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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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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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형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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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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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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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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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0.9em"
성남 FC
13대




성남 FC 감독
Seongnam FC

파일:FB_IMG_1670665277115.jpg

이름
이기형
李基珩 | Lee Ki-hyung
출생
1974년 9월 28일 (49세)
전라남도 화순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81cm
직업
축구 선수 (풀백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2002)
성남 일화 천마 (2003~2004)
FC 서울 (2005~2006)
오클랜드 시티 FC (2007~2010)
코치
FC 서울 (2011)
FC 서울 (2013~2014)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5~2016 / 수석 코치)
부산 아이파크 (2019~2020)
감독
FC 서울 2군 (2011~2012)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6 / 감독 대행)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7~2018)
부산 아이파크 (2020 / 감독 대행)
성남 FC (2023~ )
행정
한국프로축구연맹 (2021~2022 / 기술 분석관)
국가대표
47경기 6골 (대한민국 / 1995~2003)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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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들 이호재
서명
파일:이기형서명.png


1. 개요
2. 선수 경력
3. 국가대표
4. 플레이 스타일
5. 지도자 경력
5.1. 코치 시절
5.3.1. 2017년
5.3.2. 2018년
5.4. 부산 아이파크 코치, 감독 대행
5.5. 성남 FC 감독
6. 행정가 경력
7. 여담
8. 수상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우측 풀백). 별명은 캐넌 슈터.

현역 시절에는 공격형 풀백의 이미지가 강했고 매우 강한 킥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 슈팅이 인상적이었다.

2016 시즌 후반부터 감독 대행으로서 인천 유나이티드를 이끌며 인천을 강등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때 이기는 형이라는 별명까지 얻는 등 찬사를 받으며 정식 감독으로 승진했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부족한 자질 논란이 감춰져 있었고 모 대표이사 부임 이후로는 최악의 선수단 운영온갖 논란거리를 만들어내는 여러 행동으로 인해 팀을 강등 위기로 몰아넣어 결국 모든 팬이 등을 돌리는 현상을 자초했다.[1]

2020 시즌 말에 부산 아이파크가 자동 강등되는 12위까지 떨어지자 조덕제 감독이 사퇴하면서 남은 시즌 동안 감독 대행으로서 팀을 이끌었으나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후임인 페레즈 감독 부임 이후 부산을 떠나서 행정가 일을 하다가 2022년 말 성남 FC 감독이 됐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으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골 동네에서 논이든 밭이든 넓은 터만 있으면 공을 차고 놀았다. 형들과 어울릴 때도 어느 정도 상대가 될 정도로 운동 능력이 좋았다.

그러나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안타까운 가족사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고,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8살이 되던 해 6남매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리고 서울 상경 후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오게 되는데 은로초등학교 4학년 우연히 체육대회에 출전하여 달리기 우승을 차지했고, 이를 지켜본 축구부 코치가 축구선수가 되라고 제안한 것이다. 서울로 올라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큰형도 이기형의 결정에 찬성하였고, 본인도 큰 고민은 하지 않았다거 한다. 이를 계기로 이기형은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2]

뛰어난 축구실력을 바탕으로 신림중, 정명고 모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였고, 고등학교 2학년 청소년 대표에 뽑힌 이후로 태극마크는 늘 그의 가슴에 붙어있었다. 이러한 실력을 바탕으로 이기형은 축구명문 고려대학교 92학번으로 입학하였고, 대학교 4학년인 1995년,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예선전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편집]


파일:external/www.kfa.or.kr/201611592715.jpg

고려대를 졸업하던 1996년, J리그행 대신 신생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신생팀 우선지명으로 계약금 1억 5천만원이라는 당시로써는 거액을 안겨주며 이기형을 영입했고, 이기형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 창단 멤버로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등번호 6번.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가 된 이기형은 입단 첫 해에는 올림픽 대표팀 및 수원 입단 동기인 박충균과 경쟁이 예고되기도 하였으나, 저돌적이고 활발한 플레이로 단숨에 김호 감독이 아끼는 자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활약은 계속 이어져 1998년과 1999년 수원의 K-리그 2연패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게 되었다. 특히 반대편의 신홍기, 수비력이 뛰어난 이병근과 차별성 있는 특유의 킥과 저돌성으로 수원의 첫 번째 황금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99년 말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고, 무리한 재활로 약 1년 반을 쉬며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진 못한다. 그래도 2001년 여름 복귀했고, 아시안 슈퍼컵 2연패와 01-02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했다.

2002년을 끝으로 FA로 풀리며 계약 만료됐고, 그의 FA 보상금을 낼 만한 팀이 없다고 판단한 수원 구단은 그에게 적은 연봉 제시액을 제안했고, 결국 협상이 결렬돼 다소 초라하게 팀을 떠나게 된다.

2.3. 성남 일화 천마[편집]


"수원과 성남에서 정말 강한 팀을 많이 경험했죠.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팀을 하나 고른다면 성남에서의 첫해, 그러니까 2003년이에요. 그때 선수와 전술 등 모든 게 가장 강했어요. 지금 저와 함께 생활하시는 김도훈 감독님부터 정환이 형, 신태용 감독님, 데니스, 김대의 같은 선수가 다 한 팀에 있었죠. 경기에 나가면 거의 이기는 식이었어요. 지금 전북이 비슷한 수준으로 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수원과 협상이 결렬된 이기형은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 시절 트레이너로 사제의 연을 맺던 김학범이 코치로 있던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을 타진했고, 이적료 5억에 연봉 1억 5천만원에 수원의 라이벌 팀인 성남으로 전격 이적한다.[3]

성남에서 등번호 5번을 달았고, 첫 해에 팀의 리그 3연패에 기여했고, 2년 차에는 K리그 리그컵 우승에 기여하며 2년 연속 우승 트로피를 드는 등, 2년 동안 주전으로 뛰며 팀 수비에 크게 기여했다.

2004년 말 차경복 감독이 갑작스레 별세한 후 김학범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하며 팀에선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마침 계약 만료 + 고령 + 고액 연봉자인 이기형은 자연스럽게 팀을 떠나게 됐다.

2.4. FC 서울[편집]


2005 시즌을 앞두고 서울 연고 2년차를 맞이한 FC 서울은 어린 선수들의 중심을 잡아줄 빅네임 선수가 필요했고, 이기형을 영입했다. 라이벌 수원 때와 같은 등번호 6번을 달았다.

하지만, 본래 외국인 감독이 내정돼 이기형을 영입한 것인데 이장수가 지휘봉을 잡았고, 이장수 감독과 전술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으며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2005년에 16경기 밖에 출전을 못하였고 2006년에도 17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6년 K리그 리그컵 우승에 기여했으나, 2년 연속으로 정규 리그에서 한 자릿수 출전에 그치는 등 전력 외 자원으로 분류됐다.

결국, 시즌 종료와 함께 팀을 나갔고, 그것이 K리그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2.5. 오클랜드 시티 FC[편집]


파일:external/spnimage.edaily.co.kr/PP09121300014.jpg

서울과 2년 계약을 마친 후 K리그 중하위권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연봉을 깎아가며 국내에 남기보다는 해외 진출을 경험하고 싶었다. 당시 A리그에서 뛰던 신태용의 추천으로 영어 공부와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오세아니아행을 결심했다. 처음엔 호주의 웰링턴 피닉스 입단을 추진하였으나, 협상 단계에서 결렬된다.

그러다 뉴질랜드 풋볼 챔피언십의 오클랜드 시티로 전격 이적하였다. 당시 세미 프로 리그였던 뉴질랜드에서 월등한 기량을 자랑했고, 국내에서와는 달리 중앙 플레이메이커로 나서며 적지 않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활약으로 정규 주전으로 출전하였으며, 많은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08/09 시즌 리그와 OFC 챔피언스 리그 더블에 기여하며 FIFA 클럽 월드컵 참가권을 얻었고, 5, 6위 결정전에서 아프리카 챔피언 마젬베를 꺾으며 대회 5위에 기여했다. 예상보다 긴 3시즌 동안 활약했고, 2010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최종 은퇴하게 되었다.

3. 국가대표[편집]


파일:external/www.kfa.or.kr/201611592716.jpg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데뷔하여[4] 축협은 올림픽 대표팀을 타국 A대표팀과 맞붙는 대회에 참가시켜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이기형은 21세의 나이에 칼스버그컵과 다이너스티컵을 소화하며 대표 선수로 첫발을 뗐다. 그중 다이너스티컵에서 일본을 상대한 결승전은 화제를 모았다. 전반 26분 이우영이 코너킥을 땅볼 패스로 내줬고, 후방에서 달려들던 이기형이 골대와 약 30m 떨어진 곳에서 쭉 뻗는 슛을 날려 골망을 찢을 듯 흔들었다. 4번째 A매치에서 터진 데뷔골로 이기형의 오른발은 뭇 사람에게 알려졌다. 이기형은 이날 한 골을 더 넣어 2-2 동점을 만들었으나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놓쳤다. 1997년 9월 28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최종예선 3차전에서 멋진 크로스로 서정원의 동점골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47경기 6골로 꽤 많은 출장 기록을 갖고 있지만 정작 A대표로서 남긴 족적은 다이너스티컵 이후 희미하다. 대회 본선마다 불참했기 때문이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 때 붙박이 라이트백으로 뛰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본선 명단엔 들지 못했다. 차범근 감독이 자신을 외면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5]

플레이 스타일을 감안하면 한 수 위의 팀들 상대로 수비력 강화 차원에서 밀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기형 대신 발탁하려 했던 강철이나 강철이 부상으로 낙마하자 최종 발탁된 최성용은 이기형같이 폭발적인 스피드와 킥은 없지만 지구력과 경합 능력이 뛰어나 이를 바탕으로한 대인저지에 두각을 보인 선수들이었다. 최용수와 함께 월드컵 예선을 책임진 이상윤이 있으니 공격력 강화보단 균형을 잡아보려는 시도였던걸로 보이는데 현대축구 트렌드에 깜깜했던 당시 한국은 그런 미봉책으로 보완되는 팀이 아니었고 월드컵에서 찢어발겨졌다.

2002 한일 월드컵 역시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참가할 수 있었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 초창기에는 십자인대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십자인대 부상은 원래 6개월 만에 나을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재활 훈련을 하다 무리하는 바람에 수술에 들어갔고, 그렇게 6개월씩 두 번 회복기간이 연장돼 결국 일년 반 동안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2004 아시안컵도 예선은 주전으로 소화했으나 오만 쇼크로 별다른 족적은 남기지 못했고, 역시 본선행엔 실패했다. 2003년 10월 네팔을 7-0으로 대파할 때 2골을 넣은 것이 이기형의 마지막 A매치였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공격형 풀백으로 명성이 높았던 선수였다. 수비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 슈팅과 중거리 프리킥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캐논슈터. 1999년 올스타전에서 123km, 2002년 올스타전에서 138km를 기록하며 최고의 캐논슈터상을 받기도 하였다.


5. 지도자 경력[편집]



5.1. 코치 시절[편집]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1010601200001300_P2.jpg

뉴질랜드에서 은퇴 후 2010년 2011년부터 황보관 감독이 새로 부임한 친정 FC 서울의 2군 코치로 합류하였다. 이후 2013년에는 1군 코치로 승격하며 2014년까지 팀의 많은 우승 트로피에 기여하는 등 성공적인 첫 코치 생활을 경험했다.

성남 시절 연이 있던 김도훈 감독이 인천 유나이티드 FC 감독으로 부임한 2015년, 인천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며 지도자 인생 첫 수석 코치를 역임하게 됐다. 합류한 첫 해에 인천의 돌풍을 이끌며 FA컵 준우승에 일조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2016년에는 8월까지 팀이 최악의 경기력을 보이며 강등권에 허덕이고 마는데...


5.2. 인천 유나이티드 FC 감독 대행[편집]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6091801001260300091311.jpg

이기는 형


이기형 감독대행축하[6]


결국 2016년 8월 31일, 김도훈 감독이 사임하면서 감독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9월 10일 FC 서울과의 경인더비에서 감독 대행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하여 탈꼴지에 성공했고,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었다.

감독 대행 자리에 오를때 스플릿 라운드 전까지 3승 2무를 해내겠다고 약속한걸 그대로 지켰다. 그리고 스플릿 라운드에서도 2승 1무를 거둬 대행 부임 이후 5승 3무를 기록, 이름에 빗댄 "이기는 형"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 수원 FC를 이겨 극적인 K리그 클래식 잔류를 이끌어냈다.

감독 대행으로써 팀을 재빨리 수습한 것, 선수단에 목표의식 부여, 기회를 못받던 르엉 쑤언 쯔엉의 기용으로 대표된 폭넓은 선수 기용 등 능력을 인정받아 정식 감독으로 부임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9일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5.3. 인천 유나이티드 FC 감독[편집]


감독 대행 이후 정식 감독이 된 뒤, 그야말로 버스를 세우는 두줄 수비 축구를 강했다. 또한, 풀백 포변 성애자였다. 주전들을 제외한 서브와 후보 자원 들중에서 사이드를 본다는 선수들은 거진 풀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강행하거나, R리그에서 풀백으로 뛰게 되는 괴상한 전략을 썼다. 김진야,김대경,박종진(1987) 등부터 신인들까지 희생양이 되었다.


5.3.1. 2017년[편집]


야심차게 영입한 달리는 그 피지컬로 6개월동안 0골 1어시를 기록하고 앉아있고, 땜빵으로 스트라이커로 기용된 웨슬리는 전문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았으며, 부노자는 자존심이 강해 조직력을 와해시킬 때가 간혹 있어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노출하게 되었다. 결국 대행 시절과 달리 팀이 삐걱대며 좀처럼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중후반기에는 전북한테 3대1로 털리고, 서울한테는 5대1로 영혼까지 털리는 등[7]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그나마 후반기에 문선민, 김대중, 채프만 등이 각성한 이후로는 승점을 꽤 따내면서 최종순위는 9위를 기록해 어찌어찌 잔류는 성공했다. 선수단 기용 측면에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케빈, 요니치, 권완규, 박대한, 진성욱 등 지난 시즌의 주축들을 상당수 잃고 맞이한 시즌이기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


5.3.2. 2018년[편집]


시즌 시작 전부터 조건부계약설[8], 대표이사의 월권논란[9] , 코치진과의 불화설, 선수단과의 불화설, 달리의 영입과정에 관한 논란 등등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시즌 개막후, 계약만료로 떠난 하창래, 남은 계약기간을 해지하면서 내보낸 채프만, 군에 입대한 김도혁과 이상협 등을 제외하면 주전급 선수의 유출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무고사, 아길라르, 임은수, 김정호등이 합류하면서 인천 역사에 남을 정도로 수준높은 선수단을 갖추었음에도 선수단 운영에 완전히 실패하여 그 잘하던 최종환, 이윤표, 김용환 등은 수비진 붕괴의 원흉으로 전락해버리고, 한석종이나 고슬기 등도 맞지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시즌 초의 폼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진에 빠지는 등 스쿼드 수준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팀을 어린 선수가 30대에 접어든 부노자를 무시한다, 선수가 지각 등의 잘못을 저질러 팀의 규정을 어겼어도 벌금도 제대로 못걷는다는 등의 소리가 나오는 말그대로 개판 오분전의 상황에 빠뜨리고 만다. 팀이 이 모양이니 당연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2R 전북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이외의 경기는 부진했다.[10] 결국 12R 제주전이 끝나고 얼마뒤에 결국 사임을 표하며 팀을 떠났다. 코치진과 주장을 비롯한 선수 두 명이 5월 마지막 두 경기에서 감독에게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서 당초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결국 최종 사임이 결정된 것. 2018 시즌 중 기록은 12경기 1승 4무 7패이다. 인천 역사상 최고의 감독 반열에서 1년반만에 최악의 감독으로 불리게 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떠나게된다.


5.4. 부산 아이파크 코치, 감독 대행[편집]


파일:FB_IMG_1546128605962.jpg

2019 시즌을 앞두고 2018년 12월 20일에 조덕제 감독을 따라 노상래와 함께 부산의 코치로 임명되었다.

직전까지 1부 리그 구단의 감독이었던 이기형과 전남 드래곤즈 전 감독 노상래의 이례적으로 2부 리그 구단의 코치로 복귀한 만큼 상당히 화제가 됐다.[11]

조덕제 감독과는 P급 라이센스를 준비하면서 만났는데 이기형 본인이 먼저 조덕제 감독과 함께 하고 싶다고 먼저 제시했다고 하고, 이후에 연락하니 흔쾌히 코치직을 받아주었다고 하며, 직책은 선수 시절 수비수였던 것을 감안했는지 수비 코치를 맡았다.

평소 조직적이고 수비적인 축구 위주로 배웠던 이기형은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조덕제 감독을 보좌하며 실제 상대가 누구든 모든 전술을 공격에 중점을 두고 고민하며 생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2020년 9월 29일 팀의 조덕제 감독이 사퇴했고, 이기형 코치는 남은 시즌 동안 감독대행을 맡게 됐다. 순위는 12위. 11위 인천과 승점이 같고 득실차에서 3골 뒤지는 상황. 이번에도 강등을 막을 수 있을지 기대되고 있다.

그리고 감독 대행으로써의 첫 경기 FC서울과의 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팀은 12위에서 10위로 상승했고 이 날 승리로 이기형 대행 체제는 많은 부산 팬들의 응원을 받는 듯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더 이상 이기는 형을 볼 수 없게 되었다.

26 라운드 친정인 생존왕이라 불렸던 인천 유나이티드 FC와의 인천 원정에서 이동준의 선제골로 앞서가다가 후반들어 쭉 밀리더니 순식간에 두 골을 먹고 역전을 허용, 결국 1:2로 역전패하며 잔류 기회를 미루게 되었다.

결국 27 라운드 성남 FC와의 성남 어웨이 최종 라운드 단두대 매치에서도 이동준 선수의 환상적인 발리 슛 선제골이 나왔음에도 공격진의 두께를 줄이고 수비를 강화함에도 불안불안한 수비를 보여주다가 결국 역전을 허용하며 1:2로 패배하며 잔류 기회를 날려벼리고 말았으며, 특히 역전을 당한 이후 공격 숫자를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김현을 투입하면서 이정협을 뺀 교체카드가 의아했다.

결국 부산은 1년만에 강등당하면서 K리그 기업 클럽 사상 처음으로 승격 이후 1년만에 재강등되었다.

후임으로 히카르두 페레스 감독이 선임되면서 부산을 떠났다.

5.5. 성남 FC 감독[편집]


2022년 12월 9일 2부 리그로 강등된 성남 FC 감독직에 선임되며 5년만에 다시 프로팀 감독을 맡게 되었으며, 대략 18년 만에 친정팀 성남에 복귀하였다.

강등 여파와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2023시즌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은 물론 그로 인한 주전 선수들의 대거 이탈로 23시즌 상당히 험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위 ‘레알 성남’ 시절의 선수가 그 후신 팀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그간 지도자 및 행정가 경험을 발휘할지가 관건이었다.

태국 1차 전지훈련 전에 ‘간절한 선수 위주로 팀을 구성했다’고 밠혔다.

홈 개막전에서 안산 그리너스를 상대로 1-1 무승부 상황에서 후반 추가시간 신재원의 극장 헤딩골로 2-1 승리를 가져갔다.

하지만 FA컵 포항에게 패배 후 충남아산, 안양, 부천에게 연달아 패배하며 리그 11위까지 떨어졌고, 충북청주, 김포에게도 무승부를 기록하며 팬들의 여론은 극에 치달았지만, 부산전 진성욱의 멀티골로 선두 경쟁을 펼치며부산에게 찬물을 끼얹어 주었고, 경남에게도 밀림 없이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부산전부터 불안했던 수비가 개선되지 않으며 아쉬움을 남겼다.

결국 7월 23일 연고이전 라이벌 팀이자 최하위팀인 천안을 상대로 무려 전반에만 2골이나 실점했고, 팀은 가브리엘의 캐리로 2:2로 따라왔고 후반전에는 닥공하며 천안을 위협했지만, 추가시간 몇분을 못 버티고 모따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천안의 시즌 첫 승 상대가 되며 자존심을 구겼고, 여론이 안좋아졌다.

시즌 중반까지 플레이오프권은 고사하고 하위권을 맴돌며 지도력에 의문을 드러냈는데, 특히 선수기용, 교체에 있어서 상당히 의문을 자아냈다.

예를 들자면, 1부 리그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한 안진범은 리그에서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외 좋은 움직임을 보여준 김훈민이나 김원준은 배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가장 심각한건 수비인데, 강의빈-조성욱 조합이 천안전에서 3실점하는데 원흉이 되었지만, 유선, 양시후, 패트릭은 또 잘 기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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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라운드에서 김포FC에 2-4로 충격적인 역전패를 하자 경기 결국 종료 후 버스 앞에서 주장단과 같이 성남 팬들과 20여분간의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12]

성남 서포터즈는 당장 이기형 감독과 주장단의 이야기를 들은 만큼 향후 경기들은 더 지켜볼 예정으로 면담은 했어도 현 상황은 매우 불만족스럽기에 결과, 내용이 지금과 비슷하다면 거취 문제 등에 지금보다 더 강하게 불만을 표할 것이며, 성남과 이기형 감독에 반전이 요구되었다.

성남은 결코 하위권의 수준이 아닌 것이 1부 경험이 풍부한 문창진, 안진범 그 외에 박상혁이나 정한민등 스쿼드가 탄탄하지만, 플레이오프는 커녕 신생팀 충북청주에게도 순위가 밀리니 팬들은 답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9월 3일 전남과의 경기에서 마치 승점관리하는 팀마냥 수비적으로 나오며 말 그대로 수면축구를 선사하였다.

그러나 한달 이후로도 경기력이 나아지지 않았으며, 10월 21일 천안 시티 FC전에서 3:1로 패하며 남은 경기 상관 없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3]
천안의 5승 중 2승이 성남이라는 치욕적인 기록을 쓴 것은 덤.....


6. 행정가 경력[편집]


부산을 떠난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기술분석관으로 임명되며 행정가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성남 FC 감독으로 선임되기 전인 2022시즌까지 활동했다.

이 시기에 K리그 모든 구단 경기를 찾아다니면서 큰 공부가 됐다고 하며 감독할 땐 당장 우리 팀, 다음 상대 팀 분석하기에 바빴는데, 디테일하게 장기간 여러 팀을 보면서 팀 성향이나 선수 파악이 되었다고 한다.


7. 여담[편집]


  • 2002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138km 캐논슛 기록은 아직까지 K리그 올스타 역사상 최고속 기록으로 남아있다.

  • 1999년 8월 25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홈경기에서 이기형은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다. 당시 수원은 팀을 이끌던 외국인 선수들이 부상과 경고누적 등으로 모두 결장하는 바람에 국내선수들로만 팀을 꾸려야했고, 전반 박태하고정운에게 연속골을 허용한데 이어 전반 29분 이기형이 상대의 승리를 확정지어주는 듯한 골을 자신의 골문에 집어넣어 0-3이 되고 말았다. 패배의 예감이 수원을 감쌀즈음 수원의 저력이 발휘되며 서정원과 이병근의 연속골을 집어넣으면서 극적으로 3-3 동점을 만든 뒤 후반 35분. 이기형이 30m 거리에서 대포알같은 슛을 터트려 4-3 역전극의 대미를 장식했다.

  • 2018시즌 팀에서 나가기 전까지 인천이 거둔 1승은 전북인데 이 승리가 전북에겐 5월 10일까지 리그에서의 유일한 패배이다.

  • 아들 이호재 역시 축구 선수다. 2019년 대건고를 졸업하고 아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인천유나이티드 유소년 팀 출신으로 2018년 K리그 주니어 무대뿐 아니라 프로 2군인 R리그에서도 맹활약해 주목을 받았다. 190cm의 장신 스트라이커인 이호재의 합류는 2018년부터 고려대의 약점으로 지적되어 온 정통 스트라이커 부재에 대한 해답이 될 전망이다.

  • 풀백 포지션 변화를 즐긴다. 2016년 인천 유나이티드 FC 수석 코치 시절 2군 리그인 R리그 감독도 도맡았는데 경기 라인업마다 그 해 신인 선수들이 풀백 포변 시험대에 오르곤 했다. 사실 풀백 말고도 스트라이커센터백으로 포변하거나 중앙 미드필더스트라이커를 보는 괴상한 라인업도 종종 보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가 인천 감독이 된 후 경질되기 직전은 2018시즌 초반에 풀백이 진짜 구멍났다. 주전 풀백이던 김용환과 최종환이 제 폼이 아니자, 이기형이 코치시절 시험무대에 올렸던 박종진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이에 축구 팬들은 진짜 미래를 내다봤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8. 수상[편집]


  • 2002년 스포츠투데이 - 푸마코리아 선정 7월의 베스트11 (DF 부문)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K리그 (우승 2회) (1998년, 1999년)
    • K리그 (준우승 1회) (1996년)
    •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 1회) (2002년)
    • 대한축구협회 FA컵 (준우승 1회) (1996년)
    • K리그 리그컵 (우승 4회) (1999년-아디다스컵, 1999년-대한화재컵, 2000년, 2001년)
    • 대한민국 슈퍼컵 (우승 2회) (1999년, 2000년)
    •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2회) (2001년, 2002년)
    • 아시아 슈퍼컵 (우승 2회) (2001년, 2002년)
  • 성남 일화 천마
    • K리그 (우승 1회) (2003년)
    • K리그 리그컵 (우승 1회) (2004년)
    •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1회) (2004년)
  • FC 서울
  • 오클랜드 시티 FC
    • 뉴질랜드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2008-09 시즌)


9. 관련 문서[편집]


이기형, 전설의 오른쪽 수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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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적이 안 좋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재임 기간 동안 많은 논란을 일으킨 건 이기형이 유일무이하다.[2] 출처[3] 김학범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성남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김학범은 차경복 감독과 잠시 상의하더니 한 시간 만에 “와라”라는 답신을 보냈다고. [4] 당시 축구협회는 올림픽 대표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5] 충격을 받은 이기형은 대회를 시청하지 않았고, 이웃집의 환호성 소리도 듣기 싫어 한동안 산속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6] 인천 팬들이 기적적 잔류를 축하하기 위한 걸개이다.[7] 심지어 둘다 홈경기였다[8] 개막후 10경기동안 승리가 없으면 경질된다는 계약을 체결한다는 설이다.이후 상황들을 보면 말도 안되는 헛소문이었다 판단될 것이다[9] 선발라인업에 대표이사가 관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출전기회를 얻은 선수들이 잔류의 주축이었다는 내용의 논란이다.[10] 이 과정에서 구단 역사의 남을 5연패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1] 단순히 프로 감독을 하던 사람이 감독이 아닌 코치직을 맡는 경우는 간혹 있는데 최문식, 이영익, 김호영, 노상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미국 프로 야구 MLB에선 감독 출신 코치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감독에서 해고된 뒤 바로 타 구탄 벤치 코치로 재취업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메이저 리그 구단들은 초보 감독을 임명할 때 거의 반드시 빅리그 감독 출신 벤치 코치를 임명해 리스크를 최소화한다. MLB에서 감독과 코치는 상하 관계, 주종 관계가 아닌 ‘파트너’다. 감독과 코치가 각자 전문 영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돼 있다. 코치로 잘한다고 다 감독 후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감독으로 실패했다고 코치 역량이 평가절하되지도 않는다고 여긴다.[12] 무작정 버스를 막는 것이 아닌 아닌 면담 요구를 먼저 한 뒤 약속된 곳에서 통제 아래 진행된 면담이었다.#[13] 이날 경기 패배로 승점 41점이 되었는데, 남은 두경기를 다 이겨도 플레이오프 마지노선인 5위 경남 49점보다도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