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완(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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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완
李圭完 | Lee Kyu-wan
[1]

파일:이규완.png

이름
이규완 (李圭完 / 李奎完)
아사다 료 (淺田良)
아사다 료이치 (淺田良一)
출생
1862년 11월 15일
한성부 뚝섬
(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뚝섬)
사망
1946년 12월 15일 (향년 84세)
강원도 춘천부 석사동
(현 강원도 춘천시 석사동)
중풍, 등창 등으로 인한 병사
직업
관료, 정치가, 군인
주요 경력
강원도관찰사, 춘천농립고등학교장
강원도장관, 함경남도장관
함경남도지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
강원도지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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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이규관 (李圭寬), 이주완 (李走完)
본관
전주 이씨 (全州)
종교
유교 (성리학)
기독교
학력
파일:일본 국기.svg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
부모
아버지 : 이기혁(? ~ 1884?)
어머니 : 유씨(? ~ 1871)
계모 : 이름 미상(? - 1876)
배우자
첫째 부인 : 이름 불명(? - ?)
둘째 부인 : 이매자(1880 - 1961?)[1]
자식
슬하 5남 4녀
아들 : 이각일(1897 - ?)
아들 : 이선길(1898년 - 1971)
딸 : 이송자(1902 - ?)
아들 : 이영일(1903 - 1984)
아들 : 이재길(1920 - ?)
아들: 이대길(1909 - ?)
딸 : 이춘자(1910 - ?)
딸 : 이부자(1914 - ?)
딸 : 이절자(1915 - ?)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5_Lee_Kyu-wan.png

대한제국 육군 참장 시절 모습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2] 무신, 군인, 개화파 정치인이자 일제강점기 관료. 박영효의 측근으로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민원식과 함께 참정권, 자치권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경술국치 직후부터 참정권과 자치권 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문화통치기 이후 자치론을 주장한 친일파들과 차이를 뒀다. 하지만 그 역시 1910년 초대 강원도 도장관(도지사)를 지내는 등 일제에 부역한 친일 행적은 남겼다. 다만 구습 타파엔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 생애[편집]


1862년 한성부 뚝섬 출생. 왕족 출신임에도 오래 전에 몰락해서 광주군 남종면에서 살다가 아버지 때는 뚝섬에서 나무꾼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그는 소년 시절 박영효를 찾아가 그의 식객으로 생활했다.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서재창 등과 함께 정변군의 지휘관이었고, 검술 실력이 뛰어나서 민영익 등의 귀를 칼로 베었다 한다. 특히 이완용, 송병준 등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불알 간수 잘하라고 농담하면서 수근댔다.

1907년 순종이 그를 조선 최후의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했는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대로 조선총독부의 강원도장관에 유임되어 초대 강원지사가 되었다.


파일:이규완.jpg

함경남도 장관 취임식 모습

친일파로 등재되어 있는데, 실제 일제 강점기 때 도지사 등의 고위직을 지낸 것은 맞으나, 조선인 참정권 및 자치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경술국치 직후에 주장한 내용으로 3.1운동 이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과 문화 통치를 사용하는 총독들, 1940년 이후 총독부에서 민족 분열 정책 및 전시 활동 참여 장려의 일환으로 사용된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내용이며, 그의 활동으로 짐작해보면 연방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민족은 다르지만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나라를 구성하는 체계를 생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똑같이 자치 운동을 했지만 박춘금 등과는 좀 다른 케이스인 셈이다.

여성들의 인권 향상을 주장하였고 다른 친일파들이 흔히 보인 탐욕성과 달리 일상 생활에서 성실하였으며 악습 근절에도 앞장섰다. 신간회, 물산 장려 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창씨 개명, 병력 동원, 공출, 일제를 위한 군수물자 지원 활동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전쟁 관련해서 참여한 것은 조선인 참전 병사 위문품 후원회 및 원조처럼 순전히 조선인과 관련된 활동에만 참여하였다.[3]

다만 조선인들이 악질적인 구습을 타파하지 못하였고 나라를 충분히 발전시키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합병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며, 독립 운동에 대해선 현실성이 낮다고 판단하였다. 실제로 3.1 운동 당시 평안도의 최고 직위에 있었으나 독립 운동에 반대한다는 경고문을 붙이기도 하였다.[4]

1945년 해방이 되자, 스스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니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고, 자신은 나라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에는 미군정 관계자들은 물론 이승만의 특별 조문단 이기붕, 윤치영 등과 김구의 특별 조문단 이외에도 강원도지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어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장례식 당시에 독립운동의 큰 축이였던 김구와 이승만이 조문단을 보낸걸 보면 최소한 당시 명망이 바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해방 이후에 암살 시도와 투석, 수많은 비난이 이어졌던 윤치호와는 달리 임시 강원도지사를 맡기도 했던걸 보면 반민족 행위와 별개로 사람들 못살게 굴진 않은듯. 못 살게 굴긴 커녕 당시 강원도에서 학교 다녔던 가난한 고학생들의 등록금을 자비를 털어서 내줬던 사람이다. 확실히 사리사욕을 위해 친일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본인은 독립 운동한 거 없다고 하지만,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활동 자금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5] 물론 그저 설일 뿐이라 확실하진 않다. 애초에 그런 일 있음 본인이 밝혔을 확률이 높지만, 실제 본인은 상술되어있듯 3.1 운동도 반대했고 독립 운동도 안했다고 명확히 밝혔다. (추론이지만 만일 그가 강직한 성격이였다면 활동자금을 좀 보낸 것 만으로 독립운동에 기여를 했으니 죄를 참작해달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승만은 이규완 사후인 1953년 그의 차남 이선길에게 신신 백화점 부지 및 주변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해주겠다 제안하였으나 이선길은 도가 지나친 호의라며 이를 거절했다.


3. 여담[편집]


소탈하고 호방한 성격과 동시에 격의없는 모습을 자주 보여, 여러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김옥균, 박영효 등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때 나이와 신분, 위상에 따라서 잡일을 시켰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은 나이가 많고 사회적 위상이 높다는 이유로 유혁로, 이규완, 서재필을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이때 이규완이 분노하여 "어찌 조선의 폐단을 바로잡겠다는 자들이 조선의 악습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가?"라고 일갈하였고 시중을 받던 이들이 부끄러워 사죄하였고 각자의 일은 각자가 하도록 하였다.


시위대 병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병영으로 복귀하던 도중 나뭇짐을 짊어진 사내를 만났다. 지친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군장을 떠넘기며 "이것도 나라를 위한 일이오."..라며 변명을 댔다. 그러다 사내의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사내 曰, "연대장 관사 옆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병사들이 알기로 연대장 관사 옆은 이규완 장관 관사 뿐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장관댁 머슴이요?"라고 물으니 사내는 "아니, 내가 장관이오."...라고 대답했다. 기겁한 병사들이 바로 군장을 내리고 사죄하려 했으나, 이규완 장관은 "이것도 나라를 위한 일 아닌가."...라면서 병영까지 마저 날라 주었다고 한다.


일본인 사업가의 부인이 집 근처를 지나가던 추레한 행색의 조선 노인을 불러다가 심부름을 부탁했다. 시장에서 물건 몇 가지 사오면 심부름값을 주겠다고 해서 노인이 쾌히 수락하여 심부름을 해줬는데, 이 여자는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심부름값도 주지 않았다. 노인이 이에 항의하여 밥 한술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항의하자 여자는 할 수 없이 노인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남편과 하인들을 불러다가 몰매라도 때릴 작정이었는데, 남편이 노인을 보고 깜짝 놀라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장관 나리께서 저희 집엔 웬일이십니까?" 부인은 몰랐지만, 남편은 노인, 아니 이규완 장관과 안면이 있었던 것.


그는 며느리가 될 사람, 사위가 될 사람을 볼 때 집안 문벌이나 형식적 예의 보다는 성실성, 성공 가능성 여부가 있는가 없는가 여부를 보고 골랐다. 이규완은 아들이 결혼하면 결혼식 다음날 반드시 밭에 데리고 나가 가래질을 시켰다. 그의 며느리들 중에는 당시 고등 여학교를 나오고 교사를 하거나 상류층의 여자라 해도, 셋 이상이 협동해야 일이 잘 되는 일을 시켜 서로 협동하는 일을 시험했다. 숙명 여학교를 졸업한 넷째 며느리가 왔을 때는 가래질할 철이 아니어서 이규완은 새로운 넷째 며느리에게 나흘 동안 계속하여 돌담을 쌓게 했다.


이규완은 공무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개간에 힘썼다. 개간을 하고 보니 여름에 물이 부족할 듯 싶어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마침 분가한 아들의 집을 저수지 뚝 위에 지었다. 아들이 "홍수에 뚝이 무너지면 큰일이잖습니까?"라고 울상을 짓자, 이규완은 "큰일이지,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뚝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 젊은이가 돈을 모으는 방법을 묻자 그는 오락하지 않고, 유흥에 빠지지 말고, 도박하지 않는 것이 돈을 모으는 방법이라 답하였다. 그러면서 “야구란 미친 짓이야. 그런 짓 하는 놈은 나중에 실업자 되지. 이상한 유희는 할 생각을 말고 퇴근하면 청소부터 하고, 과수원도 가꾸라”고 하였다. 이규완은 술과 담배를 시간을 허비하는 미친 짓이라고 조롱하였고, 게임, 스포츠, 오락, 도박 등을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고 규정하였다.


손자가 마당에 다알리아 꽃을 심으려 하자, 이규완은 "그거 심지 말고 도라지 꽃을 심어라. 도라지는 꽃도 보고 뿌리는 반찬과 약으로 쓸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라고 하였다. 그는 상당히 구두쇠라서 사소한 나무 토막, 목재라고 해도 쓸 데가 있다고 보고 함부로 버리지도 않았다.


이규완은 백수 실업자를 상당히 싫어했는데, 때문에 이와 관련해 ‘게으른 본성’을 가진 조선 민족은 독립할 자격도 없다며 그 ‘본성’을 개량하자고 즉 열심히 일하자고 울부짖기도 했다.# 막상 미국이나 영국, 독일도 1930년대 초중반에는 백수가 많았고, 일본도 1920년대 중후반에는 백수가 많았다. 물론 이는 이규완만 딱히 주장했다기보단 당대 많은 지식인들이 언급하던 것이긴 했다. 서구 및 일본, 미국, 청나라 등지와 그들의 서적을 통해 주류였던 사회진화론을 학습하였고, 성실하게 배우고 일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시대의 흐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 다만 서구 우월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었던 사회 진화론은 결국 2차 세계 대전 이후 쇠퇴한다.


4. 둘러보기[편집]


1862~1946
복무
조선 병조
대한제국 육군
기간
1882년 ~ 1884년 12월 7일
1905년 11월 23일 ~ 1907년 11월
임관
무과 급제
최종 계급
조선 육군 하사관
대한제국 육군 소장
최종 보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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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奎完으로 표기하기도 함.[2] 사실 조선에선 왕의 자손은 5대까지, 대군의 자손은 4대까지, 군의 자손은 3대까지 왕족으로 예우했기 때문에 임영대군의 15대손인 이규완은 당시 왕족으로 대우받진 못했다.[3] 태평양 전쟁 당시에 총독부에서 방공호 구축을 지시하기도 했지만, 무시했다.[4] 주민들에게 3.1운동에 신경쓰지 말고 생업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 위키피디아에 상해 임시 정부에 자금을 송금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인이 되진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