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쿠웨이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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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갈등
3. 역사적 관계
3.1. 20세기
3.2. 21세기
4. 교통 교류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이라크쿠웨이트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두 국가는 서로 이웃한 나라이고 같은 아랍계열의 국가라서 종교나 문화적으로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상은 차이점이 많다. 단적으로 이라크 아랍인들은 같은 아랍인이라 하더라도 도시, 지역, 부족별로 종파나 문화가 무척 다양한데 비해, 쿠웨이트는 근세 이 지역에 정착한 베두인 계통의 아니자족을 기원으로 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일어난 걸프 전쟁으로 인해 양국관계는 앙숙이다. 물론 이라크에서 쿠웨이트를 침공해 걸프 전쟁을 일으켰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이 실각하고, 이후 이라크에 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관계개선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쿠웨이트군은 이라크를 경계하며, 일반 쿠웨이트 국민들의 이라크에 대한 시선과 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


2. 갈등[편집]


20세기 이라크의 바트당 정권은 쿠웨이트를 두고 "영국이 아랍 무슬림들로부터 석유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국가"라고 주장하며 쿠웨이트를 자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이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하였고, 이는 걸프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이라크-쿠웨이트 관계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중세 이래 아랍 문명의 중심지는 엄연히 이집트시리아, 이라크였고 이러한 연유에서 해당국 국민들은 대개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를 "못 살던 촌동네가 석유로 졸부가 됐다"고 아니꼽게 보는 경우가 없지 않다. 더욱이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 정권이 반서방 성향 국가이다보니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를 "영국이 중동의 석유를 수탈하기 위해 만든 근본도 없는 괴뢰정권"이라고 국민에게 교육시킨 영향이 남아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쿠웨이트의 입장을 보자면 또 상황이 다르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 남베트남 사람들은 같은 북베트남인과 동질감을 느꼈고, 그 결과 북베트남군의 침공을 환영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쿠웨이트인들은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침공을 환영하기는 커녕 침략자로 보았다. 이라크는 바트당 정권 치하의 아랍 사회주의 국가였다면 쿠웨이트는 왕정이 유지되는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 문화적-정서적 차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라크 인구의 60%는 시아파 아랍인, 20%는 순니파 아랍인, 20%는 쿠르드족이며, 쿠웨이트와 인접한 이라크 남부 지역 주민 대다수는 시아파이다. 쿠웨이트가 이라크 영토로 귀속되었다면 순니파인 쿠웨이트 시민들은 시아파 사이에 끼인 종교적 소수자로 상당한 불편을 겪어야 한다.

일단 아랍 연맹은 쿠웨이트의 독립을 공인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병합하는 논리는 이란이나 사우디 등 다른 중동의 대국들이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는 데에 악용될 소지도 있을 뿐더러, 쿠웨이트와 같은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이 쿠웨이트 측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3. 역사적 관계[편집]


걸프전을 배경으로 하는 마스터 키튼 8권 1화에서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쿠웨이트는 원래 영국이 석유전략 때문에 억지로 이라크에서 독립시킨 나라이고, 쿠웨이트는 괴뢰 왕조로 주변과 관계 없는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족 추장을 앉혔다는 내용의 영국 책임론을 설명한다. 더 어이없는 것은 작중에서 그 해설을 해 주는 사람이 영국 수상 비서라는 것. 작자의 치명적인 고증오류이긴 한데, 정작 걸프전 당시에는 비슷한 시각의 기사도 꽤 있었던 시절이다.

일단 이라크란 나라 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재탄생하게 된 나라이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멸망 이래 이라크는 전통적으로 지중해에 기반한 제국 세력(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과 이란 고원에 기반한 세력(사산조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 등)의 각축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라크 일대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혹은 이슬람 제국 같은 대제국의 중심지가 되었을 때나 이런 각축장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이라크는 1932년 과거 오스만 제국 시절의 모술령, 바그다드령, 바스라령을 하나로 묶어서 만들어진 국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의 영토로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쿠웨이트가 19세기 바스라 빌라예트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바스라가 이란 잔드 왕조의 공격을 받으면서 많은 상인들이 쿠웨이트로 피난하였고, 근대 바스라와 쿠웨이트의 경제가 밀접하게 엮어있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쿠웨이트 측은 영국은 제맘대로 쿠웨이트의 국경선을 책정해 독립시켜준게 아니라 오스만과의 회담을 통해 결정된 구획선을 기준으로 국경선을 삼았다는 것을 반박의 근거로 삼는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 대전에 패함에 따라 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간에는 '세브르 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에 의해서 오스만 제국은 연합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아랍 지역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아랍은 영국과 프랑스의 통치하에 놓여진다. 이 때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가, 이라크와 쿠웨이트, 팔레스타인 등의 지역은 영국이 통치하게 되었고 영국이 통치한 이라크 지역을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The British Mandate of Mesopotamia)'라 불렀다. 참고로 이 조약에 반발해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이 터키 독립 전쟁을 벌여 그리스를 물리쳤고, 연합국에 세브르 조약의 개정을 요구해 1923년 새로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터키의 독립성을 인정받고, 현재 터키의 영토를 확립하게 되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 상실에 관한 조약은 개정되지 않았으므로 세브르 조약과 변함없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북쪽 해안가를 영토로 주장할 수 있는 권원은 조약상으로도 국제관습법으로도 전무하다. 그저 이라크의 인구가 많으니 해안선이 넓었으면 좋겠다뿐인데 이런건 국제법상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3.1. 20세기[편집]


쿠웨이트는 1913년부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1961년부로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한다. 이라크는 1932년부로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하였다. 쿠웨이트는 18세기 이래 전통적으로 영국에 우호적이었으며[1] 더욱이 1차대전 초기 1914년부터 영국 편에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으므로 영국에서 쿠웨이트 정부의 독립성을 인정해 주었다. 이라크는 1932년 영국령에서 독립했으므로 이라크가 오스만 제국을 바로 승계했다고 볼 수도 없고, 쿠웨이트는 오스만 제국의 조차지(Leased Territories)[2]가 아니었으므로 이라크는 바스라 빌라예트를 승계했다는 것을 이유로 쿠웨이트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3.2. 21세기[편집]


오늘날에도 쿠웨이트인의 이라크에 대한 국민 감정은 대단히 좋지 못하며 침략자로 보고 있다. 오죽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게 당한게 심했으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시리아, 이집트, 모로코, 요르단, 사우디, 튀니지 등 다른 아랍국가들이 미국,영국의 이라크 전쟁을 비난할때 쿠웨이트만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을 정도다.

미국을 지지하는 친미 아랍어 방송인 알 후드가 미국과 합작으로 세워진 곳도 바로 쿠웨이트였다. 카타르의 알 자지라와 맞서기 위하여 만들어졌지만 뭐 아랍권에선 알 자지라는 커녕 아랍 각 방송국 상대도 되지못하고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 결국 문 닫았다. 쿠웨이트에서조차 철저하게 외면당했으니 말 다했다.

그뿐만 아니라 걸프전으로 인한 배상금을 더 내놓으라고 이라크를 압박하는 한편, 2013년에도 쿠웨이트 국경에서 이라크와 총격전이 벌어지는 등 거의 원수로 보는 수준. 이제는 쿠웨이트인들이 이라크인들을 거지라고 멸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것과 다르게 사담 후세인이 몰락하면서 적어도 외교적으로 예전과 달리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한다. 이미 2004년에 이라크와 수교했으며 침공 당시 사죄 및 피해 보상금도 두둑히 받았다. 2014년 1월까지 450억 달러가 넘는 피해 보상금을 이라크에서 내줬으며 총보상금은 525억 달러로 매해 석유를 팔면서 그 수익을 이자와 같이 이라크에서 내주고 있다. 사실 쿠웨이트와 이라크가 사이가 나빠진 계기인 걸프 전쟁은 사담 후세인의 명백한 잘못이고, 현 이라크 정권은 아무튼 후세인 정권을 부정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후세인 정권 시절의 앙금은 털어버리고 쿠웨이트와 관계 개선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 솔직히 이라크인들도 걸프 전쟁에 대하여 잘했다느니 잘났다는 반응은 그리 없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 기자가 이라크인들을 만나 취재할때, 오죽하면 같은 이슬람 나라, 그것도 약자를 먼저 쳐들어가 뭉갰으니 개망신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2019년 10월, 이라크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는 이라크에 거주하는 자국민에 철수를 권고하고 여행을 자제하라고 했다. #

4. 교통 교류[편집]


이라크 내전의 여파로 2022년 기준 이라크와 쿠웨이트 간의 항공편 교류는 아직 활성화되지 못한 편이다. 쿠웨이트 항공쿠웨이트 국제공항과 이라크의 알 나자프 국제공항을 연결하는 노선을 운영 중이다.

5. 관련 문서[편집]



[1] 16세기 포르투갈이 쿠웨이트 일대를 식민화하면서 무슬림들을 학살하거나 혹은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곤 했는데, 이후 들어온 영국과 네덜란드는 오히려 현지인들을 무역 파트너로 존중해주던 편이었다. 쿠웨이트 시민들이 친영파인 것을 무슨 일제강점기 친일파 같은 식으로 해석하기 힘든 이유이다.[2] 양국간의 조약에 의하여 타국으로부터 빌린 영토. 홍콩마카오가 대표적인 예이다. 참고로 1913년 영국과 오스만 제국과의 조약만을 보았을때는 영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쿠웨이트를 조차했다고 볼 여지도 있으나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 위 조약이 파기되고 쿠웨이트는 영국령이 되었으므로 오스만 제국의 조차지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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