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시리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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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고대 말
2.3. 중세
2.4. 중세 말
2.5. 근세
2.6. 근대
2.7. 20세기
2.8. 21세기
3. 교통 교류
4. 관련문서


1. 개요[편집]


이라크시리아의 관계. 양국은 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속했으며 중세 때는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고, 현대사에서는 바트당 정권이 들어섰으며 다에시의 준동 및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고대 이라크와 시리아는 아람어 사용 지역이었으나 이슬람화 이후 아랍어권 지역이 되었다. 국기가 적백흑 삼색기로 비슷한 점도 닮았다.

유럽의 식민지였다가 제국주의 유럽 열강에 의해 인위적으로 현지 세력들의 내분과 대립을 조장하여 식민지 독립 이후에 쿠데타와 전쟁, 내분 등 정치적인 혼란을 겪은 점에서 마치 아프리카의 르완다-부룬디 관계와도 비슷하다.[1]

2. 역사적 관계[편집]



2.1. 고대[편집]


시리아와 이라크 모두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시대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는 오늘날보다 기후가 훨씬 습윤한 편이었고 고대 이 지역은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불리었다. 오늘날 터키와 시리아의 접경지대 일대 차탈 휘위크에서 시작된 농경은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 일대로 퍼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흥으로 이어졌다.

고대 아시리아 제국은 시리아 일대의 아람인들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고 이를 계기로 레반트(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리적 개념) 외에도 이라크 일대를 포함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아시리아 제국이 무너진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신바빌로니아 등등의 제국들이 흥성하다가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다시 통일한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으로 멸망하고 이후 그리스인들이 대거 정착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분열되면서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는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중 한 명이 건국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는 그리스와 가까운 안티오키아였는데, 수도가 지나치게 서쪽으로 치우친 문제도 동방 영토를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결국 이라크에 해당하는 영토 일대는 파르티아가 장악한다. 이를 계기로 시리아와 이라크는 수백여년간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헬레니즘 제국으로서 그리스인들과 아람인들이 융화하였으며 안티오크를 비롯한 도회지에서는 아람어 외에도 그리스어가 폭넓게 사용되며 헬레니즘 문화가 널리 번졌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고대 로마에 병합되었고 이를 계기로 시리아 지역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시리아와 이웃한 팔레스타인 유대인 사회에서는 셀레우코스 제국, 고대 로마 치하라는 사회적 배경 하에서 유대교 사회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비유대인 출신 개종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혹은 유대인들이 헬레니즘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관련하여 많은 의견 차이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사회적 혼란상을 배경으로 기독교가 출현하였다. 초기 유대교의 일파 정도로 취급되었던 기독교는 시리아의 안티오크 일대에서 크게 번성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공인 이전 시리아 속주는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기독교인 인구 비율이 높던 지역이었다.

2.2. 고대 말[편집]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같은 비슷한 시기 이라크 일대에서는 파르티아가 무너지고 새로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들어섰다. 사산 왕조의 명목상 지배층은 페르시아인이었지만 핵심 영토는 비옥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하류를 포함한 이라크 일대였고 이 지역 주민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셈어파 민족들이었다. 사산 왕조의 조로아스터교 강요 정책에도 불구 이라크의 아람인들은 시리아의 아람어 사용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리아의 기독교와 이라크 내 기독교계가 서로 항상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은 로마 제국에서 추방당하는 대신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교세를 넓혔고,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을 로마 제국의 스파이 취급하며 박해하던 사산 왕조는 자국 내 기독교인들과 로마 제국의 기독교인들이 서로 교파가 다르다는 점을 확인한 이후 탄압을 약화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라크의 아시리아인 기독교인들과 시리아 정교회 등은 서로 교리는 달라도 아람어 전례를 고수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2.3. 중세[편집]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이 6세기 내내 전쟁을 벌이며 국력을 쇠진하는 사이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아랍인들이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부족간의 상쟁을 멈추고 통일하여 정통 칼리파 시대에 들어서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기 시작한다. 아랍인들은 카디시야 전투의 대승을 기점으로 사산 왕조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2]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레반트 일대를 야르무크 전투를 통해 정복하고 이후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의 나머지 영토였던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차례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의 정복을 계기로 같은 문화권에 두 나라로 갈라져있던 시리아 지역과 이라크 지역은 한 제국의 영토로 통합되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아람인들은 각기 그리스어, 페르시아어를 아랍어로 번역하거나 동로마 제국, 사산 왕조의 행정 체계를 이슬람 제국의 행정 체계에 통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아람어의 위상은 아랍어로 대체되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주민 상당수가 아람어 대신 아랍어를 모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라쉬둔 칼리프조가 우마이야 칼리프조로 대체된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두었으며,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킨 압바스 칼리프조는 이라크 일대에 새로 바그다드를 건설한 후 수도로 삼았다.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는 아라비아 반도와 가까우면서 동시에 아랍인들과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던 아람인(아시리아인)들의 중심지였기에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로 삼기 적합한 지역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아랍인들이 발흥한 아라비아 반도는 척박하고 가혹한 기후로 인구 부양력이 낮은 사막 지역이라 대제국의 중심지로서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2.4. 중세 말[편집]


압바스 왕조 초창기까지만 해도 이슬람 제국에서 무슬림 인구는 전체 인구 중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압바스 왕조의 전성기가 지난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지방에는 여러 군벌 정권들이 들어섰다. 새로 들어선 군벌 정권들은 군인들에게 돈으로 봉급을 주는 것이 아닌 토지 수조권을 분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행정, 경제 구조가 급변하는 과정에서 비무슬림들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지즈야 부담이 농민들 입장에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수준으로 폭증하기 시작했고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의 기독교인 대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시리아와 이라크는 중세 기준으로 동질성이 강한 같은 문화권으로 묶였다. 기울어져가던 압바스 왕조는 한 때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 군벌들에게 통제당하다가 오우즈 튀르크셀주크 제국이 부와이흐 군벌들을 무찌르면서 셀주크 제국의 명목상 칼리파 종주국이 되었다. 셀주크 제국이 압바스 왕조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과정에서 아랍인들의 입지가 더 약화되고 투르코만이라고 부르던 튀르크인들이 이라크와 시리아를 포함한 중동 각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이라크와 시리아와 역사를 가르는 역사적 격변이 두 차례 발생한다. 중세 말 레반트 지역은 유럽에서 온 십자군들의 침공으로 십자군 전쟁의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라크 일대는 십자군 전쟁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몽골 제국은 이라크 일대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관개 시설을 파괴하고 농경지를 불지르고 갈아엎었으며[3] 이를 계기로 이라크 지역은 한 때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했던 비옥한 인구 밀집 지대에서 황폐한 건조 지대로 전락하고 만다. 레반트에서 십자군을 축출하던 맘루크 왕조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 침략군들을 격파하였고, 십자군이 레반트 일대에서 완전 축출된 이후에도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 사이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라크에서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시리아로 피난 온 이슬람 한발리파 율법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아랍인 우월주의를 어느정도 포함한 형태로 이슬람 신학을 재정립하는데, 그가 정립한 이슬람 신학은 오늘날 순니파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쿠란 주해본의 저자 이븐 카시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븐 타이미야 - 이븐 알 카이윰 알 자우지야 - 이븐 카시르로 이어지는 이슬람 신학은 후대에 아랍 민족주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2.5. 근세[편집]


16세기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를 격파하고 시리아 일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후 시리아와 레바논 등을 포함한 레반트 지역은 이탈리아인들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다시 융성해짐과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성지순례 루트로 아라비아 반도와 연결되었다. 반면 이라크의 경우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전쟁터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라크 북부는 오스만 제국이 이라크 동남부 일대는 사파비 제국의 영토로 대체 상태가 이루어졌다. 사파비 제국은 시아파 12이맘파 근본주의 성향 국가로 자국 내 신민들을 시아파로 강제 개종시키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는 오늘날 이라크 인구의 60%가 시아파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강했던 이라크 북부의 경우 쿠르드인 인구가 많았다. 이런 과정을 겪지 않았던 시리아의 경우 인구 대다수가 순니파 무슬림이긴 북부 접경 지역에서는 쿠르드인 인구가 많다는 공통점이 남았다.

2.6. 근대[편집]


오스만 제국이 약화되고 서구인들에 의한 경제적 침탈이 가중되는 과정에서 시리아와 이집트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아랍 우월주의-반튀르크 성향의 민족주의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메흐메트 알리의 케디브 왕조가 훈련시킨 농민 징집병 군대는 오스만 제국을 시리아 일대에서 격파하며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오스만 제국이 완전히 붕괴되면 아시아가 혼란에 빠져들 것이라 우려한 서구 열강의 간섭으로 정복한 영토를 다시 반환하게 된다. 여기에 고무된 아랍인들은 그동안 아랍인들을 2등 신민 취급하였던 오스만 제국의 타락한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고 동시에 과거 라쉬둔 왕조, 우마이야 왕조처럼 다시 아랍인들이 주도권을 잡는 이슬람 제국을 세워 서구의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게 되었다. 시리아의 아랍 내셔널리즘은 한 편에서는 아라비아 반도의 근본주의 와하브파 신학에 영향을 받은 살라프파로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등 서구 국가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은, 아랍 현지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힘을 합쳐 아랍 민족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20세기 바트주의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2.7. 20세기[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시리아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라크는 이미 영국의 식민지가 된 상황이었다. 영국은 모술에 송유관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이라크 현지 유력자 중 하나인 하심 가문과 소수의 순니파에 권위를 심어주어 이라크 다수의 시아파를 견제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는 시리아의 다수파였던 수니파를 견제하기 위해 현지 소수종파였던 알라위파를 지원한다.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알라위파를 중심으로 한 바트당 정권이 들어섰으며, 이라크는 1932년 영국으로부터 하심 가문의 통치하의 군주국으로 독립하고, 하심 가문이 1958년 군부 쿠데타로 최종적으로 몰락한 이후에 정치적 혼란을 겪다가 1963년 이후에 바트당이 집권하였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트당이 서로 사이가 갈라진 것을 계기로 바트당의 창건자 미셸 아플라크는 1968년부로 이라크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라크시리아는 1980, 90년대 당시 집권 바트당의 정통성 문제를 두고 대립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와 싸우고 있던 이란쿠웨이트를 지지하여 이라크의 심기를 건드려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 실제 국교 단절로까지 간적이 있었다.

2.8. 21세기[편집]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는 와중에 시리아는 이라크에 일부 지원군을 파병하기도 하였다. 바그다드 함락 자체는 단기간에 끝나면서 시리아군과 미군 사이에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후세인 실각 후 양국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고 2006년 시리아와 이라크는 다시 관계를 복원했지만 여전히 이라크는 시리아를 이란 다음 가는 주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도 이라크 전쟁, 아랍의 봄 이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 ISIL 또는 다에시)가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에서 발호하여 IS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싸우게 되면서 어쩔 수 없는 같은 편이기 때문에 많이 가까워진 편이다.

그리고 2018년 말에는 시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이라크군이 시리아 영내에 있던 IS들을 공습하여 시리아를 지원했다.


3. 교통 교류[편집]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를 잇는 항공 노선들이 존재한다.

2019년에는 단항되었던 이라크 항공의 시리아 행 항공편 운항을 다시 재개했다.#


4. 관련문서[편집]



[1]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 이라크는 영국, 시리아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며, 지배하던 유럽의 열강들이 내부 부족/이슬람 종파 간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한 쪽을 우대하는 분열 정책을 펼치면서(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각각 후투족과 투치족 간 분열을 조장했고, 영국은 이라크에서 각각 이라크의 다수 종파인 시아파를 배척하고 소수의 수니파를 지배층으로 우대했으며, 프랑스는 시리아 국민 다수의 수니파들을 견제하기 위해 시아파의 한 분파인 알라위파를 우대했다.) 독립 이후에 분쟁의 원인이 된 것도 비슷하다. 그리고 현재 이라크와 르완다는 그럭저럭 정치적으로 안정도 찾고 잘 사는데 비해 시리아와 부룬디는 이웃한 이라크나 르완다보다 더 경제적으로 못 사는 최빈국으로 남아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2] 아랍인들은 사산 왕조와 교역하는 와중에 사산 왕조의 중심 지역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을 저지대라는 의미로 이라크라고 불렀는데, 이는 오늘날 이라크 국명의 기원이 된다.[3] 이란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역시 이 때를 기점으로 농민 인구가 급감하고 대신 유목민들이 빈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4] 여기서의 투르크멘은 서아시아 등 아랍권에 분포하는 투르크계 이주민 또는 소수민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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