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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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조선에서
4. 내용
4.1. 이기론
4.2. 심성론(성정론)
4.3. 수양론
4.4. 내세관
4.4.1. 귀신의 유무
5. 비판과 반론
5.1. 성리학은 과도하게 비현실적이다
5.2. 성리학은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5.2.1. 반론
5.3. 지배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5.3.1. 반론
6. 의의
7. 성리학자
8. 여담



1. 개요[편집]


/ Neo-Confucianism

송나라 때 외래사상인 불교에 대응하고, 형식화/획일화된 훈고학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탄생한 유교의 한 갈래이다.

도학(道學), 송학(宋學), 송명이학(宋明理學), 주자(주희)학, 정주학[1] 등으로도 불린다. 현대에는 송명대에 출현한 신유학의 한 갈래로 구분하기도 한다.


2. 배경[편집]


송나라 시대에 성리학이 탄생한 주된 이유는 형식화, 획일화된 훈고학에 대한 반발과 불교의 영향력 증대라고 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때의 유교형이상학적으로 그리 현란하지 않고 현실적인 학문체계였다. 이후 진나라 때 발생한 분서갱유로 인해 소실된 유교 경전을 전한시기에 되살리는 과정 속에서 훈고학이 탄생하였으며, 이후 당나라 때 까지 훈고학이 유학의 주류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훈고학은 당나라 때 공영달이 저술한 오경정의가 출판되어 관학화되자 결국 획일화, 형식화된 학문으로 전락하게 된다.[2] 결국 당나라 중기~말기 그리고 오대십국시대에 이르면[3], 기존의 유학인 훈고학은 혼란한 시대상황 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4][5] 그러나 전한말부터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에선 주목받지 않았던 여러 형이상학적 논점들을 깊이 다룸으로써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더불어 도교 역시 후한말부터 재조명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형식화, 획일화된 유학에 대한 문제의식,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일으킨 불교와 도교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한 여러 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 등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유학을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유학을 불교와 도교에 비해 우위를 갖는 학문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형식화와 획일화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는 송나라 시기 주돈이ㆍ장재ㆍ소옹ㆍ정호ㆍ정이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유학자들이 구체화하였고 이를 주희가 집대성하여 이후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다른 한편 당대 중국의 정치 상황 등 외적인 요소에 주목을 하는 시각도 있다. 이를테면 전한 이래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북중국 중심주의가 의 북중국 정복 때문에 깨지자, 남송의 성리학자들은 이(理)와 기(氣)를 분리하여 정신적인 측면과 명분을 강조하는 '이'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6] 그리고 이것을 국가 단위의 논리로 발전시킴으로써 '지정학적인 중심과 정신적인 구심점은 다를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 프로파간다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송나라의 관료제문치주의의 영향에 문화가 크게 발전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리학이 탄생하였다는 시각이 있다.

3. 조선에서[편집]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이다. 조선 초 유학자들이 주희에 열광한 이유 중에는 주희불교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점이 있었다. 주희가 설파한 귀신론의 핵심 중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으나, 다만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 원리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조화로 여긴다.'는 것이 있다. 즉 도교나 불교의 존립기반인 내세ㆍ영혼ㆍ환생 등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단호히 부정함을 골자로 한다. 이는 정도전불씨잡변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후 조선 성리학사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것은 이기론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이다. 이를테면 이기불분(理氣不分)과 이선기후(理先氣後)가 공존하는 등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면모를 두고, 이이는 이기불분을 강조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承一途說)을 주장했고, 이황은 이선기후을 강조해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안한 것이 유명하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올라탄 것"으로 요약되는 한편,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은 "기가 발하면 이는 탈 뿐이며, 이가 단독으로 발하는 일은 없음"으로 정리된다.[7]

16세기에 성립된 조선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뿐만 아니라 북송의 소옹(召雍)과 장재(張載)의 성리학의 영향도 적지 않고,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의 학문[8]양명학[9] 또한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 강항 등을 통하여 조선 성리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등으로부터 시작되는 에도 막부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일본에서 성리학은 가마쿠라 막부시기에 유입되었으나, 외래 사상이 처음 들어올 때 대개 그렇듯 이해가 부족하였다.[10] 17세기에 와서 조선 성리학과 교류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은 본격적인 발전을 맞이한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유림이 사회적 영향력을 많이 잃고 서구화 및 근대화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성리학도 위축되었다. 하겸진(1870-1946)은 1943년 저술하고 1970년에 출판한 《동유학안(東儒學案)》으로 조선 내 성리학 학자들과 학파의 연원을 집대성했다. 하겸진은 성리학적 이념을 의심 없이 고수하였다. 그의 노력 역시 맥이 꺼져가는 성리학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 땅에서 전통적인 성리학은 하겸진과 그 제자 세대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맥이 끊겼다.

하겸진의 제자로는 대표적으로 '진주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성환혁(成煥赫)이 있다. 위당 정인보가 동생처럼 매우 아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에도 상투를 자르지 않고 유생의 옷차림 그대로 다녔으며,[11] 해방 이후에는 해인대학(경남대학교의 전신)에서 한문 강사로 잠시 있었다. 성환혁은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한학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어했으나, 학생들의 소양 부족과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서 다음 말을 남기고 강사직을 사임했다.

아이들은 을 달라고 하는데 내겐 줄 것이란 밖에 없다.


얼마 안 가 성환혁은 정인보의 납북 소식을 듣고 생의 의욕을 잃어,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시기 김창숙도 세상을 떠나면서 유림은 더 이상 단일하고 가시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

4. 내용[편집]



4.1. 이기론[편집]


성리학의 핵심은 세상(物)과 마음(心)을 모두 ()와 ()의 두 가지로 규정하는 것이다. 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는 우주의 원리인 것. 현대과학에 비유하자면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합쳐 '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 물질들이 서로 조응하는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 법칙이 '리'라고 하겠다. 예컨대, 해, 달, 바람, 비, 눈, 서리, 이슬, 천둥, 번개 등의 현상들은 '기'에 해당하며,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까닭으로 작용하는 원리나 물리법칙 등은 '리'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이기론은 도가와 불교의 문제의식을 포용한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구절인데, '무극'과 '태극'의 관계를 규정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자는 무극을 무한한 궁극자, 태극을 존재의 거대한太 궁극자로 읽어 무극=태극이라는 주장을 했다. 반대로 무극에서 태극이 발생한다는 해석은 '도대체가 없는데서 있는게 만들어진다니 불교적 냄새가 난다'며 거부했다. 참고로 이 해석을 수용하는 게 육구연과 그를 계승한 왕양명양명학이다. 이것 때문에 성리학에게 '양명학은 귀신놀이하는 불교랑 똑같다'라는 비난을 받은 것.

이 태극이 움직이면서 음양을 낳고 음양이 오행을 낳으며 만물을 만들게 되는데, 주돈이는 여기서 태극이 리理이고 음양오행이 기氣라고 주장한다. 이를 송나라의 다양한 학자들이 해석하며 이기론의 기초를 낳았다. 주돈이의 제자였던 정호 · 정이 형제는 천리와 각각 이기이원론과 기일원론을 주장하고, 장재는 기를 주인공으로 '태허에 기가 있었다'는 태허지기太虛之氣를 주장한다.

이런 이론적 흐름을 주희가 종합해, 주자는 리를 비교적 더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기를 만물의 다양한 요소로 산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모든 사물의 개별적인 이는 보편적인 이와 같다'는 정이의 이일분수理一分殊를 가져온다. 주자는 그러나 여기에 "이와 기는 섞이지 않는다"는 이기불상잡과 "이와 기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기불상리를 더하면서 기를 이에 꿀리지 않은 조연으로 끌어올려 이기이원론을 완성한 것이다.

성리학이 전개되며 주자가 정립한 '이가 살짝쿵 더 중요한 이기이원론'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이가 확실히 더 중요하다'는 주리론이나, '기가 확실히 더 중요하다'는 주기론이 아래의 심성론 논쟁이 심화되면서 조선에서 중요해지고, 아예 '둘 중 하나가 먼저다'라는 일원론을 주장하는 흐름 역시 중국에서는 적지 않았다.

여담으로 기를 중시했던 이이가 유물론적, 이를 중시햇던 이황이 관념론적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와 기는 차설 존재와 의식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단순히 치환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두 유학자의 성향이 다른 만큼 이이는 이와 기가 같다는 이기일원론을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두 학통을 이어받은 서인(이이)와 남인(이황)의 입장 차와 예송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12]

4.2. 심성론(성정론)[편집]


성(性)은 타고난(生) 마음(心), 즉, 태어날 때 부터 생기는 마음을 말하며 '이성(도덕성-인의예지)'과 '본능'(욕망)[13]이 있다.
정(情)은 본디(靑) 마음(心), 즉, 본심. 솔직한 마음. 감정을 말하며 '사단'(동정심, 의협심, 공경심, 분별심)과 '칠정(희노애락)'이 있다.
'어떤 감정에서 도덕성(이성)이 발현되느냐?, 사단의 감정과 칠정의 감정은 분리 가능한 문제인가?, 이기론에 해당되는 바는 무엇인가?'가 성리학의 심성론, 성정론, 사단칠정을 만들어 내었다.

주자는 이기론을 사람의 마음에 적용해 성리학은 심(心, 마음)의 두 측면인 성(性, 본성)과 정(情, 감정)을 분리하며, 마음은 성과 정을 주재한다(심통성정心統性情)고 주장했다. 주자는 심과 성은 같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지만 섞이지도 않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심과 성과 리가 같다고 주장하는 양명학과 갈리게 되는 것.

주자는 성과 리가 같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다. 성性을 순수한 이인 본연지성과 이기가 섞인 기질지성의 두가지로 보는데, 타고난 본성인 '리'가 만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 원리(인의예지)인 본연지성本然之性를 형성하고, 다만 인간의 (기)질의 상이함에 따라 현실로 구현된 성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사람마다 달라져 사람들의 개성, 열등함과 우수함이 나뉘게 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 점이 인간끼리 혹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시킬 여지가 있어 근대 중화권의 신분제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 주의할 것은 이게 모든 성리학 학파에서 동의한 것은 아니라, 이이 같은 학자들은 모든 인간은 수양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켜 도를 익힐 수 있다는 교기질론을 제시해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장을 내포한 학자들도 매우 많다. 여기서 비롯된 신분 사상이 양인 내의 법적 신분 구별을 없애고 양인과 천인만을 두는 양천제로, 중국은 당나라 (실질적으론 송나라) 대부터[15], 한국은 조선부터 실시되는 것. 그렇지만 유학은 반대로 가정 내의 신분질서, 또한 학식에 따른 신분질서를 부정하지 않아 조선 중기에 반상제가 대두된다. [16]

문제는 정情에 대해서는 학파마다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위에서 적었듯이 정은 인간의 기질에 따른 감정과 욕구를 의미한다. 그런데, 맹자는 우리에게 윤리의 원리인 사덕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사단四端, 즉 인의 단서인 측은지심, 의의 단서인 수오지심, 예의 단서인 사양지심, 지의 단서인 시비지심의 네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주자는 사단이 정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은 성처럼 이기가 섞여있나? 아니면 그저 기일 뿐인가? 쉽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도 우주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조선 성리학의 문제의식이 시작한다. 이황의 학파는 사단은 이이고 칠정은 기이다고 주장하며, 이이의 학파는 칠정이 사단을 포함해 모두 기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정치까지 불어나면서 동인서인으로 갈리고 현실정치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


4.3. 수양론[편집]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방법은 거경궁리(居敬窮理)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있다. 거경궁리를 거경과 궁리로 따로 해석해 보면, 거경은 궁리를 임할 때의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아 하나에 몰입하는 것을 뜻하며, 궁리는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궁리는 격물치지이며, 격물치지는 사물에 대하여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이다. 이는 인간의 기질을 우수하게 하기 위한 학문적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마음이나 사물에 몰입한 후 그 이치를 성실히 연구해서 알고, 그 이치를 실천함으로써 사람의 도덕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

거경에 대해서 좀더 부연설명하자면, 주희는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희노애락이 크게 발하기 전의 고요한 마음 상태(미발, 未發)를 관찰하는 주경함양(主敬涵養)을 이야기했다. 이는 이미 희노애락이 발하였고 의식 위로 떠오른 상태에서(이발, 已發) 그 이치와 작용을 탐구하는 격물치지와는 구분된다. 즉 주희는 잠에서 막 깨어나 마음에 생각이나 감정이 활성화되기 전인 미발 상태에서도 수행이 계속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주경함양을 위해서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를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수양론은 불교의 지관법(사마타+위빠싸나)과의 유사점을 많이 주목받아 왔다. 현대에는 심리치료에서 성리학적 주경함양을 활용하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4.4. 내세관[편집]


따라서 주자의 사상은 철학적인 바탕에 기반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희가 동시대인들에게 심지어 조상의 영혼을 모시지 않는 후레자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때문에 주희가 조상에 대한 제사에 대해서만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중론이다. 타협했다고는 해도 주자는 조상이 '귀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차례나 제사를 지낼때 조상의 영혼이 밥먹으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위해 자손이 모임으로서 흩어져있던 조상의 기가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귀신을 모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손들이 모여서 조상을 기리는 행위 자체가 본질인 것이다.


4.4.1. 귀신의 유무[편집]


성리학에서는 세상을 이기론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이기론에 입각하여 불교나 도교 등이 '허황된 설을 주장한다.'고 하며 거부했다. 그런데 만약 불교 등이 허황되고 귀신이나 윤회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제사를 지내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성리학도 유교인 이상 제사라는 형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었고, 제사가 무용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귀신이 존재한다면 성리학의 기본철학과 어긋나고, 그렇다고 없다고 하자니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는 딜레마에 빠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이황도 이 문제를 의식하면서도 다루기를 어려워한 듯하다. 그래서 문집을 살펴보면 시간에 따라 생각이 조금씩 바뀐다. '귀신의 일처럼 알기 어려운 것은 논의하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를 회피하기도 했고, 사람이 죽으면 기가 흩어지는데 어찌 귀신이 있겠냐고 부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사람이 죽어도 기가 바로 흩어지지 않고 아직 뭉쳐있을 때가 있으니, 그때까지는 귀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만약 귀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옛 성인들은 망자의 가족들을 위로하고자 거짓으로 의례를 제정하였다는 뜻이 되므로, 이러한 결론을 유학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율곡 이이도 귀신이 있다고 말하지도, 없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있고,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없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했다. 또한 기가 아직 흩어지지 않은(죽은 지 얼마 안 된) 조상을 제사 지내면 후손의 정성에 따라 기가 감응하고, 기가 이미 흩어진(죽은 지 오래 된) 조상을 제사 지내더라도 조상을 이루었던 '이'가 감응하기 때문에 제사는 무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송시열도 이러한 설명에 동의했으나, 이런 설명을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

미수 허목은 정말로 귀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허목의 주장에 따르면, 옛 성인들이 제사를 정한 것은 귀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월이 지나도 기가 흩어지지 않은 귀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윤휴도 귀신이 기본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고, 임금이 백장의 어버이자 귀신을 주관하는 자로서 제사 등 예법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왕권중심적 사상과 연결지었다. 김원행은 기존 성리학계의 설명이 귀신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걸쳐 있으며, 제사를 경솔히 지내게 하는 폐단을 부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김원행은 귀신이 기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주나 위패를 만들어 깃들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호 이익은 처음에는 정말로 귀신이 있다는 입장이었으나 훗날에는 없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5. 비판과 반론[편집]



5.1. 성리학은 과도하게 비현실적이다[편집]


재밌는 건, 도가불교의 과도한 비현실적인 것이 나라를 망친다며 비판하고 나온 것이 성리학이다. 원래 유교는 우주론에 관심없이 춘추전국시대의 아수라장을 해결하려고 현실에 치중한 윤리학/정치철학이였는데, 도가와 불교가 유교가 속시원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면서 위진남북조시대당나라 (한국의 경우엔 고려)의 학문을 휘어잡았다가, 왕족과 귀족, 학자들이 현실에 관심없이 내세에 치우치다가 나라 정치를 말아먹는 꼴을 지켜본 사대부 계층이 불교와 도가의 문제의식만을 수용해 현실에 도움이 되게 써먹으려고 유학적인 답을 내놓은 것이 성리학이다.

그런데 조선은 이황과 이이의 이론적 전성기 직후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며 성리학을 제외한 공학과 같은 실용학문도 연구자가 죽거나 일본에 납치되거나 하면서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 너무 처참했는지 한국 성리학이 현실을 똑바로 못보기 시작하며 과도한 이론성만 남아 조선의 학문에 남은채로 현실과 점점 괴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 당파싸움을 거치며 유학의 교조화가 일어나다보니 결국 유학이 비판하던 불교의 모습과 다를 게 없어진 것이다. 즉, 단순히 성리학의 본성 때문이라고 하기엔 성리학이 망가진 데는 조선의 난리통이 영향이 컸다고 볼수도 있다. 물론, 성리학이 처음부터 형이상학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

중국은 반대로 명나라 대에 양명학이 등장하며, 성리학은 '세상을 극한까지 탐구해 이치를 얻어내라'고 한다면 양명학은 격물치지를 '마음만 이해하고 실행하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명학도 마음에 대해 이해한 내용이 엿장수 맘대로였단 점에서 단순히 무엇이 더 형이상학적이라 주장하긴 어렵다. 청나라 대에는 고증덕후스럽게도 문자의 옥을 거치며 성리든 양명이든 황제의 심기를 건들것 같아서 '유교 경전이 고증부터 틀린거 아니냐?'라는 고증학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결국 성리학이나 양명학 학자들의 연구를 건륭제문자의 옥으로 탄압해서 심기를 건들만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학문으로 도망친 도피성 학문이라는 점에서 고증학 역시 비현실적 학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고증학 연구로 진짜 고증이 틀린 부분들을 실제로 찾아냈고, 그러면서 공자처럼 현실로 돌아가자는 흐름이 생겼다는 점에서, 공자 때의 유학처럼 다시 현실로 집중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5.2. 성리학은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다[편집]



5.2.1. 반론[편집]


흔히 성리학(주자학)에서 과도하게 형식에 집착한다고 비난받는 부분은 사실 성리학 체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주자가 살아있던 당시의 관혼상제의 문제였다. 송대의 가례(家禮)가 과도하게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현실적인 예법을 보급하려는 것이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의 의도였다. 하지만 이 주자가례도 현실적으로 모두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주자 본인조차도 이 가례는 원리원칙일 뿐이니까 상황에 맞게 응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 특히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당대 상황과 관계없이 성리학을 절대화, 종교화시키는 바람에 학문의 취지를 훼손시켜버린 것이다.

예송 사건에서 성리학을 상대해석 하려는 윤휴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아낸 송시열과 그 추종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5.3. 지배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편집]


성리학의 사상이 당초부터 신분 차별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대상은 달라도 이치는 하나"라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개념은 윤리학적 개념으로 시작해 주자가 우주론으로 확대 적용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하나의 리로부터 기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이기론적 주장을 응축하는 단어인데, 개념의 방점이 '이치는 하나'에 찍히기도 '형태는 여럿'에 찍히기도 한다. 문제는, 신분제에 있어서 이 개념이 "이치는 하나지만 대상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는 방식으로 적용되어 인(仁)과 같은 보편 윤리를 차등적으로 행하는 것을 정당화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범주에 신분의 귀천을 포함했다는 것.[17]

사실 성리학의 근간인 유학 자체가, 주나라의 봉건제 질서를 이상향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신분제를 긍정한다.# 설령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군주는 바뀔지언정 상하계급 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처럼, 한번 군주는 영원한 군주인 것이고, 한번 신하는 영원한 신하인 것. 이는 유학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로, 유학에 뿌리를 둔 성리학 역시 이를 피해갈 순 없었다.

5.3.1. 반론[편집]


충효(忠孝)를 이용해 백성을 국가 권력에 예속시키는 일도, 성리학에서 비로소 나타난게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유서 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충효 사상을 가르치는 도덕 선생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군주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보다도 오히려 역성 혁명을 긍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주희 시대의 신유학적 정치 관점이었다. 한 왕조 이후 천 년 이상 철저하게 이단으로 취급되던 맹자를 다시 주요 경전에 포함시킨 것도 주희의 업적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맹자'의 사상은 매우 껄끄러울 수 밖에 없는데, 걸핏하면 정치를 제대로 못하고 인성이 글러먹은 왕은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당장 군군신신부부자자부터가 그런 이야기다. 위에서는 "군주는 영원한 군주"라는 뜻으로 신분제를 공고히하는 사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세상이 평안하다"라는 뜻으로, 바꿔 말하면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갈아치워라"라는 뜻이다.

송나라 때는 군주의 전제 정치가 약화된 시기였으며 왕안석의 신법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들이 나타날 수 있는 시민 계층이 형성된 시기였던 것이 이같은 진보적 관점을 태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몽골의 칩입과 반달리즘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는 중국에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유교가 다시 자리 잡는 것은 명나라 이후이다. 물론 남송 대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천과 의지를 중요시하는 자기 개발서 비슷한 관점이 명대의 주류가 되었지만...

또한 성리학이 신분제도 강화를 옹호하고 지배층의 수탈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도 있는데 이는 왜란과 호란 후에 생긴 사회혼란으로 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리학을 변질적으로 해석하여 생긴 부작용이지 성리학이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과 지배층의 횡포를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당시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고 성리학을 악용한 지배층 잘못이 크다. 이는 전근대 사회의 한계라고도 볼 수는 있다.

애초에 당시에는 신분제와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였으니. 그리고 처음에는 의도는 좋았을지언정 후에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오용되거나 변질되는 경우도 살펴봐야 한다. 당장 불교나 기독교 등도 평등을 주장했지만 이후 권력자들이 자신들 통치와 지배 이데올로기 정당화로 써먹은 걸 떠올려보자. 이러한 현상은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목격될 수 있는 현상이라 성리학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6. 의의[편집]


한편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개혁적 열망은, 성리학을 도입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몰아내는 지식인들의 거대 프로젝트로 결론이 내려지고 군부의 쿠데타와 협력하여 조선 왕조가 세워지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의 논의는 구 고려 왕조 시대의 종교적 생활 방식을 타파하는데 있었다. 성리학이 윤리적, 경제적 생활 이념으로 완전히 체화된 것은 퇴계와 율곡이 등장한 16세기 후반이었다.

중국에서는 일단 명 중기부터 양명학이 인기를 끌었다. 다만, 명 멸망 이후에는 일단 사상계에서 명나라 멸망은 양명학 때문[18]이라는 보수적 경향, 그리고 청나라의 문자의 옥 크리 등으로 인해 유학 연구가 시망이 되었다.[19]

하지만 성리학이 내내 주류였던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나 에도 막부에서도 정부의 공식 이념 및 주류를 차지한 사상 체계는 성리학이었고, 그 위상은 축소된 바가 없었다. 일본 성리학은 에도 막부 시절 발달되었고, 한국에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에도 막부는 대놓고 양명학을 탄압했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송나라에서 창시되었으나 조선에서 재발견되고 발전되었다. 혹은 또 다른 학문으로 재탄생된다. 이이와 이황의 추종자들은 이이와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했다고 보는데,[20] 이건 순수하게 한국 유학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고 우주론까지 나가는 개념은 원래 주희의 성리학에는 없던 개념이다. 이 때문에 해동 성리학이나 조선 성리학으로 별도로 분류되기도 한다.


7. 성리학자[편집]


학자로서 성리학을 연구, 발전시키는데 전념한 인물이나 유명인들 위주로 게시가 되어있으나, 사실상 남송(南宋) 이후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던 중국 명나라나 한국 조선 왕조의 관리들이 대부분 성리학자에 해당한다 할 수있다. 또한 조선의 경우 충무공 이순신같은 무관(武官)들도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배웠으므로 하술된 인물들이 문관(文官)위주로 작성되었음을 참고바람.


8. 여담[편집]


  • 송나라 이후에 촉한정통론이 나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성리학이었다.

  •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한국명 이만열)는 한국이 제대로 된 문화 산업을 이끄려면 유교(성리학)를 활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처럼 선비정신이나 유교 같은 한국의 전통적 정신 문화를 버리고 뿌리 없이 표류하는 대중문화만 좇다가는 만주족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 페스트라이쉬 외에도 우리 사회의 대안을 해외로부터 본받는 것보단 우리 안에서 그걸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성리학을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 충북대학교 허태용 교수는 조선시대 수많은 현상 원인은 성리학' 견해 부적절"이라고 얘기했다. 허 교수는 '성리학으로 조선시대를 설명하는 연구 경향의 비판적 고찰'이라는 글에서 국내외에서 특정 사상을 역사적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러한 태도는 문제의 소지가 작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상적 요소를 역사의 동인으로 보려는 이유에 대해 연구자의 심리적 편견이 투영됐을 가능성이 있고,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선동에 유리한 측면이 있으며, 비판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안전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 후기에 주체적 역사학과 국어학, 현실적 문학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열린 것은 실학이라는 학풍이 대두됐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마치 인과적 설명이 마무리된 듯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면서 설령 이러한 설명이 불만족스러워도 반론이 쉽지 않아 설득력을 얻게 된다고 했고,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체제 교학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어떤 역사 현상이 성리학으로 인한 것이라는 설명은 공기에 산소가 포함됐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이어 "조선시대에도 상황마다 성리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모습과 역할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며 "그런데도 모든 사건의 원인을 성리학으로 돌리는 것은 관념론적 환원주의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허 교수는 "역사학에서 편의적으로 특정 시점과 공간을 잘라내서 특정 사건이나 현상의 인과를 판단하려는 시도는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기 마련"이라며 "복잡한 요소들을 늘 입체적으로 고찰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사상적 배경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가족법 등에 관하여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고, 그 보수적 성리학으로 인해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고 사농공상의 신념에 의거하여 민의원 후보에 나오고도 선거 운동을 안 했는데 그 이유가 아랫 사람에게 어떻게 표 달라고 고개를 숙이냐는 이유였다. 성리학의 폐해가 그대로 드러났다고도 하지만 당시 비슷한 시기 독립한 신생독립국들의 사례를 생각하면 김병로와 비슷한 사상이나 행동을 보인 자들은 많았다. 애초에 저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신분제 사회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절이라는 걸 기억해야 있으며 여성인권 역시 서구권 선진국만 해도 더 나아지는 것은 수십 년은 지난 뒤의 일이다.[21]
[1] 정이,정호 형제+주자[2] 그나마 오경정의가 나오기 전까지는 금문학파-고문학파 간의 논쟁이라도 있었으나, 공영달의 오경정의가 출판되자 오경정의만이 옳다는 시각이 널리 퍼지면서 이러한 논쟁도 무의미하게 된다.[3] 한국과 일본의 동양사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당송변혁기라고 지칭한다.[4] 오히려 이 시기에는 당나라 황실마저 도교를 사회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5] 성리학 역시 명나라와 조선왕조 때에 이르러 관학화되었으며, 결국 명청교체기, 백련교도의 난 이후로 나타난 청나라 후기의 사회변화, 임진왜란 이후로 나타난 조선후기 사회변화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이런 상황은 양명학, 실학, 공양학 같은 학문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6] 위진남북조시대에 도교와 불교가 유행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5호의 침략과 이로 인한 화북지방 상실로 인해 한족 우위를 강조하는 화이사상이 깨지게 되자 현실도피 차원에서 문벌귀족들이 도교와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7] 유학자들은 이러한 이와 기의 관계를 각각 사람나귀에 대응시켜 설명하곤 했다. 조선시대 그림에 나귀를 탄 선비 그림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나귀는 그냥 두면 마구 날뛰지만, 사람이 고삐를 잡아주면 온순하게 원하는 곳으로 간다. 이황의 설명대로라면, 사람이 처음부터 나귀를 몰고 가는 것은 사단에, 나귀가 마구 달려가는데 사람이 뒤늦게 올라타는 것은 칠정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이이는 그런 구분을 굳이 할 필요 없이, 사람이 나귀에 처음부터 올라타 나귀를 몰 뿐이며, 이때 고삐를 얼마나 당기냐 늦추냐에 따라 사단과 칠정이 갈린다고 본 것이다.[8] 이이의 학설은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9]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양명학의 양지(良知)가 가질 수 있는 능동적 실천성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양명학이 갖는 문제 의식이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새로운 해석으로서 이 이론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10] 불교를 처음 접한 서양 사상가 중에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처럼 불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었고, 중국인들은 불교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인도로 유학을 갔으며, 일본인들은 유럽의 사상과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한자어를 번역어로 고안해냈다.[11] 그러면서도 용모가 워낙 청아해서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12] 예송논쟁으로 치면 간단히 말해서 죽은 왕을 장남 대우를 해줘야 하냐 마냐의 논쟁으로 유교에서 적법한 계승자는 적장자이며 부모보다 적장자가 먼저 죽으면 부모는 3년복을 입는다. 그리고 그 며느리의 경우는 1년복을 입는다. 그런데 효종은 적자이긴 했지만 장자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정통성 논쟁이 있어왔고 이것이 효종의 사후와 인선왕후 사후에 상복 문제로 터지고 만 것. 이기론의 대립이 영향을 주었다는 관점에서는 서인의 1년복, 대공복은 이와 기가 같으므로 왕가라고 해도 예에서 예외가 있을 순 없으니 장자가 아닌 효종은 당연히 3년복을 입을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남인의 3년복, 1년복은 왕가는 특별하므로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관점이므로 따라서 적장자가 아니었지만 효종은 적장자가 이을 수 있는 왕이었으므로 적장자와 마찬가지로 3년복을 입을 대상이다.[13] 다만 맹자는 사람의 타고난 마음(性)이 선하다고 생각했으며, 타고난 마음(性)에 본능과 욕망을 두지 않았다. 성리학은 맹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본능과 욕망을 타고난 마음(性)이라고 보진 않았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같이 나열하였다. 순자의 성악설에서는 욕망(이기심)이 타고난 마음(性)에 해당된다.[14] 물론 전근대 시기에서는 세계 어디서나 둘 다 당연한 것이었고, 지금도 인간과 동물의 차별은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15] 청나라에 들어서선 만주족 무사였던 팔기군에서 비롯된 기인이 등장하며 다시 제도적 신분이 등장한다.[16] 다만 조선 후기에 가선 양반 질서가 전락하며, 양반의 기준에 따라 1.9%에서 심하면 전체 인구의 70%가 양반이였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런 동양 신분제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과 중국의 봉건성/신분성은 항상 첨예한 논쟁거리다. 양반 항목 참고.[17] 이승환, 리일분수 담론의 사회 현실적 의미과 기능 - 성리학의 신분제 정당화 문제를 중심으로[18] 명 중기는 사상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웠던 시기인데 이를 일종의 퇴폐로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의 가톨릭에 대한 인식과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인식과 현대 한국의 유교에 대한 인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건 보편적 현상이다.[19]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다.[20] 이황의 대표작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마인드 맵 열 장으로 쌈빡하게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병풍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 공부에 쓰라고 임금(구체적으로는 선조)에게 바친 책이지만, 내용이 좋아 선비들도 애독했다.[21] 당장 한국 초대 영부인이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너만 해도 남편 이승만에게 과잉내조라 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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