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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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유중용(柳重容)

성관(盛寬)
본관
고흥 유씨[1]
출생
1875년 8월 21일[2]
충청도 목천현 이동면 지령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418번지)
사망
1956년[3] 4월 7일 (향년 80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유중권은 그의 형, 이소제는 형수, 유우석·유관순 남매는 조카, 유예도는 장녀이다.

2. 생애[편집]


1875년 8월 21일 충청도 목천현 이동면 지령리(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418번지)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유윤기(柳潤基, 1845. 3. 23 ~ ?. 5. 19)와 어머니 전주 이씨(1854 ~ ?. 1. 30)[4]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5] 일찍이 개신교로 개종해 교사로 근무하면서 고향 지령리의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에 천안군 갈전면(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조인원태극기와 함께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형 유중권, 형수 이소제, 딸 유예도, 조카딸 유관순,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김상헌(金尙憲), 김상훈(金相訓), 김상철(金相喆), 조병호(趙炳鎬), 이순구, 한동규(韓東奎) 등을 비롯한 3,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여세를 몰아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군 헌병들이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주재소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형 유중권과 형수 이소제 등이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에 유중권의 시신을 둘러 메고 주재소로 달려간 뒤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매며 헌병보조원 맹성호(孟星鎬)[6]에게 "너희는 몇 십 년이나 보조원 노릇을 하겠느냐"며 일갈하는 등 유혈 진압에 대해 항거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다소 감형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했으나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21년 5월 10일 만기출옥한 뒤에는 은거하다가 1956년 4월 7일 별세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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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상공파(檢詳公派) 26세 중(重) 항렬.[2]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 2심 판결문에는 8월 22일생으로 기재돼 있다.[3] 고흥류씨세보 권1 1215쪽에는 1959년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4] 이두건(李斗建)의 딸이다.[5]유중권은 아버지 유윤기의 첫째 부인 전주 이씨(? ~ ?. 5. 19) 이인채(李寅采)의 딸 소생이다.[6] 이후 충청남도 도순사(道巡査)가 되었고, 1927년 12월 31일에 정근증서(精勤證書)를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