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트 체임벌린

덤프버전 :


윌트 체임벌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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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972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www.hoophall.com/529ad33867ead3ff870e81b56342a36f_f279.jpg
윌트 체임벌린
헌액 연도
1979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No. 13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No. 1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 13
윌턴 노먼 체임벌린
Wilton Norman Chamberlain

출생
1936년 8월 21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사망
1999년 10월 12일 (향년 63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신학교
캔자스 대학교
신장
216cm (7' 1")[1]
체중
124kg (275 Ibs)[2]
윙스팬
234cm (7' 8")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59 Territorial 드래프트[3][4]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지명

소속 팀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1958~1959)
필라델피아-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 (1959~1965)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65~1968)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68~1973)
등번호
13번 - 워리어스 / 필라델피아 / 레이커스

1. 개요
2. 수상 내역
3. 플레이 스타일
4. NBA Career Statistics
5. 기록
7. 일화, 떡밥
8. 기타
9. 압도적인 개인 기록에 비해 우승을 많이 하지 못한 이유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a.espncdn.com/la_lakers_legends_02.jpg


미국의 前 농구선수. 포지션은 센터. 단일 시즌 PER 역대 2위[5][6]를 비롯해 수많은 기록을 써 내려간 선수다.

한 경기 최다 리바운드, 득점 기록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역사상 유일한 3만 득점[7] - 2만 리바운드[8]의 기록 보유자다.

별명으로 'Wilt the Stilt', 'The Big Dipper', 'The Record Book'이라 불렸다. 국내에서는 '고대굇수' 가 대표적.

2.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png NBA 챔피언 2회 (1967, 1972)
파일:NBA-Champion.png NBA 파이널 MVP 1회 (1972)
파일:NBA 로고.svg NBA 정규시즌 MVP 4회 (1960, 1966-1968)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7회 (1960-1962, 1964, 1966-1968)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13회 (1960-1969, 1971-1973)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전 MVP (1960)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세컨드 팀 3회 (1963, 1965, 1972)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2회 (1972-1973)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신인상 (1960)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득점왕 7회 (1960-1966)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11회 (1960-1963, 1966-1969, 1971-1973)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1968)
파일:NCAA 로고.svg NCAA 토너먼트 MOP (1957)
파일:HOF-Logo.png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79)

3. 플레이 스타일[편집]


NBA 역사상 최고의 피지컬[9]을 이용한 공격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만능 토탈 패키지. 페인트존 내에서 모든 득점이 그의 오른손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의 필살기로는 'Lay down'이 있었다. 보통 선수들은 레이업을 하면 공을 살짝 올려놓는다는 느낌이 되니까 상황이 맞으면 블록을 당할 수도 있는데, 윌트는 팔을 쭉 뻗으면 공이 이미 림보다 위에 올라가 있으니 핑거롤 형식으로 내려보내기만 하면 슛이 되는 것이다. 림을 향해 내려오는 공을 건드리면 당연히 골텐딩. 사기적인 팔길이에서 구사하는 레이 다운은 그 시대 모든 선수들의 골칫거리였다.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드리블이나 슛 같은 게 현대 기준으로 엉성해 보일 수 있지만, 1960년대 기준으로 보면 탑클래스의 기술적인 센터라 평할 수 있다. 그 당시에도 체임벌린에게 기술적인 점을 문제 삼자 페이더웨이 슛을 장착했고, 패스를 문제 삼자 패스에 눈을 떠서 그 해 어시스트 왕을 차지한다.

또한 그의 점프력은 자유투 라인에서 한 발 도약으로 레이업이나 덩크를 성공시켰을 정도로 뛰어났다.[10] 자유투 시 라인을 넘으면 안된다는 룰[11]이 이 때문에 생겼다.

가장 큰 단점은 역시 자유투. 통산 성공률이 51.1% 밖에 안 될 정도로 낮다.[12] 오늘날 종종 비교대상이 되는 샤킬 오닐의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52.7%이다.

특히 1968년에는 38.7%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2015~16년 안드레 드러먼드가 35.5%로 경신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단일시즌 자유투 최저 성공률 1위를 지키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이 기록을 포함해 역대 10위 안에 3시즌이나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샤크는 대선배 덕분에 13위에 머물 수 있었다.


4. NBA Career Statistics[편집]


[ 정규시즌/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 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
턴오버
트루슈팅
PER
59-60
72
46.4
.461
-
.582
37.6
27.0
2.3
-
-
-
.493
28.0
60-61
79
47.8
.509
-
.504
38.4
27.2
1.9
-
-
-
.519
27.8
61-62
80
48.5
.506
-
.613
50.4
25.7
2.4
-
-
-
.536
31.7
62-63
80
47.6
.528
-
.593
44.8
24.3
3.4
-
-
-
.550
31.8
63-64
80
46.1
.524
-
.531
36.9
22.3
5.0
-
-
-
.537
31.6
64-65
73
45.2
.510
-
.464
34.7
22.9
3.4
-
-
-
.513
28.6
65-66
79
47.3
.540
-
.513
33.5
24.6
5.2
-
-
-
.547
28.3
66-67
81
45.5
.683
-
.441
24.1
24.2
7.8
-
-
-
.637
26.5
67-68
82
46.8
.595
-
.380
24.3
23.8
8.6
-
-
-
.557
24.7
68-69
81
45.3
.583
-
.446
20.5
21.1
4.5
-
-
-
.567
21.9
69-70
12
42.1
.568
-
.446
27.3
18.4
4.1
-
-
-
.554
24.8
70-71
81
44.3
.545
-
.538
20.7
18.2
4.3
-
-
-
.558
20.3
71-72
82
42.3
.649
-
.422
14.8
19.2
4.0
-
-
-
.610
18.5
72-73
82
43.2
.727
-
.510
13.2
18.6
4.5
-
-
-
.689
19.1


[ 플레이오프/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 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
턴오버
트루슈팅
PER
59-60
9
46.1
.496
-
.445
33.2
25.8
2.1
-
-
-
.498
27.0
60-61
3
48.0
.469
-
.553
37.0
23.0
2.0
-
-
-
.492
26.7
61-62
12
48.0
.467
-
.636
35.0
26.6
3.1
-
-
-
.508
29.7
63-64
12
46.5
.543
-
.475
34.7
25.2
3.3
-
-
-
.543
31.3
64-65
11
48.7
.530
-
.559
29.3
27.2
4.4
-
-
-
.550
27.1
65-66
5
48.0
.509
-
.412
28.0
30.2
3.0
-
-
-
.500
26.0
66-67
15
47.9
.579
-
.388
21.7
29.1
9.0
-
-
-
.546
25.3
67-68
13
48.5
.534
-
.380
23.7
24.7
6.5
-
-
-
.511
22.7
68-69
18
46.2
.545
-
.392
13.9
24.7
2.6
-
-
-
.518
18.3
69-70
18
47.3
.549
-
.406
22.1
22.2
4.5
-
-
-
.528
20.3
70-71
12
46.2
.455
-
.515
18.3
20.2
4.4
-
-
-
.479
19.1
71-72
18
46.9
.563
-
.492
14.7
21.0
3.3
-
-
-
.562
17.8
72-73
17
47.1
.552
-
.500
10.4
22.5
3.5
-
-
-
.556
16.7


5. 기록[편집]


파일:external/img.scout.com/wilt%20cham.jpg
NBA를 넘어 스포츠 역사상 가장 깨지기 힘든 기록을 여럿 만들어냈다. 오죽하면 대기록을 만든 선수가 나올때마다 같이 등장한다.
단일 시즌 PPG 역대 1위 (50.4), 통산 PPG 역대 2위 (30.1)
단일 시즌 RPG 역대 1위 (27.2), 통산 RPG 역대 1위 (22.9)
단일 시즌 PER 역대 2위 (31.82), 통산 PER 역대 6위 (26.13)[13]
단일 시즌 WS 역대 2위 (24.98), 통산 WS 역대 2위 (247.26)
단일 시즌 MPG 역대 1위 (48.5분)[14], 통산 MPG 역대 1위 (45.8분)

이 외에도 한 경기 100득점 기록[15], 한 경기 55리바운드 기록[16], 65경기 연속 30득점 이상[17], 50득점 이상 경기 118회[18], 한 시즌 최다 평균시간출전 48.5분[19] 등등 농구를 넘어 스포츠 역사상 가장 깨지기 힘든 기록들을 많이 갖고 있다.

루키 시절 기록도 무시무시해서 데뷔경기에서 43득점 28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 43득점은 NBA 역대 데뷔전 최다 득점 기록이고, 시즌 총 2707득점(경기당 37.6득점)과 1941리바운드(경기당 25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 역시 NBA 역대 루키시즌 최다 득점과 최다 리바운드 기록이다.
참고로 루키 시즌 윌트의 평균득점기록인 37.6점보다 뛰어난 기록을 낸 NBA선수는 아무도 없다. 엘진 베일러가 61-62시즌에 38.3점을 기록했지만 48경기 출전에 그쳐 인정되지 않고, NBA 역사에서 평균 37점을 넘은 선수는 윌트 외엔 오로지 마이클 조던 뿐이다.(86-87시즌 37.1점) 평균득점으로 NBA역대 순위를 내면 1~4위가 윌트, 5위가 조던이다.

NBA는 이러한 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페인트 존을 넓히고, 수비자 3초를 등 부단히 룰을 바꿔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50-30을 밥먹듯이 하였고, 한 번은 시즌 평균으로 50.4 득점을 한 적도 있다.[20]

당시에는 블록 슛이 집계되지 않아서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기 힘들었다보니 역대 4위밖에(?) 되지 않는다.만약 그 당시 블록 슛이 집계 되었다면 쿼드러플-더블, 트리플-더블 기록이 다시 쓰였을 거라는 의견이 다수이다. 블록이 공식기록이 아닌 걸 알면서도 체임벌린이 너무 대단해서 따로 집계했다는 기록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의 기록을 보면 경기당 10개는 기본적으로 넘어가는 수준이었기 때문. [21] 다만 당시 블록 슛 규칙이 거의 없어 지금으로치면 골텐딩인 것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지금까지 뛰었던 모든 선수들 가운데 단 둘 뿐인[22] 더블 트리플-더블[23]을 달성했던 선수이다. 1968년 2월 2일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경기에서 25득점, 22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했었다.

또다른 기록은 1966년과 1967년에 기록한 +30득점 동반 야투율 100%의 트리플 더블 기록이었는데, 이것도 50여 년 동안 체임벌린만이 기록하고 있었다가 2018년 10월 21일 니콜라 요키치가 35득점 12리바운드 11어시스트 야투율 100%의 기록으로 기록했다.

6. vs 빌 러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윌트 체임벌린 vs 빌 러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일화, 떡밥[편집]


빌 러셀보스턴 셀틱스 때문에 우승은 단 2회에 그쳤지만 체력/신체에 관해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무수한 일화들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기록들을 보다보면 한 경기 30-20 정도는 겨우?라 생각하게 될 정도.

결론적으로 엄청난 운동능력의 소유자이다. 캔자스 대학 시절에는 육상 종목에서 우승을 휩쓸기도 하고, 힘이 엄청나게 세서 내기 팔씨름으로 용돈벌이를 했다고 할 정도이다.

NBA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팀동료였던 게리 와드는 이렇게 말했다.

"체임벌린이 나나 빌리를 데리고 밖에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사람들이 항상 그를 둘러싸고 사인을 요청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어느날 밤 홈경기가 끝난 후 우리 셋은 필라델피아 중심가를 걷고 있었죠. 밤 11시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나처럼 해봐요' 놀이를 하면서 가고 있었죠. 다른 모든 세 젊은 독신남이 모이면 그렇듯 바보스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기둥 하나와 마주쳤는데, 마침 체임벌린의 차례가 되었었죠. 그는 두 팔을 벌려서 기둥을 끌어안더니 자기 몸을 공중으로 들어올려서 기둥과 45도의 각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공중에 자기 몸을 고정시킨 자세로 대략 1분 정도를 버티다[24]

가 내려왔죠. 빌리와 나도 시도해봤습니다. 우리는 공중으로 발을 박차고 올라갔지만 그 즉시 땅으로 떨어졌죠. 두 명 다 단 1초도 그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25]

2000년대 핸드폰 가로본능 cf에 나왔던 무브로 카포에라나 올드스쿨 비보잉에 있는 기술이다. 체중대비 엄청난 코어힘이 있다면 가능하고 일반인중에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하반신의 길이, 즉 키가 클수록 어렵다. 180이상만 되도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동작이다.



큰 키에 팔길이까지도 무지막지하다.

윌트 체임벌린 시대의 농구 룰에 대한 자세한 설명


나중에 무릎을 다쳐 운동 능력을 상실하지만 그 몸으로 카림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도 블록했다. 부상으로 운동 능력을 많이 잃은 상태에서도 저 정도... 그러나 이 장면은 잘보면 첫번째 슛은 스카이 훅슛보단 일반적인 훅 슛에 가깝고, 두번째는 골텐딩이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배구 홍보차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는데, 마침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연습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선수들이 뛰는 모습이 기특했던 건지 그 특유의 과시욕이 불타올랐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풀이로 나선 연습 경기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 매직 존슨의 공을 블록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그냥 넘어갔으면 될 일을 당돌한 매직 존슨이 "님 반칙해놓고 왜 모른 척? 뻔뻔하네염 'ㅅ'"라고 대선배 체임벌린에게 함부로 떠들었던 것. 순간 새파란 아들뻘에게 모욕을 당한 체임벌린의 얼굴은 금방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곧 그는 손가락을 들어 매직을 겨냥하였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 경기장에서 레이업은 없다." 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말대로 상대팀 선수들[26]의 모든 골밑공격만을 블록으로 막았다. 그 연습경기 내내 매직은 단 한 번의 골밑 득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매직 +4인과 대굇수 윌트 체임벌린의 난잡한 골밑 공성전은 래리 브라운의 입에서 나온 목격담이다.

다만 이런 일화가 항상 그렇듯 과장이 섞여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이때 코트에 있을게 분명한 카림 압둘자바는 체임벌린만큼 크고 11살이나 어리다. 압둘자바의 데뷔 당시 전성기가 한참 지났던 체임벌린은 현역시절 매치업에서도 압둘자바에게 밀렸는데[27] 은퇴한지 한참 지난 이때, 아무리 골밑만 막았다고 한들 현역인 압둘자바에게 단 한 차례의 골밑공격도 허용하지 않았을까? 체임벌린은 은퇴 후 압둘자바의 데뷔(물론 당시 이름은 이슬람 개종 전이라 루 앨신더) 시절에 대해 "내가 누군가를 막는데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고 회고한 적 있다.

사실 체임벌린에 대한 일화들은 미국인들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해서 들어야 한다. 상당수 미국인들, 특히 스포츠 선수들은 원래 대단한 일을 설명할 때 악의없이 과장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고 이것 때문에 직접 보고 들은 얘기를 전할 때도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도미니크 윌킨스의 경우 래리 버드에게 4쿼터에만 20점을 얻어맞아 역전패한 경기를 두고 "그 중 하나는 왼손 3점 슛이었다"고 하지 않나[28], 로버트 오리는 전 동료인 팀 던컨보다 또 다른 동료인 하킴 올라주원20배는 더 잘한다고 하지 않나, 얼 매니고트 등 길거리 농구에 대한 믿기지 않는 일화 등 (체임벌린과 닥터 J가 발렸다든가)이 있다. Open Court같은 NBA 관련 토크쇼를 보다보면 이런 식으로 "단 한 개의 슛도 못 넣었다," "50점은 넣었다"고 하는 식의 일화가 많은데, 실제 기록을 찾아보면 다른 경우가 많다.

가장 비슷한 경우가 크리스 웨버의 드림팀과의 일화로, 그랜트 힐, 바비 헐리, 웨버 등이 속한 대학선발팀은 전날 드림팀과의 연습경기에서 놀랍게도 승리했다. (물론 이와 관련해 여러 논란이 있다. 조던이 거의 뛰지 않았다던지...자세한 것은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고) 그리고 다음날 웨버는 칼을 갈고 나온 드림팀에게 쳐발렸다고 하면서, "우릴 완전 박살냈지. (They killed us). 단 한 점도 못 넣었어. 레이업이던, 자유투건..."이라고 했는데, 농구 특성상 풀경기를 뛰면서 체격과 운동능력이 대등한 팀을 무득점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기량은 드림팀이 압도적이었지만 웨버나 힐같은 선수들은 드림팀 선수들도 부담스러운 체격과 운동능력을 지닌 선수들이었고, 드림팀의 가장 큰 약점인 "작고 재빠른 단신선수에 대한 수비"를 잘 공략하는 헐리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드림팀을 상대로 가장 적게 득점한 팀이 앙골라로 고작 48점 득점했는데(68점차로 패배) 앙골라는 키도 작지만 7, 80kg대의 갈비씨들이 빅맨을 볼 정도로 체격이 형편없었다. 그런데도 48점이나(?) 넣은 것.

즉, 농구에서 성인 프로급 이상 레벨에서는 아무리 미친듯이 수비를 해도 경기 내내 무득점은 결코 불가능하다. 래리 브라운의 증언도 이런 식의 과장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미국인들의 화법상 누군가 얘기를 할 때 관심이 없어도 리액션을 크게 하는 경우가 많고, 얘기를 할 때도 담담하게 하기보다는 과장되게 액션과 단어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소 과장법이 섞이는 경우가 많다.[29]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심한게 스포츠계이다.

또한 윌트의 육상 실력에 대한 기록도 과장이 심한데 실제로 윌트 체임벌린에 대해 가장 널리 인용되는 코멘트는 1955년(윌트가 대학에 입학한 연도다) 당시 스포팅 뉴스에서 캔자스 대학을 인용한 멘트로 "필라델피아의 오버브룩 고등학교 재학 시절 높이뛰기 6피트6인치(198cm)를 기록했으며 440야드를 49초만에 뛰었고 880야드를 1분58.3초만에 뛰었으며, 투표환을 58피트4인치 길이로 던졌고, 넓이뛰기 기록은 22피트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양덕이 윌트가 재학시절 실제 기록을 찾아본 결과 https://www.reddit.com/r/nba/comments/9akkos/debunking_most_every_wilt_chamberlain_track_field/ 해당 연도의 높이뛰기 기록은 6피트5.75인치에 불과하고 윌트가 아니었으며, 윌트의 기록 중 확인되는 최고기록은 6피트1인치인 등 저 기록들보다 명확히 낮은 기록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종합하면 윌트의 고등학교 시절 육상 기록은 필라델피아 공립학교 리그 챔피언십(Philadelphia Public League Championship)에서 두차례 높이뛰기 우승(5피트10인치, 6피트1인치), 투포환에서 한 차례 우승 (46피트10.5인치)를 차지한게 전부이며 전국 랭킹 안에 오르거나 주 챔피언을 딴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대학에서도 캔자스 대학이 속한 Big Seven 컨퍼런스에서 야외 높이뛰기 우승 1회, 실내 높이뛰기 대회 1회를 차지했으며, 육상분야에서 올아메리칸에 오르진 못했다.

즉 윌트는 전업선수가 아닌 기준에서 뛰어난 육상선수이긴 했으나 고등학교 때 주 챔피언이나 올아메리칸급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으며, 대학 때도 우승을 쓸어담거나 기록을 세우고, 올림픽에 선발될 만한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라이벌인 빌 러셀이 1956년에 6피트 9.25인치(206cm)를 뛴 기록이 2022년 기준 아직도 그가 재학했던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기록은 당시 세계 7위 수준이었으며, 당시 러셀과 같은 기록을 세웠던 찰리 듀마스는 그 해 올림픽에서 세계 최초로 7피트를 넘으며 금메달을 따낸다. 즉 점프 분야에선 러셀이 명확하게 윌트보다 한 수 위였다.[30] 물론 이는 순수하게 육상선수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고, 육상이 주종목이 아닌 농구선수가 육상에서 저 정도 기록을 냈다는 것을 보면 러셀이든 윌트든 규격 외의 괴물들인 것은 명확하다.

포인트는 이런 식의 과장은 별볼일 없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포장하는게 아닌 체임벌린이나 버드, 드림팀처럼 실제로 대단한 것을 더욱 대단하게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브라운의 일화나 여성편력이 엄청난 체임벌린 본인이 떠들어댄 "여자 2만명과 동침"이라든지, 체임벌린이 무려 500파운드를 벤치프레스할 수 있다고 한다던지[31][32], 퓨마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고 하던지... 체임벌린은 실제로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고, 그런 체임벌린의 대단함에 대해 떠드는 것을 체임벌린 본인도, 주변인들도 즐겼다. 그러다보니 그의 대단함에 대한 이런저런 과장된 일화들도 굉장히 많다. 문자 그대로 "전설적인" 인물.

보유하고 있는 대기록들과 신체능력 등으로 인해 아직도 농구팬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떡밥으로 등장한다. 그가 현재 리그에 등장한다면 명실공히 리그 최강의 센터가 되었을 거라는 편과, 당시 농구가 현대농구보다 상당히 낙후된 점을 들어 그 정도 대기록은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편이 대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의 축복받은 신체운동능력 만큼은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데뷔 시즌의 몇 없는 기록 영상들 중에는 리바운드를 잡자마자 무슨 퓨마처럼 달려서 레이업을 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림 위로 공이 올라올 무렵에 뒤에서 죽을 힘으로 따라오던 상대편 선수는 겨우 자유투 라인에 도달했다. 물론 같은 편에서는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다.

농구가 각종 구기종목 중 신체능력과 체격의 영향이 가장 큰 종목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언제 뛰었다고 해도 NBA를 지배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 조금 더 부풀려보자면 종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체의 소유자였다. 현대 농구가 센터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만일 오늘날에 윌트 체임벌린이 나타났다면 스피드, 체력, 내구성이 전부 최상이면서 키, 팔 다리 길이, 운동능력, 기술 등이 전부 최상급이기 때문에, 리그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건 물론이요 오히려 리그를 선도하면서 지배하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서 다시 센터 전성시대가 열렸을 가능성도 높다. 현 리그 최고의 몸뚱아리라는 르브론 제임스보다 거의 전 부분에서 비교우위를 가진 피지컬이니... 스몰 라인업은 도태된 전술로 여겨졌을 것이다.

신체능력은 역사상 최고였고 힘도 무시무시했고 상대 선수를 블록으로 깔아뭉갠 일화도 무수히 많지만... 다행히 성격은 착했다고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플레이어를 상대 선수들이 가만 안 놔뒀으리라는 건 안 봐도 당연한 일이고 실제로 폭력에 가까운 수비를 종종 했지만 경기 중에는 도를 넘어서는 정도만 아니면 보복하거나 같이 짜증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양반 성격이 드마커스 커즌스나 바이넘 같았다면 NBA는 폭력사건 때문에 1960년대에 문 닫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8.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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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놀드 슈워제네거, 안드레 더 자이언트와 함께. 가운데 슈왈제네거가 꼬마로 보이지만 188cm의 장신이다.[33]

  • 현재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체임벌린의 경기 영상은 다 전성기가 지난 이후의 모습이라 그의 최전성기 피지컬이 어느정도 수준이었는지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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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트 체임벌린 저택의 Love-making room, 즉 "사랑을 나누는 방"

  • 평생 독신이었지만 20,000명이 넘는 여인과 동침을 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34] 사실 정확한 수치를 밝힌 적은 없지만, 본인의 자서전 꼭대기에서 바라본 경관에서 "이 때까지 나는 리바운드를 잡은 숫자만큼 여자와 잤다"라고 했는데, 통산 기록이 2만 개가 넘기 때문... 자서전 출간일 기준으로 하루에 1.4명의 여성과 자야 가능한 수치이다. 데니스 로드맨은 훗날 이를 두고 "내가 계산해봤는데 2만명은 도저히 불가능함"이라 말하기도. 사실 이게 절대적 수치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냥 본인이 경기에서 리바운드를 밑도 끝도 없이 잡아대는 것처럼 동침을 밑도 끝도 없이 해댔다는 얘기에 더 가까워 보인다...고는 하지만 언론 인터뷰에서 절대적 수치이며 거짓은 없다고 본인이 언급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일에 14명의 여성과 동침했었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매일 1~2명과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고, 특별한 날에는 수십명과 한번에 관계를 하거나 하루에 여러번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가능은 아니다. 실제 킨제이 보고서에는 19세기 유럽의 평생동안 5만 명이 넘는 여성과 섹스를 한 남자의 기록이 매우 상세하게 실려있으며[35] 11살에 즉위한 아라비아의 이반 사드 왕은 일생동안 궁녀나 시녀 등 2만여명과 섹스를 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정작 체임벌린 본인은 이에 대해 후일 "천명의 여자와 한 번씩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 한 명의 여자와 천 번 사랑을 나누는 것이 낫다."라고 하기도.[36]

  • 과장이 섞일 수 있는 걸 감안하더라도 피지컬과 관련된 여러 괴물같은 일화나 증언들이 많다. 본인 주장으론 500파운드(220kg)을 벤치프레스 할 수 있었다던지(다만 위에 언급된 것처럼 사실일 가능성이 크진 않다.), 90kg이 족히 넘는 동료 2명을 멱살을 잡고 락커에 밀어서 들어올린 채 혼쭐을 내고 또 다른 선수를 위로 던져올렸다가 받는다든가, NBA팀원들을 보트에서 아기처럼 들어 내린다든가, 130kg에 육박하는 거구로 철봉도 아니고 기둥을 붙잡고 가로본능 자세로 1분 넘게 있다가 내려오고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든가[37], 전미 팔씨름대회 준우승자를 팔씨름으로 아이다루듯 이겼다든가[38], 퓨마를 맨손으로 죽인 적이 있다든가, 물론 위 일화들 중 상당수는 현재로썬 사실확인이 불가능하고, 미국인들 특유의 과장된 말하기 방식이나 너무 오래되어 와전되었을 가능성 등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 한 동료는 "체임벌린이 착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왼손 하나로 우리를 죽일 수 있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당대 NBA 선수 중에서도 체임벌린의 무력은 단연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과 달리 느바 내 폭력사태나 벤치클리어링이 숱했던 만큼, 체임벌린이 포악한 성격이었다면 정말로 사람 하나 죽었을지도 모를 일... 물론 체임벌린은 자신이 이성을 잃고 날뛰면 진짜 큰일이 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폭력적인 수비를 받으면서도 어지간하면 큰 반응없이 인내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다행이기도 하다.

  • 본 문서에 그의 성품이 플레이 스타일과 피지컬과는 별개로 섬세하고 온화했다는 내용이 적혀져있는데 실제로 그러하였다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유망주 모리스 스톡스와 그를 전재산까지 털어가며 도왔던 잭 트와이먼을 위해 열린 자선경기에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해 코트위를 빛냈으며 이후로도 여러 자선경기를 개최하는등 살아생전 죽는날까지 선행을 몸소 실천했던 성현이었다.

  • 은퇴 후 배구에 뛰어들어서 배구에서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되었다고 한다. # 오히려 농구보다는 배구 행정에 더 일을 많이 했다고. 그래서 배구 관련 인물 항목에도 올라와 있다.

  • 1992년부터 심장질환을 앓았는데, 1999년 로스앤젤레스의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뉴욕 닉스전에서 100득점한 그 날, 집이 뉴욕인 체임벌린이 뉴욕 닉스팀 보고 같이 버스 좀 타자고 말했다. 버스에서 자다가 잠결에 앞의 선수가 이야기하는 것 들었는데, 자기 욕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어쩔까 하다가 그냥 자는 척하고 도착하고 나서 태워다줘서 고맙고, 100득점 넣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집에 갔다...[39]

  • 몸담았던 3개의 프로구단에서 모두 영구결번이 되었다. 아예 타계 후 전구단 결번으로 지정된 빌 러셀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구단에서 영구결번이 된 선수. 당연히 3개 구단 영구결번은 역대 최초이다.

  • 22-23시즌부터 신인상의 이름이 윌트 체임벌린 상으로 변경되었다.

9. 압도적인 개인 기록에 비해 우승을 많이 하지 못한 이유[편집]


위에 언급되듯이 체임벌린은 개인 퍼포먼스와 스탯에 관해선 NBA역사 전체에서도 독보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이벌 빌 러셀이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와 거의 매년 플레이오프에서 붙으면서 단 한번을 제외하곤 매번 패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의아해하면서 "빌 러셀이 더 뛰어난 동료들과 뛰어서 그렇구나."하고 단정짓곤 하는데, 물론 전반적으로 러셀의 동료들이 체임벌린의 동료들에 비해 수준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팀 동료들의 수준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기 전까지 빌 러셀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렸고, 매직 존슨같은 선수들은 "조던은 최고의 선수지만, 빌 러셀은 최고의 승리자다."라고 하는 등 러셀은 단순히 동료복이 좋기만 한 선수는 아니었다. 또한 반대로 체임벌린의 동료들이 러셀보다 더 강한 적도 있었는데, 이때 체임벌린이 승리를 챙기지 못한 적도 있었다. 즉, 체임벌린의 압도적인 스탯에 가려진 점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 체임벌린은 물론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고 개인기량으론 가장 압도적인 선수였지만, '스탯 부풀리기'의 의혹이 있다.
100득점 경기 당시에도 약체 닉스를 상대하면서[40] 승부가 3쿼터에 사실상 갈렸는데도, 계속 뛰면서 4쿼터에만 당시 한쿼터 최다득점 기록이던 31점을 기록했다. 전설의 50-25 시즌 당시 그는 경기당 평균 48분을 넘게 뛰었는데, 이는 체임벌린의 우월한 신체능력을 보여주지만 뒤집어 말해보면 승부가 이미 갈린 상황에서도 계속 뛰면서 스탯을 쌓았다는 말이다.

그는 개인스탯에 매우 신경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고, 본인의 우월한 스탯이 본인이 러셀보다 우월한 근거라고 몇번이나 강조한 적이 있다. 전설적인 감독 잭 램지에 따르면 그는 경기 도중에도 본인이 얼마나 스탯을 기록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기록원에게 "내 리바운드 기록이 잘못 나왔다."고 지적한 다음, 고치는 것을 직접 확인한 적도 있다고 한다.

체임벌린은 빌 러셀을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25.7점을 기록했다. 그가 정규시즌에 러셀을 상대하면서 평균 34.4점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거의 10점 가까이 떨어진 기록이다. 또한 평균 50점을 기록한 1961-62 시즌의 경우 플옵 1라운드에서 37점, 2라운드에서는 보스턴을 상대로 33.6점을 기록했다. (통합 평균 35점)

그와 동시대 라이벌인 러셀과 비교해보면 체임벌린은 리바운드를 제외하곤 득점/어시스트/자유투성공률/필드골 성공률이 모두 플옵에서 정규시즌에 비해 하락했지만, 러셀은 필드골 성공률을 제외하고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자유투 성공률이 모두 플옵에서 상승했다. 체임벌린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득점원으로 평가받는 마이클 조던의 경우에도 플옵 득점 기록이 정규시즌에 비해 3점이나 높지만 체임벌린은 8점 가까이 떨어진다.

물론 체임벌린은 커리어 후반기에 득점보다 수비/리바운드/어시스트에 더 집중하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가 연속으로 득점왕을 차지하던 첫 7시즌만 놓고 보더라도 정규시즌에서는 39.6점, 플옵에서는 32.8점을 기록했다. 그는 플옵에서 최고의 득점원도 아니었다. 체임벌린이 포스트시즌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한 적은 단 한번, 1963-64 시즌(34.7점) 뿐이며 그 외에는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 등이 1위를 차지했다. 반면 조던의 경우 포스트시즌 13번 중 1위를 차지한 게 10번에 달한다. 물론 1985-86, 1986-87 시즌은 고작 3경기만 뛰어서 표본의 신뢰도가 떨어지지만 그 외에는 최소 16경기를 뛰며 1위를 차지했으며, 특히 우승을 차지한 시즌 중에는 정규시즌/플옵 평균/총득점 1위를 놓친 적이 한번도 없다. 반면 체임벌린이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정규시즌/플옵 평균이 24.1/21.7이었고 당연히 총득점 1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1962 플옵 당시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이 붙은 1차전에 대한 기사를 보면 1, 2번에서 지적한 점들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사에는 러셀이 이끄는 보스턴의 팀 수비 덕에 필라델피아를 117대 89로 승리했다고 나왔다. 당시 체임벌린은 33점을 넣었지만 전반전에는 빌 러셀 때문에 12점에 그쳤는데 이때 보스턴은 점수차를 15점까지 벌리며 승부를 사실상 결정지었다고 한다. 승부가 사실상 갈린 후반에 21점을 넣은 것인데, 스탯상으로는 체임벌린의 승리지만 진정한 승자는 중요한 순간에 체임벌린을 묶으며 팀을 승리로 이끈 러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체임벌린이 후반에 추가한 득점은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팀은 대패했으므로...

또한 최종 7차전에서는 정규시즌 평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2점에 그쳤으며 필드골 7개를 시도하는데 그쳤다. 팀내 최다 득점자는 32점을 기록한 Tom Meschery였는데, 이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체임벌린이 쪼그라든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 (우승하기 전까지) 체임벌린은 팀을 돕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포인트가드 밥 쿠지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체임벌린과 러셀은 블록 슛 갯수가 비슷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러셀은 블록을 할때 치밀하게 계산해서 팀 동료들에게 공이 가도록 블록을 하고, 이로 인해 러셀의 수비는 속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한 목적+관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을 관중으로 뻥뻥 쳐내곤 했다.

이런 플레이는 심지어 그가 스타일을 바꾼 후인 레이커스 시절까지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 당시 레이커스 감독인 Butch van Breda Kolff는 "러셀은 블록 이후 플레이를 전개하는데, 체임벌린은 관중석으로 쳐내니까 공격권이 상대에게 돌아간다."고 불평한 바 있다. 그러자 체임벌린은 "보스턴 선수들은 러셀의 블록 슛을 잡아내도록 훈련을 받는단 말이오."라고 받아쳤다. 물론 전체적으로 러셀이 체임벌린보다 더 뛰어난 동료들과 뛴 것은 사실이지만, 1969 파이널 당시 늙고 병든 셀틱스와 붙으면서, 베일러-웨스트라는 명예의 전당급 동료들을 데리고도 7차전 홈에서 패한 건 체임벌린 본인이다.

또한 체임벌린은 1965년, 11승 33패로 무너져가던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이때 필라델피아는 체임벌린 합류 이전 22승 23패, 체임벌린 합류 이후 18승 17패로 별 차이가 없었다.[41]

  • 그는 중요한 시리즈에서 침묵했다.
1967년에 우승을 차지한 윌트 체임벌린은 더 이상 팀원들의 지원이 없다고 할 위치가 아니었다. 1968년 동부결승 당시 필라델피아는 늙어가는 보스턴 셀틱스를 맞이해 홈코트 어드밴티지와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당시 필라델피아는 4차전까지 3대1로 앞서고 있었는데, 당시까지 역사상 어떤 팀도 3대1로 앞서다가 역전당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셀틱스는 결국 이를 뒤집는데 성공했는데, 7차전에서 그는 무려 34개나 리바운드를 잡았지만, 슛 9개를 던져 14점을 넣는데 그쳤다. 또한 7차전 후반에서는 단 하나의 슛도 던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체임벌린의 반응은 리더로서 매우 실망스러웠는데, 그는 자신의 감독 알렉스 해넘이 "감을 잃었다."고 비난한 것. 해넘이 명감독으로 알려져 있고 그가 부임한 이후에 체임벌린이 첫 우승을 차지한 걸 생각하면 그가 패배의 책임을 지지 않고 감독탓만 한 것은 에이스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또한 본인의 자서전에서 "동료들이 슛을 대부분 쏴서 3분의 1밖에 못 넣었는데, 나만 탓한다"고 불평했다. 이는 마지막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데

  • 체임벌린은 좋은 리더도 팀메이트도 아니었다.
이 부분은 그가 1960~70년대에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을 볼 수밖에 없어 확신하긴 힘든 부분이긴 하다. 그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의 1965년 인터뷰기사 "My life in a bush league"에서 동료, 감독, 그리고 NBA 관계자들을 싸잡아 비난한 적이 있는데, 체임벌린의 대중적 이미지가 영구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한게 이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선수들도 체임벌린과 뛰는 걸 꺼렸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한 이후, 팀은 체임벌린을 처분하고자 했는데 당시 레이커스 구단주는 체임벌린 영입을 두고 선수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했으나 9대2로 부결되었다. 당시 베일러, 웨스트가 이끌던 레이커스는 결승에 올라가는 족족 패하는 상태라 우승에 고픈 상태였는데도 리그에서 가장 압도적이었던 센터과 함께 뛸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린 것이다. 체임벌린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42]

우승하기 직전 감독이었던 돌프 셰이즈와의 에피소드도 유명한데, 선수시절 레전드 빅맨이었던 셰이즈는 현역시절 체임벌린과 자주 맞붙으며 충돌이 있어서 둘의 사이가 서로 안 좋았다. 이러한 악연은 셰이즈가 체임벌린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당시 체임벌린은 필라델피아 선수였지만 뉴욕에서 살면서 필라델피아로 출퇴근했다.[43] 거기다 체임벌린은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추기 위해 셰이즈는 팀 연습을 오후 4시로 잡았고, 이로 인해 오전에 연습하고 오후에 자유시간을 받길 원했던 다른 선수들은 불만이 폭발했다. 이에 당시 팀 구단주였던 어브 코슬로프는 그에게 필라델피아로 이사올 것을 요청했지만 체임벌린은 이를 거절했다.

1966년 보스턴과의 시리즈에서 체임벌린의 재멋대로인 성격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당시 필라델피아는 홈 1, 2차전을 모두 패배하고 3차전을 원정에서 겨우 잡았다. 4차전까지 지면 벼랑끝까지 몰리는 상황에서 셰이즈는 3차전 다음날 팀 연습을 잡았는데, 체임벌린은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거절했고 "그냥 와서 자유투 연습이라도 해라."는 셰이즈의 요청도 거부한다. 그리고 4차전에는 필라델피아는 패배하고 만다. 이어진 5차전 직전 연습에서도 체임벌린은 별 이유없이 잠적해버린다.[44]

이 외에도 그는 종종 동료들과 감독을 비난한 바 있다. 물론 버드같은 선수들도 1984년 결승에서 3차전 패배 이후 "나를 포함해 우리들이 기집애처럼 뛴다."고 비난한 바 있지만 이는 본인을 포함한 비난이었고, 이 발언 이후 셀틱스 선수들은 힘을 내 시리즈를 역전시켜버린다. 또한 셀틱스 선수들 사이에선 상호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 발언 이후 "저 새x가 우리를 욕해?"가 아니라 "우리가 오죽하면 저 친구가 저러겠냐. (실제로 셀틱스 선수들의 경기력은 버드를 제외하고 형편없었다.) 좀 더 빡세게 하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이런게 아니라 "얘들이 더 못하는데 왜 나만갖고 그러냐"식의 책임전가였다는 게 문제다.

종합해보면 어떤 기준으로 봐도 당시 윌트 체임벌린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던 것은 확실하다.[45] 또한 현재 그의 업적으로 봐도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본인이 매치업을 압도해도 체임벌린이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조던이나 러셀같은 선수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스탯을 너무 의식했던 것도 문제인데, "팀만 이긴다면 스탯 따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접근했던 러셀이나, "승리를 위해 뭔 짓거리든 한다."는 마인드의 조던과 달리 체임벌린은 "내가 이 정도 스탯을 쌓는데도 팀이 지는데 그게 내 탓이냐."고 한 적이 많았다. 은퇴 이후에도 체임벌린은 스탯 얘기를 굉장히 많이 했는데, 보통 탑텐이라고 분류되는 선수들 중 자기 스탯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는 선수는 체임벌린 뿐이다.

그는 자신과 조던의 비교에 대해 "조던이 50점을 넘긴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나는 평균 50점을 기록한 적도 있다."고 했는데, 정작 중요한 플레이오프에서는 조던이 체임벌린보다 월등히 높은 득점을 기록했다. 다른 걸 다 떠나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다. 체임벌린이 아무리 개인기량이 뛰어났다고 해도 커리어 내내 원맨팀에서만 뛰었던 것도 아닌데 동시대 라이벌인 러셀에 비해 우승 횟수가 11대 2로 밀린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초에 체임벌린의 팀은 보스턴이 서서히 하락세를 그리던 1966년부터 4년 연속으로 러셀의 팀보다 더 좋은 정규시즌 성적을 거뒀고 멤버도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았다. 특히 1969년에는 늙고 병든 보스턴보다 훨씬 더 강력한 멤버들과 함께 했다.[46], 그런데도 러셀은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서 네번 연속 체임벌린의 팀과 맞붙어 이 중 세번의 시리즈를 따냈다. 즉, 체임벌린과 러셀의 차이는 팀빨만이 결코 아니었다.
[1] 맨발 기준 216cm (7' 1") / 착화 신장 218cm (7' 2").[2] 시기미다 차이가 있으며, 약 124kg(275 lbs)에서 가장 많이 나갈 때는 136kg(300 lbs)까지 나갔다.[3] 지역연고제를 하는 NBA 특성을 위해 지역연고팀이 해당 지역의 유망한 신인을 우선지명하는 우선지명제 비슷한 방식이다. 1949년에 NBA가 출범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1965년에 이 제도는 없어졌다. 각 팀들은 1라운드 지명권을 포기하는 대신 해당 지역 출신 대학을 나온 선수 1명을 지명할 수 있는데, 이 제도를 통해 NBA에 데뷔해서 유명해진 선수로는 체임벌린 외에도 폴 아리진, 에드 매카우리, 톰 헤인슨, 가이 로저스, 오스카 로버트슨 등등이 있다.[4] 윌트 체임벌린은 캔자스 대학 출신이고, 캔자스에는 NBA팀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원래는 지역연고 드래프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NBA.com의 체임벌린 프로필 페이지에 따르면, 당시 필라델피아 워리어즈의 구단주 에디 고틀립은 윌트가 필라델피아 출신이고 고등학교도 여기서 나왔으며 지역에서 인기가 많으니 자신의 팀이 뽑아야한다고 주장했고, 이게 받아들여지면서 지역연고를 뽑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드래프트는 로터리는 물론 동전던지기도 없이 단순히 전 시즌 성적의 역순으로 지명권을 줬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윌트는 3위 지명권을 지닌 워리어즈에 갈 수 없었고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신시내티 로얄스에 뽑혔을 것이다. 여담으로 '윌트가 너무 대단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때 미리 뽑혔다'는 설이 있는데, 윌트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1955년에 필라델피아는 지역연고 지명권으로 톰 골라를 뽑았고, 윌트가 입단하던 해인 59년 드래프트에서 지역연고 지명권으로 윌트를 뽑은게 확인되므로 낭설일 뿐이다.[5] 1위는 2021-2022 시즌 PER 32.85을 기록한 니콜라 요키치[6] 참고로 이 시기에는 스틸, 블록, 턴오버, 3점 슛 등이 집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PER가 손해볼수 있다. 실제 수치는 이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7] 통산 득점 역대 7위 (31419점)[8] 통산 리바운드 역대 1위 (23924)[9] 그의 신장, 팔 길이, 손 크기, 완력, 스피드 등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엄청난 만큼 당시에는 압도적이였다.[10] 마이클 조던이나 줄리어스 어빙도 자유투라인 덩크를 성공시켰으나, 그건 전력으로 달려서이고 체임벌린은 실제 '자유투'할 때에 그랬다. 대학리그 당시.[11] 정확하게는 자유투를 던지고 나서, 던진 공이 림에 맞기 전에 던진 선수가 자유투 라인 너머에 발을 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노골이 되더라도 재빨리 들어가 풋백을 집어넣는 등의 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 2011년 기준 현행 규정상 자유투를 레이업처럼 던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12] 자유투 슛폼은 찾아보면 알겠지만 굉장하다. 부정적으로... 일단 라인 한참 뒤에 서있고 슛을 쏘는 타점 자체도 낮고 약간 정면에서 빗껴서 잡는 폼도 폼이지만, 쏘는게 아니라 그냥 휙 냅다 던지는 느낌이다. 이 때문에 스핀도 거의 안 먹고 포물선도 낮아 얼핏 봐도 안 들어갈 것 같은 슛. 하도 자유투가 안되니까 한때는 언더핸드 (릭 베리나 슬램덩크의 강백호 자유투폼)로 던졌던 때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성공률이 올라가기는 했으나 폼이 계집애 같이 생겼다는 비아냥을 듣고는 이 폼을 버렸다.[13] 아직 현역인 르브론 제임스앤서니 데이비스가 각각 역대 2,3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향후 행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14] NBA의 정규경기는 4쿼터까지 48분이다. 체임벌린은 이 시즌 결장없이 80경기를 모두 출장하였고, 연장전 포함해서 시즌 내내 단 7분만 쉬었다고 한다. 51경기 연속 풀타임 출전도 이때 세운 기록. 당연하게도 체임벌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선수들에게 농구에서 한 게임을 풀타임으로 뛰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을 넘어 혹사에 가까운 일이며, 당시 NBA 수준이 낮았다며 폄하하는 사람들도 평균 출장시간 48.5분만큼은 절대 까지 못한다.[15] 1962년 3월 2일 뉴욕 닉스, 당연히 역대 최다. 2위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81득점... 원래 체임벌린은 자유투 성공률이 낮은데 이 날은 자유투 32개를 던져서 28개를 성공시켰다.[16] 이것 역시 당연히 역대 최다.[17] 2위는 제임스 하든의 32경기[18] 2위는 마이클 조던의 31회[19] 1961-1962시즌[20] 30대 중후반쯤에는 수비형 센터로 변신했더니 어떤 아나운서가 "이제 득점력이 한 물 갔나봐요?" 라고 철없는 발언을 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치뤄진 경기에서 45득점을 넘겼다.[21] 이러다보니 당시 상대편에서 뛰었던 선수들은 마치 벽과 함께 플레이하는 기분이었다고...[22] 50여 년 동안 체임벌린만이 보유한 기록이었으나 2019년 4월 3일 러셀 웨스트브룩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상대로 20득점, 20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하여 달성했다.[23] 3개 이상의 분야에서 20점 이상을 기록[24] 이게 왜 대단하냐고 묻고 싶냐면, 직접 해봐라... 역도 선수나 체조 선수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체임벌린은 달리기와 점프에 특화된 농구 선수다![25] 게다가 이 아저씨 키가 7ft 1.06in, 대략 216~7이고 체중은 120kg이다...[26] 로스앤젤레스의 모든 선수들이다. 당연히 압둘자바도 포함되어 있고 어쩌면 루키 시절의 제임스 워디도... [27] 물론 가끔 노장의 투혼을 발휘해 그를 압도한 적도 있다.[28] 버드는 물론 왼손슛을 잘 쐈지만 이 경기에서 왼손 점프슛은 없었다.[29] 물론 모든 미국인이 얘기할때마다 슬랩스틱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성향이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30] 윌트의 높이뛰기 최고기록은 6피트 6.75인치인데, 물론 대단한 기록이긴 하지만 러셀보단 2.5인치 밑이다. 게다가 윌트의 기록은 58년에, 러셀의 기록은 56년에 세워졌는데 육상기록은 위에서 보다시피 계속 수준이 올라갔기 때문에 러셀이 56년에 세운 기록은 미국 2위에 해당했지만 윌트가 58년에 찍은 저 기록은 본인이 컨퍼런스에서 공동 1위에 그쳤다.[31] 1990년대에 코난 오브라이언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와 본인이 주장한 것인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체임벌린은 본인과 키가 비슷하고 몸무게는 더 많이 나가는 당대 최고의 파워를 지닌 센터 샤킬 오닐보다 최소한 100파운드(45kg) 넘게 더 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샤킬 오닐은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TV에서 벤치 프레스를 들었을 때 300파운드는 무난히 들었지만 405파운드를 드는데 실패했기 때문. https://www.youtube.com/watch?v=WZIp4daEO1I. NBA선수들은 거구에 강한 힘을 지녔지만, 같은 직업운동선수들인 파워리프터들만큼 힘이 강하진 않다. 직업적으로 힘만 키우는 사람과, 달리고 점프하는게 주 목적인 농구는 다르기 때문. 현역 선수들 중 가장 힘이 센 선수 중 한명인 드와이트 하워드도 벤치프레스 365파운드에 그치는데, 사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수치다.[32] 사람들은 유독 거대한 NBA선수들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경우가 많다. 유타 재즈에서 1981년부터 1997년까지 스트렝쓰 코치로 재직한 그렉 셰퍼드가 한말이 정확히 이를 보여주는데, 그는 "사람들은 항상 칼 말론이 얼마나 벤치를 들 수 있는지 묻는데, 저는 '한 350파운드 정도요. 대단하지 않나요?'라고 답하죠. 그러면 사람들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곤 '뭐, 그렇네요'라고 답하곤 하죠. 그들은 500파운드 뭐 이런 답을 듣고 싶어하니까요"라고 한 적이 있다. 셰퍼드는 이어 "칼은 350파운드를 들고 코트 반대편으로 전력질주한 다음 바로 350파운드를 또 들 수 있어요. 그리고 반대편으로 전력질주해 또 할 수 있죠. 코트를 백번 왕복하고 나서 300파운드를 들 수 있을 거라 장담합니다"라며 말론의 가장 큰 강점은 체력이라고 했다. 즉, 빨리 달리고, 높이 뛰고, 오래 달리는데 특화된 농구선수가 말론이나 하워드처럼 350파운드 이상 드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지, 오직 힘을 키우는데만 집중한 파워리프터들만큼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기대다.[33] 참고로 영화 코난을 찍을때 사진. 슈워제네거가 ESPN의 빌 시몬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안드레와 체임벌린이 종종 아놀드를 아이처럼 번쩍 들어올리곤 했다고. 또한 셋이서 자주 어울렸는데 안드레가 워낙 대인배라 항상 저녁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반면 체임벌린은 천하의 짠돌이라 절대 안 냈다고. 그러던 어느 날, 아놀드가 "오늘은 내가 쏴야지"하고 맘을 먹고 안드레가 화장실에 간 사이 몰래 계산을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안드레가 화가 나 "너 나 열받게 했어!"라면서 아놀드를 들어 올리자 옆에서 체임벌린이 "그래! 나도 낼려고 했다고!"하면서 거들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아놀드의 반응은 "웃기고 있네!(That's a good one!)"[34] 같은 파트너와 여러 번 한 적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총 횟수는...[35] 이런 인간이 실제 존재했다면 체임벌린이 경험한 여체는 그의 절반도 한참 되지 않는 것이다.[36] 이후에 이 내용에 대해 누군가가 질문을 했고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지만 4천명은 넘는 건 확실하다고 답했다는데, 이제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다.[37] 같이있던 동료는 몇초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38] 그가 유일하게 팔씨름에서 진게 NFL의 짐 브라운 이라고한다.[39]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40] 안 그래도 약체였던 닉스는 주전 센터포워드였던 필 조던은 결장해 상대가 안되는 상황.[41] 아무리 본인의 기량이 훌륭해도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팀스포츠에서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팀스포츠의 가장 큰 목적은 팀이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 역대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마이클 조던은 1994-95 시즌에 야구하다 복귀해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34승 31패를 달리던 팀을 13승 4패로 이끌면서 확실한 임팩트를 남겼다. 또한 전성기와 비교도 안됐던 워싱턴 시절에도 19승에 그치던 팀이 조던의 합류로 37승으로 거의 두 배나 뛰었다.[42] 결국 몇년 더 고생하던 레이커스는 1968년에 체임벌린을 데려오고 만다.[43] 뉴욕과 필라델피아 사이 거리는 직선거리로 130km, 차도로 150km에 달하며 뉴욕시까지 가는데만 최소 두시간이 걸린다. 거기다가 뉴욕 내 교통상황까지 생각하면...[44] 대외적으론 감독이 "열외처리"한 것으로 되었지만 팀 동료들은 진실을 알고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출처: 윌트 체임벌린 전기 Larger than life.[45]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히면 위에 언급된 "스탯 부풀리기"란 것은 평균 40-18을 할 선수가 50-20을 넘기는 수준의 부풀리기지, 애초에 체임벌린은 당대에 막을 존재가 없었고 어떤 경우에서건 비상식적인 스탯을 찍었을 것이 명백한 선수다. 이 문단의 목적은 체임벌린의 위력을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저렇게까지 개인기량이 압도적인 선수가 팀성적 면에서는 그만큼 뛰어나지 못했을까'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다.[46] 참고로 1969년의 웨스트-베일러-체임벌린 라인이 얼마나 사기적이었냐면 체임벌린과 베일러는 바로 직전 시즌에 올 NBA 퍼스트팀 (NBA의 베스트 5라고 보면 된다.)에 뽑혔고, 웨스트는 세컨팀에 뽑혔다. 게다가 웨스트가 세컨팀이라고 무시못할 것이, 그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6년 연속 퍼스트팀에 올랐다가 1967-68, 1968-69 시즌 세컨팀, 1969-70 시즌부터 다시 4년 연속으로 퍼스트팀에 오른 선수다. 즉, NBA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들 중 세명이자 당대 최고의 센터, 포워드, 가드가 뭉친 것. 심지어 체임벌린은 1967-68 시즌 MVP였다. 현재로 따지면 2014-15 시즌이 끝나고 나서 MVP 스테판 커리와 르브론 제임스, 앤서니 데이비스가 한 팀으로 뭉친 셈이다. 게다가 웨스트와 베일러는 하필 체임벌린, 러셀과 전성기가 겹쳐 MVP가 하나도 없지만, 다른 시대였으면 MVP 쯤은 한두번 충분히 타고도 남을 선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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