故が起こってしまいました。骨に細かい罅も入ってる模様です。

翌日の月曜日のitvのライブは、まわりのスタッフの反対を押しきって、舞台に座ってライブを強行しました。お客様の反応はとても良かったです。ファンとの約束を果たしたいからと、かなり無理をされたようです。

完治まで約4週間かかるとのことです。パクサに、皆様の激励のメッセージをお寄せください。

이박사가 다치고 말았어요.여러분에게 괜한 걱정을 하게 할까 봐 걱정하면서 역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의 폭우는 기억에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요일 비로 쓰러져 버린 울타리의 장미 화단을 보수하던 중 한쪽 다리의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뼈에 미세한 금이 간 모양이에요.

다음날 월요일 itv 라이브는 주변 스태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에 앉아 라이브를 강행했습니다. 관객의 반응은 매우 좋았습니다. 팬들과의 약속을 이행하고 싶다고 상당히 무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완치까지 약 4주가 걸린다고 합니다. 이박사님께 여러분의 격려 메시지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다리가 으스러졌다는 언급은 없고. 인대가 끊어져 뼈에 금이 갔다고만 서술되어 있다.인대가 끊어진거면 으스러진것보다 큰 부상인데 그리고 그 다음날 의자에 앉아 라이브 공연을 했다는 언급도 있다.


그러나, 지인이 단 유튜브 댓글을 보면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하려던 당시 팬클럽 회원이 돈을 들고 잠적했고, 그 탓에 모든 활동이 무산되었는데 이박사가 이를 감싸주려고 다리 부상 핑계를 댔다고 한다. 또한 이박사가 방송에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수를 쓴 무리들도 존재했다고 한다. 정황상 부상이 원인이라기보다는, 돈을 들고 잠적한 팬클럽 회원과 003 앨범을 발매하고 당한 사기가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이박사는 디시뉴스에서 003을 내준 사람이 '자기와 친한 동생'이었다고 말했다. 이박사는 그냥 이 사람을 감싸주려고 다리 부상 핑계를 댔을 가능성이 높다.

이박사의 팬클럽 모임에서 이박사가 말하길, 003 앨범을 발매하고 매니저에게 앨범을 홍보하라고 돈을 얼마 줬더니 그걸 먹고 날라버렸다고 한다.

2021년 1월 11일 최일구의 허리케인 라디오에 출연해서 '공백기 동안 사기를 두 번이나 당했고, 2년간 차 있던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면서 위약금까지 배상해야 했다.'고 말한 걸 보면 위약금에 사기 2번이 컸던 것 같다.

그와 별개로 나이가 나이인지라 최근에도 다리는 계속 다치는 듯. 인대가 끊어지는 건 스포츠선수로 치면 선수생명이 끝날수도 있는 중상이다. 완치되더라도 후유증이나 자잘한 부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

6. 그 후[편집]


2003년에는 epaksa 003이라는 앨범을 냈었는데. 이게 헤비메탈, 레게, 테크노 등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본인이 디시뉴스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100이라고 하면 70 정도는 구현해낸 앨범" 이라고.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 앨범 홍보를 맡은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앨범에는 쿨 앤 더 갱의 곡 'Celebration'을 리믹스한 곡 <황조가>도 수록되어 있다. 결국 저작권 때문에 이 곡은 내려갔다...

2007년에는 그의 노래 '이집트 여행'이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에 등장하기도 했다.

2012년에 미니앨범 '레알 뽕짝커'를 발매했고, 그 시기 MBC 공감토크쇼 놀러와에도 출연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게다가 그 공백기 동안 사기도 두 번이나 당하고 2년간 빽빽히 차있는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어 위약금을 배상하게 되어 100억에 달하는 가산까지[10] 모두 사라지고 이혼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이혼을 두 번 했다. 인간시대에 출연한 첫 번째 부인과는 아내의 도박중독을 이유로[11] 큰아들 이성민씨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혼했고, 이후 배복선씨와 재혼했으나[12] 이분과도 이혼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생의 시련들로 인해 마지막 남은 큰아들과 함께 힘든 생활을 지내 왔었다고 한다. 몽키매직, 스페이스 환타지 같은 대표곡은 판권이 전부 일본에 있다고 하니 저작권 수익도 기대하기 어려운 듯하다.

배복선씨가 OBS 다큐에서 말하길 서울에 자가 아파트가 있었고, 전세로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생활이 안 돼서 빚을 졌다고... #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천마산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링크 날씨가 좋은 날 동네를 지나다니다 보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다.

2019년 들어서 근황올림픽에서 올린 영상에 따르면 인천으로 이사를 간 듯하며, 2층 사무실을 월세로 임대하여 라이브 카페를 돌며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듯하다.

파나소닉 드라이어의 광고를 찍은 것이 확인되었다. #

2020년 빅대디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와 계약 후 새 앨범 발매 준비를 하고 있다. #

깡 패러디인 '깡키매직'을 준비했다고 한다. 새 앨범으로 7월중 컴백할 계획이라고. #

2020년 8월, 빅대디 계약 후 첫 싱글인 ‘술이 웬수다’를 발매했다. 그리고 술이 웬수다 챌린지를 시작했다. 이 챌린지의 우승자는 가수 박군이었다.

킬링트로트 라는 것에 출연해서 라이브를 했다. 딩고 킬링벌스의 패러디인 듯. 배경이나 엠블럼 등이 동일하다. https://youtu.be/iU4ocyxPWy4

빅대디엔터와 계약한 후 머리스타일을 확 바꾸고, KBS전주에서 진행하는 백투더뮤직에 출연해 2009년 제작한 곡 '야야야' 라이브를 했다. https://youtu.be/IA6m-FGfuAA 참고로 해당 곡은 이박사 작사 작곡에 편곡은 아들 이성민이 맡았다.

최근에는 복면가왕과 코미디 빅리그, 보이스킹 등에 출연했다.

2021년 5월 12일 공개된 갤럭시 스토어 광고에서 배경음악을 불렀다.

2021년 6월 3일 진주시의 특산물 파프리카를 홍보하는 곡인 ‘진주 파프리카’라는 노래를 발매했다.

250의 앨범 '에 그의 동료 김수일과 함께 참여했다. 그후 250과 함께 공연도 했다. 이박사가 참여한 곡은 '사랑 이야기'.

2022년 현재 각종 행사나 나이트클럽 등의 밤업소를 돌며 팁을 받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는 듯하다.

2022년 6월 10일 이루어진 고 송해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송해 선생님은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인으로서 길을 터주신 것 같다. 8차선, 16차선 길을 내주신 건데 나머지 후배들이 이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남을 헐뜯지 말고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가르쳐 주고 가셨다"며 소회했다. # 여담으로 송해와 이박사는 같은 양복점을 이용했다. 이박사가 MBN 특종세상에서 방문한 단골 양복집이 송해의 생전 마지막 양복을 가봉한 곳이다. 영상을 보면 이박사가 송해 선생님을 회고하며 "애기 엄마(정황상 이혼한 부인 배복선씨) 가게에서 오징어회를 자주 드셨다"고 말하는 모습이 보인다.

리듬파워의 월드컵 응원곡인 주모 Remix에 인트로로 참여했다. 심지어 앨범 커버에서는 주연으로 나온다(...)

2023년 2월 2일 TBS FM 이가희의 러브레터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2023년 6월 애프니어의 곡 Ph.D에 MC 노리아키와 함께 피처링을 했다.

2023년 그의 팬클럽이 소규모이긴 하지만 카카오톡 오픈채팅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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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박사의 아버지는 1894년생이다.[2] 현재에는 '여객자동차 운수 사업법 시행규칙' 변경에 따라 관광버스 안에서 노래를 틀고 춤을 추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볼 수 없다.[3] 해설은 성우 박기량.[4] 이박사가 청년시기였던 1970년대의 배경을 보면 당시의 청년층 인구가 많아 병역자원이 넘쳐나던 시기였으며, 이 영향으로 인해 현역병 입영대상이 50%도 안되고 방위병 소집이 되거나 장기대기로 병역이 면제되는 경우도 많았던 시기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이박사의 학력, 당시의 키와 체중에 의한 병역판정기준으로 이박사가 관광버스 가이드가 되기 전에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병역을 마쳤거나 장기대기로 인한 소집면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기간 동안 일자리를 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박사처럼 1954년생이 주요 대상자였던 1973년 징병검사에서 초등학교 졸업자는 갑종(1급)만 현역, 1~3을종(2~4급)은 당시 방위병 소집대상이던 보충역이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것은 태진아도 비슷하며, 태진아는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쳤다.[5]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6] 볼빨간사춘기와는 다르다.[7] 사실 이 앨범 거의 전체가 이박사 오마주에 가깝다. 1번 트랙 제목이 '지루박 돌려요! (이박사에게 바침)'[8] 2001년은 공교롭게도 그의 정규 2집 'PAK-SA REVOLUTION & EMOTION'이 발매된 해이다.[9] 여기서 말하는 '싼티멘탈'이 든 앨범이란 'epaksa 003'을 말하는 것이다.[10] 인터뷰에서 한 곡 부를때 마다 1,000만원을 넘게 받았던 가수였고, CF도 심심하면 찍을 정도였으니 자세히는 100억이 넘었을 것이라고 본인이 이야기 하기도 했다.[11] 이박사가 일본 공연을 다녀와 보니 전재산을 챙겨 도박판으로 달려갔다는 썰이 있다. 이박사 본인은 아내의 노름 때문에 이혼했다고 행사에서 밝히긴 했다.[12] 배복선씨도 이박사와 마찬가지로 1988년 인간시대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고 이박사가 신동아 인터뷰에서 밝혔다. 알고 지낸 지 한참 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