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로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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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Jewish–Roman War

1. 개요
2. 원인
6. 결말
7. 참고자료



1. 개요[편집]


유대인로마 제국의 통치에 대항해 일으킨 여러 전쟁을 부르는 명칭.

좁은 의미의 유대-로마 전쟁은 제1차 유대 전쟁만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의 유대-로마 전쟁은 키토스 전쟁과 바르 코크바의 난도 포함한다.


2. 원인[편집]


유대인은 특유의 문화와 종교로 인해 헬레니즘 시대에도 대다수가 동화를 거부했고, 헬레니즘 국가들이 몰락한 뒤에 그 자리를 대신한 로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는 처음 유대인과 접촉한 뒤에는 유대 지역에는 시리아 총독 휘하의 장관을 파견했고, 친로마 왕조인 헤로데 왕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황제를 사후 신격화하는 로마의 문화는 헬레니즘 시기와 마찬가지로 유대인과는 영 맞지 않았고[1], 유대 내부에서도 독립을 주장하는 열심당이 암약하면서 유대의 정세는 불안해졌으며, 결국 네로 황제의 재위기간 후반에 유대인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진다.

유대 땅이 쓸모없는 불모지였다면 로마도 '그냥 자기들끼리 살든가 말든가 내버려 두자'라며 포기할 가능성도 있었지만,유대 지역을 포기하기엔 로마로선 너무 아까운 땅이었다. 동서 무역의 거점이자 중동 전선의 축인 시리아 지역과 로마에서 가장 경제적 가치가 큰 이집트를 육로로 연결하는 중요한 루트가 이 유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많은 비용과 인력을 들여서라도 이 유대 땅을 확보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이 전쟁이 벌어진 것.

3. 제1차 유대-로마 전쟁(66년~71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제2차 유대-로마 전쟁 (115년~117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유대-로마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란을 진압한 루시우스 퀴에투스 장군의 이름을 붙인 키투스 전쟁으로도 불린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재위 기간인 115~117년에 걸쳐 키레나이카, 이집트, 키프로스 속주에서 일어났고 2년 만에 진압되었다.


5. 제3차 유대-로마 전쟁 (132년~135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3차 유대-로마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란 주동자인 바르 코크바의 이름을 붙인 바르 코크바의 난으로 널리 알려진 전쟁.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재위 기간인 132~135년에 걸쳐 일어났으며, 주동자인 바르 코크바는 당시 유명한 랍비였던 아키바 벤 요셉에게 메시아로 인정받은 뒤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대부분을 석권했으나 3년 만에 진압되었다. 바르 코크바는 전사했고, 아키바는 로마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추방한 뒤, 예루살렘을 로마식 이름인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개칭하며, 유데아 속주를 팔레스티나 속주로 바꿨다.


6. 결말[편집]


유대인은 영토와 국가를 잃고 나라 없는 민족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도 잃었기 때문에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기존 종교 의식을 거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랍비를 중심으로 개편되며, 사두가이파에세네파가 소멸했다.

또한 본격적으로 로마의 유대 박해가 시작 되었고 전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였기에 유대인 혐오는 전유럽에서 중세와 근대까지 지속 되었다.


7.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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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유대인은 그리스 다신교를 강요하던 셀레우코스 왕조마카베오 전쟁으로 몰아낸 적이 있었으니 로마의 통치를 반길 이유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