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활동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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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이경규

1. 1980년대
2. 몰래카메라를 통한 최전성기
3. 영화인 이경규
4. '양심냉장고' 공익 예능의 선구자
5. 일본 유학 후 복귀
6. 침체기
7. KBS에 오길 잘했습니다
8. SBS 활동, 지상파 3사 트리플 크라운
9. 제 2의 터닝포인트, 2016년
9.1. 2016년 상반기
9.2. 2016년 하반기
9.2.1. 연예대상 시상식
9.2.2. 코미디 콘서트
10. 2017년 이후


1. 1980년대[편집]


주한미군 부대 통역관[1][2] 아들로 1960년 9월 21일 경상남도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現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의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이후 동구 초량동에서 자랐다.[3][4] 원래 이름은 명규였으나 사촌형제와 이름이 같아 개명했다고 한다.

취미는 골프, 영화감상, 낚시, 쿵후(공인 4단)이며, 낚시(도시어부)와 쿵후(영화 제작)는 그의 커리어가 됐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출신으로 김형곤과 대학교 동창이며 실제로 두 사람은 개그맨 데뷔 이전부터 서로 친했다고 한다. '명랑 히어로 두 번 살다'' 이경규 편에서 이윤석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경규가 김형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둘이 대학교 동갑내기 동창이기도 한데 이경규는 방송, 김형곤은 무대에서 활약했으면서도 서로를 미워하고 상처 준 일이 있었던 모양. 김형곤 사망 후 이경규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울면서 술을 마시다 정신을 잃는 바람에 술집 점원이 이윤석에게 전화했다고 한다.

1981년 제1회 MBC 개그 콘테스트에서 인기상을 수상하여 8명[5] 중에 8등을 받아[6] 겨우 데뷔에 성공했다. 당시 이경규가 선보인 개그 제목은 '소림사 주방장'. 병색이 짙은 주방장 사부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제자에게 "내 외상 술값을 대신 갚아달라"는 말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의 반전 개그였다고 한다.몰래카세트에서 직접 밝힌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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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시절의 이경규, 뺑코 이홍렬과 함께
이 사진과 관련된 비화가 있는데, 무명 개그맨이었던 이경규가 자신도 개그맨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방송사 선배와 사진을 찍고 싶어했는데 이경규에게 그나마 잘해주고 가장 친한 선배였던 이홍렬이 이 얘기를 듣고 같이 사진을 찍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찍은 후 이경규는 감히 선배와 사진을 찍는데 옆에서 쪼개고 건방진 표정을 짓는다는 이유로 어떤 선배에게 코피까지 흘릴 정도로 얼굴을 주먹으로 얻어맞았으며 다른 선배 개그맨들에게도 어떻게 감히 후배가 선배랑 사진을 찍냐고 갈굼받았다고 한다. 개그계의 대표적인 똥군기의 예.

이경규로서는 운이 없었던게 동기였던 최양락, 엄영수, 이상운 등이 모두 KBS로 이적한 상태라 남아있는 남자 개그맨 동기가 김정렬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더 갈굼을 심하게 받은 것이다. 그래도 이홍렬은 이경규에게 그나마 잘해주던 천사표 선배 중 하나였다. 나중에 가면 이경규도 너무 편하게 생각했는지 이홍렬과 맞담배를 피우질 않나 담뱃불 없다고 이홍렬이 피우던 담배를 뺏어서 자기 담배에 붙이는 행동을 하다가 혼났다. 나중에 이홍렬이 최양락에게 지나가는 식으로 뒷담화를 했는데 최양락은 말끝나기 무섭게 자기도 똑같이 이경규를 따라했다. 그러자 이홍렬이 폭발해 구두로 "네가 더 나쁜 놈이네." 하면서 최양락을 때렸다고 한다.

이경규가 본인의 1980년대 시절에 대해 많이 언급을 하지 않아서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의 모습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몰래카메라로 전국구 인기를 얻을 때 까지 이경규가 생무명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경규의 암담한 무명 시절은 경상도 사투리 억양 때문에 아예 방송에 출연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198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이 때 이경규는 어떻게서든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유명 가수의 백업댄서를 맡기도 했다. 오죽하면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이문세가 이걸 이야기하자 이경규는 무안하듯이 "아, 그땐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니까요."라는 말도 한 바 있다. 일밤에서 이경규와 같이 진행을 맡던 최수종이 해당 영상을 직접 보여줬는데 곱슬머리에 지금 보자면 무지 유치하고 촌스러운 옷차림으로 나와 무표정하게 춤췄다. 이외에도 청춘만만세의 단편에 제발 한번만이라도 출연시켜 달라고 이경규가 피디에게 통 사정해서 연기력 없는 배우역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이 당시 이용식이 정말 잘나갔었는데 그 이용식의 원맨플레이 코너인 '미스터 주'에서 이경규는 마지막 부분에 잠깐 등장하는 단역으로 나오기도 했다.

1990년대 <삶과 꿈>이란 월간지에서 이경규가 회고하길 이름없던 시절, 싸구려 자취방에서 이불 안에 들어가서 슬피 울면서 배고픈 시절을 견디던 시절도 있었다고. 그 당시 이경규는 전농동에 있는 자취방에서 살았는데 방송국까지 그 먼 길을 차비가 없어서 걸어다니는 지경이였지만 개그맨들의 위계서열 분위기상 이걸 내색조차 못했다고 한다.[7] 그런데 선배들 중 한 명인 강석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출퇴근을 할 때마다 이경규를 청량리까지 태워다줬다. 당시 개그맨들의 위계서열 의식을 생각하면 강석이 이경규에게 이렇게 해 준 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동이였다.

1980년대 중반의 이경규는 지금처럼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선 것은 아니었지만, MBC 청춘만만세[8]의 코너 '공작 클럽'[9]에서 중간 정도되는 비중으로 출연하여 "띠용~", "쿵쿵따리~", "자연즈럽게", "우우하하하하하~" 등 귀에 쏙쏙 들어오는 다수의 유행어들을 쏟아내었고 이를 토대로 각종 CF에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기가 점차 상승중이었다. 당시 "자연즈럽게"라는 유행어로 삼양식품의 인스턴트 자장면 짜짜로니의 광고에 이홍렬과 같이 출연하기도 했고, "우우하하하하~" 하는 웃음으로는 고려제약의 종합감기약 '하벤'의 광고에 단독으로 나오기도 했다.[10] 무릎팍 도사에서 올밴이 어릴 때 이경규의 이미지로 뽑은 것도 바로 이 유행어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특출나게 눈에 띄는 개그맨은 아니었다. 즉, 1980년대 중반부터는 위에 열거한 유행어 정도를 남긴, 지금으로 따지면 개그콘서트에 주력으로 나오는 인기 개그맨 수준 정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경규는 1980년대 중반에 군대에 입대했기 때문에 이 인기를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군에서 제대한 1980년대 후반, 이경규는 라디오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에 보조 출연으로 나와 입담을 과시했는데 특히 1989년부터 5년간 진행자 이문세 옆에서 보조진행을 봤던 MBC FM "별이 빛나는 밤에" 주말 공개방송과 1990년 KBS FM "박중훈의 인기가요"에서 개그를 뻥뻥 터뜨려서 당대 라디오 청취자들의 웃음을 책임지기도 했다. 당시 녹음본을 들어보면 입담과 재치가 최고조에 올라있던 상태였던 이경규의 개그 실력을 잘 느낄 수 있다.

즉, 이경규의 1980년대 커리어는 1980년대 초반 무명 → 1980년대 중반 군복무 → 1980년대 후반부터 잘 나가기 시작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2. 몰래카메라를 통한 최전성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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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주병진의 친구인 이문세의 추천으로 이경규는 주병진의 보조역할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높여가기 시작했으며[11][12] 1991년 말, 주병진이 사업 문제로 하차하고 다른 인기 개그맨들도 SBS의 개국에 맞춰 이적한 덕에 본격적으로 이경규가 일밤의 메인을 맡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몰래카메라'를 통해 시청률 대박을 터뜨리며 전성기에 돌입한다. 그전까지 인지도 있는 주변 개그맨에서 한순간에 톱 개그맨으로 부상한 것.

위에 서술한 삶과 꿈에서도 비로소 내가 인기를 끄는구나를 실감하게 되었던 게 이때부터였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연예인들이 이경규와 마주치면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냐"며 계속 피해 다녔다고 한다.


이후의 몰래카메라들과 달리 자극적인 소재는 아님에도 웃기다는 명성이 자자하다. 아내 역의 뻔뻔한 연기가 일품.
해당영상은 2004년 일밤 800회 특집때 하이라이트로 보여준 영상.

인기가 절정에 이르던 이 시절 이경규는 결혼도 하고, 영화 제작도 하면서 잠시 활동이 줄었으나 코미디 동서남북, 오늘은 좋은날 등에서 "별들에게 물어봐~"로 대표되는 희극연기로 재기했다. 별들에게 물어봐는 이경규의 대표적인 희극 연기이자, 아직까지도 가끔씩 나오는 유행어이다. 그리고 이경규가 시전한 최초이자 최후의 바보 연기이기도 하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일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영화인 이경규[편집]


파일:/image/109/2006/08/10/200608100828562300_1.jpg[13]

새로운 영화로 여러분들을 다시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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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SBS연예대상 최우수상 수상 소감 중[14]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관련분야를 전공했기 때문에 의외로 정통파 영화인의 계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본인도 원래는 연극학도였으며, 호구지책을 위해 개그 콘테스트에 도전했다가 덜컥 붙으면서 그 때부터 코미디언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여러 차례 회고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영화에 대한 열정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몰래카메라의 후속 코너도 유명 영화들을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하는 시네마 천국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코미디로 쌓은 인기를 바탕으로 야심차게 제작한 '복수혈전'[15]이 흥행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하면서 한동안 그의 영화 이야기는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듯 했다. 이경규 본인도 방송에서 망한 영화 이야기를 꽤 써먹었지만 사실 그 이후에도 계속 영화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어려울 때는 직원이 본인 포함 2명이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복면달호를 제작했고, 수준이 나쁘지 않은 평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결국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앞으로도 영화는 계속 만들겠다고 한다.

복수혈전에 대해서는 사실 다른 이야기가 있다. 당시의 복수혈전은 물론 웃음거리로 전락했지만 수많은 카메오와 예나 지금이나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이경규의 작품이었던 관계로, 의외로 꽤나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렸다는 것[16]. 그리고 비디오 판매 수입까지 합치면 어쨌든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다만 총수익은 영화관과 배급사, 투자사, 제작사가 나눠가지며, 촬영이 끝난 뒤 홍보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하고 추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으로는 오히려 손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개그 소재로는 이경규 본인의 자학개그 소재든 남이 이경규를 공격할 때 쓰든 상당히 쏠쏠하기 때문에 망한 감독 컨셉을 계속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여하튼 그렇게 대망은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복수혈전은 이경규가 그야말로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서 그런지 당시 기준으로 보면 매우 괜찮은 완성도의 작품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다름아닌 이경규의 원래 직업. 이경규의 직업 때문에 이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진지해야 할 장면에서조차 폭소를 터뜨리고 만 것이였다. 하다못해 코미디 장면이 많이 섞인 개그 액션영화라면 이경규의 이미지와 맞물려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겠지만, 배신당한 주인공의 진지한 복수극이라서 이경규의 연기력 자체는 준수했음에도 평소 이경규의 이미지와 괴리감이 너무 큰 것이 흥행 실패의 중요 요인이 되고 말았다.

평론가 김태훈은 20여년이 지나 2017년 1월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이경규와 같이 이 영화를 보며 "1970년대 홍콩 쿵후영화의 진한 향취가 느껴지는데, 액션으로만 짜여진 구성이 너무 강강강강으로 간다"고 코멘터리를 날렸다.

복면달호 이후에는 한동안 방송활동 쪽에 전념하다가 다시 전국 노래자랑을 소재로 한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2013년 5월 1일 개봉. 뭐 이것 역시 그럭저럭 중타는 쳤지만 동시기에 개봉한 아이언맨3에 심하게 밀린 감은 있다. 아빠를 부탁해에서 이 때를 회고하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내한했을 때 때리려고 했다."고 언급. 아이언맨 1,2는 봤는데 3는 영원히 안 볼 거라는 인터뷰도 했었다. 나중에 왜 그렇게 잘되나 싶어서 보긴 봤다만 한 가지 기념비적인 게 있다면 당시 기준으로 거의 90살 다된 송해가 카메오로 출연했다는 점이었다. 참고로 송해는 평생 휴대전화를 안 가지고 살던 사람에다가 사실상 방송과 관계된 날 이외에는 매니저도 두고 다니는 일이 없이 서울의 보통 70~80대 어르신들처럼 종로구 일대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연예인이라 섭외는 커녕 연락하는 일 자체가 너무나 어려웠다고 하는데, 이경규가 직접 발로 뛰어 겨우 섭외했다고 한다. 수소문하여 송해가 자주 다닌다는 종로의 한 업장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겨우 만나서 부탁을 드렸고 송해도 "나를 어떻게 찾아 왔냐"며 놀란 뒤, 그 정성에 섭외를 허락해 줬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휴대전화가 없다보니 송해가 출연해야 할 분량의 촬영일정[17]을 잡는게 쉽지 않아서 고생하여 겨우 다 찍었다고 한다.

이경규는 심형래처럼 고집이 쌘 편이 아니라서 복수혈전으로 쓰라린 경험을 하자 시간을 두고 생각한 뒤 복면달호에서는 바로 제작자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래서 크게 성공한 작품이 없을 지라도 심형래처럼 폭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평론가들의 평가도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정도로 존중해주는 편이다. 그리고 50살이 넘은 나이에도 영화감독으로서 아직도 최대한 많이 배우려고 다른 영화인들에게 겸손하게 가르침을 요청하고 있다. 복면달호와 전국노래자랑 촬영 당시, 감독 옆에 붙어있으면서 연출이나 촬영 노하우를 계속 배웠다고 한다.

최근에는 딸 이예림양과 치맥을 먹으며 "영화 하나 더 준비하고 있는데 잘못하면 집에 있는 재산 다 날아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물려줄 게 없으니 제빵 조리사 자격증이라도 따 놓아라"라고 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왔다.[18]

여담으로 본인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 영화에 성우로 참여한적도 있었다. 아치와 씨팍에서 잠시 내레이션으로 등장한다.

복수혈전 - 복면달호 - 전국노래자랑 계보로 이어지고 있는 이경규 영화 커리어에 새로운 영화가 추가될듯하다. 요새 방송에서 한 언급에 따르면 올해나 내년에 영화를 새로 준비하는 듯 하다.

씨네21과 '영화인'으로서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 # 영화에 대한 이경규의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2021년부터 소설 망원동 브라더스의 영화화를 맡으면서 다시 영화감독에 도전한다. #


4. '양심냉장고' 공익 예능의 선구자[편집]




1996년, 이경규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이경규가 간다'를 통해 공익 예능이라는 새로운 예능 트렌드를 탄생시켰다.

원래 이경규가 간다는 1회의 선동열이나 초창기의 김대중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연예인이나 사회 저명 인사들을 찾아가서 대담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시청률이 2%(현재로써는 소수점 수준)을 기록했기에 경쟁 프로그램이자 시청률 40%를 찍었던 KBS2 '슈퍼 선데이'의 꼭지 '금촌댁네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프로그램 성격을 바꾸기로 했다.[19]

그 결과 개편된 내용이 바로 공익성이 짙은 이른바 '공익 예능'. 코너의 내용이 바뀐 후 내세운 최초의 테마는 정지선 지키기.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의 일일 교통사고율은 부끄러울 정도로 세계 최고수준이라 국가적 계몽 운동이 필요했고, 방송용으로 적합한 것이 정지선 지키기였다.[20]

'양심냉장고'라는 이름으로 한 첫 방송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당시 내용은 한 밤중에 신호와 정지선을 준수하는 차량에게 양심냉장고를 주기로 했는데 세 시간 이상을 기다려도 아무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경규와 당시 게스트로 나왔던 민용태 교수,[21] 스탭들이 모두 철수하려는 찰나에 뇌성마비 장애인이 신호와 정지선을 모두 지켜 양심냉장고를 타게 됐다. 자세한 내용은 양심냉장고 문서 참조.

양심냉장고는 일밤을 위기에서 건져낸 구원 투수이자 몰래카메라의 공익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데 일조한 전설적인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 결과 이경규는 김국진 독주 체제를 저지하고 1997년 MBC 방송연예대상을 차지했다.

다만, 아무래도 상품이 걸려있는지라 결국은 양심냉장고를 타려는 사람들만 많아져서 이 아이템 형식 코너는 곧 막을 내렸다.

5. 일본 유학 후 복귀[편집]


1998년, 이경규는 모든 방송을 중단하고 1년 간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전파견문록, 건강보감 등으로 복귀했다.

2000년에는 KBS에 처음 진출하면서 야! 한밤에를 진행하여 2002년 KBS 연예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대단한 도전, 느낌표 등으로 2004, 2005 MBC 방송연예대상을 2년 연속 수상하였다. 대단한 도전에서는 김용만을 비롯해 여러 개그맨들과 다양한 과제에 도전하였는데 사실 본편보다 이경규와 김용만이 투닥거리는 모습이나 벌칙에서 노는게 더 재밌었다. 이후 상상원정대라고 하여 정형돈, 이윤석과 세계 여러 나라의 놀이기구 타러 가기[22] 코너를 진행했으나 썩 성공하진 못했다. 그러나 돌아온 몰래카메라를 진행하면서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이어가게 된다. 다만, 돌아온 몰래카메라는 소재의 고갈로 101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프리랜서이긴 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MBC 전속 MC로 보일 정도로 이경규는 MBC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2007년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당시 유세윤이 이경규의 이런 경력을 나열하면서 "MBC에 지분이 있나요?"란 드립을 칠 정도였다. 드문드문 KBS에서 프로그램을 하긴 했지만 몇개 없었고, SBS에서는 2004년에 첫 프로그램을 맡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 그의 대표 프로그램 대부분이 MBC 일밤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2008년까지 일밤의 터줏대감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6. 침체기[편집]


2000년대 중반부터 MBC에서 이경규 본인이 진행한 수많은 프로그램이 망하면서 이경규의 커리어는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23]

2007년 야심차게 기획하여 시작한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이 시청률 부진으로 폐지되면서 이경규 위기론이 돌기 시작했는데, 정작 본인은 살아오면서 수많은 위기를 넘겼는데 이걸 새삼스럽게 위기라 하냐며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2008년에는 하던 프로그램이 2개가 날아가는 등 이경규에 있어서 매우 아쉬운 한 해였다. 특히 그가 진행하던 간다투어는 말 그대로 완전히 가버렸다.[24]

결국, 연이은 시청률 부진으로 이경규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계속 조기종영되면서 한때는 이경규가 지상파 메인 MC를 맡던 프로그램이 '퀴즈 육감대결'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적도 있었다. 거의 어거지로 끼어들다시피 한 명랑 히어로도 2009년 봄개편으로 종영되었다.[25] 그래서 "이제 이경규의 시대는 끝났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7. KBS에 오길 잘했습니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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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경규는 결단을 내려 2009년에 KBS 해피선데이로 넘어와서 남자의 자격이라는 코너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경규는 , 김태원, 유현상 등 타 영역의 연예인들이 예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아저씨 예능으로 트랜드가 뒤바뀔 것임을 예측했고 그걸 실현시킨 것이 남자의 자격이었다.

남자의 자격은 그럭저럭 반응이 좋았다. 이경규는 이 때 오랜만에 입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진행을 하는 등 그 동안의 해왔던 습성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였다. 남자의 자격에서 이경규는 무리해서 마라톤 하프코스를 완주하거나 꼬꼬면이라는 라면 상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2009년 KBS 연예대상에서 이경규가 사회를 맡았는데 이 때 시청률 부진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MBC에게 꽤 서운했던지 이경규는 연예대상 시상식 사회 도중 "KBS에 오기를 잘 했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멘트를 하기도 했다.[26]

이 때를 기점으로 그동안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특별기획으로 추진하던 월드컵 특집도 KBS에서 하기로 하는 등 이경규는 자신의 주 활동 무대를 MBC에서 과감하게 KBS로 옮겼다. 이 시기에 MBC에 출연한 것은 MBC 에브리원에서 이경규의 복불복쇼라는 막장음식 복불복 정도.[27] 실제로 2010년 놀러와 뜨거운 형제들 특집에서 김구라가 밝히길 2009년 초 MBC와 KBS가 딜을 해서 이경규가 KBS로 가고 탁재훈이 MBC로 왔다고 하며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지금 시점에서 보면 MBC가 완전히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봐야죠."

그 결과, 이경규는 2010년 12월 25일, KBS 연예대상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경규에게는 어느 때보다도 값진 대상으로 기억될 듯 하다.

2012년 1월 8일자 남자의 자격 방송분에서 스스로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음을 직접 공개하였다. 당시 기준으로 4개월 전부터 약물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28]. 평소 이경규는 항상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이 연예인에게는 치명적이 될수도 있다는 철학으로 산다고 한다.

2013년 2월 1일부터 2014년 12월 24일까지는 가족의 품격 풀하우스도 이정민을 거쳐 정지원, 그리고 다시 이정민과 함께 진행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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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2015년 7월 24일부터는 파일럿 당시 좋은 반응을 얻어서 정규편성된 나를 돌아봐에도 고정 출연했다. 제작발표회 부터 여러 논란과 다사다난이 많았지만 한때 이경규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었다.

8. SBS 활동, 지상파 3사 트리플 크라운[편집]


이경규의 본격적인 SBS 활동은 김용만과 함께한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이 시초이다. 남자의 자격 등을 하면서 KBS로 등을 돌리는 듯 하였으나 힐링캠프로 다시 SBS에 발을 들였다. 이경규는 당시 유행이었던 힐링컨셉의 휴먼 토크쇼로 건재함을 알렸으며 이후 진행을 맡은 스타주니어쇼 붕어빵도 히트하면서 2012년부터 계속 대상후보와 최우수상 자리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4 SAF 방송연예대상 대상 수상 이로써 방송 3사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게 되었다. 물론 꾸준히 하던 스타주니어쇼 붕어빵 역시 계속해서 방송했고 최우수상, 대상 수상에도 붕어빵이 한 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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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SBS와의 인연은 끊기지 않고 이어져서 2015년에 아빠를 부탁해로 계속 SBS에 출연하였다. 붕어빵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고 파급력 같은 경우에는 2015년 상반기까지는 존재감이 컸다. 물론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둘 다 폐지되어서 문제지만. 2015년 연예대상에서는 대상 후보에는 올랐다. 상반기에만 활동했기에 대상 수상은 물건너갔지만 2016년 하반기에는 다시 활동한다고 했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라고. 런닝맨 패널 순방한 이유도 새 프로그램을 위해 출연한 것이라고 한다.


9. 제 2의 터닝포인트, 2016년[편집]




9.1. 2016년 상반기[편집]


2016년 패널유망주 이경규를 주목하라! - 무한도전 예능총회에서 유재석의 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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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에는 10년 만에 무한도전 예능총회 특집에 출연하면서 오래간만에 MBC에 모습을 비추었다. 호통 개그를 내세워 분위기를 주도하며 죽지 않은 예능감으로 레전드급 에피소드를 하나 더 만들고 갔다.

"오늘 김영철이가 대상을 탄다면 MBC에서 받았던 대상 다 반납하겠습니다."[29]

[30]


"'사실 이런 과도한 칭찬은 멕이는 겁니다.'''[31]


박명수:이경규!!/이경규:''느아아!![* 이경규와 박명수가 대화 도중 주고받은 티키타카. 둘의 이미지가 둘 다 버럭인 이미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재밌는 부분. 박명수는 또한 중간에 라디오를 하러갔다가 복귀 후 이경규가 한마디하자 선배님은 가만히 계세요!''라며 윽박을 질렀다.이때 나온 자막은 이경규는 얼음,박명수에게는 질러놓고 움찔]


밤 11시 이후 쿡방을 다 없애버려야 됩니다!![32]


"신인들이 나오면은 그 가운데에서도 저는 제발 안 떠났으면 좋겠어요!"


"2016년에도 아무튼 2015년이 계속 이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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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에는 딸 이예림과 함께 예림이네 만물트럭을 출연하기 시작했다. 한편 멤버인 유재환은 계속 구박받는다. 그 이후 이윤석, 박명수등 여럿 게스트들도 출연하고,서로 으르렁대면서 물건 잘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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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에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세계 최초로 눕방을 시전했다. 그런데 의외로 시청자들의 반응은 좋았다.[33] 진솔하게 다가갔던 게 주효했던 듯. 이후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바람. 그 이후,낚방('낚시 방송'), 말방('승마 방송'), 꽃방('꽃 방송'), 절방('절권도 방송'), 골방('골프 방송'), 악극 방송까지 시전, 엎방('엎드려 하는 방송')까지 섭렵했다.[34] 5승을 달성하였다. 특히 낚방에서는 '찬물 입수'까지 보여주며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5]

2016년 6월에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직접 밝혔는데 너무 힘들어서 당시 기준으로 마리텔을 쉬고 있다고 한다. 3개월간 쉬고 가을에 컴백하여 연말까지 할 계획이라 밝혔다. 2019년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저 시기에 방송을 쉬고 윤형빈의 홍대 소극장꽁트 여름특집 '응답하라 이경규'의 연습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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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김구라의 후임 MC로 김성주와 함께 투입되었다. 첫 등장부터 액션 영화 덕후로 '갓경규' 소리를 들었으며,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투닥되며 진행되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경규의 호통과 데프콘의 애드리브로 왁자지껄하게 진행되고 있다.

2016년 4월에 KBS의 고정프로였던 나를 돌아봐가 종영하였다.

예림이네 만물트럭가 시청자들의 요구로 원래 8부작 기획이었던 프로그램을 12부작 연장편성 요구를 하여 반 레귤러 프로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6월 22일을 끝으로 종영되었다. 이로써 현재 이경규가 고정으로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능력자들 하나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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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스타에 '킹경규와 네 제자들' 특집으로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윤석, 윤형빈, 유재환, 한철우와 같이 출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6월 22일에 촬영하고 6월 29일에 방송되었다. 이경규를 비롯한 네 제자들이 다양한 에피소드와 화려한 애드리브로 재밌는 회차를 만들고 갔다. 여담으로 명랑 히어로 출신이 4명이나 있다.(윤종신, 김국진, 김구라, 이경규) 또한 같이 나오는 게스트까지 합치면 남자의 자격 출신도 4명이나 된다.(이경규, 김국진, 이윤석, 윤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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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월 25일 SNL 코리아 2016년 상반기 마지막화에 호스트로 출연하였다. 거의 22년만에 콩트로, 크루들과 호흡이 꽤나 잘 맞았다. 시작할 때에는 다른 호스트들과는 다르게 4마리의 애완견을 데리고 나와 개인기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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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6일 런닝맨에 출연하여 예능 어벤져스 팀의 수장으로 활약하였다. 역시 시청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죽지 않은 예능감을 보여주면서 몸개그 + 적절한 호통 + 우수한 플레이로 많은 활약을 하였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아쉽게 대진표가 잘 못 짜이는 바람에 패배하였다. 후에 라디오 스타에서 직접 밝혔는데 차기에 SBS 프로그램을 할 거라서 출연한 것이라고 한다.

정리를 하자면 2016년 상반기 '패널 이경규'가 돈 프로그램은 2016년 1월 무한도전 예능총회 - 2016년 3월 마리텔 - 2016년 6월 25일 SNL 코리아 - 2016년 6월 26일 런닝맨 - 2016년 6월 29일, 7월 6일 - 라디오 스타

한국기업평판연구소가 2016년 6월 1일부터 7월 2일까지의 예능 브랜드평판 빅데이터를 조사한 결과 이경규유재석을 누르고 1위에 등극하였다.

9.2. 2016년 하반기[편집]


2016년 8월, 매년 열리는 부산 국제 코미디 페스티벌에 김용만과 함께 MC를 본다고 한다. 올해 김준호와 함께 각본을 맡은 송은이와 집행위원장 김준호가 라디오에서 밝히기를, 예능계의 현역 최고참 이경규가 출연한다는 것으로도 큰 의의가 있고, MC까지 맡아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덕분에 대중들도 관심도 높아졌다.

여러 프로그램들의 폐지와 패널 순방이 일시적으로 종료되면서, 또 다시 암흑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잠깐 있었으나 하반기가 되면서 패널이 아닌 MC로의 부활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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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every1에서 신작으로 PD 이경규가 간다가 기획되었다. 9월 7일 오후 8시 30분에 첫 방송을 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 지난 MBC 라디오 스타에서 이경규가 살짝 귀띔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자신이 직접 기획, 연출, 출연 1인 3역을 한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예능인으로써 뿐만 아니라 연출자로서 섭외, 방송, 콘티, 제작비 등 주어진 환경에서 고뇌하고, 방송인으로서 그동안 펼쳐 보이고 싶었던 다양하고 새로운 포멧의 프로그램 제작에 돌입할 예정이다. 자세한 것은 위의 항목참조

2016년 9월 6일에 런닝맨성훈과 함께 출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9월 6일에 촬영을 진행하고, 정확한 방영 날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일명 '부코페'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에서 후술되어있는데로 이경규쇼를 열었는데, 국내 공연들 중 가장 사랑받은 공연 팀에게 주는 '부산 바다상'을 수상하였다.

능력자들이 2016년 9월 8일부로 종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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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서술되어있는 런닝맨 방영 날짜는 바로 9월 18일로 공개되었다. 이경규는 런닝맨 멤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예능 어벤져스 2탄을 준비했다고 공개되었다. 일명 이경규의 복수혈전(한국 영화) - 예능 어벤져스 특집 2탄 어벤져스 특급용병으로 힐링캠프의 전 MC 한혜진이 출연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판타스틱4 라는 칭호로 특급 게스트 4명도 같이 출연한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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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하반기에 JTBC 새 프로그램으로 한끼줍쇼를 기획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끼줍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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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경규를 종편에 발들이게 한 PD 이경규가 간다가 <답답하네> 뮤비를 끝으로 종영되었다. 이경규는 3개월동안 PD 생활 하면서 많이 배웠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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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6년 11월 20일 부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복귀한다. 이는 한끼줍쇼에서 살짝 귀띔이 되었다.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이경규의 복귀에 당연히 1위를 할 것이라고 예상을 하였지만 이천수가 이경규를 꺾고 1위에 올랐으며 이경규는 2위에 그치고 말았다. 일단 현재는 이경규의 재탕과 휴머니즘 방송이 한계라는 평이 많으며 후반전에 반전이 있을지 추측이 난무하다.

지난 MLT-23 이경규의 〈안녕 경규♡〉의 재탕 느낌이다. 게다가 MLT-23 때는 오프닝에 직접 참여했지만, 이번엔 위 사진과 같이 영상으로 참여했다.
[전반전 미공개] 이경규, 개그 대부의 반려견 힐링 방송


9.2.1. 연예대상 시상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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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KBS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없음과 동시에 대상 후보가 아님에도 시상을 하러 친히 나와, 박명수와 함께 개그로는 대박, 방송사고 직전까지 갈만한 호통 개그로 박수를 받았다. 그 짧은 시상 멘트에 버럭&시상식 개그를 꾹꾹 눌러담아, 기센 예능인들 중에는 제일 잘 맞는 박명수와의 케미까지 터트리며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다.

또한 2016년 SAF (SBS) 연예대상 시상식에 강호동, 이시영 등과 함께 MC로 활약하였다. 시상식이 개최 될 때의 의뢰인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예능 대부님으로 등장하여 시작부터 큰 웃음을 주었고 시상&수상자의 멘트가 길 경우 쓰러지겠다, 이제 시작하는 거냐?라는 식의 멘트로 중간중간 큰 웃음을 자아내었다. 그리고 수상자의 멘트가 길 경우에 MC들에게 바람을 맞는 벌칙을 시행했는데, 2부가 끝날 때 즈음에는 뒷 머리가 다 헝클어져 있었다.

또한 12월 29일날에 MBC에서는 10년 만에 돌아와 이 해 별세하신 대선배님 구봉서에게 공로상을 시상하였다.

9.2.2. 코미디 콘서트[편집]


2016년 7월, 홍대 코미디 위크에서 20년만에 콘서트를 하였다. 일명 '예능계 대부의 신토크개그쇼!' 장소는 윤형빈 소극장. (부제: 응답하라 이경규!) 또한 윤형빈과 이윤석도 조연진으로 나온다고 한다.

1. 복수혈전 <절권도>: 관객참여를 통해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코너!
2. 별들에게 물어봐: 1994년의 '명불허전 코믹콩트', 더 강해져서 돌아오다!
3. 19금 경규 TALK: 이경규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노편집 '사이다 토크'!
4. 퍼포먼스: 노래와 춤 등 보기 힘들었던 퍼포먼스 총 출동!

1시간 만에 표가 매진되었다고 하니 역시 이경규의 힘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개그 각본가의 전설 개그맨 전유성이 7월 2일에 첫 콘서트에 등장하였다. 쇼에 나온 것은 아니고 관객석에 앉아서 구경만 하였고, 쇼가 끝날 때 즈음에 이경규의 소개로 관객들 전부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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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코미디패스티벌에서도 홍대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이경규 콘서트를 선보인다. 윤형빈이 이에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대중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라디오 스타에 나와서 본인이 밝히기를 콘서트에 도용되었던 컨텐츠를 마리텔 소재로 삼을 계획이라고 한다. 이경규 콘서트에 도용된 내용들이 3시간 장편으로 끌고가기에 충분하고, 그만큼 하나하나 열정을 담았다는 소리다.

그리고 pd 이경규가 간다 등으로 프로그램이 많아져 마리텔에 잠시 하차했었는데, 복귀하여 콘서트는 물론이요 본인의 개그를 총망라하는 예능의 밤 콘텐츠를 시행했다.


10. 2017년 이후[편집]


이경규는 2017년에 새로운 포멧의 착한 예능, 내 집이 나타났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약 40억원의 제작비와 8개월간의 대장정 끝에 제작 하였다고 한다. 국내 최고의 건축가들이 설계와 시공을 도맡고 게스트들이 스타의 한 평을 내준다고 한다. 방송사는 JTBC이다.

그리고 2016년 이경규가 무한도전에 다시 출연했다. 이는 정준하 대상 프로젝트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으며 기대한 바와 같이 해당 에피소드에서 에이스급으로 큰 웃음과 많은 분량을 선사했다.

그리고 작년 여름부터 꾸준히 떡밥을 던져왔던 SBS 새 프로그램 런칭이 드디어 공개되었는데 희극지왕이라는 코미디 경연 쇼이다. 이경규는 참가 코미디언이 아닌 MC로 출연하게 되었다.

9월 7일 채널A에 처음으로 넘어와 새롭게 런칭하는 프로그램인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의 MC로 발탁이 되었다. 이덕화와 같이 합을 맞추는데, 이것마저 성공시켰다. 3~4%대의 준수한 시청률을 보여주는데, 김구라가 진행하는 썰전과 유재석이 진행하는 해피투게더 3를 이기며 가망이 없던 채널A의 예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본래 이경규는 촬영 시간이 오래 걸리는 프로그램을 꺼리는 편인데, 이 프로그램은 예외로 오히려 이경규 본인이 더 시간을 들여서 촬영에 임하고 있다.

2019년 들어서는 KBS의 신흥 강자 프로그램 신상출시 편스토랑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으며, 강형욱과의 공동 진행 프로그램 개는 훌륭하다를 런칭시켜 다시한 번 호평을 받고 있다. 이전에 진행해오던 도시어부한끼줍쇼를 안정적으로 진행함과 동시에 메이저 포멧 2가지를 추가해나가면서,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뒤쳐지지 않고 후배들과 맞먹는 방송활동을 펼쳐나가며 그 저력을 입증했다. 이후 연말에는 KBS 연예대상에서 3년만에 최고령으로 대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꾸준한 이경규의 모습에 신세대들이 축을 이루고 있는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2020년에도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는데 카카오 tv의 오리지널 예능 프로그램 찐경규가 그것이다. 어느덧 60대에 접어든 노장 이경규를 재해석하는 데에 성공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경규의 생명력이 남아있음을 보여줬다. 또한 작년의 기록을 깨고 KBS 연예대상에서 다시금 최고령 코미디언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한편 KBS 연예대상에 대한 뒷이야기가 있다. 시상식 전 이경규에게 KBS 사장과 PD가 찾아와서 미리 축하드린다고 말하자 내심 대상을 기대했는데, 기대를 깨고 김숙이 받았다. 그리고 시상식 후 이윤석이 울면서 이경규에게 전화를 하는데 "형님께서 대상을 받으셔야 하는데 형님이 앞으로 얼마나 사신다고......"라고 말해서 그냥 끊었다고 한다.# 물론 예능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각색이 좀 있을 순 있겠지만 이경규 본인도 내심 대상을 많이 기대했다고 한다.

2021년에는 SBS에서 새로운 골프 예능 편먹고 072를 런칭하여 성공시켰다. 이승기, 박현주, 이승엽 등과 함께하며 시즌 2까지 편성되었다. 2021년 SBS 연예대상에서 대상 후보에 올랐으며 이승기, 박선영과 함께 올해의 예능인상을 받았다.

2022년 MBC 연예대상에서는 공로상을 받았다. 수상 소감에서 이경규는 '나는 정동 MBC 출신이다. 정동에서 여의도에서 일산 갔다가 상암으로 왔다. 공로상을 안 받을 수 없다. 이 시간까지 있다는 것 만으로도 받아야 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거 정신 나간 놈입니다. 박수칠 때 왜 떠납니까. 한 사람이라도 박수를 안 칠 때까지 활동하겠다.'라는 지극히 이경규다운 소감을 말해서 웃음을 샀다.
[1] 아버지의 이름은 이찬이(李贊伊)씨로 최종계급 육군하사로 전역했으며 2014년 11월 3일 작고.[2] 2021년 5월초 모친상을 당했음을 26일 카카오TV 예능 찐경규에서 밝혔다. #, #, #.[3] 아빠를 부탁해 2015년 5월 17일 방송분에서 언급했다. 진해 주둔 부대에서 소세지, 샌드위치 등 서양 먹거리를 가져다 먹었다고 한다. 입버릇처럼 자신이 1967년 대한민국 최초로 샌드위치를 먹은 어린이였다고 너스레를 떤다.(사실 저 방송보다 먼저 힐링캠프에서도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샌드위치는 이미 한국전쟁 때 UN군들이 만들어 먹은 적이 있기에 이경규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에게 얻어먹은 한국인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1940년대 2차대전때부터 미군 내에서 식빵과 땅콩버터가 공식 보급되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전 미군 군정기에 얻어먹은 한국인이 존재할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4] 본관(本貫)은 전주 45대 규(揆)자 항렬에 효령대군의 22세 손이다.[5] 최양락, 엄용수, 이상운, 김보화 등이 MBC 공채1기 동기다.[6] 최양락이 1등, 엄용수가 2등으로 데뷔했다.[7] 물론 이는 이경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대 대다수의 개그맨들이 신인 시절 겪던 일이었다. 이경규보다 더 빨리 잘 나갔던 주병진조차도 신인 시절 일이 너무 없어 차비조차 없다보니 단둘이 살던 어머니에게 방송국 갈 버스비만 달라고 청한 적이 있고 그 돈이 없어서 다리 건너 방송국까지 걸어다닌 적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8] 청춘만만세는 원래 청춘만세라는 개그프로를 시작으로 발전한, 나중에는 청춘행진곡으로 개편된 프로그램으로 서세원의 <산넘고 물건너 송>, 김정렬의 〈숭구리당당〉 등을 히트시킨 1980년대 초중반 MBC의 대표 주중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9] 이 당시 같은 코너에 출연한 개그맨으로 조정현. 김보화 등이 있다. 이 컨셉은 일요일밤에 대행진에서도 그대로 이어갔는데 주 출연진이 이경규, 김창준, 김보화, 김정렬, 조정현이었다.[10] 하벤의 광고는 이경규가 몰래카메라로 인기를 얻으면서 이 시기에 찍어 뒀던 광고를 약 5년 만에 리바이벌하기도 했다.[11] 일밤 방송내에서는 이경규가 주병진에게 반말을 하면서 화도 내고 주병진 앞에서 까불거리는 이미지를 선보였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이경규는 선배인 주병진에게 감히 편하게 말을 걸지도 못하며 쩔쩔맸다고 한다. 심지어 방송 녹화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할 때도 주병진을 무서워했다고 한다.[12] 주병진은 '개그계의 신사'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후배 개그맨들 사이에서 무서운 선배로 유명했다. 당시 방송국 희극인실이 개그맨들의 수다로 시끄러울 때도, 주병진이 잠깐 나타나 "조용히 안해!"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가면 몇 시간이 조용했다고. 주병진의 친구이자 동시대 레전드 가수 이문세도 "사석에서 병진이가 후배들을 혼낼 때는 친구인 나도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주병진은 고등학교 때 수영부를 했었고, 아마추어 수영선수였기도 했을만큼 운동을 잘 했던 개그맨이다. [13] 복수혈전 시절의 이경규이자 영화배우 시절 이경규. 이경규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때 핏줄이 더 두드러지게 보이려고 소매 안에 고무줄로 팔을 꽉 묶었다고 한다.[14] 이 때 모든 관중이 환호성을 질렀다.[15] 다만 이경규의 스크린 데뷔작은 의외로 복수혈전이 아니다. 복수혈전보다 1년 이른 1991년 개봉한 특촬물 우주전사 불의 사나이 였다.[16] '대단한 도전' 야구 편에서 서재응이 얘기하길, 지방에서는 인기가 있었고 서재응 자신도 즐겨 봤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17] 약속된 일정에 문제생겨 하루만 바뀌어도 다시 송해선생을 찾으러 다녀야 했다.[18] 여기서 이예림은 "제빵은 아빠가 남격때 실패한거니까 아빠가 도전하시고 나는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딸 거야"라고 맞받아친다.[19] 사실 이 코너는 일본 TBS 테레비의 '전파소년'을 베낀 것이었다. 꼭 시청률 경쟁 문제뿐만은 아니라는 얘기.[20] 신호위반 같은 건 고발 형식이면 모를까 예능방송을 채울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다. 정지선 지키기는 잘한 사람에게 칭찬과 상을 주고 인터뷰로 끌어내기 좋다.[21] 국내 스페인어 및 스페인문학의 권위자로 현재 스페인 한림원의 종신위원이시기도 하다. '이경규가 간다' 이후 '도전 지구탐험대'에도 출연한 바 있다.[22] 우리나라에서도 타기는 했다. 서울랜드롯데월드 어드벤처 그리고 지금은 폐장된 부산 미월드에서 했다.[23] 참고로 2006년 무한도전에 출연한 것도 같은 프로그램인 강력추천 토요일의 이미지 서바이벌이라는 코너를 진행한 것과 연관이 있다.[24] 마지막회마저도 처참했는데 절친노트에서 밝히기를 간다투어 마지막회 때 카메오로 출연하기로 했던 연예인이 펑크를 내서 녹화 8시간 전에 개그맨 김현철을 섭외했는데 김현철은 예전에 이경규가 자신을 푸대접을 한 것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상태였고 간다투어의 마지막회를 장식하기 위한 카메오로 출연하는 내용이 적혀진 대본을 본 후 엑스트라 수준이라는 것에 화가 나서 방송을 펑크 냈다.[25] 여기에서 촛불시위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보인 것이 당시 MBC 고위 간부들 및 노조 집행부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설이 있다.[26] 물론 이 앞에 "이렇게 아름다운 아나운서 분들과 같이 사회를 하게 돼서"라는 멘트가 붙긴 했지만 이경규가 아나운서들하고 사회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 왜 굳이, 게다가 저 KBS에 오기를 잘 했다는 대목에 힘을 주어서 저 발언을 했는지는 다들 짐작이 갈 것이다.[27] 나중엔 시즌2로 제작사가 바뀌어 남희석이 메인MC로 진행하였으며 현재는 종영됐다.[28] 원래도 초등학생 때 숨박꼭질을 하다가 창고에 갇혔던 기억 때문에 폐소공포증이 있었는데, 이것이 적절히 치유되지 않아 공황장애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2009년의 남자의 자격 전투기 탑승편에서도 잘 드러났으며, 당시 '공황장애'라는 병명에도 관심을 보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공황장애 증상이 발현된지는 꽤 오래되었고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볼 수 있다.[29] 그 전에 참가자 명패를 보며 김영철의 이름을 보고는 ''오늘 김영철이 나오네? 안해 안해 안해'' 라며 버럭한것은 덤이다.[30] 또한 토크 도중 김영철이 끼어들자 어른이 얘기하잖아!라며 버럭했고 이때 김영철은 “저도 어른이에요”라고 했으며 이어서 김영철이 “뭘 껄어” 라는 말을 꺼내자, 시간을 임마!!라며 김영철만 까는 모습을 보여 웃음을 줬다. 이에 김영철이 “라면물 껄어”라는 썩은 드립을 날리자 아이 저 잔바리(잔챙이).라고 화내는 박명수의 모습도 덤.[31] 첫 등장후 멤버들이 이경규에 대해 추켜세우며 칭찬하자 한 말.[32] 하하가 "치킨 광고모델하고 계시잖아요"라고 반문하자 하는 대답이 심히 걸작이다.그건 내가하는 장사고 임마!!(...)[33] 바로 위의 예능총회에서 자신이 언급했던 타입의 방송이었다. 당시 이경규는 노르웨이에서 방영되는 방치형 예능 프로그램을 예로 들어 새로운 예능 장르의 출연을 예견했다. [34] 다만 중간에 양정원에게 패해서 4연승이 무산된게 충격이 컸는지 이후 두고두고 언급된다.[35] 이경규가 날방 컨셉을 잡고 있어서 이를 그냥 지나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시청자들도 많지만, 사실 이경규는 혈관 관련 질환으로 인해 심장 스텐드 시술을 한 적이 있다. 즉 이경규 입장에선 절대 피해야 하는 게 찬물입수 등의 노출이며, 이를테면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방송한 셈이었다.[36] 윤형빈소극장은 평소에는 '관객과의 전쟁'이라는 레퍼토리가 상연되는데 2016년 여름 한정 '응답하라 이경규'를 상연했다. 이후 반응이 좋아 한 달쯤 더 앵콜상연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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