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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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rraca_I,_reina_de_León_(Museo_del_Prado).jpg
Urraca de León
가문
히메네스 왕조
생몰년도
1081년 ~ 1126년 3월 8일
출생지
레온 왕국 부르고스
사망지
카스티야 왕국 리오 카리온 강변 살다냐
재위
기간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왕
1109년 - 1126년
갈리시아의 여왕
1109년 - 1111년
히스파니아의 여제
1109년 - 1126년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비
1109년 - 1114년
아버지
알폰소 6세
어머니
부르고뉴의 콩스탕스
배우자
부르고뉴의 레이몽, 알폰소 1세
자녀
산차 라이문데스, 알폰소 7세, 페르난도 페레스, 엘비라 페레스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레온 왕국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아라곤 왕국팜플로나 왕국의 왕비, 전히스파니아여제.[1] 별명은 라 테메라리아(la Temeraria: 무모한 자).


2. 생애[편집]


1081년경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6세와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의 손녀인 부르고뉴의 콩스탕스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어머니 콩스탕스는 우라카를 낳은 해에 숨을 거두었다. 어렸을 때 리에바나, 살라냐, 카리온의 백작이었던 페드로 안수레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페드로 안수레스는 이후에도 우라카의 최측근으로서 그녀의 행보에 함께 했다.

1089년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약혼했다. 레이몽은 1086년 알폰소 6세가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쉬핀에게 참패한 직후 전 유럽에 십자군을 보내줄 것을 호소한 것에 응해 레온 왕국에 찾아온 대표적인 인물로, 1086년 또는 1087년에 투델라 공방전을 치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당시 그녀는 8살이어서 교회법상 약혼할 수 없었지만, 알폰소 6세는 왕국이 무슬림들의 공세로 위태로운 상황에서 신실한 기사로 평가받는 레이몽에게 딸을 맡겨야 한다고 보고 약혼을 감행했고, 결혼식은 1093년 2월에 거행되었다.

이후 우라카는 갈리시아 여백작으로 선임되어, 남편과 함께 남쪽의 알 안달루스와의 국경지대에서 칸타브리아 해안까지 이어지는 대서양 연안 전체를 통치했다. 1096년 알폰소 6세가 정부 히메나 무뇨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테레사 데 레온엔히크 드 보르고냐와 결혼한 후, 알폰소 6세는 갈리시아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우라카가 그대로 가지고 두에로 강과 미뇨 강 사이의 갈리시아 서부는 지참금으로서 엔히크에게 전달되었다.

우라카는 레이몽과의 사이에서 산차 라이문데스(1095년 생)와 알폰소 라이문데스(1105년생)를 낳았다. 그러나 1107년 9월, 레이몽은 그라할에서 알폰소 6세와 우라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라할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남편의 유해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안장한 뒤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서 통치를 이어갔다.

1108년 5월 30일, 알폰소 6세의 유일한 아들 겸 우라카의 이복형제 겸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의 유력한 왕위 후계자였던 산초 알폰세스가 우클레스 전투에서 무슬림군에게 패해 목숨을 잃었다. 알폰소 6세는 귀족들을 톨레도에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우라카를 재혼시킬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여러 후보가 우라카와 결혼하러 나섰는데,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라라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알폰소 6세의 측근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폰소 6세는 신하였던 자가 자기 딸을 밀어내고 왕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고, 레온 귀족들과 카스티야 귀족 중 한 명을 택하면 다른 쪽이 반발할까 걱정했다.

알폰소 6세는 고심 끝에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를 딸의 결혼 상대로 낙점했다. 알폰소 1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우라카와 같은 신분이고, 군사적 역량이 출중하고 용맹해서 무슬림들의 침략으로부터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국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레온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Alfonso Raimúndez)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직후인 1109년 7월 9일,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가 숨을 거두었다. 알폰소 1세는 자신이 장인의 직위를 그대로 승계받았다며 알폰소 6세가 생전에 누렸던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자기 것으로 삼아 '전히스파니아의 여제' 우라카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 직후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더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기사들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접수하게 했으며, 1110년 내내 우라카의 영지인 레온과 카스티야를 돌며 공물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알폰소 1세가 발바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하다, 산살바도르 데 오냐 등 여러 수도원에 기부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우라카를 따르는 귀족들을 견제하게 하려는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우라카는 남편의 이같은 행보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고 분노했다. 그녀는 비스카야와 하로의 영주이자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후계자인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에게 특권을 부여해 알폰소 1세에 적대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귀족들은 알폰소 1세가 자기들 영지 내에 있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우라카의 지원에 반색하며 알폰소 1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몄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은 알폰소 1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통합 문제에 전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타우스테를 탈환하고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1110년 1월 24일 발티에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알 무스타인을 처단했다. 이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쇠락했고, 그동안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 상당수가 알폰소 1세의 봉신을 자처했다.

발티에라 전투의 승리로 알폰소 1세의 위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지만, 그와 우라카와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에서 집필된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가 우라카를 손과 발로 허구헌날 구타했다고 서술했다. 이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저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우라카와 알폰소 1세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대응해 우라카를 긴급 체포한 뒤 그녀의 정신 상태가 통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며 아라곤의 엘 카스텔리아 성채에 투옥시킨 뒤 레온과 카스티야의 반란자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몇 주 만에 팔렌시아, 부르고스, 오스마, 사하군, 아스토르가, 오렌세 등 레온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민중들이 분노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진군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엘 카스텔리아 성채를 습격해 우라카를 석방시킨 뒤 사하군 수도원에 이송시켰다가 다시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는 군대를 돌려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의 영지가 있는 카스티야 남부로 진격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에게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요청했던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를 축출한 뒤 아라곤 수비대를 톨레도에 배치했다. 이 무렵 포르투갈 백작이며 알폰소 6세의 또다른 딸인 테레사 데 레온의 남편인 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우라카를 돕기 위해 진군하자, 알폰소는 엔히크에게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9월 17일,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우라카로부터 갈리시아 왕위만 먼저 물려받았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가 1110년 원정 당시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어린 알폰소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1112년 여름 동안 휴전을 맺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협약을 맺으려 애썼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커서 협의에 실패했다. 알폰소 1세는 어떻게든 레온과 카스티야를 장악하고자 아라곤 수비대들을 곳곳에 배치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좀처럼 통제하지 못한 데다 아라곤 귀족들마저 본국 귀환을 종용했다.

1112년 9월, 알폰소와의 협상이 무익하다고 여긴 우라카는 전쟁을 재개했다. 그녀는 케아 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해 케리온 강 서쪽의 카스티야 영역을 탈환했다. 부르고스 남쪽의 두에로 상류 영토 역시 우라카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알폰소 1세는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녀의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우라카와의 결혼을 이어가려 했으며, 교황 특사의 중재 제의를 거절했다.

1113년, 우라카는 갈리시아 귀족군과 함께 또다시 공세를 개시해 사하군과 카리온을 공략하고 부르고스를 포위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맞서 라 호야로 진군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4월에 로스 아르코스로 진군해 부르고스에 포위된 지지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알바르 파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톨레도를 공략했다. 이렇듯 기독교도들이 내전을 일삼자, 사라고사 토후국은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했다. 무슬림군은 오레하 성을 공략하고 톨레도 주변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1113년 6월, 우라카는 부르고스를 손에 넣은 뒤 무슬림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톨레도 구원에 착수했다. 이후 양자는 무슬림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라카 역시 사망할 때까지 전히스파니아의 여제를 자처했다.

1116년, 우라카는 갈리시아의 왕으로 세워둔 아들 알폰소에게 두에로 강 남쪽 땅과 톨레도 일대의 통치권도 양도했다. 젊은 알폰소는 이때부터 카스티야를 여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탈취하려 드는 알폰소 1세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라카의 배다른 누이 테레사가 그녀에게 반기를 들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신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워서 일부는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그녀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그녀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테레사에 대한 원정을 취소하고 레온으로 귀환한 우라카는 때마침 아들이 톨레도에 입성해 알폰소 1세의 세력을 축출한 덕분에 카스티야에서의 입지가 강해졌다. 이에 아들 알폰소가 후임 왕이 되는 것을 보장하는 탐브레 협약에 서명했다. 1118년, 우라카는 자치권을 무제한적으로 누리면서 알폰소 1세와 내통하는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카스티야 동부로 진군했다. 그해 6월에 세고비아에서 그녀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갈리시아를 확고히 장악하고자 그곳으로 향하면서도 알 안달루스와 맞서는 톨레도 대주교에게 일부 병력을 보냈다.

1119년 1~3월, 우라카는 부르고스에 남아서 알폰소 1세의 대 무슬림 전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전 집사 구테 페르난데스가 참여한 위험한 음모에 직면해야 했다. 구테 페르난데스는 우라카의 연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을 만실라 성에 잠시 가두고 레온에서 여왕의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다. 우라카는 이 반란을 가까스로 제압한 뒤 음모에 가담한 카스티야 귀족 여럿을 처벌하고 1119년 9월 알폰소 1세와 화해했다.

1120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성공에 취했기 때문인지, 우라카는 이 시점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디에고 헬미레스의 권세가 갈수록 커져 정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거슬렸고, 장차 아들 알폰소를 등에 업고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하려 들 거라고 의심했다. 결국 그녀는 1120년 7월 말에 아리아스 페레스를 통해 헬미레스를 카스트렐로에서 체포하여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권신이긴 했지만 그녀를 지금껏 따랐던 주교를 하루아침에 가둬버린 일은 심각한 후폭풍을 야기했다. 헬미레스의 추종자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여왕을 압박했고, 어머니가 자신을 해칠 지도 모른다고 여긴 알폰소는 산티아고 인근에 머물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와 합세했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우라카는 얼마 후에 헬미레스를 석방했지만, 그로부터 빼앗은 영지와 성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헬미레스는 테레사와 그녀의 연인이 된 트레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의 편에 섰다. 그해 가을에는 주교를 체포하고 주교의 영지를 몰수했다는 소식에 진노한 교황 갈리스토 2세[2]가 우라카에게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121년 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행진한 뒤 헬미레스 주교와 프루엘라스 백작과 면담한 뒤 그들의 직위를 돌려주며 크리스마스 이전에 주교의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내전은 겨우 수습되었지만, 1121년 8월 사하군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헬미레스의 지지자들과 여왕의 반대자들이 우라카를 몰아내고 알폰소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하는 등, 사건의 여파는 이어졌다. 게다가 그 해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123년 3월 다시 갈리시아로 행차한 우라카는 헬미레스 주교와의 동맹을 갱신하는 대신 페드로 프루엘라스 백작과 그의 아들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남쪽으로 이동해 톨레도에 도착한 뒤 시구엔사를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124년 5월 25일, 헬미레스 주교가 우라카 여왕의 허락을 받고 산티아고에서 알폰소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124년 여름, 테레사가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1125년 늦봄에 아들과 갈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대면한 뒤 카스티야로 떠나 말년을 보내다 1126년 3월 8일 리오 카리온 강변 살다냐에서 병사했다. 사후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알폰소 7세로서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3. 가족 관계[편집]


  • 부르고뉴의 레이몽(1070 ~ 1107): 부르고뉴 백작 기욤 1세의 넷째 아들.
    • 산차 라이문데스(1095 ~ 1159):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모종의 이유로 평생 결혼하지 않는 대신 남동생으로부터 상당한 영지와 재산을 물려받고 산 후안 데 아레나스 마을을 성전 기사단에 기부하거나 산타 마리아 데 라 산타 에스피나 수도원을 세우는 등 기부 및 종교 활동에 전념했다.
    • 알폰소 7세(1105 ~ 1157):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 알폰소 1세(1073/1074 ~ 1134):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전히스파니아 황제.
  • 고메스 곤살레스(? ~ 1111): 카스티야 백작. 우라카 여왕의 애인.
  •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 1130): 라라 백작. 우라카 여왕의 애인. 우라카 여왕의 그 전 정부(情夫)인 고메스 곤살레스와 친척 관계이다. 아들 페드로 페레스 데 라라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알폰소 7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아라곤 왕국으로 망명했다가 톨로사 백작 알폰소와의 마상창시합 때 낙마했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 페드로 페레스 데 라라(1115 ~ 1156): 우라카 여왕의 사생아. 아버지가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가 몰락한 뒤에도 알폰소 7세의 부관으로서 전장에서 활약했다.
    • 엘비라 페레스 데 라라(1110년대 ~ 1174?): 우라카 여왕의 사생아. 1122년 산 페드로 데 알란자 수도원에 친척들과 함께 기부한 기록과 1159년 부르고스 대성당에 친척들과 함께 기부한 기록이 전해지며, 알폰소 7세로부터 노갈 데 라스 우에르타스와 올밀로스 데 무뇨의 별장을 수여받은 뒤 1168년에 이 별장을 레온에 있는 사하군 수도원에 기증한 사실이 전해진다. 1174년에 두 별장을 사하군 수도원에 기증한 것을 재확인한 것을 끝으로 기록상에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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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히스파니아의 황제의 여성형으로, 이 황제 칭호는 아버지 알폰소 6세가 시작해 우라카를 거쳐 남편 알폰소 1세, 아들 알폰소 7세 때까지 쓰였다.[2] 우라카의 첫 남편 레이몽의 형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