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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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제2대 총수
이건희
李健熙 | Lee Kun-hee


파일:삼성이건희회장.jpg

출생
1942년 1월 9일
경상북도 대구부 수정
(現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1][2]
사망
2020년 10월 25일 (향년 78세)[3]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파일:경주 이씨 종문.svg 경주 이씨 (慶州 李氏)[4]
직업
기업인
학력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상학 / 중퇴)
와세다대학 상학부 (상학 / 학사)
조지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수료)
부모
아버지 이병철, 어머니 박두을
빙부모
장인어른 홍진기
형제자매
누나 이인희, 이숙희, 이순희
이맹희, 이창희
여동생 이명희
이복누나 이덕희
이복남동생 이태휘
이복여동생 이혜자
배우자
홍라희
자녀
장남 이재용
장녀 이부진
차녀 이서현
삼녀 이윤형
친손
이지호(2000년 12월14일생)[5]
이원주(2004년 3월 27일생)[6]
외손
임동현(2007년생)[7]
김지이(2001년생)[8]
김지수(2003년생)[9]
김지후(2006년생)[10]
김성준(2007년생)[11]
서명
파일:이건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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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66 ~ 1979)
중앙일보·동양방송 부회장 (1979 ~ 1980)
삼성그룹 부회장 (1979)
중앙일보 이사 (1980)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 (1982 ~ 1997)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1982 ~ 1996)[명예회장]
삼성그룹 회장 (1987 ~ 2008)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1996 ~ 2017)[명예위원]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 고문 (2011 ~ 2018)
삼성전자 회장 (2010 ~ 2020)
수상
대통령 표창 (1974)
체육포장 (1982)
체육훈장 맹호장 (1984)
체육훈장 청룡장 (1986)
대통령 표창 (1990)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훈장 (1991)
한국경영학회 제정 경영자 대상 (1993)
문화부장관 감사패 (1993)
한국무역학회 무역인 대상 (1994)
KMA 한국능률협회 최고의 경영자상 (1996)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감사패 (2002)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04)
홍콩 디자인센터 홍콩 산업기술통상부 디자인경영자상 (2004)
밴플리트 상 (2006)
신체
164cm[1], 90kg, AB형
병역
불명[2]
종교
원불교[3], 불교


1. 개요
2. 생애
2.1. 학창 시절
2.2. 삼성의 회장이 되기까지
2.3. 회장으로의 활동
2.4. 입원
2.5. 사망
3. 경력 및 약력
5. 어록
6. 별명
6.1. 쁘띠거니
6.2. 개건희
7. 비판 및 논란
7.1. 무노조 경영
7.2. 삼성 반도체 노동자 사망사건
7.3. 비리와 재판, 그리고 사면
7.4. 성매매 논란
7.5. 그 외 비판
8. 여담
9.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다큐 인사이트 - “이건희, 거인의 유산”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성전자 회장 겸 삼성그룹 총수였다. 생전에 대한민국 최고 갑부였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세계 부자 순위 66위였다. 사망 직전 보유 재산은 약 23조 7,100억원(198억 달러)이다.[12]


2. 생애[편집]



파일:이건희 생애.jpg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의 셋째 아들로, CJ그룹의 첫째 형 이맹희, 새한그룹의 둘째 형 이창희를 제치고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았으며 아버지 이병철이 사망한 1987년에 그룹 회장이 되었다. 1993년 6월 '신경영'을 주창하며 이후 자신의 모토로 삼아왔으며, 그가 삼성을 이끌던 바로 이 시기에 삼성전자는 구미일본 유수의 굴지의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올라섰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과 함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양대 주역이며, 삼성그룹의 제2의 창업주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1987년 취임당시 삼성그룹의 연매출은 10조원이 안 됐지만 그가 취임하고 30년간 경영하면서 삼성그룹의 연매출은 약 400조원으로 무려 40배 가까이 늘어났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미친 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확실성이 큰 사업 분야이다. 그런 분야에서 미국,일본에서는 중소 제조업체 취급 당하던 삼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니 경영 실적만 두고 보면 중앙집권적 오너 경영의 이상적인 사례였다고 볼만하다. 최근에는 LG가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의도치 않게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2008년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의 양심고백으로 드러난 비자금과 세금포탈 사건으로 인해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2010년에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다. 2014년 5월에는 급성 심근경색이 와서 이후로는 사실상 코마상태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로 직함만 유지했으며, 그의 장남 이재용이 이건희를 대신하여 사실상 삼성 총수 역할을 수행했다. 6년 5개월의 투병 끝에 2020년 10월 25일 결국 사망했다. 삼성전자 회장 자리는 그가 사망한 후 2년간 공석이였다가 이재용이 2022년 10월 27일에 승진하면서 정식으로 회장 직위를 승계하였다.

2.1. 학창 시절[편집]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이병철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의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고, 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이때도 형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 이건희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13] 이러한 환경 때문이었는지 이건희의 성격 또한 내성적이 되어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 지낼 때 괄괄했던 대학생 형들이 아버지의 일본인 부인과 육탄전으로 싸울 때, 초등학생이었던 이건희는 아직 어려 그 싸움을 피했다고 한다. 이 싸움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는데 이병철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끔 일본인 작은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던 이맹희에게 죽일 기세로 골프채를 휘둘렀으며, 이후 영영 부자 사이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6.25 전쟁 시기인 고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와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4, 5학년을 같이 다닌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증언에 의하면 부자집 도련님이라 신기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와 같이 놀긴 했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던 아이라 그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딱히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고교시절에는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는데, 당시 이건희의 동창인 홍사덕[14] 2001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는 둥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둥 195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매우 독특한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심지어 1965년,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가 개통되었을 때 다들 이거 어떠냐고 할 때 친구들에게 "제2한강교는 통일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할 다리인데 다리 경간을 좀 더 넓혀도 되었을 것이다."는 말까지 했었다고 한다.[15]

이때도 이건희는 딱히 말이 없고 행동도 느릿느릿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학과 공부에도 별 뜻이 없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사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 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는 황당한 답을 했다고 한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이후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고교생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이 두말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병철은 스스로의 인사관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고등학생 이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더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또 이 시절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있던 시절이라 홍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라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도 활동했다고 하며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지 성적은 중간도 못했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경영학과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해 졸업했다.


파일:이건희 회장 젊은시절.jpg

이건희 회장 1987년 모습

이 시절 군복무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린다. 일전에 강용석은 이건희가 정신질환으로 면제받았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 근거로 든 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한 이야기임이 드러났고, 한겨레신문의 취재에서는 만기 전역은 아니지만 복무를 하긴 했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었다. 이래저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군 복무를 회피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비판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한데,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런 부분이 거의 공개되지 않은 것이 커 보인다. 일단 삼성 측의 공식적인 발표는 "이건희 회장님께서는 육군 현역병 출신으로 병장 만기전역을 하신 분이십니다"이다.

다만, 이건희가 현역병 출신이 아니라 방위병 출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건희가 방위병 전역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보통 라이벌 대기업인 현대그룹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실 지금도 '삼성가 남자라면 인생 낭비가 되는 군 복무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드는 게 낫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긴 하다.

젊을 때는 술도 안 했다고 한다. 권근술 전 사장 말에 의하면 나이가 들어서는 하긴 하지만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와인은 좋아한다는데 정작 와인 얘기를 하자 무관심했다는 소리도 있다.

자동차 매니아인 그는 유학생 시절 중고차를 사서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 4,200달러에 중고차를 사서 3~4달쯤 타고 다니며 분해해 본 뒤 수리해서 판매한 결과 700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유학시절 동안 중고차 6대를 수리해서 팔았다.

2.2. 삼성의 회장이 되기까지[편집]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66년 10월 중앙일보·동양방송에 입사한 뒤[16]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되었다.

이병철의 장남도 아니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삼성을 물려받은 것이 전통적인 재벌 구조에서는 조금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1969년 말 이건희의 형들인 이맹희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했던 사건, 일명 왕자의 난을 터뜨리는 바람에 후계구도에서 쫓겨난 탓이 크다. 똑같이 왕자의 난이 일어났던 현대에서는 정주영의 사망 직전(2000년), 즉 정주영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황에서 왕자의 난이 벌어지는 바람에 아들들이 자신의 지분을 갈라 먹는 것에 성공해서 현대그룹이 분열된 것이지만, 삼성가에서의 왕자의 난은 이병철이 반란을 진압할 힘과 권위가 있었을 때[17] 벌어졌고, 그 결과 이맹희와 이창희가 완전히 진압당해 내쳐졌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마지막엔 배다른 형제 이태휘와도 경쟁하기도 했다.[18] 물론 후술하겠지만 이건희 본인이 나름 능력을 보여준 덕도 있다.

사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건희는 형이 두 명이나 있어서 삼성의 회장이 되리라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맹희의 무능과 이창희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건희에게 기회가 왔고, 이건희는 두 형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인 이병철의 마음에 들 정도의 업무성과를 내면서 후계자로 굳어졌다. 특히 동양방송(TBC)이 전두환에 의해 KBS에 강제 통폐합되기 전까지는 드라마 부문을 직접 챙겨서 키웠을 정도로[19] 의욕적이었고, 성과도 꽤 좋았다.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개인 사재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적자 상태였으며 초라하게 삼성전자에 흡수되었다. 이병철은 NEC에게 삼성 반도체에 대한 개선을 자문하나 거절 당하였고, 기술협력 요청마저 NEC가 거절하자 대체 반도체가 뭐길래 NEC가 이렇게 나오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도쿄선언으로 반도체 투자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이건희에게 자연히 힘이 쏠리게 된다. 또한 삼성전자 내부의 반도체 반대론자들도 이병철에 의해 모두 정리되었다. 이병철 생전에는 삼성전자는 반도체 투자와 일본이 벌인 치킨게임으로 흔들렸지만,[20] 이병철이 사망할 즈음인 1987년 말부터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고, 1988년 반도체 사업부가 3200억 흑자를 내면서 내외부에선 도박으로만 보였던 이병철-이건희 두 부자의 반도체에 대한 집착은 놀라운 혜안으로 드러났다.

이건희는 두 명의 스승으로 아버지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를 꼽았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한편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이건희는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 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 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이 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고 한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2.3. 회장으로의 활동[편집]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회장 취임사 中


회장이 된 뒤 이듬해이자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이 되는 1988년에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고, 인간중심·기술중시·자율경영·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고문인 후쿠다에게서 받은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1993년 6월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혁신을 시작하였다.[21] 현재의 삼성 로고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안일한 직원들을 꾸짖기 위해 불량 핸드폰 15만 대를 구미공장에서 불태워 버린 애니콜 화형식은 전설로 전해질 정도. # 이기태 사장이라는 최고의 실무진이 애니콜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낸 것은 그의 역량과 이건희라는 비전가의 결단, 추진력이 어우러진 결과였으며 한 마디로 (긍정적인 의미의) 그 회장의 그 사장이었다.

그는 이러한 '신경영'을 통해 임원진들과 반대까지 물리치며[22] 극단적인 질적 개혁을 골자로 한 획기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해 나갔고 이 승부수는 통해 결국 삼성전자를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후쿠다 고문에게는 매우 두둑히 챙겨줬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들을 다 제치게 도와줬다면서 욕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질적 개혁이 뭐 그리 대단한 비전에 의한 것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 한국 대기업들 중에서는 이 정도의 경각심을 가진 곳이 거의 없었고, 당장 내수 매출이 잘 나오고 하니 해외 일류 기업들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더라도 괜찮다는 인식이 팽배했다.[23] 결국 LG전자는 이 때 삼성처럼 하지 못해 결국 스마트폰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 라이징'의 저자인 기자 제프리 케인도 삼성이 오너 세습 경영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전 오너의 신화를 흐릴 필요는 없다며 '이건희 회장은 냉전 이후의 시장 변화에 대해 미리 내다본 몇 안 되는 경영자였으며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글로벌 삼성은 없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디자인 혁명 역시 질적 혁신과 함께 글로벌 삼성을 만든 두 축 중 하나이다. 그는 '미래에는 핸드폰들 성능이 다 비슷비슷하게 좋아질 것이다'는 주장을 하며 그 때 가서 승패를 가릴 요소는 디자인이라 단정, 1990년대에는 삼성의 '디자인 혁신'을 지휘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선언한, 이른바 '밀라노 혁명'인데, 이건희는 여기서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다, 고객들이 제품에 마음을 뺏기는데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그 짧은 순간을 사로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

그룹 회의에서 심심하면 위기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매출이 100조를 넘어도 시장 흐름이 바뀔지 모르니 걱정, 매출이 줄면 줄었다고 걱정했다고 하며 이렇게 항상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게 여러 CEO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삼성의 성장 비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텔의 前 CEO도 일본 업체에게 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추월당한 다음엔 맨날 위기론에 빠져 있었다고. 다만 항상 그러는 건 아니라 2010년대 초반쯤엔 중국이 우릴 쫓아오려면 아직 멀었고, 일본은 힘이 빠졌다는 뉘앙스로 낙관론을 내놓기도 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이 '위기 위기 위기'를 반복하는 것에 대한 재미있는 회고가 있다. 삼성사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선언, 애니콜 화형식으로 신삼성이 시작된 것으로 이야기하나, 당시 일본인 상무였던 요시카와 료조의 눈에는 이건희가 아무리 위기를 부르짖고 품질경영을 강조해도 임직원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잘 나가는데 도련님이 귀찮게 하네 수준의 반응이었다고. 그러나 IMF 외환위기와 함께 삼성에게 정말 위기가 다가오자 이건희의 위기 강조는 일종의 예언적 통찰력으로 받아들여졌고 삼성에서 비로소 그가 강조한 질적 혁신이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답게 경영 방식 또한 철두철미하고 세세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삼성그룹 법무팀에서 일했던 김용철이 쓴 책인 <삼성을 생각한다>에 나오는 지시사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와 관련된 수많은 저서 중에는 제3자인 작가가 쓴 평전인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이미지와 다른 그의 삶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흥미 위주라면 깊이는 없지만 이지성 작가의 '스물일곱 이건희처럼'도 킬링타임용으로는 괜찮다. 학술적으로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저술한 '이건희 경영학 | 삼성웨이'가 가장 깊이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만, 관리의 삼성이라는 면에서 '자율경영'이 안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신경영만 봐도 당시 선언의 상징적 조치로 받아들여진 7-4제(7시 출근, 4시 퇴근)는 1990년대 후반에 벌써 사라졌다. 또 신경영 당시 이건희는 직원들에게 "회장이 잘못하거나 틀렸으면 '그게 아니라 이겁니다'라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다. 사장, 비서실장이 회장한테 지적을 안 하는데 어떻게 과장, 부장이 이사, 상무한테 지적하느냐. 이것부터 고쳐라"고 강도 높게 주문했지만, 이 역시 사라졌다.

선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이긴 하지만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무노조 원칙을 고수했던 것도 주요 비판거리다. 다만 2010년대 이후부턴 원체 기업 규모가 커져서 그런지 노조가 사실상 허용됐다는 말도 있다. 이는 삼성 본사에서 설립된 노조가 아니라 삼성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합병당하는 회사에 있던 노조가 존속한 것이다.

2.4. 입원[편집]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는데, 심장이 멎는 급박한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로 심장기능이 돌아온 후 삼성그룹 산하인 삼성서울병원에 이송됐다. 스텐트 시술을 받고 나서 VIP 병실에 입원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계속 입원해있었다. 덕분에 주기적으로 그의 사망설이 돌았다. 참고로 삼성병원 x층에 이건희 전용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층이 있다고 한다.

투병생활 1년차 조금 넘어서서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파동이 일어났고 3차 감염자 태풍의 눈으로 삼성서울병원이 주목받는 와중에도 계속 자리를 지켰다. 병원 측에서도 이건희의 병실 이동 계획은 없고 입원 수술 상황 역시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건희가 입원한 이후부터 삼성 경영권은 이미 이재용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 2015년 5월에는 삼성문화재단,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직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24]

관련 기사. 반 식물인간 상태에서 눈을 뜨고 감는 등의 반사적인 행동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활치료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구단에서 뛰고 있는 야구 선수 이승엽홈런 소식에 눈을 번쩍 뜨기도 했다고 한다.

2016년 6월 30일경 이건희가 사망했고 오후 3시에 발표한다는 루머가 돌아 삼성 주가가 폭등하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했으나 삼성은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이 사망설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일베저장소가 압수수색을 당했다는 보도가 났었지만 후에 오보로 밝혀졌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는 관세음보살상 중앙에 이건희 앞으로 건강 발원을 빌며 가장 큰 초가 하나 공양이 되어 있는데, 아마도 아들 이재용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8월 1일, 한겨레는 그룹 사정을 잘 아는 핵심 관계자가 “이건희 회장의 건강 상태가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양호하다. 건강한 상태다”고 밝혔다. 또 “침대에만 누워 있지 않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병실 복도를 오가기도 한다"는 말을 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2017년 8월 2일, 이재용이 재판 도중 언급하였는데, 표현이 눈에 띈다.

이재용은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부터"라고 말했다가 다급히 "회장님이 건재하실 때부터"라고 말을 정정했다.

박근혜에게 자신이, '홍석현이 이건희의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를 했다고 설명하는 도중에 나온 표현으로 당시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2017년 11월 6일, 2년만에 TV조선 종합뉴스 9에서 이건희의 근황을 취재한 영상이 보도되었다. 이건희가 영화를 보면서 간호사와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건희가 보고 있던 영화는 목소리의 형태였다. 링크


2.5. 사망[편집]


파일:이건희 회장 영결식.jpg

2020년 10월 25일 3시 59분, 재활에 힘을 쏟았지만 지속된 건강 악화(급성 심근경색)로 인해 2014년부터 6년간의 투병 끝에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 장례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며, 삼성 사장단의 조문은 26일에 진행될 예정이다. 부인 홍라희와 장남 이재용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 18, 19호에 마련되었다. 일반인의 조문은 받지 않는다. 또한 유족 측에서는 빈소 사진을 찍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25]

생전에 삼성 일가가 대대로 원불교 집안이고, 특히 2011년 뉴욕주에 있는 원 다르마 센터를 짓기 위해 부지, 건축비 전액 120억 원을 기부하는 등 원불교에 많은 지원을 해주면서 중덕(重德)이라는 법명과 중산(重山)이라는 법호를 수여했다. 이로 인해 원불교 장의위원회에서는 공덕을 기리며 원불교 서울교구청 원불교 한강교당에 별도의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천도재 및 추도식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는데, 추도식은 전라북도 익산시에 위치한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11월 8일에 열렸다.

28일 오전에 영결식과 발인이 엄수되었고, 아버지 이병철 때처럼 장례가 끝난 후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 부지 내에 속한 선영(선산)에 안장될 것으로 보였지만 이병철의 조부모 등을 모신 수원 가족 선영에 안장되었다.
# #

발인식이 끝난 후 운구 버스에 탑승할 때 이재용은 내내 굳은 표정이었고, 이부진은 중간중간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서 영결식 참석을 위해 차에서 내릴 때는 휘청이는 이부진의 한쪽 팔을 홍라희가 잠시 부축하기도 했다. #

이건희의 직접적인 사인은 신부전증인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계는 고령에 긴 투병 생활을 해왔던 이건희의 신장 기능이 나빠지면서 회복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고 있다.(추측)

삼성전자의 경쟁사이자 협력사이기도 한 Apple CEO 팀 쿡이 추모의 뜻으로 한국식 근조 화환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는 이재용이 2011년 스티브 잡스의 사망 당시 추도식에 참석한 것에 대한 답례의 표시라고 한다. #

2021년 4월 28일, 삼성상속세 납부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건희 회장의 유지에 따라 미술품 기증 및 어린이 의료 지원 등 사회 환원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사회 환원 계획에 따라 몇 만 점에 달하는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들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으며,[26] 소아암·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지원 용도로 3,000억원이 기부된다. # 새로운 기증관 후보는 서울 송현동과 용산 두 곳이 후보로 정해졌다. #


3. 경력 및 약력[편집]







  • 1998. 8.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 1998. 4. ~ 2008. 4.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 1996. 7. ~ 2008. 8.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 1993. 3.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 1989.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 1982. ~ 1993. 2.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 1982. 3. ~ 1997. 3.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

  • 1981. 2.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 1979. 2. ~ 1987. 11. 삼성그룹 부회장




4. 가족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범삼성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어록[편집]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1987년 삼성그룹 회장 취임사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우리 인재들이 그리고 인재들이 모인 기업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해 오대양 육대주로 활동무대를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한다.

1988년 창립 50주년 기념식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라.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봐.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구태여 회사에서만 할 필요 없다. 6개월 밤을 새워서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논다고 평가하면 안 된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옆으로 돌려놓는가?

불량은 암이다.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이고, 3만 명이 만들고 6천 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다.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임원들에게.


바뀌고 싶은 사람만 바뀌어. 많이 바뀔 사람은 많이 바뀌어, 많이 기여해. 적게밖에 못 바뀔 사람은 적게 바뀌어서 적게 기여해. 그러나 남의 뒷다리는 잡지 말라 이거야.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경영자는 또한 적어도 4, 5년 후의 일에 대해서는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1994년 6월 집무실에서


경영자는 알아야 하고 행동해야 하며 시킬 줄 알아야 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사람과 일을 평가할 줄도 아는 종합 예술가로서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

1995년 5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미래 국제포럼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27]

[28]

1995년 4월 베이징 특파원들과 간담회에서


휴대폰 품질에 신경을 쓰십시오. 고객이 두렵지 않습니까? 반드시 한 명당 한 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1995년 애니콜 품질 향상을 강조하면서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


인재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2003년 5월 사장단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서.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한국은 두 나라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2007년 1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


삼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5~6년 뒤에는 큰 혼란을 맞을 것이다.

2007년 3월


삼성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기꺼이 협력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2011년 1월 신년사


여성 인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면 회사와 나라의 손해다.

2012년 여성 승진자 오찬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기회를 놓치고 나서 ‘우리가 이제부터는 잘해서 만회하겠습니다’는 소용없다. 아무리 잘해서 만회가 되더라도 그건 당연한 것이지. 만회가 아니라 기회 손실이다.

2010년 3월 경영 복귀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 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한다.

2013년 10월 신경영 20주년 만찬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 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2014년 1월 신년사


큰 형님이셨는데, 마음이 아프다.

2018년 김종필 국무총리 서거



6. 별명[편집]



6.1. 쁘띠거니[편집]


파일:이건희 회장.png[29]

프랑스어로 '작은', '사소한' 등을 뜻하는 쁘디(Petit)의 뜻을 따서 지은 별명. 여러 언론사에서 언급한다. #

6.2. 개건희[편집]


파일:이건희 회장2.webp

유난히 강아지를 좋아하고 이 회장의 외모도 견종(犬種) 시츄를 닮기도 해서 생긴 별명이다. '개건희' 또는 '시츄건희'라고 부른다. 이렇듯 재계에서 소문난 애견가인지라 부하 직원에게 각 계열사 사장중 누가 보신탕을 먹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한적이 있는데, 부하 직원이 이유를 묻자 보신탕을 먹는 사장들에게 개를 키워보게끔 강아지를 한 마리씩 선물하려 했다는 일화도 전해질 정도다.


7. 비판 및 논란[편집]


이건희 일가는 유럽 귀족 흉내를 몹시 내고 싶어했다. 이걸 굳이 규제할 근거는 없다. 다만 조건이 있다. 개인적인 사치는 개인 돈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희의 생일잔치는 공식행사를 빙자하여 공식비용으로 치러진다. 이들은 개인적인 파티에 회사 돈을 쓰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손님에게는 주인보다 더 싼 음식을 제공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무례한 태도의 배경에는 이건희 일가가 마치 왕족이나 귀족처럼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있다.

삼성을 생각한다 p.225~230


이건희와 그 주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세계를 잘 몰랐다. 이건희는 그게 경영자로서 약점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30]

하지만 그 뿐이었다.이런 약점을 굳이 보완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핏줄이 다른 귀족이라고 여기고 있던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정서를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삼성을 생각한다 p.252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지만, 들여다보면 여느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이건희 역시 논란이 없지 않다.[31]참고로 삼성에 관한 비리는 삼성 내부고발자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비롯 여러 언론사에서 나온 삼성 자료들만 대충 훑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7.1. 무노조 경영[편집]


선대 이병철 때부터 내려온 무노조 경영을 본인도 그대로 이어 받았다. 노조로 인해 회사 경영에 차질이 될 수 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병철 회장이 삼성 그룹에서 노조를 설립해선 안되지만 그만큼 회사 복지를 잘 해야한다고 하지만 삼성은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여러 일화들로 악명이 자자하다. 특히 여러 사업장[32]에서는 노조 결성이 의심되는 직원들의 휴대폰, 전화를 도감청은 물론이고 미행까지 서슴치 않는다고 한다. 통화 내용을 얻기 위해 경찰서에 알력으로 영장을 발부하게 해서 통신사에 의뢰하여 노조활동이 담긴 통화내역을 발췌해 직원을 자르는 일이 감사팀과 인사팀의 주요 업무라고도 한다.

이런 무노조 방침은 해외도 어디 가지 않아서 매수와 협박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고 한다. 영국의 사업장에는 노동조합이 존재하는데 무노조 경영 방침을 이야기하자 노동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 결국 영국 노동청이 노조 없는 기업은 우리나라에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하여 삼성은 영국 노동자들의 노조 활동을 인정했다고 한다.

범 삼성계도 다르지 않다. 여동생이 운영하는 기업 이마트에선 한때 창고에서 전태일 평전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일일이 솎아내서 퇴사에 이르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관련 인사들이 검찰 수사를 받았다. 삼성전자와 삼성전자서비스의 노조와해 사건 pdf 이후 재판의 판결문은 1심(2018고합557), 2심(2020노115), 3심(2020도11559) 판결 보도자료 이밖에도 에버랜드 노조 와해 공작으로 또 관련자들의 유죄가 인정되었다. 1심(2019고합25), 2심(2020노50), 3심(2020도17789) 판결 보도자료


7.2. 삼성 반도체 노동자 사망사건[편집]


삼성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 씨 등이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던 도중 백혈병에 걸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족 측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업재해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삼성과 근로복지공단 측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다가 장기간의 법정투쟁 끝에 대법원 최종판결이 나고서야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로도 개봉했다. 삼성을 다룬 이야기라 투자가 어려워서 전액 국민 후원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삼성 법무팀에 근무했던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자신과 같은 법무팀 직원들이 한 일이 바로 삼성 사업장을 돌면서 이런 저런 사건사고와 악재들을 막아서 (검찰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기소까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삼성은 2012년 스위스의 시민단체 베른 선언과 그린피스 스위스 등이 글로벌 악덕기업을 선정하는 '공공의 눈 상(Public Eye Award)' 투표에서 3위에 랭크[33]되는 흑역사를 기록했다.


7.3. 비리와 재판, 그리고 사면[편집]


삼성의 전 법무팀장인 김용철이 삼성 비리 관련하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양심고백을 했던 일이 있었다. 이건희의 차명계좌가 적발되고 천억 원대의 세금포탈 혐의가 적발되면서, 2008년 4월 22일 이건희는 삼성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여 전격 퇴진하였다. 이건희가 증여세를 피하면서 삼성 그룹의 지분을 물려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이건희의 아들 이재용도 최고 고객 책임자[34]의 직위에서 물러났다. 김용철은 이건희의 비리 혐의와 삼성 내의 비화 등을 담은 <삼성을 생각한다>를 출간했고, 이 책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2008년 4월, 임원들과 함께 불구속 기소되었다. 참고로 이건희 본인이 구치소에 구금되거나 수감된 전력은 없다. '황제 경영’ 이건희 결정적인 흑역사 네 가지 장면.

2009년 12월 29일, 이명박 정부에서 특별사면을 하기로 발표했다. 이와는 별도로 2010년 2월 7일, IOC에서도 견책(a reprimand) 조치를 취했으며, 향후 5년간 산하 위원회 활동을 금지하였다. 단, IOC 위원으로서의 활동은 계속할 수 있다. 동시에 대법원에서 근소한 차이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 처분을 받았다.[35] 그리고 2010년 3월, 경영에서 퇴진한다는 약속을 철회하고 회장 퇴임 23개월 만에 삼성전자의 회장으로 복귀했다. 기사

2018년 초, 다스 실소유주 논란과 엮어서 이 사면이 뇌물에 대한 대가로 얻어낸 것이 아니냐는 혐의가 있다. 다스가 미국에서 벌인 소송에서 삼성이 소송 비용을 내주고, 그 대가로 원포인트 사면을 받아낸 것이라고 검찰은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이명박 재판에서 이 혐의가 인정되었다.


7.4. 성매매 논란[편집]




2016년 7월 21일 오후 10시 인터넷 언론인 뉴스타파에 의해 이건희의 불법 성매매 장면이 보도되었다.
파일:external/ncache.ilbe.com/cd50996695bce6cdff2f913bdb0bd96c.jpg
영상이 촬영된 기간은 2014년 이건희의 장기 입원이 시작되기 전인 2011년~2013년이다. 때문에 영상 속에는 건강했을 당시 이건희의 모습과 목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수차례의 전문가 검증을 통해 위변조 가능성이 낮음을 확인했다.

영상에는 이건희가 여러 여성에게 돈봉투를 건네주던 중[36] 한 여성에게 "니가 오늘 수고했어~ 응? 니 키스 때문에 오늘 황홀했어."와 같은 음담패설을 내뱉는 등 누가 봐도 성매매로 의심할 만한 발언과 행동이 적나라하게 찍혔다.

뉴스타파 제작진의 취재 결과 이 영상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일당이 성매매 여성과 공모한 끝에 나온 것으로 보이며, 성매매에 대한 삼성그룹의 조직적 지원이 있었을 가능성도 보도했다.

보도 직후 이 영상이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고, 기사화까지 이루어지면서 포털 사이트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다수의 네티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이건희가 올라간 걸 보고 지난 몇 년간 투병 중이던 이 회장이 결국 사망한 줄 알고 기사를 찾아봤다가, 전혀 예상 못 한 소식에 놀랐다고 한다.

2016년 7월 22일, 삼성그룹이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물의가 빚어져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회장의 사생활 관련이라 회사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허나 그동안은 회장 일가를 삼성그룹의 신처럼 받들던 사람들이 이제 와선 삼성과 이건희의 사생활은 별개라고 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관련 기사 그렇다 하더라도 삼성그룹이 회장의 성매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애매하긴 하다.

네이버 기사의 순서를 보면, 최초 뉴스타파가 보도한 이후 1시간 정도 후에 한경오에서 관련 보도를 냈고, 이후 인터넷 뉴스들을 중심으로 관련 보도가 계속하여 올라왔다.

해당 기사마다 댓글이 수천 개씩 붙고 최초로 보도한 뉴스타파 기사의 댓글 숫자는 무려 10,000개를 넘어가는가 하면, 각 포털 사이트마다 실검 1위에 이건희가 오르내리는 둥, 그야말로 대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조중동의 보도는 이미 하루가 지나간 시점까지 없는 상태이고, 상대적으로 빨리 보도했던 KBS의 기사는 삭제되었다. 다만 다시 몇 줄짜리 단막 기사로 보도되긴 했다. KBS 해명에 의하면 처음엔 진의 여부를 믿기 어려워 기사를 삭제하고 뉴스타파에 연락해 동영상 원본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해 그냥 단막 기사로 재보도했다고 한다.

여튼 이런 주요 언론들의 행태는 기존의 연예인 성매매 및 성폭행 사건 등과는 전혀 다른 얌전한 행보이기 때문에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 쪽에서 언론사에 전화를 돌렸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와 관련 뉴스타파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뉴스타파 보도와 관련해 삼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반드시 녹음을 해주세요. 만일 뉴스타파 보도 관련 청탁이 있다면 뉴스타파로 해당 녹음 파일을 보내주세요.”

하지만 사안이 워낙 세간의 큰 관심을 모은 사안인지라, 결국 7월 22일 삼성그룹과 특수 관계에 있는 언론사인 JTBC[37]에서도 JTBC 뉴스룸을 통해 소식을 보도하였고, 뉴스채널인 YTN과 비슷한 시각에 방송되는 지상파 방송 3사의 저녁 뉴스에서도 모두 보도되었다. KBS, SBS, MBC, YTN.

조선일보도 7월 23일자 사회면 톱(A10면)에 실어 보도하였다. 기사글 하지만 아무래도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혹은 바로 얼마 안 된 시점에 터진 연예인들의 성 관련 논란에 비해 보도 비중이 확 줄었다는 느낌을 지우긴 힘들다. 그리고 기사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뉴스타파를 거듭 언급하면서 (자신들은) 뉴스타파의 보도를 인용했을 뿐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뉘앙스다. 게다가 기사가 올라온 시각도 새벽 3시 5분. 현재는 기사를 아예 포털에서 내려 버린 상태다.

참고로 KBS의 경우는 이건희의 성매매 의혹을 주로 다룬 것이 아니라 몰카만을 집중해서 다뤘다. 당연히 기사의 모양새에서 이건희의 성매수는 온데간데 없고 몰카의 불법성만 부각되었다. 거기에 덤으로 뉴스타파까지 이건희를 괴롭히는 모습으로 변신시켜버렸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성매수보다 성행위 몰카가 훨씬 중대한 범죄인 것이 사실이고, 심지어 이건희의 성매수는 그 당시 이미 공소시효마저 완성되어 처벌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영상 촬영 자체가 협박용이었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뉴스타파 보도가 오히려 일방적으로 성매수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건희의 명예를 깎아내리고자 선정성에 기댄 편파보도였던 것이 사실이다. 성적 수치심을 약점으로 잡고 착취하려고 했던 범죄자의 보복성 투고를 그대로 들어준 보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건희의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편, 8.15 특사를 앞두고 이 사건이 터져 특사를 기대했던 여러 재벌가에서 노심초사 중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그렇잖아도 재벌 출신 경제사범을 특사로 사면해주는 것에 대해 유전무죄라고 말이 많은데, 이 사건으로 재벌에 대한 국민 감정이 악화되면 정부도 부담감을 느껴서 재벌들을 특사에서 제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동영상 촬영자들이 삼성에 돈을 요구하기 전에 당시 재산 승계를 놓고 법적 분쟁 중이던 CJ그룹쪽에 먼저 접근했다가 거절당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건희 동영상 촬영자 쪽, CJ그룹에 ‘거래’ 제안” 당시 CJ는 형제 간의 갈등에 이런 영상을 이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이 영상을 촬영하고 협박을 주도했다고 보여지는 두 남성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직계 가족들도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취재진은 "선 씨의 친형, 이 씨의 전 부인과 어렵게 접촉했지만 자신들도 이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물론 연락이 안 될 뿐 실종 같은 루머는 현재로선 그저 추측일 뿐이긴 하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7월 25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선 씨를 지난해 4월 경기도 안성의 터미널 내 한 찻집에서 만나 그 동영상을 접했다고 밝혔다.

선 씨는 '김 위원장을 수년 동안 지켜봤다. 삼성과 싸우는 사람들은 1~2년 안에 돈을 받고 끝냈는데 김 위원장은 끝까지 싸우더라'고 말을 하면서 노트북을 건네며 보여주었다고 했다.

9월에 선 씨와 이 씨를 만났는데 이 씨가 '삼성 미래전략팀 위기관리팀 소속이라고 하는 50대 남성 두 명이 찾아와 동영상을 공개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가져가자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

묻힐 뻔했다가 검찰이 반년 만에 고발인 조사에 착수해 본격 수사 검토에 나섰다. #

검찰 조사 결과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촬영을 지시한 사람은 CJ그룹의 차장급 직원인 S씨로 파악됐다. 구속 후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성폭력처벌법에 따라 "카메라 등 기계를 이용해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몰래 찍고 이를 타인에게 제공하는 것"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수사팀은 S씨를 상대로 이건희 동영상을 갖고 삼성그룹을 협박해 금품을 요구한 적이 있는지 조사 중이라고 전해졌다. 출처 그리고 이재용박근혜에게 뇌물을 준 댓가로 5년형을 받은 거의 같은 시각에 4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위와 같이 협박을 목적으로 영상 촬영을 지시한 사람은 4년 6개월이라는 중형을 받았으나, 영상을 통해 확인된(성행위에 따른 대가 지불 장면) 성매수자 이건희와 포주에 대한 처벌이나 조사는 요원해보인다. 우선 해당 행위가 2011년에 촬영된 영상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성매매 공소시효 5년이 지나 처벌이 불가능하다.[38]

7.5. 그 외 비판[편집]


  • 삼성을 생각하다에 의하면 삼성 냉장고의 월간 판매 실적이 LG에 뒤진 적이 있었는데, 이건희는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남은 이익을 한 2조원 쯤 에어컨이나 냉장고 등 냉공조 사업부에 돌려서 우리나라 전 가정에 삼성 에어컨과 냉장고를 공짜로 줘서 LG가 망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물론 실행된 적은 없다. 이 지시는 치킨 게임이 가능한지 검토하라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2조원을 1500만 가구로 나누면 가구당 13만원이고, 2000년대 초 삼성 에어컨은 100~300만원이었다.

여기서 치킨게임이 항상 비현실적이고 반기업적이고 손해보는 공상이냐면 그건 아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익을 몇 조나 증발시켜가며 덤핑을 했고 그 결과 여러 회사가 망하면서 삼성전자가 오늘날만큼 돈을 번다. 하지만 냉장고나 에어컨 업계에서도 치킨 게임이 가능했는지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기술 수준이나 규모의 경제가 반도체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그런 식으로 LG전자를 망하게 해봤자 얻는 이익이 크지 않았을 수 있다.
지시사항의 배경으로 2000년대 초반 냉장고 사업 환경을 알아야 한다. EU는 2005년 한국산 양문형 냉장고에 대해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삼성전자 4.4%, LG전자 14.3%). 2002~2003년 한국 업체들이 유럽 시장에 대형 양문형 냉장고를 출시하면서 2~3년만에 시장 70% 이상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EU 조사관들은 한국 냉장고 업체들이 유럽 시장에서 덤핑을 했다고 판정했다. 이건희는 LG전자의 덤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으로, 2003년 지시사항 중에는 경제담당 기자나 학계를 동원해 LG가 해외에서 일삼는 덤핑이 얼마나 국가적으로 해를 주는지 여론을 조성해보라는 지시를 한 적이 있다.

  • 한 번은 한겨레가 삼성에 비판적인 기사를 계속 싣는다는 이유로 이건희가 직접 광고 중단을 검토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순동 당시 홍보팀장이 한겨레와 대화 통로를 끊지 않으려면 계속 광고를 줘야 한다고 해서 가까스로 넘어간 일이 있었다.

  • 프랑스에 가서 스키장 슬로프 하나를 전세 내서 황제 스키를 즐겼다가 프랑스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국제적 망신 거리에 오른 적이 있다. 그 뒤 2004년에 처남 집안에서 운영하는 휘닉스 파크에 가서 가족이나 임원진들과 스키를 타기도 했는데 역시나 또 슬로프를 전세내서 쓰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 역시 보도가 되자 화가 난 이건희는 없었던 일로 하고팠는지 삼성그룹 명의로 계약한 슬로프 전세금 100억 원을 하루아침에 갚으라고 해서 당시 휘닉스 파크 임원진들이 돈을 마련하느라 비상이 걸렸었다는 일화도 있다. 기사[39]

  • 휘닉스 파크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이건희는 창밖이 시끄러워 봤더니 당시 체리필터가 리조트에 초청되어 공연 중이었다고 한다. 이건희의 시끄럽다는 한 마디가 전달된 뒤 체리필터의 공연은 강제로 중단되었다고. 기사 기사가 나온 당시 휘닉스 파크는 보광그룹의 소유였는데, 보광그룹은 1999년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된 범 삼성계 그룹 중 하나이고 보광그룹의 회장인 홍석규는 중앙일보 회장인 홍석현의 셋째 동생이다.[40] 게다가 보광의 핵심 계열사인 STS반도체는 반도체 후공정 분야에서 삼성그룹과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는데,[41] 핵심 계열사의 주요 핵심 고객이 삼성그룹이라 당연히 보광그룹에서 이건희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 영화 베테랑에서 차용한 사장단 회의 때 사장들이 기저귀를 차고 회의에 참석하는 장면은 '삼성을 생각한다'에 나오는 실화를 각색한 것. 기사 영화처럼 기저귀는 차지 않지만 이건희는 아무리 회의가 길어져도 절대 화장실을 가지 않는 습관이 있고, 그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회의 시작 전에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고 회의 중에는 가급적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고.

  • 이건희 전용기에 적힌 회장 지시사항은 참으로 민망하다는 후문이 있다. 전용기서 먹었던 초코칩 쿠키가 촉촉하지 않다는 이유로 쿠키를 담당한 신라호텔 제과팀이 문책을 당해 담당 쉐프가 어떻게 만들겠다고 답변한 게 나와있고, 담요를 3장이 아니라 2장만 덮으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일들을 회장 지시사항이라고 하달했다고 한다. 회장 지시사항은 삼성 전 계열사에 하달된다.

  • 이건희 전용기를 타본 김용철에 따르면, "백 수십 명이 탈 수 있는 전용기를 16인승으로 개조한 까닭에 공간이 넉넉했다. 침실과 와인바까지 갖춰져 있었다. 전용기 안에서는 스튜어디스가 무릎을 꿇고 기어와서 시중을 들었다. 동행한 검사들은 전용기 안에서 신기하다는 듯 연신 두리번거렸다."고 한다. 사장단은 회장 전용기를 탈 수 있었으나, 자기가 타고 있는 도중에 회장이 전용기를 찾을 것이 두려워서 실제 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이건희의 생일잔치엔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초청되었다고 한다. 한 곡만 부르고 가도 수천만 원씩 줬다고. 근데 당시 유일하게 거절한 연예인이 나훈아. 내 노래 듣고 싶으면 티켓 끊고 콘서트 와서 들으라고 했다고. 때문에 이후 나훈아가 성루머 스캔들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자 당시 삼성이 개입한 거 아니냐는 카더라 찌라시가 떠돌기도 했다. 헌데 정작 조용필 예술의전당 공연 때는 표 사서 봤다.

  • 용인 에버랜드에 있는 AMG 에버랜드 스피드웨이는 자동차 광인 이건희 전용 서킷으로 지어진 거라는 게 정설. 이것도 역시 언론의 거센 구설수 때문이었는지 모터스포츠 활성화라는 측면을 걸고 각종 레이싱 대회를 열게 하고 있다. 안전상의 이유로 사용이 중지된 서킷을 이용하다 카메라에 찍힌 적도 있다.


8. 여담[편집]


  • 생전에 기관지가 많이 약해 림프암 수술에 6년간 심근경색 투병을 했었다. 그래서 집에 공기청정기가 있는데 전기료가 가장 많이 나오는 대저택이었다.


  • 아버지로서 이재용을 엄격하게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홍라희는 말로 훈계를 했지만 이건희는 빠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재용의 소심한 성격이 아버지의 영향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파일:삼성_이건희_일가.jpg
  • 출생지가 대구시 중구 인교동인지라 대구(중구) 출신 인물로 분류되어 있지만, 전술되었듯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떠나 3살 때까지 경남 의령군에서 자랐고,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닌 뒤에 1950년 6.25 전쟁 때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사범국민학교[42]를 다녔고 중고등학교는 모두 서울에서 다닌데다 대학 역시 연세대학교를 다니고 나서 일본 와세다대학,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이 학력이다. 말그대로 출생지만 대구일 뿐, 대구 사람은 아닌 것이다.[43]

  • 부산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사립학교를 나왔을 것으로 보는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초중고는 모두 국립학교를 졸업하였다.[44][45] 다만 1970년대 평준화 이전에는 서울을 비롯 지역명문고는 국공립이 우선이었고[46] 사립이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 아들인 이재용은 재벌 개그를 담당하고 있고, 이건희는 재벌 총수가 주는 이미지와는 다른 귀여운 외모로 한때 쁘띠거니로 알려졌었다. 이 별명을 본따 이건희의 여러 가지 모습을 모아놓은 '쁘띠거니' 시리즈가 한때 유행했었다. XX에 상황에 어울리는 말을 넣어놓고 'XX거니'라는 제목을 달아놓는 형식. 예시.

  • 고등학교 시절에는 레슬링부 소속이었다. 럭비도 좋아했고 승마도 즐겨했던 모양이다. 이를 바탕으로 레슬링협회장[47]과 승마협회장을 맡았다. 2008년 특검 수사 때는 수사관들에게 승마의 장점에 대해 줄줄이 설명하면서 아예 직접 배워보라고까지 권했었다.

  • KBO 리그 창립 초창기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삼성 라이온즈 초대 구단주[48]로 야구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구단 경영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롯데 자이언츠에 패한 뒤로는 직관은 안 간다고 한다.[49]

  • 재벌 중에서도 소문난 애견인으로 유명한데, 한남동 자택에서도 포메라니안, 요크셔테리어, 치와와를 포함한 여러 마리의 반려견을 키웠으며 특히 '벤지'라는 이름의 포메라니안을 무척 아껴서 이 개가 16세의 나이로 노령으로 사망하자 충남대에 연구비를 지원하여 이 개를 체세포 복제하기도 했다. 삼성화재의 맹인안내견 육성 사업을 통해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안내견 육성을 지원하고 있으며, 에버랜드를 통해 진돗개라는 견종을 국제적으로 알린 것도 삼성인데 이러한 사업에 이 회장의 반려견 사랑이 반영되었다는 평가다. 또한 갤럭시 휴대폰의 테스트 모드중 하나인 *#0*#에 사진이 숨겨져 있다. 센서 버튼을 누른 후 이미지 테스트를 누르면 나온다.

  • 반려견 사랑과 함께 부하 직원을 직접 문책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알려주는 성품이 반영된 일화가 있는데, 어느날 모 임원을 불러 "우리 사장단 중에서 혹시 보신탕(개)를 먹는 사장이 있는지 조사해달라"고 하자 해당 임원이 "명단이 제출되면 문책하실 생각이시냐"고 물었다. 이에 이 회장은 "아니, 강아지를 한 마리씩 선물하겠다"고 했다고. 관련 기사 강아지를 직접 키워보면 보신탕을 먹는 일을 안할 것이라 생각하여 완곡하게 알려준 것이다. 실제로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국제 행사 때 한국인이 개를 먹는다는 외국의 인식 때문에 평가절하당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 일본에서 산 유년 시절에는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가정교사의 특별 교육만 받아 평범한 친구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건희는 거의 하루종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고 한다. 이것은 이건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같은 영화를 수차례 관람하면서 각각 주연, 조연,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고 이는 회장이 된 후 다각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50] 그가 처음으로 입사했던 동양방송의 운영이나 안목에도 이러한 유년시절의 취향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 자동차 애호가로도 유명해 자동차 수집과 운전도 좋아했다. 가끔은 에버랜드 서킷을 전세 내고 레이서에게 교습 받아가며 드라이빙을 배웠다고 한다. 1982년에는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크게 나서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아야 했을 정도. 세계 최고가 차량인 페라리 250 GTO[51] 를 포함한 클래식 카들은 물론 고급 세단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슈퍼카 매니아로 알려져 있는데 2015년 조사 결과 26억원짜리 부가티 베이론 포함 총 12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고, 차량 가격을 다 합치면 총 477억 원에 달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단 한대 있는 부가티 EB 110도 소유 중이었는데, 삼풍백화점 붕괴 시기에 삼풍백화점에 있었는지라 현재 소유는 불명확하다.[52] 그런데, 이게 1억 원 이상 차량만 조사한 거라서 1억 원 이하의 저렴한 차량은 누락되었다는 게 함정. 관련기사

  • 상당한 오디오광으로도 유명했다. 일본의 고급 오디오 회사인 럭스만을 인수했다 되팔기도 했고, 마크 레빈슨·헤일즈 스피커와 손을 잡고 엠퍼러라는 하이엔드 오디오를 출시했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정리했다. 와병하는 동안 삼성이 하만을 인수하면서 하이엔드 오디오에 재진입하였다.

  • 카메라도 좋아해서 돈이 되지 않아도 카메라 사업에 꾸준히 투자를 하기도 했다.

  • 에피소드로 외제차를 구매하다 영업사원에게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 포르쉐를 구입하려 매장을 방문한 이건희가 포르쉐를 총 6대 고르고 계약 사인을 하고 가는데 신입직원이 몰라보고 계약금을 달라며 발목을 붙잡은 일이 있었다. 이에 이건희는 지갑 가져와라 하면서 3억을 즉납했다는 일화도 있다. 벤틀리 매장서는 벤틀리를 고르는데 역시나 이건희를 몰라본 직원이 차를 리스로 하면 좋다는 조언을 해주고 직원은 신원조회를 위해 이건희의 정보를 삼성캐피탈에 의뢰했다는 웃긴 이야기도 있다. # #[53]

  • 내성적인 성격 탓에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던 습관이 있었는지 경영권을 이어받은 후에는 회사일 외에 대중매체나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편이었다. 주로 한남동 자택에서 집무를 보며 은둔과 칩거 등을 반복하였다. 또 국제적 기업의 회장답게(?) 3~4개월간 미국, 중국, 유럽 등으로 국외 출장도 잦았으며, 암 투병 경험에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데다 폐까지 좋지 않아 요양 겸 하와이, 타이완 같은 곳으로도 오래 나갔다.

  • 옛부터 국내 기업 총수들은 대외적으로 모습을 노출하는 경우가 적다. 연예인처럼 언론지상에 자주 오르내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 접촉도 신문 매체의 경우 1990년대 중반까지는 자주 하였으나, 그 후에는 거의 없다. 2003년 동아일보에서 질문지를 기자가 미리 보내면 비서와 함께 구술을 통해 답변하는 식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다만, 뉴스에는 이따금씩 나온다. 본사 사옥으로 출근할 때나 해외로 출국할 때, 생일 파티나 만찬 같은 각종 모임이 있으면 행사장 앞에서 기자들 모아 놓고 스탠딩 인터뷰 잠깐 하는 정도다.

  • 막내 딸 이윤형이 2005년 미국에서 자살했다. 처음엔 교통사고라고 했지만 뉴욕시경의 발표에선 맨해튼 숙소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은 나오지 않았지만 뉴욕에 유학간 이윤형이 그곳에서 남자친구와 사귀었고[54]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주지 않아서 자살한 거라는 추측만 있다. 딸이 사망했지만 이건희는 뉴욕을 방문하지 않았고, 언니들인 이부진과 이서현이 와서 시신을 수습해 갔다고 한다. 관련 자료. 그녀가 보유한 삼성 주식은 사후 장학재단에 들어갔다고 한다.

  •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과는 선대째부터 내려져 오는 인연으로 10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경영 멘토로도 매우 절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김승연이 중대한 경영상 결정 사항이 있으면 이건희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하고[55] 반대로 당시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이었던 이재용을 김승연에게 보내 경영 수업을 받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56] 또한 이건희 본인이 별장으로 놀러 갔을때 한화 이글스가 전지훈련을 오자 선물을 보내기도 했으며, 승지원으로 김승연을 불러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덕분에 자식들도 나이차가 있음에도 절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병상에 누워 지내기 직전인 2014년엔 삼성그룹의 위기를 언급 하면서 삼성이 변해야 한다는 언급과 함께, 한화도 변화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하며, 삼성그룹과 한화그룹의 빅딜 기반을 설계 했다고 한다.[57] 이건희가 사망하자 이튿날 바로 조문하여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나누었으며, 언론에 "형님처럼 모시던 분"이라며 "가장 슬픈 날이다"라고 애통해하기도 했다.

  • 국내 재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과 인지도를 갖춘 인물이니만큼 재벌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이건희 손자에게도 공짜로 급식을 줘야 하느냐?" 등이 있다.

  • 이름이 니코니코니의 '니코니'와 운이 비슷해 패러디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영상. 이건희에서 이건 = 이것은으로 치환되어, 트위터 등에선 이건희가 이것은희로 자동 필터링이 된다.

  • 2017년, 외아들 이재용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되어서 구속되었다. 이 때문에 미래전략실이 없어지게 되는 등, 이건희 일가에게 위기가 오기도 했지만 2018년 초에 이재용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면서 일단 급한 불은 진화될 줄 알았는데, 또 뭔가가 터지기 직전이다.

  • 사후 이건희가 생전에 남겼다고 추정되는 편지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본인이 작성한 것인지 확인된 바가 없는 루머이므로 이 점을 유의하는 것이 좋다. 편지가 널리 확산되자 삼성 측에서 공식적으로 해당 편지는 1년 전부터 인터넷에 떠돌던 내용이라면서 부인했다.기사

  • 그의 사망 전에 그의 사망과 이재용의 승계에 대한 꿈을 미리 꾼 지식iN 이용자가 있다. 네이버 지식iN 질문 정작 질문 작성자는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하다. 다만, 이건희는 투병한지 오래 되었고 한때 사망설까지 퍼질 만큼 건강이 좋지 못한 게 세간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딱히 예지몽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 사후 이건희가 안치된 이목동 수원 선산은 원래 SK 소유의 산이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매입해 자신의 조부모를 모시면서 선영으로 지켜온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 라면을 비롯한 면류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던 날 저녁식사 메뉴도 국수였다. 이건희는 평소 당뇨가 심한데도 식단조절을 하지 않아 이재용 부회장의 걱정이 커던 듯 하다.# 더불어 상당한 대식가였는데 98년 어느날 밤 늦게 이건희의 자택에 초대받았던 최규선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이건희는 자동차 사업과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의 투자문제 등을 이야기하며 옆에 놓여있던 케이크 한판을 다 먹었다고 한다.


9.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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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의 인교동 오토바이골목에 '호암 이병철 고택'이자 이건희의 생가가 있다. 대구시 출생이지만 3살 때 떠나온 탓에 본인의 고향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 #[2] 하지만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떠나 살았고, 학교는 타지에서 다녔기 때문에 실제로 대구 사람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3]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의 후유증#[4] 중시조 40세. 판전공파(判典公派)-사정공파(司正公派). 파조(派祖) 이강(李파일:한자 강(康+羽)(각주용).png)이 전객시(典客寺)의 판사(判事), 즉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역임하였기에 줄여서 판전공(判典公)이라고 한 것이다. 다만 의미상 판사공(判事公)으로 해야 옳다는 의견도 있다. 전객시는 예빈성(禮賓省)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 외국의 빈객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하던 관청이다. 전객시의 장(長)은 정3품 판사로 하였다. 사정(司正)은 조선시대 5위(五衛)의 정7품 관직이다.[5] 이재용장남. 이건희의 첫 손주이자 장손이기도 하다.[6] 이재용장녀.[7] 이부진무녀독남.[8] 이서현장녀.[9] 이서현차녀.[10] 이서현3녀.[11] 이서현장남이자 고명 아들.[12]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20조 이상을 가졌던 사람이다.[13] 이 시기 이병철-박두을 부부의 사이도 매우 좋지 않았다.[14] 이건희와 홍사덕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서로 건희, 사덕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최규선에 따르면 이건희는 홍사덕을 가리켜 내 죽마고우라고 하였다고 한다.[15] 훗날 양화대교는 교각 사이로 화물선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각의 중간을 없애고 대형 아치교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리 중간의 교각 간격을 넓힌 후에도 이 다리 밑으로 화물선이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16] 다른 계열사도 아니고 하필 왜 언론사로 입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병철은 언론 사업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고, 외국의 언론 재벌들이 사회의 존경을 받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언론사에서 경험을 쌓아 큰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건희를 언론사에 입사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삼성의 핵심 주력 계열사가 되는 삼성전자는 이건희가 입사한 지 3년 후에 창사되었다.[17] 이병철은 이 사건 이후 18년이 지난 1987년에 사망한다.[18] 제프리 케인의 삼성 라이징에 따르면 이병철이 실제로 이태휘를 후계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건희가 미국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한 후 잠시 의료용 마약에 중독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태휘와 경쟁시켰다고 서술하고 있다.[19] 드라마에 대한 이건희의 통찰력을 드러낸 일화를 소개하자면 자사 소속 중견 배우였던 강부자, 이순재, 여운계 등의 급여 지급과 대우에 신경 쓸 것을 드라마 제작진들에게 주문했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주연은 얼굴 반반하고 적당히 연기하면 되지만, 극을 살리는 건 조연이니까 잘 챙겨줘야 한다." 그 덕에 언론통폐합 이전의 TV 3사 드라마 중에서는 TBC 작품의 인지도와 시청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20] 이 당시 누적 적자가 수천억에 달하면서도 추가 투자 결정하자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이병철에게 반대 의견이 빗발쳤으나 그는 '내한테는 돈냄새가 난다'면서 쿨하게 무시했다고 한다.[21]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 또는 '신경영 선언[22] 당시 삼성의 2인자나 다름없었던 이수빈 현 삼성경제연구소 회장마저 그의 극단적인 질적 개혁안에 반대하다가 이건희가 화가 나 티스푼을 테이블 위로 던진, 일명 티스푼 사건도 이 때였다. 물론 화난다고 스푼을 던진게 잘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 개혁이 험난했으며 이건희가 생전 회사 내에서 신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한 것이 괜히 형성된게 아니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23] 심지어 상당한 질적 개혁이 이루어지고 난 1990년대에서도 선진국에서는 삼성을 'Sam-Suck'이라 부르며 2류 기업 취급하는 분위기가 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한거다.[24] 계열사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재단인 데다가, 이 재단들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어서 재계에서는 사실상 삼성을 승계했다고 판단한다.[25] 그런데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이 빈소 사진을 찍어 SNS에 공개하는 바람에 비판을 받았다.[26] 워낙 값어치가 있는데다가 규모 또한 어마어마해 가치가 2 ~ 3조원 내지는 10조원 규모로 추정된다.[27] 원래는 "첨단 산업인 반도체 공장 건설에도 도장 1천개가 필요하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무분별한 기업규제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좌우를 막론한 수많은 칼럼니스트들이 제 입맛에 맞게 가져다 쓰기 시작하면서 오용된 말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말을 들은 4류 김영삼 대통령은 격노하였고 이건희는 일본으로 반도피성 체류를 떠나게 된다. 한국에 남은 삼성 임원들도 김영삼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YS 방미 당시 500만 달러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비용을 기부하고, 파격적인 중소기업 상생방안을 발표하는 등 YS 정부에게 기었다.[28] 김종인은 이 발언을 민간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넘어서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함축한 발언이며, 더 나아가서 이젠 더 이상 정부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 혹은 오만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29] 토모 타바타(tomo tabata) 작품.[30] 실제로 본인도 회의 때 "나에게는 약점이 하나 있네. 바로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네"라는 자기 평가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31] 특히나 다른 건 몰라도 성매매 논란과 무노조 경영은 그가 심하게 욕 먹는 요소들이다. 성매매의 경우 박유천의 사례와도 비교되면서 논란을 빚었고, 거기다 정준영의 성범죄와도 비교가 될 수 있다 보니 더더욱 논란이 셀 수 밖에 없다.[32] 삼성은 공장을 사업장이라고 칭한다. 사실 법적으로 보면 사업장이 맞는 표현이다.[33] 본상인 청중상은 브라질의 광산기업 발레(VALE)가, 심사위원상은 영국의 금융기업 바클레이즈가 선정되었다.[34] CCO, Chief Customer Officer. 고객 서비스 담당 총책임자 임원이다.[35] 에버랜드 전환사채의 중요 논점은 주주배정 방식의 신주발행을 시가 이하로 발행하는 것이 배임행위에 해당하느냐인데…사실 상법학계 쪽에서는 상법 424조의 2 불공정한 가액의 주식발행으로 인한 통모인수인의 책임은 제3자 배정과는 달리 주주배정 방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설이고 이러한 견해가 업무상 배임죄에 관한 대표이사의 임무 개념에 반영됐다.[36] 1인당 500만 원이라고 한다.[37] 중앙일보종합편성채널. 알다시피 중앙일보는 이병철이 창간한 신문이고, 현재 이건희의 처조카인 홍정도가 부회장이다. 현재 지분 관계가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보긴 어렵다. 게다가 이건희가 가장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가 JTBC의 전신이라 불리는 동양방송이다.[38] 성매매 관련 법률에 따르면 알선자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성매수자의 경우 1년 이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해진다. 물론 현실은 성매수자 초범은 성교육 이수 후 기소유예다(장애인 및 미성년자 성매매가 아닐경우).[39] 그런데 그 슬로프는 이건희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VIP용이다. 정설은 해 놓고 일반인들을 위해서는 잘 쓰지 않다가 VIP들이 오면 사용한다. 다른 데는 의자형 리프트 체어들만 매달려 있는데, 이 황제 슬로프는 군데 군데 곤돌라의 밀페된 케이불카가 매달려 있다. 강습도 1:1 기준 2~3시간 강습에 50만 원 이상 하는 데몬스트레이터급의 스키 스쿨 고참 강사가 두 명이 붙어서 곤도라 탈 때 스키도 들어 주고, 놓아 주고 신겨주고 하면서 가르친다. 300만 원 정도면 이용할 수 있을 듯 하니 돈이 남으면 이용해 보자.[40]홍라희의 동생이다. 남동생 중 막내.[41] 2015년 보광그룹은 STS반도체를 정리하게 된다. 명목적 이유는 2013년부터 지속된 반도체 업계의 불황이지만 사실 삼성이 생산라인을 확충하는 바람에 삼성과의 거래관계가 끊어져서 그렇다. 물론 이 기사의 배경인 2009년에는 멀쩡히 보광 계열사로 영업 잘 하고 있었다. 보광그룹에 대한 기사[42] 현. 부산교대부설초등학교.[43] 태어난 특정 지역의 사람이라 한다면 적어도 학교는 그 지역에서 나왔어야 한다.[44] 물론 국립 초등학교는 공립 초등학교와는 다르게 사립학교에 준할 만큼 교육의 질이 매우 좋다. 단지 학비가 무료일 뿐이다. 중/고등학교는 일반적인 공립학교와 다를 바 없으며, 사립학교도 뺑뺑이 돌려서 배치되는 곳은 공립학교와 다를 바 없다.[45] 공립학교 출신의 정치가, 기업가들도 많은 것을 보면 사립학교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46] 경기고, 부산고, 경북고 등[47] 레슬링협회장, 대한체육회 이사를 거쳐 1996년 IOC 위원에 당선되었다.[48] 나중에는 현명관 삼성물산 회장,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등 그의 경영 참모들이 구단주 역할을 대리했다.[49] 그가 야구장에 갈 때마다 라이온즈가 패하는 징크스가 있었다고 한다.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때도 처음에는 자택에서 TV로 중계를 보다가 삼성이 리드를 잡자 잠실야구장으로 향했는데 하필 야구장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은 순간 장효조의 결정적 수비 실책(일명 '만세 사건')이 터지면서 경기가 꼬이기 시작했고 결국 유두열의 역전 홈런과 최동원의 역투로 팀이 준우승하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다. 이후 단 한 번도 야구장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라이온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상당했다. 대조적으로 아들 이재용은 야구장에 갈 때마다 승리하는 이른바 '재용불패' 징크스가 유명했다.[50] 2014년 병환으로 쓰러져 있을 때에는 병원 측에서 의식이 깨어나도록 그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틀어줬는데 자주 보던 스타워즈 시리즈삼성 라이온즈 경기 등을 보여줬다고 한다.[51] 22번 차량이다. 1996년에 구매했다가 2007년에 익명의 영국인 수집가에게 매각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해당 구매자는 바로 다음해에 이 차를 몰다가 사고를 냈다.[52] 다만 후에 반납했다는 말을 보아 아직까지 소유 중인듯 하다.[53] 근데 계약금은 구매자가 돈이 있냐 없냐를 떠나서 앞으로 구매절차에 대한 담보적 성격이기 때문에 받는 게 옳다. 예를 들면 돈이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차를 구매하기로 해서 영업사원이 이런저런 절차를 다 거쳐놨는데 갑자기 안 산다고 하면 영업사원 입장에서는 손해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 손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 받아두는 것이다.[54] 장녀 이부진의 남편 임우재도 오랜 세월 동안 삼성물산 사원 출신으로 삼성그룹 봉사활동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혼 뒤 본인 스스로 삼성에스원 소속의 경호원이었으며 경호를 하다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가게 됐었다고 진상을 밝힌 바 있다.[55] 대한생명 인수에 나서기 전 김승연이 이건희를 찾아와서 "형님! 금융 사업의 노하우를 전수해주시면 형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잘 해보겠습니다"라고 조언을 구했다. 이후 이건희는 김승연에게 많은 조언을 전했고 결국 생명보험사 인수에 성공해 한화생명을 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키우게 된다.[56] 반대로 김승연 회장이 어린 나이로 회장직에 급작스레 올랐을땐 이병철 회장이 김승연 회장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57] 이후엔 자손들인 이재용과 김동관이 서로 성사 시켰고, 서로에 대한 그간의 믿음 덕분에 기업 실사도 생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