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라크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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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고대 말
2.3. 중세
2.4. 중세 말
2.5. 근세
2.6. 근대
2.7. 20세기
2.8. 21세기
3. 관련 기사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이란이라크의 관계. 두 나라 모두 역사적으로 견원지간이지만 시아파 인구가 다수라는 공통점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종파가 같아도 서로 민족과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1] 서로 경계하는 분위기도 있다. 양국간의 관계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아랍인과 이란인 사이의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다. 최근 이라크의 경제난 및 전력부족 등의 사회문제가 친이란 정치인과 민병대들의 부정부패와 연관되어있다는 이유로 반이란 시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고대[편집]


고대 이라크 일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이란고원엘람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라크 일대는 아카드 제국 이래로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셈어파 민족이 주류가 되었으며, 동부의 이란고원은 이후 인도유럽어족의 팽창 과정에서 인도유럽어족 이란계 민족들이 주류로 남게 되었다. 기원전 9세기에 흥기한 우라르투 문화권 등은 이라크 북부와 튀르키예 동부 외에도 아르메니아와 이란 각지에 고대 문화를 전파하였다. 기원전 6세기 발흥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이후 우라르투, 이란 북부의 메디아 및 오늘날 이라크 일대를 장악한 강대국이었던 신바빌로니아를 병합하고 오리엔트 일대를 통일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드로스 제국에 병합되어 멸망당하고,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휘하 장군들의 내전 과정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이란 중, 서부와 이라크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북방에서 남하한 다하이족이 셀레우코스 제국 영토 허리 부분을 끊어버리고 파르티아를 건국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해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 파르티아는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 일대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기원후 2세기 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끄는 군대의 침공을 받아 수도인 크테시폰을 포함한 수도권 영토를 일시 상실했다가 다시 찾았지만 이후에는 회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로마의 전투력 측정기 정도로 전락했다가 기원후 3세기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밀려 퇴장당한다.


2.2. 고대 말[편집]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이란고원 일대의 파르스에서 기원하기는 했으나 사산 제국의 엄연한 중심지는 건조한 이란고원 지대가 아닌 인구가 밀집된 이라크 일대였다.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 역시 이라크 일대 후대에 건설되는 바그다드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했다.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를 전복시킨 이후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라크 북서부와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일대를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으며 로마인 포로들을 동원하여 이라크 지역의 관개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여 이라크 일대의 농업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사산 왕조는 이라크 남부 언저리에 라흠 왕국이라 불리는 봉신국을 두었다.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에서 아라비아 북동부에 걸친 지역에 위치한 라흠 왕국은 아랍계 기독교인들의 왕국으로 문화적으로 기독교 아시리아인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들은 이라크 최초의 아랍 왕조 세력이기도 했다.


2.3. 중세[편집]


이란과 이라크 일대를 장악했던 사산 왕조는 고대 말 동로마 제국과의 지나친 소모전으로 국력을 소진하였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랍인들이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부족간 상쟁을 멈추고 통일한 뒤 사산 왕조를 공격하자 수도 크테시폰이 함락당하고 멸망하였다. 아랍인들이 사산 왕조를 대상으로 진행한 전투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승전이 바로 카디시야 전투였는데, 이 카디시야 전투는 20세기 후반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후세인 정권 측에서 프로파간다 용으로 다시 기념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카디시야 전투는 고대 당시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의 적대감과 이질감을 통해 후대에서도 끊임없이 재해석되었다. 아랍인 역사가 측에서는 카디시야 전투 당시 사산 왕조 군대는 귀족 군인들에게만 물과 식량을 주고 보병들은 갈증 속에서 싸우게 한 것과 달리 아랍 무슬림들은 빈부 상관없이 물과 식량을 공평하게 나누어서 훨씬 더 적은 병력에도 불구 단합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강조하는 반면, 페르시아인 시아파 & 민족주의 성향 역사가들은 해당 전투를 미개한 아랍인들이 문명인 페르시아인들을 힘으로 찍어누른 대재앙이라고 평가하였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이란과 이라크 일대는 모두 이슬람 제국의 영토가 된다. 이라크 일대는 사산 왕조의 중심지였으나 도회지 주민의 상당수는 인도유럽어족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인이 아닌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아람어를 사용하는 아시리아인이었고, 이들이 사용하는 아람어는 로마 제국의 시리아 주민들이 사용하는 아람어와도 소통이 가능하였다.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이라크, 시리아의 아람인들과 콥트어를 사용하는 이집트인들은 이슬람 제국 치하에서 아랍인과 동화되었다. 반면 이란 고원의 지역 주민들은 이슬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되 페르시아어를 보전하고 페르시아인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이란 동부 호라산 지역에 정착한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인들 사이의 반 우마이야 왕조 감정을 이용하여 우마이야 칼리프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여 전복시키고[2] 압바스 왕조를 건국한다. 압바스 왕조는 이슬람 제국의 수도를 전쟁이든 상거래든 명백하게 동로마를 겨냥했다고 할 정도로 구 로마령이었고 타우루스 산맥을 따라 이루어진 국경선과도 멀지 않았던 시리아 일대의 다마스쿠스에서, 크테시폰과도 멀지 않아 당연히 구 페르시아령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바그다드를 신축하면서 천도하였으며[3] 압바스 제국의 전성기 동안 이라크 지역은 세계의 부와 물산이 모이는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압바스 왕조의 건국 세력은 기원이 호라산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와 이란 지역의 교통로 및 무역로 정비에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이라크 외에도 이란 역시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페르시아인 학자 및 관료들은 이라크 바그다드 및 이란의 니샤푸르 등의 도시에서 고대 페르시아와 인도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학문을 진흥시킴과 동시에 도시 행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는 영토가 상당히 광대하였다. 초창기 유능한 칼리파들이 제위하던 시절에는 광활한 제국의 관료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으나 하룬 알 라시드 사후 칼리프들의 권위가 조금씩 실추되고 내분이 빈발하기 시작한다. 아랍인들 사이의 내분을 제어하기 위해 알 마문 같은 칼리프들은 아랍인 군인 대신에 튀르크인 노예병(맘루크)들을 중용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압바스 제국 각지에서 군벌들이 사실상 독립적인 왕조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한 때 이란계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 군벌 정권이 바그다드의 칼리파를 간섭하는 상황마저 일어나고 이라크의 순니파들이 동요하자 호라산 지역으로 침투해온 오우즈 튀르크인들이 부와이흐 왕조를 축출하고, 바그다드 칼리파를 사실상 꼭두각시 삼는 셀주크 제국을 건설한다. 이후 이란과 이라크는 셀주크 제국의 강역이 되었고 이른바 투르코만이라고 불리는 튀르크인들이 대거 정착하기 시작했다. 셀주크 제국의 명재상이자 페르시아인 니잠 알 물크는 바그다드-니샤푸르-메르브-부하라-사마르칸드를 잇는 교역로를 정비하여 한 때 타격을 입는 듯 하던 중앙아시아 무역로를 다시 활성화시키고 셀주크 제국의 부흥을 견인하였다.

오늘날 이란은 시아파, 아랍인들은 수니파로 분리되는 것과는 다르게 중세 당시에는 이란과 이라크 모두 오늘날과 다르게 순니파 인구가 대다수인 지역이었다. 다만 페르시아인과 아랍인들 사이의 반목은 중세 교리 해석의 차이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점은 마찬가지였는데, 중세 페르시아에서는 쿠란하디스 외에도 인간 이성[4]을 중시하는 하나피파 법학파가 발전하게 되었다. 하나피파 법학자의 시조 아부 하니파가 한 번은 아랍어 대신 페르시아어로 예배를 보자 곁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 예배가 무효화됩니다.”라고 간언하였고 이에 그가 다시 아랍어로 예배를 집전했던 사례가 유명하다. 페르시아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하나피파 법학파는 순니파-페르시아 문화의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전파 과정을 통해 오늘날에도 해당 지역의 주요 법학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이슬람 세계 동부에서 유입되었던 터키인들 역시 하나피파 법학파를 따르게 되었다.

하나피파가 유행하던 페르시아 지역과 대조적으로 중세 이라크의 도회지 소상인들 사이에서는 후대 아랍 민족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샤피이파한발리파 신학이 유행하였다.


2.4. 중세 말[편집]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이라크와 이란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몽골 제국 침략군들은 관개 시설들을 집중적으로 파괴하여 이란과 이라크의 사막화를 가속화시킴과 동시에 도회지들을 초토화하였다. 몽골 제국의 일 칸국은 이란과 이라크 일대의 상공업을 고대 봉건제 식의 공납 형식으로 통제하여 도회지의 상공업을 크게 침체시켰다. 고대, 중세 시대 세계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이란과 이라크는 몽골 제국의 침략과 학정 하에서 빈곤한 건조지대로 전락하는 동병상련의 역사를 공유하게 되었다.


2.5. 근세[편집]


시아파 근본주의 성향의 사파비 제국이 이란 전역 및 이라크 동남부를 장악한다. 사파비 제국은 제국 내 신민들을 강제로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순니파 인구를 학살하거나 추방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라크 동남부 및 이란 주민 대다수가 시아파 12이맘파로 개종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라크 북부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란의 사파비 제국이 붕괴되고 여러 왕조로 교체되는 와중에 오스만 제국은 이라크 일대의 영토를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 중부는 아랍인 순니파 인구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고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에서는 다른 제국들의 방치 하에서 빈곤하고 고립된 반농반목 생활을 영위하던 쿠르드인들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2.6. 근대[편집]


사파비 제국의 멸망 이후 이란에는 호타키 왕조, 아프샤르 왕조, 잔드 왕조 등을 거쳐 카자르 왕조가 들어섰다. 카자르 왕조의 창건자들은 군사적 수완이 있는 편이었고, 오스만 제국과의 분쟁 지역이던 이라크 남부 지역을 다시 접수하는데 성공한다.

여담으로 근대 카자르 왕조의 군대가 고대부터 이라크에 잔류해 있던 소수종교인 만다야교 사원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만다야교 교계가 완전히 멸망할 뻔한 적이 있었다.

2.7. 20세기[편집]


영국의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 컴패니가 이란의 카자르 왕조 영내에서 석유 채굴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20세기 초반 이란에서 생산된 석유를 이라크 모술을 거쳐 지중해로 운송하는 파이프 라인이 설치되었다. 한 때 오스만 제국 영토였던 이라크 대부분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영국의 보호국이 된 상황이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대체로 사이가 않좋은 경우도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민족적 반감만 빼면 그럭저럭 평범한 사이였다. 그러나 이란에서 이란 혁명이 발발하여 종교적 근본주의 성향의 강경파가 정권을 잡자 이라크와 다른 중동권에서는 이를 경계했다. 이라크는 시아파가 65%로 다수인 국가지만 하심 왕조와 카심, 바크르, 후세인 등 역대 집권세력은 수니파였다. 그래서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에서 강경 시아파가 득세하고 사우디에서 시아파 폭동을 일으키고 이라크 내의 다수 시아파를 충동질해 수니파 후세인의 독재권력을 위협하는 등 이란의 시아파가 중동의 패권을 위협하자 수니파가 다수인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권이나 아랍권 맹주를 노리던 후세인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특히 이란과 접한 이라크는 더욱 경계를 하였으며, 이전의 영토 분쟁과도 겹치자 사담 후세인은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주의자들을 잡겠다는 명분과 영토 분쟁으로 이란을 침공했고 반대로 이란 역시 이라크를 어떤 방법들을 동원해서라도 끈질기게 막았다. 자세한 부분은 이란-이라크 전쟁 참조.

이란-이라크 전쟁 결과 두 나라는 모두 석유 부국에서 가난한 빚쟁이 국가로 전락하였다. 그 여파로 서로를 헐뜯는 건 물론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불신도 심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외교 관계는 1990년 복원되었다.

2.8. 21세기[편집]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자 이란은 이라크에서 교체된 새로운 시아파 정권을 이용해 친이란 국가를 만들려고 하기도 했었다.

2013년 9월 이라크 내의 반체제 성향의 이란 난민들이 있는 캠프에서 피습을 당해 44명이 사망했다.

전 인구의 60% 이상이 이슬람 시아파이기 때문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시아파 맹주 이란과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미국의 침공 이후 사담 후세인 정권 인사들은 모두 쫓겨나고 후세인 시절에 이란으로 망명했던 시아파가 지금의 이라크 정부를 구성했으니 이란에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이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부은 이라크 전쟁이 아이러니하게도 적국인 이란에게 좋은 일이 된 셈이다. 특히 다에쉬 격퇴전에는 이란이 자국의 정예군인 혁명수비대를 파견, 혁명수비대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가 군사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등 지금은 사실상 동맹국 수준으로 관계가 가까워졌다.[5] 다에시 때문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라크 - 이란 - 미국의 삼각 동맹이 지금 이라크에서는 현실이 됐다.[6] 다만 어디까지나 예전보다 가까워졌을뿐이지, 사이가 좋아진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라크의 시아파 무슬림들 중에는 이란을 증오하고 이란의 적국인 미국이나 시아파와 앙숙지간인 사우디, 모로코,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같은 수니파 아랍 국가들에게 친화적인 사람들도 많이 있다. 왜냐하면 이라크 시아파 기준으로는 이란은 자기 민족을 학살한 외세이고[7] 미국은 독재자 후세인의 억압에서 구해준 해방군이기 때문이다.

2018년에도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이라크 시위대 수백명이 이란 대사관으로 몰려가 반이란 시위를 벌이며 이란 대사관에 불을 지르고 이란 국기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을 정도였다.# 이는 이라크 내에서 전부는 아니어도 이라크 시민들이 여전히 이란을 신뢰하지 않고, 이란에 대한 불만이 지금까지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19년 10월 3일 이라크 정부는 이란 대사가 미국- 이란 전쟁이 발생할 경우 이라크 내의 미군에 보복하겠다고 발언하자 이란 정부에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에 개입하지 말라고 항의했다.# 그래서 2019년 이라크 시위를 계기로 이란 영사관에 방화를 하기도 했다.#

2020년 6월 25일에 이라크 정부는 대테러 부대를 동원하여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 카타이브 헤즈볼라를 급습한다음 고위 간부 3명과 민병대원 20명을 체포하고 로켓포 10개를 압수했다.#

이라크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지역예선(아시아)에서 조추첨에서 나란히 A조로 뽑히면서 같은 조가 되었다. 나머지 4국은 대한민국,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레바논.

2021년 3월 6일에 이라크의 무스타파 알카디미 총리와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지역의 안정과 안보를 증진하기 위한 전화통화를 했다.#

2022년 3월 26일에 이라크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려다가 친이란 계열에 속한 의원들이 불참하면서 재차 실패했다.#

2022년 11월 1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관계자에 의해 이란이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에 공격을 기획하고 있다는 정보가 공개되었다.#

2023년 4월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테헤란을 방문한 압둘 라티프 라시드 이라크 대통령을 맞아 양국이 이미 맺은 상호협력을 위한 조약들을 준수하고 양국 관계를 더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두 나라는 미화 100억달러 (13조 4100억원 )에 이르는 양국간 무역량을 더욱 증가시키는 '전략적' 협력안과 두 나라의 인프라 건설, 물, 전기, 가스, 에너지 문제에 대한 대처에도 합의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 하메네이는 라시드 대통령에게 양국의 ‘단결’을 강조하는 한편 중동의 안보를 위해 미군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10일, 이라크 측은 미국이 이란 동결자금 27억 달러 해제를 허가했다고 밝혔다.#

3. 관련 기사[편집]




4. 관련 문서[편집]



[1] 이라크는 셈족 계열, 이란은 인도이란인 계열.[2] 소위 압바스 혁명(Abbasid Revolution)이라고도 한다.[3] 실제로 우마이야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서방(북아프리카,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서고트(이베리아 반도)와 프랑크 왕국(프랑스) 등) 경략에 방점을 둔 반면, 압바스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동방(파키스탄, 인도, 중앙아시아 등) 경략에 방점을 두었다.[4] 실질적으로는 현지 문화와 관습[5] 사실 이라크 입장에서는 자국 군대가 오합지졸 수준인데다 미국은 공습에만 의존하고 지상군 투입 등 적극적인 개입은 꺼리고 있으며 다른 아랍 국가들은 모두 수니파라 시아파 정부인 이라크를 도와주려고 하지를 않으니 그나마 이란의 도움이 절실하며, 이란 입장에서도 이라크 정부가 붕괴되고 다에쉬에게 장악되면 이란도 위험해지니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6] 물론 미국 정부는 이란과의 군사협력에 대해서는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지상 작전에서는 이란 혁명수비대가 지휘하는 시아파 민병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7] 사실 민족부터 다른데 이란은 페르시아인이고 이라크는 아랍인이다. 특히 이란은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란-이라크 국경 지역에서 살던 이라크인들과 이라크군 포로를 학살, 고문하는 전쟁범죄도 자행했다. 그리고 전근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슬람화 및 아랍화 이전에는 현대 이라크인의 조상인 메소포타미아 주민들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사산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이슬람화 및 아랍화 이후에는 지금의 이라크 땅에 살던 아랍인들이 사파비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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