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스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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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스 리드의 수상 이력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리드명전.jpg
윌리스 리드
헌액 연도
1982년



뉴욕 닉스 No. 19
윌리스 리드 주니어
Willis Reed Jr.

출생
1942년 6월 25일
루이지애나주 링컨 파리쉬
사망
2023년 3월 21일 (향년 80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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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그램블링 주립대학교
신장
208cm (6' 10")
체중
107kg (235 lbs)
윙스팬
215cm (7' 1")
포지션
센터 / 파워 포워드
드래프트
1964 NBA 드래프트 2라운드 8순위
뉴욕 닉스 지명

소속 팀
뉴욕 닉스 (1964~1974)
지도자
뉴욕 닉스 감독 (1977~1978)
크레이튼 대학교 감독 (1981~1985)
애틀랜타 호크스 코치 (1985~1988)
새크라멘토 킹스 코치 (1988)
뉴저지 네츠 감독 (1988~1989)
프런트
뉴저지 네츠 운영부사장 / 단장 (1989~1996)
뉴저지 네츠 선수 육성 / 스카우트부사장 (1996~2003)
뉴올리언스 호네츠 운영부사장 (2004~2007)
등번호
19번 - 뉴욕

1. 개요
2. 일생
2.1. 선수 경력
2.2. 지도자/프런트 경력
2.3. 사망
3. 수상 내역
4.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 패트릭 유잉 이전의 뉴욕 닉스의 심장이자 영혼이었던 선수로, 뉴욕 닉스의 2번 뿐인 우승을 이뤄낸 선수이자, 뉴욕 닉스 역사상 유일하게 NBA 정규시즌 및 파이널 MVP를 수상한 선수. 별명은 'The Captain'.


2. 일생[편집]



2.1. 선수 경력[편집]


1942년 루이지애나 주 링컨 패리쉬의 히코에서 아버지 윌리스 리드 시니어(1920~1983)와 어머니 아이넬 로스(1924~2004)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 할아버지 휘트 리드(1888~1950)의 농장이 있는 버니스로 이사가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그렇듯 극심한 인종차별 속에서도 공부에 매진하여 릴리의 웨스트사이드 고등학교 시절 타고난 운동 실력으로 농구부 활동을 했다. 1960년에는 당시 NAIA 소속의 흑인대학 그램블링 주립대학교[1]로 진학하여 프레드 홉디(1923~1998)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도합 2,280점에 평균 26.6 득점, 21.3리바를 각각 기록하고, 1963년 NAIA 전국대회 때 농구부를 3위까지 달성시켜 NBA 스카우터들을 사로잡았다.

1964년 뉴욕 닉스에 드래프트된 이후, 지금도 뉴욕 닉스의 영구결번의 대다수인 70년대 전성기 멤버들과 강력한 수비농구의 멤버가 되었다.

다만 이 시기, 보스턴은 빌 러셀을 필두로 리그를 평정하고 있었고, 또 인간을 넘어선 괴수 윌트 체임벌린도 있었기 때문에 60년대에 우승을 넘보기는 어려웠다.

1970년, NBA 파이널에서 보스턴에게 계속 당하며 우승이 간절했던 LA 레이커스의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 윌트 체임벌린과 맞붙게 되었다. 게임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이었고, 리드는 파이널에서 부상을 당하며 7차전 출전이 어려웠고, 닉스팬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7차전이 시작하자 놀랍게도 리드는 코트로 나섰고, 체임벌린과의 경쟁에서 공을 따낸 후, 팀의 첫 4득점을 올리고 코트를 내려갔다. 닉스는 리드의 투혼과 월트 프레이저36득점 19어시스트(!) 활약에 힘입어 하나가 되면서 7차전을 이기며 우승했다[2]. 이 해의 활약으로 윌리스 리드는 NBA 역사상 최초이자, 단 3명 뿐인 정규 시즌 MVP - 파이널 MVP - 올스타전 MVP를 동시에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3]

이후 1973년 한 번 더 LA 레이커스를 상대로 우승을 추가한 이후, 무릎부상으로 리드는 생각보다 빨리 선수 커리어를 마감하고 말았다.

뉴욕 닉스는 리드의 은퇴 10년 후 패트릭 유잉이라는 또다른 기둥을 얻지만, 유잉과 90년대의 닉스 멤버들은 2번의 파이널 진출에서 모두 준우승하며 닉스를 우승시키지는 못했다.

리드의 등번호 19번은 1976년 뉴욕 닉스 구단 최초로 영구결번되었다.


2.2. 지도자/프런트 경력[편집]


은퇴 이후 뉴욕 닉스와 크레이튼 대학교, 뉴저지 네츠에서 감독을 지냈으나, 성적은 선수 시절에 못 미쳤다. 그나마 크레이튼대 농구부 감독으로서는 1984년 NIT에 1번 진출시켰고, 이 과정에서 벤와 벤자민을 배출했다.

1989년부터 뉴저지 네츠 부사장 겸 단장을 7년간 맡아 무키 블레이락, 케니 앤더슨, 드라젠 페트로비치, 제이슨 윌리엄스, 데릭 콜먼 등을 영입해 1990년대 초반의 부흥기를 형성한 바 있었지만, 잉카 다레와 에드 오배넌 등의 실패작도 있었다.

이후 2003년까지 선수 육성/스카우트담당 수석부사장도 지내며 캐년 마틴, 케리 키틀스, 키스 밴혼, 리처드 제퍼슨 등을 발굴했다. 2003년에 뉴욕 닉스 고문으로 위촉됐다가 2004년부터 3년간 뉴올리언스 호네츠 운영부사장으로 일했다.


2.3. 사망[편집]


2023년 3월 22일, ESPN을 통해 그가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향년 80세.#

그의 동료였던 전 상원의원 빌 브래들리는 그가 이전부터 울혈성 심부전이 발병해 휴스턴에 있는 텍사스 심장 연구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 전부터 72-73 시즌의 우승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하며 녹화로나마 참여하는 형태가 많이 있었는데 최근에 병세가 크게 악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NBA 챔피언 2회 (1970, 1973)
NBA 파이널 MVP 2회 (1970, 1973)
NBA 정규시즌 MVP (1970)

NBA 올스타 7회 (1965–1971)
NBA 올스타전 MVP (1970)
올-NBA 퍼스트 팀 1회 (1970)
올-NBA 세컨드 팀 4회 (1967–1969, 1971)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1970)
NBA 신인상 (1965)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65)


4. 기타[편집]


  • 1963년 아내 제럴딘 마리 올리버(1940~2016)와 결혼해서 슬하 1남 1녀를 두었으나 나중에 이혼했고, 1983년 간호사인 게일 케네디와 재혼했다. 아들 칼 밴스 리드(1963~2017)는 아버지처럼 농구의 길을 걷지 않고 IBM, 제록스 등 lT 업체들을 전전하며 판촉업에 종사해왔다.

  • 1982년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1997년에는 NBA 50주년 기념 '위대한 선수 50인'에 선정되었다.

  • 왼손잡이였는데 뉴욕사람들이 사랑한 왼손잡이 선수들 명단에는 꼭 들어간다.

[1] 현재는 NCAA 디비전 1 사우스웨스턴 애슬레틱 컨퍼런스 소속이며, 흑인 미식축구 선수 사관학교로 손꼽힌다. 동문으로 슈퍼볼 XXII MVP로 맹활약을 했던 더그 윌리엄스가 있다.[2] 이날 경기내내 리드는 절뚝거리며 뛰어야 했다.[3] 마이클 조던 2회, 샤킬 오닐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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