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궈전 사건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吳國楨事件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우궈전 외화 사건
3.2. 우궈전의 반격
3.3. 중화민국의 대응
4. 결과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1954년, 3대 대만성 정부주석이던 우궈전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장징궈중국 국민당의 독재를 비판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편집]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유주의자인 우궈전천청의 뒤를 이어 대만성 정부주석에 임명하였다. 우궈전은 대만의 개혁에 착수, 대만인들을 공직에 대거 기용하는 한편 민주주의와 법치의 확립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대륙 시절부터 우궈전과 사이가 좋지 않던 총정치부 주임 장징궈는 불법체포, 정치자금의 불법적인 동원을 일삼으며 우궈전과 맹렬하게 대립했고 여기에 우궈전에게 불만이 많던 대만 군부까지 장징궈의 편을 들면서 우궈전과 장징궈의 대립은 첨예해졌다. 결국 우궈전은 참지 못하고 세차례나 대만성 정부주석 사직을 요청하여 4월에 마침내 해임되었다. 우궈전은 모교인 그린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는 이유로 1953년 5월 24일,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러던 중 1953년 11월 17일, 총통부 비서장이자 역시나 민주파 인사였던 왕세걸이 장제스, 장징궈 부자와의 불화 끝에 파면되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 왕세걸은 우궈전과 가까운 인물이었는데다가 왕세걸이 파면된 이유가 왕세걸이 불법으로 외화를 사주어 우궈전에게 주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우궈전의 입지는 좁아졌다. 우궈전은 그런 일이 없다고 국민당 비서장 장기윤에게 항의하며 정정보도를 내주도록 요구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은 우궈전을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3. 전개[편집]



3.1. 우궈전 외화 사건[편집]


1954년 1월, 대만의 언론들은 일제히 우궈전이 거액의 외화를 훔쳤다고 공격하였다. 이를 알게 된 우궈전은 1월 15일, 상술한 바와 같이 국민당 중앙당부 비서장 장기균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했다.

나는 멀리 국외에서 갑자기 여러 통로를 통하여 내가 거액의 외환을 사취하였다는 소식과 아울러 총통부 비서장 왕세걸의 사직과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 등을 듣고 있소. 나를 조사해 보면 이번에 미국으로 오는데 이미 행정원 천청 원장의 비준을 얻었고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대만 돈을 대만 은행에서 5천 달러로 바꾸어 여비에 썼으며, 그 외에 정부 혹은 정부 내의 어떠한 사람이 공금을 비준한 적이 없을 뿐더러, 이 부분에 대해 어떤 부탁도 한 적도 없음을 알 것이오. 더욱이 왕세걸과 미국에 가는 비용의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를 나눈 적이 없소.

장기균은 이 편지를 우궈전의 아버지인 오경명과 총통부에 보냈다. 장제스는 우궈전의 편지를 다시 한번 잘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2월 7일에야 신문에 등재하는 것을 허락했다. 1954년 1월 25일, 워싱턴의 화교신문 <민기일보>는 우궈전의 귀국을 촉구하며 우궈전이 대만으로 돌아가 관련된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우궈전은 1월 27일, 민기일보에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

의 애국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정이 어찌 한 개인 혹은 한 집안의 일을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옛말에 이르기를 일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말하길, 합당한 것은 남아 있고 합당하지 않은 것은 없어진다고도 했다. 또한 충신이 나라를 떠나면 그 이름은 깨끗하지 않다고 했다. 정은 귀 신문사에 나를 너무 궁지에 몰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부득불 원하지 않는 말을 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3.2. 우궈전의 반격[편집]


우궈전은 미국에 간 초기만 해도 '군자란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유교적 신념과 더불어 대만에 잔류한 아들 오수황의 안위를 걱정하여 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만 정부의 계속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그들이 뭔가 꾸미고 있다고 확신한 우궈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우궈전은 MGN TV 방송국 취재진의 방문을 받은 후 일주일 후 직접 UPI 기자와 인터뷰를 가져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발표, 대만 정부를 맹렬히 공격했다.
  1. 본인이 아니면 현재 정치구역 내에서 민주가 실시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만 인민과 해외 교포의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할 수 없으며 더욱이 자유국가 특히 미국의 동정과 지지를 획득할 수 없다.
  2. 현재의 정부는 독재가 지나치다. 국민당의 경비는 당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국고에 의해 지출되고 있으며, 그 목적은 영원토록 일당 통치를 하기 위한 것이다.
  3. 정치부는 완전히 소련을 본뜬 것이며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공산주의와 전투를 하려면 반드시 공산주의의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국민당 중앙위원과 행정원 정무위원 직을 유지하고 있던 상태인 우궈전은 타이베이에서 개최되고 있던 1기 2차 국민대회대표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국민당은 일당독재를, 장제스는 족벌독재를 하고 있다, 군대의 당조직과 정치부가 봉건과 내련 세력을 조성하고 있다, 특무 정보정치가 횡행하고 있다, 인권의 보장이 없어 대만은 경찰국가가 됐다, 사상통제를 위한 반공청년구국단은 히틀러의 돌격대와 공산당의 공산주의청년단을 모방한 것이다"라고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국민대표대회에 대하여 조직위원회 구성 및 국민당의 경비조달을 조사, 군대의 단무조직, 정치부 취소, 국가안전제도 법률 제정, 조직위원회가 언론의 자유 부재 원인을 조사할 것 등 6가지를 요구했다.

우궈전의 인터뷰가 공개되자 미국에선 큰 풍파가 일었으며 미국 정부의 대만 지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뉴욕 타임즈, 시카고 트리뷴, 타임지, 뉴스위크 등 주요 언론들이 차례로 일을 보도했으며 이 때문에 대만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3.3. 중화민국의 대응[편집]


2월 26일, 중화민국 입법원장 장도번이 우궈전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비방전을 전개하였으며 그를 반동, 미친놈, 불법적이고 기율을 문란케 했다고 맹비난하여 "직분을 벗어나 인수 인계를 거절하고 사사로이 수표를 마구 발행하여 식량 값을 올렸으며 아울러 외환, 무역, 임업 등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도 불법으로 하여 부패를 눈감아 주고 사사롭게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고 맹비난하며 13가지 죄상을 발표했다. 또한 타오시성은 <두 칼로 끝까지 죽여야 한다>는 글을 발표, 우궈전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와중에 우궈전은 <장 총통께 드리는 글>을 발표, 장제스와 장징궈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장징궈를 대만 정치 발전의 장애물로 지목하여 대륙이 수복되기 전에는 미국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 하며 대륙 수복 전에 대만에 돌아와선 안된다고 했고 장제스에게는 이기심이 애국심보다 많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였으며 어떠한 사람도 비판이나 건의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3월 9일, 국민당 당보는 <우궈전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자>라는 사설을 발표, 우궈전이 음흉하고 간사한 술책을 부리고 있으며 법률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바꾸려고 의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우궈전이 외국의 방종한 무리들과 제휴하여 자유라는 명목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 3월 17일, 국민대표대회 10차 대회는 우궈전 등의 여권을 취소하고 귀국하여 법에 의해 처리하자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만약 거부할 시에 체포령을 내려 국가의 기율을 유지하고 관리의 길을 올바르게 하길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날 장제스는 우궈전이 출국한지 몇달도 안되어 국가를 배반하고 정부를 능욕하여 국군을 이간질시키고 백성과 정부 및 교포와 조국의 관계를 이간질하려고 기도하여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음흉한 생각을 품었으니 죄질이 뚜렷하다면서 우궈전을 행정원 정무위원직에서 해임하고 위법 독직 사정을 철저히 조사하여 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이 개입했다. 주 대만 미국 대사 란킨은 정부의 체포령을 취소하고 대만에 남아있던 우궈전의 아들 오수황을 미국으로 보내주면 우궈전이 더 이상 당국을 비난하지 않게 하겠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우궈전과 대만 정부가 이를 수락하면서 대만 정치계를 뒤흔든 우궈전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4. 결과[편집]


장제스는 장징궈를 국가안전회의 부비서장에 임명, 정식으로 정보계통 책임자로 삼고 1954년 국민대회에서 총통에 연임하였다. 또한 대만성 정부주석도 위훙쥔에서 고분고분한 옌자간으로 교체하였다. 이어 1955년 쑨리런 쿠데타 모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민당의 독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우궈전 사건은 국민당의 핵심 간부가 국민당의 일당독재에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대만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5. 참고문헌[편집]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 장성구 외, 대만현대정치사 상(서울: 지영사, 1992)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23:24:54에 나무위키 우궈전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