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마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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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력
3. 특징
4. 인맥
5. 프로듀스 작품



1. 개요[편집]


植田益朗
일본의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1955년 출생.
선라이즈A-1 Pictures를 살린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2. 경력[편집]


니혼대학 예술학부 영화학과 출신. 영화 시나리오 라이터를 꿈꿨지만 자신은 글쓰는 재주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장에서 뭐라도 하는 게 더 체질에 맞아 재학 중에도 영화 업계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사정이 안 좋아서 자신을 정식으로 취업 시켜주는 곳이 없었고 대신 애니메이션을 해보라는 학교 측의 권유로 선라이즈에 입사했다.

1979년 입사 하고 바로 급하다며 기동전사 건담제작진행으로 투입되었다. 안 그래도 성격이 독한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작품이었고 중간에 스케줄이 꼬여 매우 힘들었지만 이때의 경험과 인맥이 자신의 프로듀서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너무 힘든 일이라 기동전사 건담 제작진행 중 1년 뒤에도 회사에 남은 건 자신 밖에 없다고 한다. 우에다 말로는 작화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밑그림을 다 깔아주는 제작 방식이라 야스히코가 있어야 작업이 되는데 야스히코가 건담과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와 동시에 작업해서 일을 미루기도 하고 나중엔 과로로 병원에 실려가서 난리가 났으며, 동화와 채색 하청사들은 건담은 도라에몽보다 선은 10배는 많아 힘들어서 안 한다고 다 거절해서 하청사를 하나하나 찾아가서 울면서 부탁해야 했으며, 애니메이터와 제작진행은 계속 도망가서 남은 사람의 일 부담은 더 커지고[1], 스튜디오에는 도둑이 수시로 들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우에다 자신도 이 작품이 명작으로 완성된 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토미노는 막 입사하고 이런 사태를 겪었는데도 끝까지 회사에 남은 우에다의 근성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기동전사 건담이란 작품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해 이런 작품을 만드는 연출가가 되겠다는 목표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토미노 요시유키에게 연출가를 시켜달라고 했는데 토미노가 "연출을 하려면 제작진행을 최소 2년은 해야한다. 전설거신 이데온까지 제작진행을 하자."라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기획이 통과되었는데 TV판 때 관여한 제작진행이 다 그만두어 선라이즈에서 우에다에게 제작진행의 리더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우에다는 이데온의 제작진행을 중도 포기하고 건담 극장판을 하기로 했다.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2 애전사'에서는 어시스트 프로듀서를 맡았고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3 만남의 우주'에서는 이례적으로 20대의 나이에 프로듀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나는 연출가보다 프로듀서가 적성에 맞는다."라는 생각이 들어 프로듀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이후 시티헌터의 프로듀서를 맡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때의 공적으로 1990년대 30대의 나이에 선라이즈의 임원 자리에 오른다. 이례적인 승진이라 주변에서는 '시티헌터 인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티헌터의 핵심 인물이고 애정도 깊어 선라이즈 퇴사 이후에도 시티헌터의 스핀오프 작품 엔젤하트도 프로듀스했고 2019년부터 다시 시작된 선라이즈의 시티헌터 극장판에도 기획 협력으로 참여한다. 2019년부터 시티헌터 애니메이션이 부활한 건 스와 미치히코(諏訪道彦) 프로듀서와 우에다 마스오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관계자를 설득한 덕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있어 건담 시리즈는 첫 작품이 가장 완성도가 높으며 이후의 후속작은 사족이라는 생각과 이대로 변혁이 없으면 시리즈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극장판 건담 시리즈가 성공하고 야마우라 에이지 프로듀서와 함께 "건담은 다시는 만들지 않는다! 회사가 망할 때나 만들 것이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기동전사 Z건담이 나오고 몇 년이나 우주세기 건담을 계속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한 기동전사 V건담에도 실망감이 있어 1990년대부터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를 그만두고 '건담 빅뱅 프로젝트'라는 기획을 세웠다. 이때 파격적인 내용의 헤이세이 건담 3부작(기동무투전 G건담, 신기동전기 건담 W, 기동신세기 건담 X[2])을 프로듀스했다. 그리고 토미노와 함께 ∀건담을 기획했으며 기존의 건담의 디자인을 파괴하고 싶다며 시드 미드에게 디자인을 맡겨[3]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 4작품은 발표 당시에는 상업적인 성과가 기대 이하였으며[4] 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고 스폰서인 반다이에서도 우에다를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4작품은 새로운 시도 덕에 훗날 재조명을 받았다.[5]

2000년에 이누야샤의 기획을 마지막으로 선라이즈를 퇴사하고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이누야샤의 기획에 관여했다가 그만둬서 퇴사 뒤로도 선라이즈에서 이누야샤 극장판의 일을 맡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폰서는 만드는 사람의 능력은 보지 않고 회사 간판만 보고 투자한다는 한계를 보았다고 한다. 실제로 프리랜서 시기에는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때 소니애니플렉스에서 자문의원으로 와 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이를 받아들여 애니플렉스의 총괄 프로듀서가 되었다. 2010년 이후의 애니플렉스의 많은 작품의 기획에 관여했다. 선라이즈에서는 "왜 경쟁사로 가는가."라고 하면서 욕을 많이 했다고 한다. 토미노도 "너 왜 날 버리고 딴 데로 가냐!" 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떠난 건 선라이즈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할 수 없었고, 경쟁사가 있어야 선라이즈도 더 열심히 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애니플렉스는 당초 원작이 있는 인기 작품만 프로듀스하려고 했으나 우에다 마스오가 "그런 것만 해서는 회사에 미래가 없다. 리스크가 커도 저작권을 회사가 가지는 새로운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해야 한다."라고 계속 설득해서 오리지널 작품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자신이 월권으로 기획을 통과시킨 작품은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알드노아. 제로라고 한다. 3 작품 모두 다른 사람들은 이거 망한다고 반대했었다고 한다. 아이돌 마스터 애니메이션도 당시 게임 아이돌 마스터 2 논란으로 팬층이 이탈해 아무도 애니화 안 하겠다고 한 걸 우에다가 하자고 했다고 한다. 소드 아트 온라인 시리즈도 우에다가 추진했다. 자신에게 그 정도의 권한을 줬기 때문에 애니플렉스로 이적한 것이라고 한다. 진격의 거인도 무조건 해야한다고 기획을 추진했는데 그건 나카타케 테츠야가 채갔다고 한다.

애니플렉스가 자체 제작사 A-1 Pictures를 설립한 뒤 우에다에게 회사를 키워 달라고 부탁해 A-1의 현장 프로듀서로 복귀한다. 본인은 이때 이미 고령의 나이였고 현장에 복귀하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후배를 키워달라는 부탁에 동의해 현장 복귀 했다고 한다.[6]

A-1의 경영 방침인 "연출과 작화와 같은 분야는 하청사와 프리랜서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프로듀서제작진행은 최고급 인력을 쓴다.", "제작진행이 과로로 고생하지 않게 제작진행을 넉넉하게 고용한다.", "최고의 프로듀스와 제작진행으로 다른 스태프가 고생하지 않도록 최고의 편의를 보장해 작품의 질을 높인다."라는 경영 방침은 우에다가 제안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는 제작진행이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했고, 스케줄이 꼬인 작품도 발생해 그의 뜻 그대로 경영되지는 않은 것 같다.

애니메이션 외의 애니플렉스의 스폰서 사업에도 관여했으며 Fate/Grand Order에 투자를 하라는 지시를 내린 건 자신이라고 한다.

이런 많은 공적으로 2015년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SVP, 2016년 애니플렉스의 회장 자리까지 올랐으나 경영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2018년 그만두었다.

2018년에는 '스카이폴'이라는 기획, 프로듀스 전문 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해 후진 양성에 전념한다. 이제 자신이 현장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2023년 'NAFCA' 라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를 성립했다. 기존의 애니메이터 조합, 단체들이 임금 협상에만 중점을 두고 돌아가던 거에서 탈피해 다방면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라고 하며, 성우 또한 조합원에 포함된다는 점이 기존 단체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

일본 정부가 애니메이터에 불리한 정책만 내놓는다고 규탄했으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예 다른 나라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애니메이터 데리고 엑소더스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엔 일본의 애니메이터를 데려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애니메이터는 언어와 공간의 제약이 적은 일이라 옮겨버리면 그만이라고. 옮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물론 정부 정책이 개선되어서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도 덧붙였다.

또한 신인 애니메이터가 기초가 안 되어서 오히려 선배 애니메이터와 작화감독에게 방해만 되는 일이 늘어나는데 시간이 없어 그들을 가르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며 애니메이터의 실력을 검증하는 공인 시험을 만들어서 자격증으로 검증받은 사람에겐 좀 더 특혜를 주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키타오 마사루, 니시이 테루미, 야마모토 유타카도 이 계획에 동의한다고 한다. 다만 우에다의 구상에 대해 "그림을 잘 그리냐 못 그리냐를 대체 누가,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라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업계인들도 있다. 아라이 준은 "임금부터 올려놓고 시험을 만들어야지 유료 검정 시험부터 만들면 뭐가 개선되냐?" 라고 했고 야마우치 히데코는 "난 이 시험이 생겨도 안 받겠다." 라고 했으며 코지마 케이스케는 "시험의 필요성은 동의하지만 왜 이 시험 디지털 작화 시험은 없고 종이 작화 시험만 있는가?[7]" 라고 반응했다.


3. 특징[편집]


작품은 감독과 스태프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자신은 편의만 봐준다고 한다. 스토리나 연출에는 크게 관여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마다 품질이 다르다. 이래서 그의 작품은 명작도 많지만 토가이누의 피 같은 역사에 남은 망작도 있으므로 애니메이션 감독 이름도 같이 확인하고 고르는 것이 좋다.

토미노의 가르침에 따라 작품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고 한다. 시티헌터 때 엔딩곡 Get Wild의 간주를 본편 마지막부터 띄우고 천천히 엔딩으로 넘어가는 연출, 은하표류 바이팜의 전부 영어로 된 오프닝곡은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신인을 육성하지 않으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작품마다 신인을 적극 기용하고 모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게 돕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에다의 작품은 베테랑 인맥도 많이 써서 대부분 연출과 작화는 좋은데 중간중간 작화가 불안정한 에피소드가 하나 둘 정도 들어간다. 이런 에피소드는 사고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고 신인이 만든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는 방영 당시에는 욕을 많이 먹지만 훗날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재조명되기도 한다.

음악을 중시한다고 하며 작곡가와 가수는 최고급으로 기용한다. 우에다의 작품은 음악을 잘 들어보는 것이 좋다.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은하표류 바이팜이라고 한다.


4. 인맥[편집]


인격자로 유명하며 따르는 인맥이 많다.[8]

자신의 스승으로는 선라이즈토미노 요시유키칸다 타케유키를 언급한다. 토미노에게는 작품에 임하는 자세와 늘 새로운 걸 하는 정신을 배웠으며 칸다에게는 밑사람을 너무 조이지 않고 현장을 통솔하는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타카하시 료스케와도 인맥이 있어 애니메이터와 연출가는 주로 타카하시의 인맥을 썼다.

토미노는 서적 '이것이 V건담이다.'에서 우에다 마스오를 두고[9] "미래의 선라이즈를 짊어질 인재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각본가 호시야마 히로유키는 대선배이지만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줬으며 매우 친했다고 한다.

시티헌터와 바이팜을 같이 만든 아시다 토요오,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을 같이 만든 세키타 오사무하고도 친했다고 한다.

아미노 테츠로와도 친분이 있는데 훗날 아미노의 아내가 된 여성과 먼저 친해져 아미노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둘은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때 우에다 마스오가 학생회 부회장이었다고 한다. 아미노는 "그게 너였어?" 하고 놀랐다고. 우에다는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아미노의 이름을 보고 "이거 혹시 그때 그 녀석 아니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나서 바로 선라이즈로 데려왔다고 한다. [10]

제자로는 본즈의 사장 미나미 마사히코가 있다.

같이 일하는 방송국 프로듀서는 요미우리TV의 스와 미치히코(諏訪道彦), 마이니치 방송다케다 세이지가 있다.

우에다 마스오가 발굴하고 밀어준 인물은 나가노 마모루[11], 코다마 켄지, 이케다 마사시, 와타나베 신이치로, 아카네 카즈키, 이마니시 타카시, 타카마츠 신지, 니시무라 노부요시, 시노하라 토시야, 야마모토 유타카[12], 나가이 타츠유키, 아오키 에이, 아다치 신고, 카와츠마 토모미가 있다. 또한 본즈 창립 때 참가한 애니메이터, 연출가 대부분이 우에다 마스오가 발굴해서 제자 미나미 마사히코에게 물려준 애니메이터이기도 하다. 인재 고르는 눈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5. 프로듀스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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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성 있게 계속 남아있어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타노 이치로였다고 한다.[2] 다만 X는 기획만 관여했다.[3] 프로듀서 은퇴 후 시드 미드 전시전을 기획하기도 했는데 이 전시전이 열리고 얼마 뒤 시드 미드는 사망했다.[4] 우에다 말로는 적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애초에 건담 시리즈는 아무리 망해도 적자를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반다이가 원하는 기준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5]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는 훗날 이 4작품 중 G, W, ∀ 3개를 "새로운 시도를 했다."라며 호평했다.[6] 대신 직함은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로 크레딧되어 나온다.[7] 이유는 "각 회사에서 쓰는 프로그램이 전부 다르므로 특정 프로그램 하나로 검정할 수 없다." 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디지털 작화가 CLIP STUDIO PAINT로 통일되어 가는 중이라 이해가 안 된다는 소리가 많다. 디지털 작화에 부정적인 키타오 마사루니시이 테루미가 기획에 참가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8] 심지어 애니메이션 업계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문제아 야마모토 유타카조차도 우에다 마스오는 한 번도 깐 적이 없으며 오히려 존경한다고 고개를 접고 들어갈 정도이다.[9] 이름은 언급 안했지만 V건담의 프로듀서라고 했는데 그럼 우에다 마스오이다.[10] 옛날 일이라 우에다와 아미노의 말이 좀 엇갈린다. 우에다는 아미노의 아내의 소개로 만났다는데 아미노는 퇴근길에 우연히 만났다고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우에다가 아미노의 아내에게 아미노가 있는 곳을 알아내서 직접 찾아간 것일지도 모른다.[11] 나가노는 선라이즈와 관계가 악화된 뒤로도 자신을 발굴해준 우에다가 하는 작품은 같이 해줬다. 브레인 파워드에 참가한 것도 우에다 때문이라고 한다.[12] 교토 애니메이션에서 쫓겨난 야마모토 유타카의 실력이 대단하면서 밀어주던 프로듀서가 우에다 마스오이다. 다만 우에다도 야마모토가 SNS에서 망언을 거듭하게 된 뒤로는 전혀 지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사적인 관계는 이어나가고 있다.[13] 원작자 나가노 마모루가 직접 지명해서 했다고 한다.[14] 후속 시리즈는 직접 프로듀스는 안 했지만 계속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