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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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유교희(柳敎熙)
자 / 호
성목(聖穆) / 일성(一醒)
본관
전주 류씨
생몰
1886년 10월 3일 ~ 1965년 12월 17일
출생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박곡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1]
사망지
경상북도 안동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유교희는 1886년 10월 3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박곡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유연성·유동수·박재식·이강욱(李康郁)등과 함께 편항 시장내의 공동 타작장에 모여서 장날인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그 진행방법으로써 만약 일본 경찰이 제지하면 편항주재소까지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각각 인근 부락 지역민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여 동참케 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은 박곡동과 수곡동 주민을 담당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 500여명의 독립만세시위 군중이 편항시장에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때 주재소에서 2명의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유연성을 강제로 체포해가자, 계획대로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위협사격을 가하자 시위군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유교희 등의 지휘아래 투석과 몽둥이로 주재소와 순사의 숙사를 파괴하고 공문서도 파기하였다. 계속 여세를 몰아 임동면사무소까지 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와 비품을 파기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건물 파괴·가택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동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5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유교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갈전리·고천리·수곡리와 함께 전주 류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