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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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공화국 국방총장기.svg
베트남 공화국 국방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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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CC0000><width=25%> 초대 ||<width=25%> 제2대 ||<width=25%> 제3대 ||<width=25%> 제4대 ||
||<height=50><rowbgcolor=#fff,#010101> 응오딘지엠 || 쩐티엔키엠 || 쩐반돈 || 쩐티엔키엠 ||
||<width=25%>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height=50><rowbgcolor=#fff,#010101> 응우옌카인 || 쩐반흐엉 || 쩐반민 || 응우옌반티에우 ||
||<width=25%>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height=50><rowbgcolor=#fff,#010101> 응우옌후코 || 까오반비엔 || 응우옌반비 || 쩐티엔키엠 ||
||<width=25%> 제13대 || || || ||
||<height=50><rowbgcolor=#fff,#010101> 쩐반돈 || || || ||
||<-3>||


제5대 베트남 공화국 국방총장
응우옌카인
阮慶 (완경) | Nguyên Khánh

파일:응우옌카인.jpg
출생
1927년 11월 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짜빈
사망
2013년 1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
국적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display: none; display: 베트남 공화국"
행정구
]]

학력

직업
군인, 정치인
최종 계급
대장
경력
베트남 국방총장
1964년~1965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편집]


남베트남의 군인,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1946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55년부터 1965년까지 남베트남 육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64년 1월 30일에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즈엉반민을 축출시키면서 남베트남의 총통 권한대행, 수상을 역임했고, 이 시기 프랑스군식 편제에 머물러있던 남베트남군을 미군식으로 개혁했다. 하지만 1965년 응우옌반티에우를 비롯한 군부 내 강경파에 의해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1977년 자신의 아내,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베트남계 기업에서 근무했다. 2005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리틀 사이공(Little Saigon)을 본거지로 하는 망명 정부 조직인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3. 평가[편집]


응우옌카인 장군의 실패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일어났다. 첫번째, 그는 기본적으로 외톨이였다. 그는 어떤 집단의 구성원도 아니었다. 둘째, 그의 개인적인 야망이 너무 티나서, 그에게 신세를 졌기에 그를 지지했어야 할 급진파들조차 거부감을 느낄 정도였다. 셋째, 1964년 1월 30일 쿠데타 때부터 그의 진정하고 유일한 동맹이었던 미국 정부와 대사를 적대하면서, 카인은 사실 그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렸다.

- Vinh-The Lam, 저서 'The History of South Vietnam - Lam: The Quest for Legitimacy and Stability'에서


즈엉반민의 군사혁명위원회는 민 본인이 위원회 내에서 압도적인 힘이 있던 게 아니라 내부의 의견 정리도 제대로 못 하는 바람에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는데, 응우옌카인이라고 다를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즈엉반민처럼 사이공 전투라는 공적으로 나름의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카인의 입지는 오히려 민보다도 불안정했다.

즈엉반민보다 발전한 것이 하나 있다면, 민간정부의 수장으로 응오딘뉴의 꼭두각시였던 응우옌응옥터를 앉혀 권위 없는 정부를 만든 것과 달리, 지엠 정부 당시 야당이었던 정치인들을 앉혀서 지엠과의 연관성을 줄이고 나름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지가 하필 북베트남 치하와 지엠 정권에서 극도의 탄압을 받아 당 조직력에 큰 타격을 입었던 대월당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명망이 전혀 없던 카인으로써는 독립운동 경력+지엠 독재정권 시절 반정부 운동 경력을 가진 대월당의 명분이 매력적으로 보였을 수는 있지만, 카인이 가진 다른 단점이었던 정치적 고립성을 해소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카인이 부수상으로 임명했던 Nguyễn Tôn Hoàn은 지엠에게 탄압받고 망명해있던 야당 인사로써 나름의 집권 명분은 존재했지만, 오랜 망명 생활로 인해 당을 확실하게 장악할 기반은 없었다. 결국 대월당은 제대로 여당으로써 기능하지 못하고 일부는 카인과 협조하는 반면, 일부는 카인에 대한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쿠데타를 획책하는 등 대월당 내부조차도 반목에 휩싸였다.[1] 대월당 외에 까오다이교, 호아하오교 같은 종교파의 잔존 인사들도 일부 초청했으나,[2] 민정 쪽 비중이 대월당에게만 기울어 있었기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도 없었고 카인이 종교파 쪽 종교 신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은 당연히 되지 못했다.

스스로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젊은 장교들을 승진시키고 파벌을 만들었으나, 정작 카인 본인이 군사적으로 너무 무능했기 때문에 이런 젊은 급진파 장교단조차도 카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장 이들 중 하나인 응우옌까오끼[3]부터가 65년 쿠데타에서 카인을 몰아내는 데 협조했다. 한편으로는 이들 장교단이 민정 회복 기회를 망친다고 본 미국과도 반목이 생기면서 카인은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던 미국 정부와의 사이마저 악화되었다.

사실, 군사적, 정치적 능력이 없는 주제에 야심만 컸던 응우옌카인, 명성은 있었으나 당 조직력이 모래알이었던 대월당, 그리고 힘은 압도적이지만 현지 사정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하면서 개입했던 미국 정부의 콜라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만남이었다. 이 셋 중에 가장 문제가 많았던 건 당연히 카인 본인이다.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정치적인 아군이 없고, 그 아군을 늘릴 생각을 하긴 커녕 정적만 늘리기 바빴던 카인은 남베트남의 수장으로써의 권력을 제대로 활용할 능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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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nh-The Lam의 책에 나온 CIA의 대월당에 대한 평가: 대월당은 비슷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공동 이익을 위해 모인 개인 정치가들의 파벌 집단 이상이었던 적이 없었다. 최소한 1955년부터, 당 중앙 조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2] 지엠보다는 나은 점이다. 하지만 카인 본인이 지엠보다 훨씬 무능했기에 소용이 없었다.[3] 응우옌반티에우 민정에서 부총통을 역임했던 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