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피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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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안니우스 울피아누스
(Gnaeus Domitius Annius Ulpianus)
출생
170년
로마 제국 페니키아 티루스(티레)
사망
223년/224년(혹은 228년)
로마 제국 로마 팔라티노 황궁
직위
법학자, 근위대장, 콘실리움[1] 위원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법학자,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법학자이자 근위대장.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초반을 대표하는 섭정으로, 근위대장 중 임페리움(통솔권)을 가지고 있었다. 세베루스 왕조를 대표하는 법학자 3대장 중 한명으로, 서구권에선 파피니아누스, 폴이라고 불리는 율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로마법 분야에서 그 명성이 대단하다. 당대부터 로마법 분야에 있어 가장 위대한 법 전문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았던 만큼,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법전을 만들면서 로마 제국의 법학자 5인 중 울피아누스의 것을 많이 인용했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는 항구적인 의지라는 표현이 유명하다.


2. 생애[편집]


오늘날의 레바논의 지중해 항구도시 티루스에서 태어났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가 그리스계의 동방 사람일 것이고, 성이 울피아누스인 것을 볼 때 트라야누스 황제때 시민권을 받았다고 추측하나 로마사 학자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성에 해당되는 노멘이 도미티우스이기 때문에, 일단 이 추측부터 틀렸기 때문이다.[2] 동방 일대에서 속주 총독으로 근무한 도미티우스 가문의 귀족에게서 로마시민권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 정확할 확률이 높다. 당장 시리아에서 근무한 도미티우스 가문 출신 인물로는 코르불로, 아헤노바르부스 등 굵직굵직한 도미티우스 씨족 출신 귀족 원로원 인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오노 나나미가 굳이 연결짓고 싶었다면, 도미티우스 가문의 전통 그대로 이름을 사용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나, 다른 도미티우스 가문 출신 인사들을 거론했던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서 시민권을 받았다면 다키아 출신 로마인들처럼 프라이노멘+노멘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것인 마르쿠스 울피우스를 사용했을 것이 분명해 울피아누스가 트라야누스에게 시민권을 받은 부모를 둘 확률은 떨어져 보인다는 평.

정확한 출생, 부모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어릴 적부터 법학을 공부해 법률 전문가의 길을 걸었다. 로마에서 말하는 법학자라는 직업은 오늘날 법학 교수, 학자와 달리 변호도 하고, 공무와 결부된 실무 중 법해석을 다루는 일을 하는 공직자까지 포괄적으로 합쳐 부르는 말이다. 따라서 율피아누스는 대중들에게 알려진 이미지처럼 학자와는 결이 묘하게 달랐다. 하지만 울피아누스는 여느 로마의 '법학자'와 달리 법이론과 로마법에 대해 211년부터 222년까지 100권 넘게 저술하고 이를 체계화한 학자이기도 했다. 당연한 말인데, 동시대 사람 중 제국 최고의 변호사, 법학자 소리를 듣는 파피니아누스, 율리우스 파울루스와도 친분이 깊었다.

본격적으로 수도 로마에서 학자, 실무가가 아닌 고위행정관, 정치인으로 두각을 드러낸 시기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재위 후반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근위대장으로 카라칼라, 게타의 보호자 지위까지 오른, 선배 변호사 파피니아누스를 돕는 파피니아누스 오디토리움 위원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돼 로마 관보에 이름을 올렸다. 이 시기, 울피아누스는 파피니아누스처럼 양심적이고 엄격하게 법지식을 활용해 세베루스 황제를 도왔는데, 211년 2월 4일 에부리쿰[3]에서 황제가 죽고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황제가 됐다.

친구이자 동료인 파피니아누스가 게타가 살해된 직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등과 함께 게타 지지자로 몰려 처형된 이후 카라칼라 아래에서 정부문서 인증서를 관리하고 황제에게 이를 자문하는 마기스테르 리벨로룸을 지냈다. 아마도 파피니아누스 못지 않은 법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공백을 우려한 율리아 돔나가 그를 점찍고 임명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렵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 돔나의 조카 율리아 마마이아와 친분을 맺었다.

마크리누스 시대까지 로마법 분야에서 율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복잡한 법해석과 다양한 법 실무 결정을 담당했으나, 엘라가발루스와 그 모후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에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찍혀 로마에서 추방됐다. 그러다가 222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즉위하면서 율리아 마마이아의 요청과 율리아 마이사의 결정으로 추방형이 해제돼 복직했다가, 같은해 황제의 수석 고문에 지명된 직후 근위대장에 올랐다. 이때 세베루스 왕조의 시리아 여제들은 울피아누스에게 임페리움(명령권)을 부여해 이전의 근위대장들보다 그 지위를 섭정과 동등하게 해줬다.

세베루스 왕조 시대가 되면 근위대장과 프라이토리아니는 과거와 같은 근위, 본국 방어 사령관/군대에서 총리와 행정업무와 정보 수집 업무를 맡는 황제 직속 행정부 성격을 띠게 됐다. 그래서 파피니아누스 같은 법학자들이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숙청 이후 연달아 근위대장에 취임했는데, 울피아누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황제 자문회의 수석 고문과 임페리움을 부여받고 원로원 안에서 우선 발언권을 갖고 원로원 의원 중 일부를 자문회의에 배석하는 특권까지 행사했다.[4] 울피아누스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소년황제에게 법학, 실무교육, 업무 결정 등을 지도한 가정교사 역할도 했다.

허나 222년 그가 취임할 당시, 프라이토리아니는 이런저런 이유로 세베루스 왕조를 싫어했고, 그들의 충성심은 예전과 달리 냉소적이었다. 이는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가 연이어 삽질을 하면서 쌓아놓은 불신에 기반했다. 카라칼라는 제 기분에 따라 장교, 병사들에게 충성보너스, 고가의 선물을 주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이들을 혹독하게 다루고 통제했다. 엘라가발루스는 4년 내내 해괴한 일을 벌이고 온갖 추잡스러운 일에 자부심 높은 프라이토리아니를 동원해 불만이 높았다. 더욱이 엘라가발루스는 종교개혁 등을 이유로 프라이토리아니 특권을 일방적으로 축소해 울피아누스 전임자들은 이쪽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엄격하게 법이라는 잣대만 동원해 장교, 병사들은 통제한 울피아누스는 과거 파피니아누스와 달리 프라이토리아니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이에 율리아 마마이아는 아들과 본인을 호위하는 게르만 경비대를 울피아누스 곁에 24시간 붙여주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그러다가 223년 로마에서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 몇명과 일반인 사이의 사소한 충돌이 4일간의 유혈사태로 번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울피아누스는 근위대 병사들과 일반 시민 간의 4일 간의 유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법대로’로 처리한다며, 유혈 사태 진압에 성공한 대대장 두 명을 체포해 일방적으로 방조죄와 과격한 진압을 이유로 처형해버린다. 이들의 죽음은 어거지도 있고, 울피아누스와 세베루스 왕조에서 책임회피성으로 덮어 씌운 터라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시대부터 쌓인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를 폭발시켰다. 울피아누스는 근위대장 취임 후, 세베루스 왕조를 안정화하고자 기소, 치안유지, 정적 제거에 근위대를 활용하면서 특권이 과하게 많다는 이유로 개혁 대상으로 매도하고 있었던 터라 사태는 심각해졌다.

이 결과, 223년 말 혹은 224년 초[5]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은 기회를 노렸다가 팔라티노 황궁 황제 집무실에 있던 울피아누스를 살해했다.

헌데 이 사건 직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두 섭정은 현직 근위대장을 암살한 병사들을 붙잡아 처형하지 못했다. 황제와 두 아우구스타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자제력을 잃고 폭발한 프라이토리아니를 두려워 했고, 16인의 콘실리움 위원 중 울피아누스를 잃은 15명의 위원들은 벌벌 떨었다. 이들이 이렇게 겁먹은 이유는 특정 병사, 장교의 일탈이 아닌 프라이토리아니 전체가 내보이는 분노를 봤기 때문인데, 로마군 역시 엘라가발루스를 '가짜 안토니누스', '사르다나팔루스', '티베리누스'로 부르며 조롱하고 있던 터라 이후 대처는 코미디로 흘러갔다.

결국 울피아누스 암살범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지도, 처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린 황제와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가 내린 조치는 고작 그들에게 불명예 차원의 조치를 취한다며 황제령 아이깁투스(이집트), 그리스 등지로 인사 이동시키는 조치 정도였다. 그런데 이 조치 역시 근위대 병사들의 반발로 잠잠해지자마자 흐지부지되고 만다. 울피아누스의 죽음은 개죽음이 됐고, 프라이토리아니는 이후 세베루스 왕조의 통제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따라서 후속 조치를 주목하던 디오 카시우스 같은 원로원, 관료들은 상식 밖의 여러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이런 까닭에 디오의 경우, 이 사건 이후 근위대와 각 군대, 황제 경호대까지 군율이 서지 않고 세상에서 황제를 우습게 본다고 이를 기술하거나, 군율이 형편없고 병사들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불평을 터트렸다고 이를 평했고 헤로디아누스 역시 이 모습을 보며 세베루스 왕조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부정적으로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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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제 자문회의[2] 우리나라의 경우, "성씨+개인이름" 식으로 작명된다면 로마식 작명법은 "개인이름(프라이노멘)+씨족명(노멘)+가문명(코그노멘)(+추가칭호명(아그노멘))"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굳이 우리식으로 로마인의 성씨를 말하면 씨족명인 노멘이 성씨가 되고, 각 성씨 내 구성원을 구분하고자 붙인 코그노멘은 본관 성씨 내 파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3] 오늘날의 영국 요크[4] 이런 강력한 권한을 다시 가지게 된 근위대장은 고르디아누스 3세의 장인 티메시테우스가 두번째였다.[5] 228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