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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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우동선(禹東鮮)
생몰1870년 9월 9일 ~ 1908년 4월 17일
출생지황해도 문화군
사망지황해도 문화군
추서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우동선은 1870년 9월 9일 황해도 문화군에서 우용상(禹龍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분노하여 황해도 구월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신천, 재령, 안악, 은율 등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이후 조윤봉(趙允奉)·강만석(姜萬石)·장동찬(張東燦)·고익균 등 유림 인사들은 우동선을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추대했고, 그는 여러 장령들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여 황해도의 서부지역 일대를 왕래하면서 적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과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전세는 악화되었고, 의병대는 일제의 탄압으로 세력이 약해졌다. 이때 서상륜(徐相崙)이 선유 위원(宣諭委員)의 직함을 띠고 황해도 방면으로 와서 황제의 선유 조서와 함께 선유위원의 효유문 및 면죄 문빙(免罪文憑)을 보내며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우동선은 다음과 같은 화답서를 보냈다.

내가 국민 중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지극히 완고하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국세(國勢)가 위태로운 것을 통분하고 민생이 억압당하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니, 충의의 기운이 격동하고 온 몸이 끓어오르는 피를 억제할 수 없도다. 이래서 창의의 깃발을 들고일어나 감히 의병이 되어, 위로는 성상의 지극한 은혜를 저버리며 아래로는 동포들의 해를 끼치니, 이것이 나라를 구하려는 이 마음에 또 한 갈래의 근심이 되는 것이로다.

지금 황상폐하의 열 줄 윤음(綸音)과 각하의 한 폭 효유문을 받들어 재삼 읽어보니, 성지의 간곡하심에는 땀이 등골에 흐르려 하고, 효유하는 말의 간절함에는 눈물이 수건을 적시려 하도다. (중략) 또 효유하는 말 중에 '시대를 생각지 못하고 경거망동하여, 나는 나비가 등불을 치는 격으로 화를 알지 못하니, 이것은 필부의 용맹에 지나지 못하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특히 외국의 강한 힘을 항적할 수 없음을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저 장자방진시황을 치려는 일이나, 문천상이 연옥에서 순절하던 일은 본받을 것이 못된다는 말인가. (중략)

아아, 교인 동포여, 과연 신앙력이 있는가 없는가. 조국의 위험한 경우와 백성들의 곤궁한 형편을 좀 생각해 볼지어다. 지금 이번 선유(宣諭)가 우리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어찌 위원이라는 한 벼슬자리에 쏠려서 장곡천·이완용 그 원수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복종할 수 있는 일인가. (후략)"


소대장 조윤봉(趙允奉), 경리 이진대(李振大)는 활을 잘 쏘는 명궁(名弓)으로서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이란 기치를 높이 세우고 있던 우동선 휘하에서 일본군을 다수 사살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조윤봉은 전사하고 그의 가족까지 학살되었으며 이진대는 적에게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우동순 역시 적이 쏜 총탄에 맞아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체포되어 감금되어 있다가 밤에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군의 총기를 빼앗아 적 8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1908년 4월 17일 일본군에게 총탄을 여러 발 맞고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우동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