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다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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郁达夫(Yù Dáfū(욱달부), 1896. 12. 7 ~ 1945. 9. 17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편집]


청말 민국초의 문학 작가이자 혁명가.

저장성 항저우시 푸양(富陽)구 출신으로 본명은 위원(郁文)이었으며 다푸는 자(字)였으나, 현재는 위다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2. 생애[편집]


저장성 푸양현 만주(滿州)롱[1]의 지식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부친을 잃고 궁핍 속에서 살았다. 그래도 공부는 어찌어찌 해서 9세에 푸양현 현립 고등 소학교에 들어가 고체시를 지을 능력을 키웠다.

1913년 17세에 형인 위화(郁华)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이듬해 7월 도쿄제일고등학교 의학부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1915년 졸업 후 다시 나고야 제8고등학교 의학부에 들어갔으나 정치학과 강의도 들었으며 1919년에 졸업하고 또 도쿄대학 경제학부에 들어갔다. 이 때 수많은 외국 소설을 접한다.

1921년 같은 중국 출신 유학생인 궈모뤄(郭沫若), 청방우(成仿吾), 장즈핑(张资平), 정보치(郑伯奇) 등과 함께 문예사단 창조사(創造社)를 창단하여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첫 단편소설집 <沈淪(침륜, 간화자로 沉沦)>을 발표했다. 1922년 경제학 학사 학위를 따고 귀국하여 상하이에 거주하다 베이징대학에서 통계학 교수로 재직했으나, 1년 후 사퇴한 뒤, 우창(武昌)대학에서 잠시 일하다 중산(中山)대학교에서 문학원에 재직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또 그만두고 상하이로 돌아와 창조계간(創造季刊)을 편집하였고 소설론(小說論)과 희극론(戱劇論)을 발표했다.

1928년 태양사(太陽社)에 가입해 루쉰의 지지 하에서 대중문예(大衆文藝)에 주석을 달았다. 1930년 상하이에서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창단한 발기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 탈퇴했고, 안후이대학 중문학과 교수로 4개월 재직한다.

1933년 항저우로 이사했고, 이듬해 절강성 정부의 참의로 잠시 일했으며, 또 2년 뒤인 1936년 국민정부 복건성 정부 참의 겸 공보실 주임으로 일했다.

1938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시에서 정치부 설계위원이 됐고, 푸저우와 항저우에 이어 싱가포르까지 가서 항일 구국 선전을 했다. 하지만 1942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침략하자 당시 네덜란드령이었던 수마트라 섬으로 피신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그곳까지 쳐들어가서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숨어 지냐야 했고, 1945년 8월에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직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간의 독립전쟁에 시달리다 9월 17일에 일본 패잔병에게 피살당했다.

1952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위다푸를 혁명열사에 추서했고, 1983년 6월 20일에 민정부(民政部)에서 또 혁명열사증서를 수여했다.

3. 평가[편집]


중국 현대 문학의 선구자 중 하나로서, 현실주의 문학계에 루쉰이 있었다면 낭만주의 문학계엔 위다푸가 있었다.

신해혁명 직후 중국 문학계는 기존의 고전 문학계의 한계[2]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학 이념과 문예 사조를 도입해 일반 대중의 공감과 이해를 자아낼 수 있는 현대적 문학으로 탈바꿈하고자 했다. 이에 신청년 등의 정식 문학 전파 경로뿐 아니라, 지식인들이 사적으로 창단한 문예사단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위다푸는 그 중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창조사의 창립자였다.

욱달부는 일본의 사소설[3]의 영향을 받아 자아, 주관, 감정을 중시하였고, 청년들이 공감할 내용을 소설로 옮겨 내었다. 그의 대표작 <침륜>은 일본에 유학 온 중국 유학생이 한번쯤 겪었을 법한 경제적, 정신적 수난과 성(性)적 고민, 애정 문제, 애국주의 문제를 다루었고, <은회색 죽음> 등도 봉건 질서 속에서 청년들이 자신의 성에 대해 갖기 쉬운 고민들을 다룬 소설이다. 이처럼 성(性)이 언급되는 내용을 다룬 탓에 퇴폐작가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위다푸가 섬세한 인물 묘사와 다양한 서정적 내용을 통하여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던 명작가였음은 부정되지 않았다.

다만, 귀국 후 욱달부는 현실주의로 전향하여 루쉰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했고, 죽을 때까지 다시 낭만주의로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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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롱(弄, lòng)은 장강 이남에서 골목을 이르는 말이다. 즉 만주롱은 도로명인 셈. 여담으로 만주롱은 현재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다푸(达夫)롱이라 불린다.[2] 당시 중국어의 문어(文語)는 구어(口語)와 너무 달랐고 운율 형식과 전고(옛 글의 표현 인용) 사용에 대한 원칙이 너무 빡빡하게 적용되었으며, 또한 내용은 유교적 측면으로 치우쳤었다.[3] 私小說, 자기 자신이나 주변인이 사사로이 겪은 일을 소설로 옮긴 것으로 20세기 초 일본에서 유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