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루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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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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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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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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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51대




FC 바르셀로나 주장

조아킴 리페
(1971~1973)

요한 크루이프
(1974~1978)


후안 마누엘 아센시
(1978~1980)


요한 크루이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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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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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C 아약스 영구결번

No. 14




네덜란드의 前 축구인


파일:cruyff legend.jpg

이름
요한 크루이프
Johan Cruyff
본명
헨드릭 요하너스 크라위프
Hendrik Johannes Cruijff
출생
1947년 4월 25일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시
사망
2016년 3월 24일 (향년 68세)
스페인 카탈루냐지방 바르셀로나주 바르셀로나시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display: none; display: 네덜란드"
행정구
]]

신체
180cm | 체중 78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1], 미드필더[2]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행정가 은퇴
소속
선수
AFC 아약스 (1957~1964 / 유스)
AFC 아약스 (1964~1973)
FC 바르셀로나 (1973~1978)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 (1979)
워싱턴 디플로매츠 (1980)
레반테 UD (1981)[3]
워싱턴 디플로매츠 (1981)
AFC 아약스 (1981~1983)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3~1984)
감독
AFC 아약스 (1985~1988)
FC 바르셀로나 (1988~1996)
카탈루냐 대표팀 (2009~2013)
기타
AFC 아약스 (2011~2016 / 기술고문)
국가대표
48경기 33골[4] (네덜란드 / 1966~1977)
통산 득점
433골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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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
오른발 (양발)
번호
AFC 아약스 - 14 영구결번
FC 바르셀로나 - 9
네덜란드 대표팀 - 14
가족
아들 요르디 크루이프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사망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6.3. 수훈
7. 어록
8. 크루이프에 대한 헌사
9. 평가
9.1. 선수로서의 평가
9.2. 축구계에 끼친 영향
9.4. 게으른 천재
10. 여담



1. 개요[편집]


네덜란드의 前 축구인.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안티 테제로, 축구 선수축구 감독으로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5]

선수 시절, 클럽에서는 토탈 풋볼의 아버지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이끄는 아약스의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1971-72 시즌 트레블[6]을 포함해 유러피언컵 3연패와 에레디비시 8회 우승을 이끌었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해서는 14년 만의 라리가 우승을 달성했다.[7] 국가대표팀에서도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미헬스의 토탈 풋볼을 구현하고 준우승을 일궈냈다. 또한 발롱도르를 세 차례 수상하며, 미셸 플라티니, 마르코 반 바스텐과 동률을 이루고 있다.[8]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구단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과 라리가 4연패를 이끌었으며, 라 마시아를 개편하고[9] 자신의 축구 철학을 도입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바르셀로나식 축구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10]

한편 그가 선수 시절에 아약스에서 달았던 등번호 14번은 현재 아약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11]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요한 크루이프는 10세일 때부터 아약스 유소년팀에서 성장했고 1964년 에레디비시에서 데뷔하여 데뷔전부터 득점을 올리는 등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하지만 아약스는 13위에 그치고 만다. 이후 자신의 영원한 은사인 리누스 미헬스를 만나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해 25경기에서 23골을 넣고 KNVB 베이커 결승전에서는 혼자 4골을 넣어 7:0 대승을 이끄는 등 괴물같은 모습을 보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46경기 33골을 기록하며 아약스의 에레디비시, KNVB 베이커 더블을 이끌었고 1969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결승에서 AC 밀란을 만나 밀란의 피에리노 프라티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며 4:1로 패배하며, 우승을 AC 밀란에게 내주었고 리그에서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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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시 유러피언컵에 도전한 크루이프의 아약스는 파나티나이코스를 2:0으로 격파하여 마침내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미헬스 감독을 떠났으나 1971-72 시즌 아약스는 에레디비시에서 단 1패만 기록했고, 크루이프는 KNVB 베이커 결승전에서도 득점을 올리며 승리를 이끌었고 인터 밀란과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혼자서 2골을 넣으며 유러피언컵 2연패 달성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클럽 최초이자 축구사 두 번째[12] 트레블을 달성하였고, 1년후에도 결승전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유러피언컵 3연패를 달성한다. 이때 크루이프는 1971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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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시절
1973년에 아약스를 떠나 은사인 리누스 미헬스의 부름을 받고 스페인 라리가에 진출한 크루이프는 "독재자의 팀에서 뛰지 않겠다"라며 레알 마드리드디스하고 바르셀로나를 택한다. 그의 이적료는 600만 길더[13]로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웠는데, 이적료가 너무 높아 스페인 당국에서 허가를 받지 못하자 농기계로 등록해서 데려왔다는 이적 비화가 있다.[14] 이때의 이적료를 유로로 환산하면 36만 유로였는데 연봉이 15만 유로였다. 당시 바르사의 스타였던 후안 마누엘 아센시의 연봉이 5,400 유로였다는 말이 있는데, 진짜면 얼마나 큰 금액인지 감이 온다. 이에 아센시는 크루이프가 경기 중에 조금 더 뛰어달라고 요청하자 "네가 더 많은 돈을 받으니 네가 더 많이 뛰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어쨌건 간에 1973년 9월에 이적 합의를 맺었지만 행정 절차가 늦어져 실제 데뷔한 것은 그해 10월 28일 그라나다 전이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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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까지만 해도 바르사는 당대의 이름난 전술가를 차례로 데려왔지만, 기대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에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미헬스와 크루이프였다. 이렇게 바르사에 온 크루이프의 기량은 그라나다와의 데뷔전 멀티골로 시작하여, 1974년 2월 17일 프랑코가 지켜보는 엘 클라시코 원정 경기에서 5:0 승리를 거두며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크루이프가 없던 1973년 10월 7일 엘 클라시코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한 바르사는 1945년 이후 근 30년만의 5:0 승리이자 마드리드 원정 사상 최초 5:0 승리, 가장 큰 점수차를 기록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961년 이후 14년 동안 라리가 타이틀을 들지 못한 바르셀로나는 오랜 숙원인 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에 따라 크루이프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가 이 시즌에서 보인 성적은 16골을 기록해 득점 랭킹 4위였다. 그리고 크루이프는 1973년과 1974년에 발롱도르를 연속 수상하여 세계 최고 선수의 지위를 굳건히 지켰다.[16] 1974년 6월 29일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4:0으로 털어 설욕했으나 이때까지 코파 델 레이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출전할 수 없어서 크루이프와 당시 공격의 축이었던 1호 외국인 선수 우고 소틸이 뛰지 못한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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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1973년 12월 22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 득점}}}
특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공중 발리 슈팅으로 '플라잉 더치맨'이라는 별명을 추가하며 매번 라리가 무대에서 화려한 축구 쇼를 보여주던 크루이프는 바르사의 주장 완장까지 꿰찼다. 그러나 그에게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4/75 시즌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 원정 0:1 패배, 안방 0:0 무승부로 우승 타이틀을 라이벌에게 내주고 말았다.

1975년에 이르러 은사인 미헬스가 감독 자리에서 사임한 뒤 크루이프에게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11년 동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지휘하면서 3번의 리그 우승과 1975년 UEFA컵 우승을 이끈 명장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취임했다.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전술적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크루이프를 측면에 기용하려 한 지시 때문에 마찰이 생겼다. 세비야와의 경기 도중 교체된 크루이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이스바일러 감독과 충돌했다. 그러나 엘 클라시코에선 안방 2:1, 원정 2:0으로 이기면서 자존심을 세웠다. 이때 동료인 카를레스 렉샤흐도 탁월한 기량을 과시했으나 1975/76 시즌 라리가 우승은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또 뺏기면서 준우승에 그쳤고, 바이스바일러 감독 역시 시즌이 끝나갈 즈음인 1976년 4월에 경질되었다.

이후 라우레아노 루이스 감독대행을 거쳐 친정인 아약스에서 감독을 하던 미헬스 감독이 돌아오면서 은사와의 눈물의 상봉을 거둔 크루이프는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비록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승점 1점이 뒤져 라리가 타이틀 탈환은 실패했지만 1976/77 시즌 동안 크루이프는 엘 클라시코에서 두 번 다 득점하여 1승 1무로 우위 전적을 만들었다.

경기력은 바르사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그해에 크루이프는 라리가에서 14골을 기록하며 줄어든 득점력을 회복했다. 1977/78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은 들었지만 엘 클라시코에서 2연패를 당해 라리가 우승을 날려먹으면서 용납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미헬스 감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 다시 사임 수순을 밟았고, 애제자인 크루이프 역시 계약이 만료되자 바르사를 떠났다.

이대로 가면 명예롭게 은퇴하는가 했으나, 사기당해 전 재산을 날려 먹으면서[17] 돈을 벌려고 선수로 복귀, 1979년 7월 은사인 미헬스가 감독이었던 미국 북미 축구 리그 로스엔젤레스 아즈텍스와 계약하면서 미국에서 뛰게 되었다.

1980년 미국 북미 축구 리그 워싱턴 디플로매츠에서 뛰다가 1981년 2월 스페인 레반테 UD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1981년 6월 다시 미국 북미 축구 리그 워싱턴 디플로매츠에 입단하였고 1981년 12월 네덜란드 아약스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시절 아약스 소속으로 PSV 에인트호번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던 허정무와 맞대결이 있었는데 허정무가 그의 마크맨이었다.[18][19] 198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축구화를 벗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66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데뷔한 크루이프는 곧 맹활약하여 주전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유럽 예선에서 탈락하여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다.[20]

하지만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미헬스를 감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크루이프를 비롯한 요한 네스켄스, 로프 렌센브링크, 뤼트 크롤 등 쟁쟁한 선수들을 모으고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토탈 풋볼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는데 1차 조별리그 3조에서 우루과이를 2:0으로 격파, 스웨덴이랑 0:0 무승부, 불가리아를 4:1로 격파하여 2차 조별리그에 진출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크루이프 본인이 멀티골을 넣는 등 4:0으로 압승을 거두었고 동독을 상대로 2:0,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상대로 네스켄스와 크루이프가 골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하며 결승까지 안착했다.

처음엔 원래 축구 변방이었던 네덜란드를 무시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본선에서 네덜란드가 토탈 풋볼로 눈부신 경기력을 선보이자 네덜란드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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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결승전 상대는 개최국 서독이었다. 서독 역시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2차 조별리그에서 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지만, 많은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승리를 점쳤다. 서독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동독전에서 의외의 졸전을 펼치며 패배를 당해 우승 후보라는 평가에 먹칠을 했고,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은 주적인 동독에게 무기력하게 패한 것에 분노한 서독 국민들에게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서독이 동독에게 패한 것은 2차 조별리그에서 유리한 B조에 속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서독은 동독에 패하면서 조 2위로 내려앉아 8강 조별리그에 폴란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B조가 되었다. 반면 네덜란드는 2차 조별리그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동독과 같은 A조가 되었다. 덕분에 서독은 네덜란드에 비해 손쉽게 결승에 올라왔지만, 같은 3승으로 결승에 올랐다 하더라도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3승을 거둔 네덜란드가 서독보다 훨씬 큰 임팩트를 보인 것은 당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결승에서 네덜란드의 우승을 점쳤다. 크루이프의 킥오프로 결승전이 시작된 후 네덜란드는 그 유명한 16번의 볼터치로 경기 시작 1분 만에 페널티킥을 얻어 냈고 이를 요한 네스켄스가 마무리하며 예상대로 네덜란드가 손쉽게 우승컵을 가져가는 듯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74년 네덜란드가 토탈 풋볼로 유명해지기 직전,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은 바로 서독이었다. 서독은 유로 1972에서 화려한 패싱 플레이를 펼치며, 잉글랜드(3:1), 소련(3:0) 등 다른 우승 후보들을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여 '람바참바 풋볼'이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1972년 발롱도르에서 서독 선수들이 1~3위를 독식할 정도였다. 당시 서독의 화려한 플레이는 유럽팀도 브라질 같이 아트사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격이라 당시 유럽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그러나 유로 1972 우승 이후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은 브라질과 같은 남미 강호들이 가세하는 월드컵에서 확실하게 우승을 거머쥐기 위해 대표팀의 색깔을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같은 아트 사커로 맞불을 놓기보다 독일의 장기인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수비와 조직력 위주의 축구로 회귀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쇤 감독은 패스마스터 귄터 네처를 빼고 전사 볼프강 오베라트를 중원 플레이메이커로 기용하는 등 대표팀의 색깔에 변화를 주었다. 허나 그 결과 1974년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실리적이고 재미없는 축구를 구사했고, 게다가 조별 본선에서 동독에게 패하면서 우승후보로서의 자존심을 구겼다.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은 화려한 토탈 풋볼을 구사하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강호들을 잇따라 무실점으로 격파하던 네덜란드에게 쏠렸다.

1974년 월드컵을 앞두고 서독의 쇤 감독이 잘나가던 서독 대표팀에서 화려함을 지우면서 팀 컬러를 바꾼 것은 브라질 같이 개인기가 뛰어난 강호를 상대로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가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서독의 이러한 전략은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입증되었다. 결승전에서 서독의 쇤 감독은 찰거머리같은 대인 방어 능력을 보유한 사냥개 베르티 포크츠를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으로 붙였다. 포크츠는 악착같이 크루이프를 봉쇄했다. 그간 수없이 많은 전담 마크맨들을 농락하면서 활약해왔던 크루이프였지만, 포크츠는 여타의 마크맨들과는 달랐다. 결국 크루이프는 결승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1974년 월드컵에서 결승전 이전까지 단 1점만 실점할 정도로[21] 탄탄한 수비를 보였지만, 결승전에서는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몰아붙이는 서독의 파상 공세에 연이어 뚫리며 위기를 맞았다. 결국 네덜란드는 파울 브라이트너게르트 뮐러에게 연속골을 내주면서 1:2로 역전패,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다만 결승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해 프란츠 베켄바워는 국가대표로 월드컵 우승,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으로 분데스리가유러피언컵 우승을 했지만 크루이프의 혁명적인 플레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여담으로 베켄바워는 크루이프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1974년 당시에는 리그, 챔스, 월드컵까지 모든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고도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22] 그 당시 크루이프가 월드컵에서는 역대급 퍼포먼스를 남겼지만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상은 다소 아쉬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참고로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골든볼을 크루이프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홈과 RSSSF에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78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다. 다만, 크루이프는 당시 모든 언론사[23]에서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혔으며 키커와 옵타에서 대회 평점에서 1위를 기록했다.# #

1974년 준우승 이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독한 악연을 이어가고 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불참했는데, 독재자를 혐오한 크루이프의 성향상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에 반대해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가족 때문에 불참한 것이었다. 2008년 스페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괴한들에게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납치당해 생명이 위협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충격이 컸던 가족들을 내버려두면서까지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라고 30년 만에 고백했다. 어쨌건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크루이프 없이도 결승까지 올랐지만 아르헨티나에게 패하고 만다.[24] 재미있게도 토탈 풋볼로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두 대회 연속 개최국에게 결승전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25]


3. 플레이 스타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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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보인 크루이프 턴

크루이프는 피지컬, 테크닉, 브레인 삼박자를 모두 갖춘 완벽한 축구 선수였다. 빠른 순발력과 주력, 독보적인 레벨의 테크닉에 누구보다도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선수로, 온 더 볼과 오프 더 볼 상황에서 어떻게 공간을 확보하고 활용해야 할지 판단하는 능력이 당대 최고였다.

일단 그의 경기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주 넓은 시야다. 경기장 전체를 보는 듯한 넓은 시야를 통해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패스를 할 수 있었다. 토탈 풋볼의 선구자답게 종횡무진 빈공간을 찾아 움직이며 수비 라인까지 내려와 빌드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는 1974년 월드컵에서 무려 36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했고, 이는 가히 월드컵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기회 창출 기록이다. 그나마 같은 월드컵에서 30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한 카지미에슈 데이나, 28회를 기록한 1970년의 펠레, 27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한 1986년의 디에고 마라도나, 30회를 기록한 2010년의 사비 에르난데스만이 이 기록에 근접해 있다.

또한 축구 역사상 최강급의 창조성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으며, 다른 선수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플레이를 자주 하곤 했다. 요즘도 간혹 보이는 페널티킥 상황에서의 패스도 크루이프가 최초다. 위의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정확하고 공격적인 아웃프런트 킥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또한 전술 이해도축구 지능마저도 축구사 끝판왕 수준이었는데, 그 토탈 풋볼을 단번에 이해하고 토탈 풋볼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천재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당대 최고의 드리블러는 물론이요,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실력을 갖추었다. 영국 축구 전문 매체 '커트오프사이드'가 선정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 베스트 10'에서 마라도나, 메시, 가린샤에 이은 4위를 차지하였는데, 앞선 세 선수들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축구에 필요한 대부분의 능력을 완벽히 갖추었으면서도 드리블마저 이들에게 필적할 만한 평가를 받은 크루이프의 위엄을 알 수 있다. 요즘 축구 선수라면 기본 소양으로 갖추고 있는 크루이프 턴을 실전에서 처음 제대로 활용했으며, 온갖 창조적인 드리블 스킬로 무장해 상대 수비수를 쩔쩔매게 만들었다.

거기에 체력과 수비 능력도 뛰어나, 팀 단위의 압박 수비를 본인이 직접 최전선에서 이끌었다. 공격수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슬라이딩 태클 실력을 자주 보여주었다. 무려 월드컵 결승전에서 그런 플레이들을 했으니 가히 혁명적인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천성적인 리더십까지 타고난 선수였다. 커리어 중간중간에 수비형 미드필더리베로로도 종종 뛰었었는데, 앞서 말했듯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가 리베로로도 뛰었다는 것은 그만큼 수비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26]

신체 능력 역시도 괴물 같은 수준으로, 당시 기준으로 꽤 큰 편인 180cm의 키에도 빠르고 민첩하면서도 피지컬도 준수한 수준이었다. 센터백들을 순간적인 치달로 벗겨낼 수 있었으며, 앞에 언급된 드리블 능력과 합쳐져서 순식간에 두세 명을 제쳐내고 슈팅을 때리는 것이 가능하던 선수였다.

또한 득점력도 상당한 선수였는데, 트랜스퍼마켓 기준으로 클럽 통산 502경기 262골과 135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27] 국가대표팀에서 48경기 33골 2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앞에도 언급했다시피 전형적인 득점 기계 타입이 아니라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스타일임에도 2경기 1골 이상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오히려 클럽에서보다 훨씬 뛰어났다. 또한 19-20 시즌 레반도프스키 이전까지 역사상 유일한 득점왕 트레블 기록 보유자였기도 하다.

탁월한 운동능력과 역대 한 손에 꼽힐 만한 최고의 테크닉, 그리고 역대 최고 수준의 창조성과 경기 운영 능력으로 필드 전체에서 극도로 효율적인 플레이의 완성형을 만들어낸 선수가 바로 요한 크루이프이다.


3.1. 토탈 풋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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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와 그의 스승 리누스 미헬스는 오늘날 토탈 풋볼이라 불리는 개념을 유행시킨 인물이다. 미헬스가 개념을 정리했다면 크루이프는 이를 실제 경기장에 구현해내며 찬사를 받았다.[28]

헌데 사실 토탈 풋볼이라는 풍조를 요한 크루이프나 미헬스 감독 둘이서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아약스 시절 이전에도 토탈 풋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흐름은 있었다. 1950년대 4년간 A매치 32연승이라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운 무적의 매직 마자르 헝가리는 경기 중에 유기적인 포지션 변경으로 황금색 바람을 일으켰고,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마슬로프는 압박과 4-4-2를 이용해 토탈 풋볼로 이어지는 여러 개념들을 앞서 선보였으며, 독일의 공격적인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도 카테나치오를 개량해서 스위퍼를 리베로 개념으로 운용하기 시작했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오늘날도 역대 최강 팀이라는 칭호를 듣는 유기적인 미드필더진을 구축한 바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토탈 풋볼을 완성시키고 축구계 전반으로 유행시킨 리누스 미헬스나 요한 크루이프의 위대함이 빛 바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두 사제지간이 만들어낸 위대한 업적들이 없었다면 토탈 풋볼은 오늘날 축구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사람과 당시 AFC 아약스,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부터 현대축구가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담으로, 이렇게 네덜란드에서 대를 이어 토탈 풋볼의 싹이 키워지고 있던 반면, 잉글랜드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킥 앤 러시 전술이 대세를 타게 된다.


4. 지도자 경력[편집]



4.1. AFC 아약스[편집]


1985년 아약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3시즌 동안 KNVB컵을 2회 획득했으나, 리그 우승은 실패했다.[29] 그가 감독직에 있을 동안 리그 우승은 전무했음에도 당시 전술적으로 가장 공격적이고 화려한 팀 컬러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4.2. FC 바르셀로나 - 드림팀의 수장[편집]


1988년에 주젭 유이스 누녜스 바르셀로나 회장은 크루이프를 감독에 앉혔다. 누녜스 회장의 리빌딩 의지를 등에 업은 크루이프는 기존 주전 선수를 거의 전부 방출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영입하여 사실상 새로운 팀으로 재창단했다. 크루이프는 부임하자마자 기존 선수들 중에서 게리 리네커를 제외한 주전 선수들을 전부 방출했다. 이 과정에서 크루이프를 대신해서 누녜스 회장이 악역을 자처하며 기존 선수단을 정리하면서 시시때때로 충돌하며 어려움을 겪었고, 이 때문에 지금도 좋지 않은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녜스 회장은 크루이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고, 크루이프가 원하는 선수들을 모두 영입해 주었다. 그리하여 크루이프는 부임 첫 시즌에만 13명의 선수를 영입했는데,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온 호세 마리 바케로와 혼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치키 베히리스타인 등 바스크 출신 선수들과 훌리오 살리나스, PSV 에인트호번에서 뛰던 로날드 쿠만, 유벤투스에서 온 미카엘 라우드루프, CSKA 소피아에서 빼어난 실력을 보인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등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기존 선수단 중에서는 팀의 에이스였던 리네커만 유일하게 남았으나, 크루이프는 리네커를 강제로 윙어로 포변시켰고, 이에 리네커의 불만이 높아져 1988-89 시즌이 끝나고 리네커 역시 이적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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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이렇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만을 모아 완전히 판을 새로 짜게 된 크루이프는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인 쿠만을 코치처럼 활용하면서 선수들에게 이미 아약스 시절에 구축한 티키타카토탈 풋볼을 바르셀로나에 이식했다. 당시 스페인 언론은 크루이프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게 된 이 팀을 '드림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선수들을 쓸어모아 드림팀을 이루었지만 첫 2~3시즌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그 사이 레알 마드리드라리가 5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하여 크루이프는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경질설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약 4년 간 라리가 4연패, 창단 이후 첫 유러피언컵 우승 등을 달성했다. 다만 1994년 이후 크루이프 감독과 선수들 간의 잇따른 불화가 불거지며 드림팀은 모래성처럼 와해되고 말았다.[30]

유소년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축구를 해야 한다는 지론을 설파하며 라 마시아 건립 및 유소년 교육에 신경을 쓴 크루이프는 캄 노우 경기장 옆에 위치한 미니에스타니를 찾아 B팀의 어린 선수들의 동태도 살폈다. 당시 바르사의 B팀은 카를레스 렉사흐 감독이 지휘 중이었는데, 크루이프는 당시 우측 미드필더로 뛰던 펩 과르디올라중앙 미드필더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한 뒤 1990년에 그를 1군 선수로 발탁해 팀의 심장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피보테(pivote)로 불리는 이 위치는 현대 축구에서 상대와 중원 대결에서 수비를 주로 펼쳐야 되는 포지션이기에 호리호리한 체형에 기술이 좋은 과르디올라를 선발한 것이 큰 논란이 되었다. 이에 크루이프는 이 위치에서 공을 가지고 공격을 펼쳐 라인 전체를 공격적으로 끌어올리는 이른바 현재의 바르사 팀 스타일, 그러니까 소유와 지배 그리고 전진 압박을 통한 지속적인 공격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이 '크루이프의 축구'에서 피보테는 가장 영리하고 볼 관리 능력이 가장 뛰어나야 하며 경기 흐름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수비 면에서의 피드백은 그 뒤에 배치된 쿠만과 풀백 수비진이 커버했다. 전방으로 쏠린 대형에서는 수비적인 위험 부담을 수반하나 공격을 최선의 수비로 택한 크루이프의 축구는 부임 첫 시즌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내용과 결과 면에서 일거양득을 이루어 세계 축구의 진보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렇게 선수들을 쓸어모아 드림팀을 만들었지만 크루이프 감독의 바르셀로나는 처음에는 기대에 못 미쳤다. 특히 첫 엘 클라시코는 실망스러웠다. 1988년 10월 22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2-3으로 졌다. 하지만 당시 바케로, 고이코에체아, 베히리스타인 등 새로 가세한 선수들이 많아 조직력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 패인이다. 이에 크루이프는 '충분히 비길 수 있는 경기였다. 1:2 상황에서 쫓아간 선수들에게 만족한다'라고 했다. 이어 1989년 4월 첫날의 안방 경기에서 무득점으로 비기면서 숙적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4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드림팀은 절치부심하여 1989년 10월 7일에 처음으로 엘 클라시코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일등공신이 당해 영입한 쿠만과 라우드루프였는데, 이때 쿠만은 페널티킥으로 2골을 기록해 3-1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 2월 15일 마드리드 원정에선 살라나스가 두 골을 넣었지만 2-3으로 패하면서 크루이프는 경질 위기를 맞았다. 엘 클라시코에서의 패배도 뼈아팠고, 이해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5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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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 감독과 과르디올라[31]

이렇게 경질설에 시달리던 크루이프를 수렁에서 구해낸 것은 1990년 4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이었다. 역시 엘 클라시코로 펼쳐진 결승전에서 기예르모 아르모와 살라나스의 골로 2:0 완승을 거두며 코파 델 레이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에 누녜스 회장이 크루이프를 지지하여 그를 유임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은 감정이 격앙된 경기였다. 그 증거로 경기 당시 퇴장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인 페르난도 이에로는 '내게 이 결승전에서 가장 기분 나쁜 부분은 우승컵을 스페인 사람들이 따내지 못한 것'이라고 민족 정서를 자극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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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도리아를 꺾고 마침내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크루이프 감독[32]과 그의 드림팀
1990-91 시즌의 엘 클라시코는 1승 1패로 호각이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홈팀인 레알 마드리드가 0-1로 진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연속 우승을 끝내버린 상황에서 치뤄졌다.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박수를 받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입성한 바르사가 1984-85 시즌 이후 6시즌만에 우승컵을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91-92 시즌 엘 클라시코는 안방에서 둘 다 비겼다. 이때 쿠만은 원정에서 페널티킥, 안방에서는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득점하여 엘 클라시코의 사나이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해에는 프랑스의 유명 위성방송채널 카날 플뤼스의 스페인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친선 엘 클라시코가 열리기도 했다. 이후로도 엘 클라시코는 계속해서 시소타기였다. 그러나 이 시즌, 바르셀로나는 당시 만치니가 에이스로 팀을 이끌던 삼프도리아를 꺾고 팀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하였다. 또한 크루이프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한 세 번째 축구인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33]

엘 클라시코의 균형이 완전히 바르셀로나 쪽으로 넘어온 것은 1994년 1월 7일 캄 노우에서 호마리우해트트릭을 몰아치며 5:0 대승을 거둔 경기부터다. 이는 크루이프가 선수 시절에 5:0 대승을 이끈 지 정확히 20시즌만에 감독으로써 또 한번 5:0의 역사를 만들어 그해 코파 델 레이 준결승에서 당한 완패를 설욕해낸 것이다. 게다가 1995년 5월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며 바르사는 라리가 4연패를 자축했다. 그의 마지막 엘 클라시코는 1996년 2월 10일 캄 노우에서 열린 경기였다. 이때 바르사는 코드로의 두 골과 루이스 피구의 골로 3:0 완승을 거두었다. 그 전인 1995년 9월 30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는 라울 곤살레스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로헤르의 동점골로 비겼다.

그러나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는 1993-94 시즌 이후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팀의 분위기가 무너진 것이 컸는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는 크루이프의 독선적인 성격과 스타 선수들의 제멋대로인 성격 양쪽이 안좋은 시너지를 낸 것이 컸다. 원래 이전부터 라우드루프, 스토이치코프 등 자존심 높은 스타플레이어들과 고압적인 태도의 크루이프 감독은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1993년 방탕한 사생활과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한 호마리우까지 합류하면서 팀의 케미는 더욱 빠르게 무너지게 된다.

특히 호마리우를 영입하고 나서 당시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선수였던 라우드루프를 대놓고 천대하면서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라우드루프는 191-92 시즌 라리가 외국인 MVP로 꼽힐 만큼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베켄바워가 60년대는 펠레, 70년대는 크루이프, 80년대는 마라도나, 90년대는 라우드루프의 시대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라우드루프의 활약은 대단했다. 게다가 라우드루프는 바르셀로나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여 팀을 이끄는 리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라우드루프는 크루이프와 더불어 바르셀로나의 올타임 레전드로 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에서 선수로서는 이루지 못한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차지했고[34] 당시 드림팀 멤버라면 조만간 다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라우드루프와 쿠만이 크루이프를 능가하는 바르셀로나 역대 최고의 레전드에 꼽힐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 중 쿠만은 지금도 바르셀로나에서 역대급 레전드 중 하나로 대우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팀에서 쿠만을 능가하는 1옵션 에이스이자 심지어 크루이프의 위상조차 넘을지도 모른다고 점쳐지던 라우드루프는 아래에 서술된 것처럼 크루이프에게 내쳐지고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만다.

크루이프는 1993년 여름 새로 영입한 호마리우를 중용하면서 라우드루프를 교체 명단에서조차 제외하기도 하는 등 대놓고 천대했다. 물론 호마리우가 좋은 활약을 펼치긴 했지만 크루이프가 대놓고 라우드루프를 무시하던 방식은 당시에도 팬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과 반감을 가져왔다. 게다가 호마리우는 사생활과 팀워크에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했다. 호마리우가 클럽 밖에서 문란한 사생활로 야기한 성추문 등 구설수는 둘째치고, 클럽 안에서도 연습 시간 때마다 크루이프의 지시를 듣지 않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불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다. 크루이프는 선수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잔소리가 심한 스타일이었고 이미 라우드루프라는 게으른 천재로 인해 골치를 자주 썩이고 있었으나, 그 라우드루프를 한층 능가하는 문제아 호마리우에게는 정작 별말도 못하고 그가 라커룸 안팎에서 망나니짓을 하는 것을 거의 방임했다.

물론 크루이프가 호마리우에게 전혀 잔소리를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마리우는 그때마다 능글맞게 응수하거나 심지어 크루이프 감독에게 '당신이나 감독질 제대로 해라, 나는 매 경기 골을 넣는다'며 큰소리쳤다. 똑같이 속썩이던 라우드루프는 그래도 예이~예이~ 하며 적당히 흘리는 식이었는데 호마리우는 그냥 대놓고 개기는 스타일이었고 이런 호마리우를 크루이프는 거의 전혀 컨트롤하지 못했다.[35] 호마리우는 바르셀로나 팀원들과도 전혀 융화되지 않았다. 그나마 스토이치코프를 제외하면 다른 동료들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스토이치코프도 성질이 대단한 인간이라 둘이서 누가 팀의 1인자인가를 두고 제법 충돌했다. 때문에 바로셀로나의 팀 분위기는 개판 일보직전까지 갔다. 호마리우는 그해 경기당 1골에 가까운 놀라운 활약을 펼쳤지만 바로셀로나 팀 자체는 이전에 보였던 응집력 있는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크루이프의 라우드루프 홀대는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때 라우드루프가 선발은 커녕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 앉으면서 정점을 찍었다.[36] 당연히 이는 현지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라우드루프가 선발에서 제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장 카펠로 감독은 라우드루프가 없으니 우리가 우승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대놓고 바로셀로나를 흔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셀로나 팀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고 결국 객관적 전력에서 한 수 아래라 평가받던 AC 밀란에 0-4라는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다. 지금까지도 역대 챔피언스리그 최다 점수차 경기 타이 기록의 불명예로 남아있는 치욕적인 경기였다. 이 충격적인 참패 직후 라우드루프는 비시즌 기간 결국 크루이프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충격을 주었다. 라우드루프의 충격적인 레알 이적 때문에 많이 가렸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드림팀의 핵심 멤버 중 한명으로 팀에서 나름 레전드급 커리어를 쌓았던 안도니 수비사레타를 1993-94 시즌이 끝나고 모양새 좋지 않게 퇴출시킨 것도 바르셀로나 팬들을 실망시켰다. 이렇게 몇몇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나고 남아있는 선수들도 전혀 뭉치지 못하며 드림팀은 와해되었다.

물론 크루이프가 팀의 새로운 핵심이라 생각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남아 있었지만 상술했뜻 문제는 팀의 분위기가 개판이었다는 것이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크루이프가 저런 난리를 겪으면서도 보호해주었던 호마리우는 라우드루프 이적 후 귀신같이 부진에 빠졌다. 비시즌 기간 호마리우는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복귀 후 심각한 부진에 빠졌다. 게다가 호마리우는 원래부터 말을 안 들어먹었는데 이제는 아예 대놓고 팀 훈련에 무단 불참하는 등[37] 문제 행동은 더욱 심각해졌다. 1993-94 시즌에 무려 라리가 30골을 넣었던 호마리우는 다음 시즌 겨우 4골을 넣었다. 경기 중에 디에고 시메오네를 가격하며 징계를 받기도 했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에 달한 크루이프는 마침내 호마리우를 갈궈대기 시작했고 심지어 언론에 대고 공개적으로 호마리우를 비난했다. 물론 호마리우도 '네 앞으로 훈련 열심히 할게요' 할 성격이 아니었고 단단히 삐져서 그냥 고향 브라질로 돌아가겠다고 선언, 결국 1995년 1월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해지하고 브라질로 돌아가고 만다.

팀이 침체에 빠지며 저조한 경기력을 펼치자 바르셀로나 팬들은 선수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런 팬들의 반응은 선수들을 더욱 힘빠지게 했다. 게다가 호마리우와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왔던 스토이치코프와의 갈등도 1994-95 시즌에 최악으로 치달았다. 스토이치코프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기면 크루이프 감독 덕분이고, 패하면 선수들 탓이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면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스토이치코프는 결국 1994-95 시즌 단 6골만 기록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결국 1994-95 시즌 바르셀로나는 수차례 졸전을 펼친 끝에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이 끝나고 쿠만, 스토이치코프 등 그나마 남아있던 팀내 핵심 멤버들도 대거 팀을 떠나 이적하면서 이렇게 드림팀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감독 시절 말년에 팀의 주축인 스타 플레이어들과 모조리 마찰을 일으켰다. 쿠만 정도만 그나마 크루이프와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은 케이스. 오히려 쿠만의 경우 크루이프의 편애로 팀내에서 약간 불편한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크루이프는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인 쿠만을 편애하는 정도를 넘어서 바르셀로나에서 항상 네덜란드식 축구를 운운하며 쿠만을 네덜란드식 축구를 바르셀로나에 이식하는 시범조교로 삼았다. 다만 쿠만과 잘 지낸것은 쿠만이 문제아들과 달리 성실하고 비교적 온순한 성격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드림팀이 해체된 것은 크루이프의 성격 문제도 크지만 당시 핵심 스타선수들의 성격 자체가 그 어떤 감독이 와도 다루기 어려운 괴짜들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훗날 르사 시대의 핵심인 세얼간이메시는 워낙 온순한 성격이라 커리어 내내 감독과 큰 불화나 마찰이 없었다는 점과 대조되는 면이다.[38] 아무튼 크루이프는 과르디올라 같은 신예가 1군으로 올라오면 크루이프는 항상 쿠만을 불러 네덜란드식 축구를 가르쳐라고 지시했다. 참고로 현재 바르셀로나식 축구라 부르게 된 이 스타일을 크루이프는 결코 바로셀로나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크루이프는 항상 자신이 추구하는 축구를 네덜란드식 축구라 불렀다.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크루이프와 바르셀로나가 추구하던 축구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로 크루이프 자신과 그리고 아약스, 그리고 네덜란드 대표팀에 의해 구현된 축구였기 때문이다.

1994년 이후 크루이프는 경질될 때까지 2년간 무관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크루이프 감독과 누녜스 회장 간의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졌고, 결국 크루이프는 1995/96 시즌 말미에 감독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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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않았던 바르셀로나 감독 말년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의 역사는 크루이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가 바르셀로나에 남긴 영향력은 엄청나다. 크루이프가 집권하기 전까지의 바르셀로나는 1960-61 시즌과 1985-86 시즌 두 차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올랐으나 모두 패하여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나 크루이프가 집권하고 나서 바르셀로나는 자신들만의 철학을 가지며 결국 1991-92 시즌에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했다. 그러나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AC 밀란에게 4:0으로 대패하였다. 그의 철학은 10년 뒤에 크게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2005-06 시즌부터 2014-15 시즌까지 여러 감독들의 감독의 지휘 아래 트레블 2회를 포함한 UEFA 챔피언스 리그 4회 우승을 거두며 유럽 최고의 축구팀으로 거듭났다.[39]

이렇게 크루이프는 장장 8년이라는 바르사 역사상 최장기 집권 동안에 무려 11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선수 시절보다 더 큰 결실을 맺었다. 그 중에서도 바르셀로나의 오랜 숙원이었던 유러피언컵 첫 우승은 크루이프에 의해 달성하게 된다. 이런 성과들을 통해 그는 역대 최고의 선수에 이어 역대 최고 감독의 반열에도 든 것이다. 그는 선수단 내부에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상대 팀과의 관계에서 늘 극단적인 지지층과 적대적인 대상을 만들어서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가 최고의 실력자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만만했고, 선수들보다 더 화려하게 언론을 장식했다. 몇몇 선수들과 좋지 않은 이별도 있었고, 위에서 언급한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0:4로 대패하긴 했지만, 그가 심어놓은 철학과 스타일이 현재까지도 계속 발전하고 계승되어 현재의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축구를 집대성했다.


4.3. 말년[편집]


1995-96 시즌을 끝으로 바르셀로나에서 경질된 후 더 이상 감독 경력을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1993-94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미카엘 라우드루프를 관중석에 앉도록 한 조치는 당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놓고서 경기도 0:4라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라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선수들과 갈등이 심하고 고집이 센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단단히 박혀버렸다. 게다가 갈등을 빚던 라우드루프와 스토이치코프 등이 줄줄이 팀을 떠나자 바르셀로나는 추락했고, 결국 크루이프도 선수 빨이고 그 선수들도 잘 챙기지 못해서 팀이 와해된다는 인식을 가져왔던 것.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물러난 후 다른 클럽의 감독이 되지 못했다.

이후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은퇴한지 10여년 만에 2009년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여 3년간 재직했다. 그러나 카탈루냐 대표팀은 일년에 한번 정도 경기를 치르는데다가 그것도 라리가 휴식기 동안 벌어지는 이벤트성 비공식 경기였기에 별 비중은 없었다.


5. 사망[편집]


2015년, 크루이프는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6년 3월 24일 향년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기사. 크루이프는 선수 시절부터 담배를 피워왔는데 이후 지도자 시절까지 담배를 끊지 못했다. 워낙에 골초로 유명했던지라 건강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었는데, 결국 우려는 폐암 발병으로 현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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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를 추억하는 수많은 바르사 팬들의 진심어린 마음
사망 이후 많은 축구 프로그램에서 사망에 대해 다루었다. Sky Sports의 일요일 프로그램인 Goal On Sunday나 Sunday Supplement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크루이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프로그램 이외에도 25~27일날 열린 A매치 기간에는 경기 시작 전에 크루이프를 위한 묵념이 있었다.

4월 3일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서는 경기장 중앙에 'Gràcies Johan'(해석하면 '고마웠어요 요한')이라는 글귀가 놓여 있었고, 그의 등번호인 14번에 맞춰 전반 14분에는 모든 관중이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2:1 승.

2018년 4월 5일, 아약스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2018-19 시즌부터 아약스의 홈구장의 이름이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로 명칭이 바뀔 예정이고, 크루이프 아레나의 새로운 로고가 발표될 것이다" 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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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àcies Johan

친분이 있던 펠레는 트위터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마라도나 역시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6. 기록[편집]



6.1. 선수[편집]



6.1.1. 대회 기록[편집]







6.1.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1971, 1973, 1974
  • 발롱도르 드림팀 2군[40]: 2020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71-72
  • IOC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1970-71, 1972-73
  • 네덜란드 올해의 운동 선수: 1973, 1974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68, 1972, 1984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66-67, 1971-72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41]: 1976-77, 1977-78
  • KNVB 베이커 득점왕: 1966-67, 1967-68, 1969-70, 1970-71, 1971-72
  • NASL MVP: 1979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유럽팀: 1998
  • 옹즈 드 옹즈: 1977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72, 197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프랑스 픗볼 60년간 베스트 XI: 2007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UEFA 회장상: 2013
  • FIFA 100: 2004
  • FIFA 공로장: 2010
  • KNVB 평생 공로상: 2006
  • FICTS 명예의 전당: 2010
  • 라우레우스 평생 공로상: 2006
  • 라우레우스 스포츠 투혼상: 2016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네덜란드 드림팀: 2022
  • 아스 올타임 XI: 2021[42]


6.2. 감독[편집]



6.2.1. 대회 기록[편집]





6.2.2. 개인 수상[편집]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87
  • 라리가 최우수 감독[43]: 1990-91, 1991-92
  •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1991, 1992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91-92
  • 엘 파이스 올해의 감독: 1992, 1993, 1994
  • UEFA 역대 최고의 감독 10인: 2016


6.3. 수훈[편집]


  • 오라녜나사우 훈장 기사장: 1974
  • 오라녜나사우 훈장 장교장: 2002
  • 왕립 스포츠 공로장 금메달[44]: 2016


7. 어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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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다."


"공을 가지면 내가 주역이다. 결정하는 것도, 창조하는 것도 나다."


"나는 공을 처음 잡은 순간부터 내가 천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내 팀에서는 골키퍼가 첫 번째 공격수고, 포워드가 첫 번째 수비수다.''


''축구는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플레이하는 것은 어렵다.''


"결과 없는 내용은 무의미하다. 내용 없는 결과는 지루하다."[45]


''찬스라는 것은 논리적(logical)이다.''[46]


''심각하게 멍청하거나 수면부족이 아닌 이상 내 팀에서 포워드는 15m 이상 달릴 필요가 없다.''[47]


''모든 불리함은, 각각의 유리함을 가지고 있다.''


''스로인은 언제나 내가 도맡아했다. 왜냐하면, 스로인 한 공이 내게 되돌아오는 순간 나는 경기장에서 유일하게 노마크인 선수가 되는 거였으니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스페인에서는 경기에 나가기 전 22명의 선수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성호를 긋는다. 만약 효과가 있는 거라면 모든 경기의 결과는 무승부가 될 테지.''


''잉글랜드 축구는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축구다. 선수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압박이란 건 뛰어난 테크닉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바티스투타는 패스부터 다시 배워라''


''내가 만약 아르헨티나 감독이라면 절대로 바티스투타를 쓰지 않을거다''


''바티스투타 너다. 네가 실패의 원인이다.''왜 이렇게 바티스투타를 미워하는거야


''11명보다 오히려 10명일 때가 팀은 잘 돌아가기 마련이다. 농땡이 피우는 놈이 없어지니까.''


''도대체 누가 나한테 축구를 가르칠 수 있지?''


''축구는 기술력, 전술능력, 체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보다 기술이 좋은 선수도 있고 나보다 신체능력이 좋은 선수도 있다. 하지만 중심 요소는 전술능력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전술능력을 간과한다. 전술능력은 시야, 신뢰, 대담성으로 나눌 수 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나는 대부분의 다른 선수들보다 뛰어나다.''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 같이 형편 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48]



8. 크루이프에 대한 헌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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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왕''

라디오 타임스 #


"디 스테파노펠레처럼."

프랑스 풋볼, 1971년 유럽 최고의 선수 1위 선정 코멘트[49]


요한 크루이프는 월드클래스 플레이어 그 이상이다.

FIFA 기술위원회, 1974년 월드컵 기술 리포트 보고서에서.


축구 역사상 3대 영웅은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입니다.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그는 네덜란드와 세계 축구를 변화시킨 매우 특별한 선수였습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당신이 크루이프를 경기장 밖에서 보면 그는 마치 마른 소년 같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그는 다른 행성에서 왔다.

크루이프 너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러니 담배를 끊고 나를 따라라. 제대로 훈련을 해! 내가 널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마! 당대 최고가 아니라 그 이상, 펠레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크루이프가 없다면 내겐 팀이 없는 것이다.

리누스 미헬스


요한 크루이프, 마라도나, 펠레, 에우제비우 모두 환상적인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요한이 역사상 최고였다.

요한은 완전한 1인자였다. 마치 현재의 메시와 같이 매우 특출한 선수였다. 나는 한밤중에도 메시를 보기 위해 일어난다. 심지어 그가 경기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50]

스야크 스바르트


사람들은 마라도나, 펠레, 베켄바워와 같이 여러 대단한 선수들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크루이프가 최고였다. 그는 세계 최고였다.[51]

하인츠 스투이[52]


선수로서 그는 축구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크루이프는 바르사에 와서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오늘날의 바르사는 그와 함께 시작했다. 그는 우리의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스타일의 축구를 탄생시켰다.

주안 라포르타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1960년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였고, 1970년대는 크루이프, 1980년대는 마라도나였다. 그리고 1990년대의 최고는 미카엘 라우드럽이다.

크루이프는 유럽이 낳은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프란츠 베켄바워


크루이프는 축구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잔니 인판티노


그가 역대 최고의 유럽 선수였냐고? 미드필드에서 그는 최고였다. 수비로서도 최고였다. 공격수로서도 최고였다. 그는 최고였다.

테리 베너블스


내 생각에 그는 펠레, 마라도나와 함께 항상 이름이 오르내릴 그런 전설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 나머지 우리들은 그저 인간일 뿐이고,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일뿐이다.

조르디 크루이프


그는 처음에는 선수로서, 그리고 다음에는 감독으로서 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축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만났던 모든 감독들이 중요했지만 그 중에서도 크루이프가 가장 중요했다. 그의 훈련과 전술은 똑같지 않았고, 경기의 승패가 갈리는 200만가지 디테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요한 크루이프는 그림을 그렸다. 이후의 바르셀로나 감독들은 단지 그 그림을 회복시키거나 향상시켜왔을 뿐이다.

펩 과르디올라


요한 크루이프는 내가 본 선수들을 통틀어 최고로 손꼽힌다. 월드컵 우승이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프랑크 르뵈프도 최고의 선수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려야 한다.

로비 제임스


축구라는 종목을 영원히 한 번 바꿔놓은 선수.

한준희[53]


내가 존경하는 요한 크루이프 선수를 처음으로 본 것은 98년이다. 그의 월드컵 경기 장면을 분석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정말로 축구를 잘하는 선수였다. 단지 공을 잘 차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팀의 리더로서 든든한 리더십을 갖췄고 골을 넣을 때나 어시스트를 할 때, 그리고 팀의 분위기를 반전시기키는 능력까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정말로 내가 생각하기에 토탈 사커라는 이름에 걸맞는 완벽한 선수'였던 것이다. 나는 골만 잘 넣는 선수도 싫고, 어시스트만 잘하는 선수도 싫다. 아직 실력은 부족하지만 나 스스로도 모든 면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 크루이프 선수는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했다. 아마 그가 브라질의 축구 영웅 펠레가 활약할 당시에 선수 생활을 했다면 펠레를 능가하는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펠레는 골을 많이 넣기는 하지만 기동력 면에서는 그리 뛰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요한 크루이프의 경우 빠른 스피드를 갖췄다는 점에서 현대 축구에 가장 걸맞는 선수일 것이다.

이천수


70년대 네덜란드 팀의 중심에는 요한 크루이프가 위치했다. 크루이프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모든 동료들의 움직임을 스스로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많은 사람들이 크루이프를 '그라운드의 감독'으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한 유명 저널리스트가 남긴 말은 크루이프가 얼마나 영리하고, 축구에 정통한 인물이었는지를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펠레는 볼을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다뤘고, 마라도나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여러명의 수비수들을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통해 제압했다. 그런 면에서 펠레는 축구공을, 마라도나는 수비수들을 지배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어쩌면 축구 그 자체를 지배했던 인물일런지도 모른다.

이형석


축구를 정말 잘했습니다. 볼 컨트롤, 패스, 시야 등 괜히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게 아니구나 싶었죠.

저도 그 사건으로 인해 네덜란드 전역에 유명세를 탔습니다. 당시 크루이프는 축구의 神(신)으로 불렸지요. 네덜란드가 개발한 토털 사커의 지휘자였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영웅이었고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지금 '크루이프 턴'으로 불리는 턴 동작이 기가 막혔다. 굉장히 스피드가 빠른데다 방향전환도 좋아 따라잡기가 힘든 선수였다. 개성이 뚜렷하고 우수한 기량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리더십으로 감독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내가 현역시절에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 꼽혔던 프란츠 베켄바워, 디에고 마라도나와도 경기를 해봤는데 경기장에서 흐름을 잡고 동료들을 이끄는 능력은 크루이프가 그 누구보다 최고였다.

허정무


요한 크루이프는 제가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입니다. 단연코 No.1입죠. 펠레, 마라도나보다 낫냐?고 물으실 수 있는데, 펠레와 마라도나는 축구 선수로 보면 안되지요. 저는 역대 최고의 선수를 논할 때 펠레와 마라도나는 뺍니다. 두 사람은 존경 혹은 경외의 대상이지 비교의 대상이 아녜요.

김유석[54]


펠레, 크루이프, 마라도나는 의심의 여지없는 천재다.

엘 문도 데포르티보


그는 비전, 태도, 존재감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매우 융통성이 있어서 상대가 그를 걷어차려고 할 때 그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때맞춰 움직였다. 수비수들은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메인 스트라이커의 제공자였지만 그 자신도 다산적인 골잡이였다.

루드 굴리트


아약스 전력의 50%를 크루이프가 차지한다. 만약 우리 팀에 크루이프가 있었다면 우리가 유러피언컵을 우승했을 것이다.

페렌츠 푸스카스[55]


그는 천재였다. 그는 6번째 혹은 7번째 감각을 가졌다. 경기에서 그는 왼발과 오른발 그리고 슈팅으로 가장 예상치 못했거나 최고의 해결책만 선택했다. 그는 단지 경기만 뛴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수비에도 힘썼다. 나에게 그는 60년대와 70년대 최고의 선수이다. 펠레가 아니다. 펠레는 전형적인 골잡이였다. 공을 가지면 득점을 해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의 심장이자 브레인이었다.

그제고시 라토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는 우주 나머지 위에 존재한다.

Laurent Vergne[56]


크루이프는 스포츠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를 만난건 행운이었다.

라파엘 나달


1위 펠레, 2위 마라도나, 3위 크루이프, 4위 메시, 그리고 그와 동급인 디 스테파노.

알피오 바실레, 최고의 선수들 뽑으라는 질문에


만약 당시 발롱도르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시상했다면 나는 메시, 호날두보다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요한 크루이프, 메시다. 호날두는 아니다.

디에고 마라도나


나에게 크루이프는 축구의 역사를 바꾼 사람이다. 그는 축구의 신이다.

마라도나, 메시, 펠레, 요한 크루이프, 지단, 디 스테파노는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다. 그들은 차이를 보여준 선수들이다.

사비 에르난데스


역대 TOP 5는 펠레, 마라도나, 메시,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다.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우리는 그와 같은 선수를 한번도 본 적 없다. 그는 빠르고 기술적이며 팀의 리더였다. 거의 그가 팀의 감독인 것 같았다.[57]

단테 미르콜리[58]


크루이프는 남다른 경지에 있었다. 인상적인 퀄리티를 지닌 위대한 축구선수였다. 그는 아주 기술적이었고 경기를 이해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이기적이기도 했지만 그는 패스를 할줄 알았고 그렇게 했다. 그는 수비하기가 힘든 선수였다. 특히 속도변환때문에 말이다. 크루이프를 1대1 상황에서 막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왼쪽 윙으로 가기도 하고 오른쪽 윙으로 가기도 했다. 그는 멈추었다가 드리블하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속력을 변화시킬 줄 알았다. 그는 그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파비오 카펠로[59]


크루이프가 박스 안에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수비수가 있다는 것을 찾아내면, 그는 필드 중앙으로 이동한다. 수비는 그를 당연히 필드 중앙까지 따라가서 마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그의 스피드를 이용한다. 월드컵 결승에서 네덜란드에게 주어진 페널티킥이 크루이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이다. 훌륭한 마크맨인 포그츠가 단단히 마크를 하기에 그는 필드 중앙으로 갔다. 그는 볼을 받고 공격을 만들어 나갔으며 그를 쓰러뜨리려는 모든 수비들을 드리블로 제쳐냈다.

만약 다음 해까지 기다린다면, 그는 40억 리라의 가치가 있다.[60]

자친토 파케티


크루이프는 작은 소년마저도 게임에 관심을 갖게 할 정도로 전술적으로 완벽했다. 그것이 그가 어렸을 때부터 전술에 매우 큰 흥미를 가졌던 이유이다. 그는 항상 경기의 상황들을 매우 명확히 봐서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항상 내 우상이었다. 나는 1970년대에 뤼트 크롤, 요한 네스켄스, 스야크 스바르트 그리고 크루이프와 같은 선수들이 함께 했던 1970년대의 위대한 팀인 아약스의 경기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3연속으로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고,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그 팀은 분명히 매우 좋은 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크루이프는 항상 내 관심을 끌었다. 요한은 아름답고 우아한 선수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아마 내가 15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나는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와 악수하고 싶었고 내 이름을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그를 매우 존경했던 것 같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가 축구계와 네덜란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나와 요한을 비교해서는 안된다. 요한은 확실히 다른 레벨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본보기로 삼았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그와 신체조건도 다르고 시대도 달랐다. 나는 그가 가진 신으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스피드와 폭발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나도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 지능적이고 수비수를 제쳐낼 줄 알며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넘버 10이었다. 그는 경기장 전체를 지배했다.[61]

내게 있어서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이다. 나는 어렸을 때 크루이프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나의 친구였다. 그가 그립다.

마르코 반 바스텐


난 1970년대의 네덜란드를 좋아한다. 그들은 날 흥분시켰고 크루이프는 최고였다. 그런 크루이프는 내 어릴적 영웅이었다. 내 침실 벽에 그의 포스터를 붙여 놓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창시자로 축구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아약스는 크루이프를 필두로 축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가 원한다면 그는 피치 위의 어떤 포지션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에릭 칸토나


사람들은 항상 내게 묻곤 했다. "브라질리언이었으면 했던 선수가 있었는가?" 질문에 답을 한다면, "아무도 없었다. 몇몇 굉장한 선수들이 있고 그들을 보며 감탄도 했지만 브라질리언이길 바랬던 적은 없었다. 그러다 크루이프를 보았다. 나는 그가 브라질리언이길 바랬다. 그를 보는 것은 즐거웠다."

펠레 #


우리는 크루이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절대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가 브라질에 2-0으로 승리하자 브라질 언론들의 반응[62]

[63]


그는 신체능력과 파워의 측면에서 마치 호날두와 같았다. 재능, 창조성, 예술성에 있어서는 마치 메시와 같았다. 크루이프는 경기장에서 두 사람의 능력을 하나로 결합해 내었다.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미겔 레이나[64]


그가 선수로서 바르사에 있었던 시간은 스페인 축구와 바르셀로나를 바꿔놓았다. 그는 단독으로 스페인에 새로운 스타일의 축구를 도입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에우제비우


그가 없었다면 이 세계에 사비이니에스타같은 선수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오리올 도메니크[65]


크루이프는 스페인에서 축구의 개념을 재창조했다. 오늘날의 바르셀로나스페인은 그가 바르사를 지휘했었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미겔 앙헬 나달


진정한 축구 브레인이다. 그는 최고의 컨트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창조적이었고 공과 함께 본능적으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골을 넣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기술적인 선수였지만,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와 함께 하는 선수들의 강력함과 함께 플레이했다.

크루이프는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그는 아직도 축구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비 찰튼


그는 네덜란드 축구의 대부이다.

프랑크 레이카르트


나는 스웨덴 리그에서 18년, 스웨덴을 위해 17번 뛰었지만 크루이프와의 경기는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공을 확실히 빼앗을 줄 알았는데 그가 나를 속였다. 나는 굴욕적이지 않았다. 나는 기회조차 없었다. 크루이프는 천재였어.

얀 올슨[66]


그는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바르셀로나의 토대를 쌓았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지배를 멈추게 한 바르셀로나의 중대한 전환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합류하기 전 그리고 전환이 진행되기 전 2년간, 크루이프는 거대한 정리를 진행했다. 그것은 혁명과도 같았다.

로날드 쿠만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캄 노우에 자신의 철학을 세우지 않았다면, 리오넬 메시는 바르사에 오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 13세의 소년인 채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니에스타 역시 선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레이엄 헌터[67]


크루이프는 그가 항상 옳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정말로 항상 옳았다는 것이다.

조니 보스만[68]


나에게 그는 역대 최고이다.

세계 축구는 최고의 선수를, 나는 어린 시절의 우상을 잃었다.

미셸 플라티니


크루이프가 평안히 잠들었다. 그의 유산은 영원할 것이다.

리오넬 메시


축구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 크루이프에게 경의를 표한다.

지네딘 지단


크루이프는 축구를 새롭게 만든 남자이다.

로타어 마테우스


크루이프는 대단한 선수이며 감독이었고 선생이며 사람이었다.

위르겐 클린스만


나는 1963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경력의 후반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을 상대했고 그 후에도 펠레, 에우제비우, 조지 베스트, 바비 찰튼과 같은 멋진 선수들과 계속해서 경기를 할 만큼 운이 좋았다. 하지만 요한 크루이프는 순수한 능력 면에서 내가 만난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축구 측면에서 확실히 진정한 슈퍼스타였고 그와 같은 경기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그 당시 그는 최고는 아니더라도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 되고 있었다. 아약스는 당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과 마찬가지로 멋진 팀이었다. 크루이프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돈을 지불하고 가서 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를 막으려는 것보다 아이브록스 테라스에서 그를 지켜보는 게 나았을지도.

존 그레이그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그에게 푹 빠져있었고 그와 함께 뛸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다. 크루이프와 함께 플레이하는 것은 마치 잘 보낸 인생과 같다. 크루이프가 돌아왔을 때 경기장은 만원이었고 모두가 그를 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우리는 더이상 경기에서 지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PSV에 꽤 뒤졌지만 JC가 온 뒤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마지막에 우승을 차지했다.

빔 키프트 #


나에게 있어 크루이프는 소설가 쥘 베른 같은 사람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 간 감독이자 리더였다.

훌리오 살리나스


그는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내가 축구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그는 신화이자 따라야 할 아이콘이었다. 그 후 내가 축구 감독이 되었을 때 크루이프는 나의 레퍼런스 중 하나였다. 그는 현대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를 만든 유명한 '오렌지 시계태엽'의 주요 요소 중 하나였다.

라파엘 베니테스


크루이프는 놀라운 선수였다. 크루이프와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클럽과 팀이 모두 바뀌었다. 그는 모든 수준에서 관습을 거부했다.

후안 마누엘 아센시[69]


요한 크루이프는 모든 것이다. 크루이프처럼 현대 축구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축구 종교의 수호자가 되었으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그리고 영원히 클럽에 혁명을 일으킨 이 되었다.

치키 베히리스타인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인이다. 세계는 크루이프를 통해 네덜란드를 알게 되었다.

마르크 뤼터[70]



9. 평가[편집]



9.1. 선수로서의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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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FHS는 크루이프를 20세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이자 펠레에 이은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2위로 선정하였으며, 2002년 FIFA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순위에서도 마찬가지로 크루이프가 펠레에 이은 2위로 선정되었다.[71] 또한, 월드사커에서 뽑은 20세기 최고의 선수에서도 펠레, 마라도나에 이은 3위를 차지하는 등 20세기 말 세계 언론들이 뽑은 역대 축구 선수 순위 합산에서 펠레, 마라도나에 이은 3위를 차지하였다. 각각 소속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아약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며[72] 축구 역사에서 유럽인 축구 선수 중 최고의 선수 중 한 명[73]으로 평가받는 선수이다.

요새는 토탈 풋볼로 인한 혁명가 이미지 때문에 선수로써 크루이프를 과소평가하는 억측이 나오고 있지만, 선수 시절 기량만으로도 마라도나의 등장 이전까지 펠레, 디 스테파노에 가장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던게 크루이프다.

그는 1970년대 당시 발롱도르 3회 수상, 유러피언컵 3연패 등 뛰어난 커리어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서 당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크루이프가 활약했던 1970년대에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인 프란츠 베켄바워,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인 게르트 뮐러 등 걸출한 선수들이 대거 활약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베켄바워와 뮐러를 각각 2인자와 3인자로 밀어내고 시대의 1인자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크루이프의 실력을 체감할 수 있다. 애초에 커리어부터가 리그 우승 10회, 챔스 3연패, 트레블, 득점왕 트레블, 발롱도르 3회 등 대단한 수준인데, 그 중 리그 우승 10회, 발롱도르 3회 수상이나 챔스 3연패 등은 현재 시점에서 보아도 경이적인 수준이며 그 팀을 이끈 크루이프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셈이다.

현재도 매우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 2017년 이후 각국 축구 전문지에서 매긴 순위 합산을 보면 펠레, 마라도나와 메시에 이은 4위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으며, 2017년 포포투와 부트발에서 뽑은 역대 TOP 100에서는 각각 4위와 3위를 차지하였다.[74] 2018년 포포투 필진이 뽑은 역대 TOP 5에서는 펠레와 함께 가장 많은 1위 표를 획득하였으며 종합적으로는 메시, 마라도나를 누르고 펠레에 이은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과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20세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0, 1981년도 기자단 역대 베스트 11에서 크루이프는 디 스테파노에게 밀렸으며,[75] 1989년 슈퍼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디 스테파노가 크루이프와 베켄바워, 미셸 플라티니를 모두 제치고 수상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 말에 들어서는 세계 각지 언론사가 발표한 랭킹에서 크루이프가 디 스테파노에 조금씩 앞서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더 흐른 지금은 월드컵에서의 불운과 자료 부족, 디 스테파노의 명성이 대단했던 시기에 활동했던 전문가들의 사망, 은퇴 등으로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가 더욱 떨어졌다. 그래서 그에 비해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으며 '현대 축구의 상징'이라는 확실한 의미도 부여할 수 있는 크루이프 쪽이 대체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는 국대 무관이라는 오명을 듣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국가대표를 조기 은퇴하여 단 두 차례의 국제 대회 출전 경력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76] 클럽과 국가대표로서 모두 역대 최고 수준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특히 1974년 월드컵에서는 무려 36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했고, 이는 가히 독보적인 단일 월드컵 역대 최다 기회창출 기록이며,[77] 다른 후보들은 월드컵, 리그, 유러피언컵(챔스)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루어낸 베켄바워 대신 크루이프가 발롱도르를 차지했고 현재까지도 국대 무관이라는 비판은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점에서 그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에우제비오나 스토이치코프가 비록 4강에서 멈췄지만 엄청난 활약으로 팀을 멱살캐리했고 순수 퍼포먼스는 어지간한 우승자들을 씹어먹을 정도이기에 아무도 국대무관이라 뭐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유관/무관보다는 뭘 보여줬는가? 얼마나 활약했는가?가 핵심이다. 크루이프가 만약 74월드컵 결승전 딱 한경기만 잡았다면 펠레마라도나의 반열에도 오를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니 그의 실력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1974년 월드컵에서의 임팩트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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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의 위상은 이미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를 넘어 자국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2004년 네덜란드의 한 방송국에서 자국 위인 순위를 선정한 결과 무려 6위라는 엄청난 순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는 동 조사에서 25위에 선정된 마르코 반 바스텐과 78위의 루드 굴리트를 가볍게 넘는 순위이며, 심지어 이는 안네 프랑크, 빈센트 반 고흐보다 높은 순위에 선정된 것이었다.


9.2. 축구계에 끼친 영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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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를 재탄생시킨 남자
The Man Who Reinvented Barcelona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축구라는 스포츠를 영원히 한 번 바꿔놓은 선수."

한준희

크루이프의 특기할 점이라면 선수로나 감독으로나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토탈 풋볼의 전도자라는 점과 그에 기인한 축구관이다. 필드 플레이어 전원이 공격 및 수비 가담을 하는 토탈 풋볼이라는 전술의 혁명, 바르셀로나 하면 떠오르는 '패스, 점유, 압박'이라는 팀 컬러. 이것이 바로 크루이프가 축구계에 남긴 것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IFFHS는 크루이프를 20세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로 선정하였다.

또한 유스 시스템으로 흥한 아약스 출신답게, 팀을 맡자마자 유스 시스템을 정비했다. 덕분에 오늘날 농담 삼아 믿고 쓰는 바르셀로나 유스라고 할 만한 기틀을 마련했다. 선수로써 맹활약했을 뿐더러 감독으로써도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와 같은 육성 시스템을 정립하였기에 네덜란드인임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9.3. vs 프란츠 베켄바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4. 게으른 천재[편집]


크루이프는 엄청난 게으름뱅이에다 골초였다고 한다. 훈련은 죽도록 싫어하고 연습도 거의 안 했다고 한다. 선수 시절 경기에 뛸 때도 하프타임만 되면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어느 네덜란드 감독은, 인생의 불공평을 언급할 때 크루이프를 예로 들며 "훈련은 죽도록 싫어하지, 몸 관리도 대충 하지, 담배는 뻑뻑 피워 대는 놈인데도 타고난 재능 하나만으로 세계 최고다."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으며, 스승인 리누스 미헬스과의 다음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미헬스: "요한! 너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러니 담배를 끊고 나를 따라라. 제대로 훈련을 해라! 내가 널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겠다!"

크루이프: "그딴 거 안 해도 난 이미 최고의 선수인데요?"

미헬스: "당대 최고가 아니라 그 이상, 펠레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크루이프: "획일적인 교육론은 선수의 재능을 죽이는 법이죠."

스승 리누스 미헬스과의 일화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요한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고 난 후 제자였던 미카엘 라우드루프에게 "너는 항상 80~90%의 노력밖에 안한다. 네가 빈민가에 태어나서 오직 축구 하나만 보고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절실함에 재능을 100% 발휘한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다."라고 갈궜다.[78] 그리고 라우드루프는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양측을 합해 5번의 리그 우승을 경험하며 199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79]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안 하고 논다고' 욕을 먹던 라우드루프는 스완지 시티 AFC의 감독이 되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축구에 헌신하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다.[80]

그리고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의 자신의 젊은 시절과 똑같은 게으른 천재같은 선수를 만나는데, 그 선수가 호마리우. 한 번은 휴가를 보내 달라고 조르자 빡쳐서 "다음 경기에서 해트트릭 하면 보내줄게!"라고 말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호마리우는 휴가를 즐기러 간다. 그런데 그 해트트릭을 넣은 상대팀이 레알 마드리드. 다시 말해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했다. 더 무서운 건 호마리우는 3골 말고도 1어시스트까지 기록했다. 그날 경기는 바르셀로나의 5:0 대승.

또 바르셀로나 다큐멘터리에 나와 인터뷰에서 밝힌 일화가 있다. 대부분의 축구팬이라면 론도(수비선수 몇명을 가운데 두고 선수들이 둥글게 서서 볼을 돌리는 훈련)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이 운동을 바르셀로나에 도입한 인물이 바로 선수시절 크루이프인데, 그가 인터뷰에서 웃으며 말하길 그 운동을 도입한 것도 열심히 뛰어다니는 훈련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게으른 선수의 이미지와는 달리 밑의 야구에 대한 일화에서 보듯 아예 불성실한 선수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에 열중하던 사람이다. 그의 축구관에서 체력 훈련이 중요하지 않았을 뿐. 그가 구현하던 토탈 풋볼은 전례 없이 체력보다는 책임 아래의 자율성을 강조하던 축구를 하였기 때문에 게으른 선수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또한 크루이프는 이론보다 경험을 중요시하는 쪽이어서 요즘으로 치면 자율적인 몸관리를 하는 프로선수를 보고 게으르다고 한 꼴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시각으로 봐도 결국 축구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도 다리에 쥐가 나고 심장이 터질듯 뛰어다니면서. 아무리 그가 지략적인 관점에서 부지런하게 공부를 했다고 한들, 평균 이하의 체력훈련과 골초급으로 담배를 피워댔음에도 그라운드를 20년이나 쌩쌩 달렸다는 것 만으로도 타선수들 입장에선 부러움의 대상이자 게으른 천재 그 자체다.

물론 축구 선수라는 체력적으로 어마어마한 무리를 떠안는 직업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워댄 결과는 말년의 폐암이었고 이는 그의 목숨까지 앗아간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10. 여담[편집]


  • 선수 시절 주로 단 등번호는 '팀 에이스 번호'와는 거리가 먼 14번이다. 14번을 달게 된 이유가 특이한데, 아약스 시절 동료 게리 뮤렌이 라커룸에서 경기 직전까지 자신의 7번 유니폼을 찾지 못하자 크루이프가 자신의 9번 유니폼을 주고 14번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14번은 AFC 아약스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 10세의 어린 나이에 아약스 아카데미에 입단했으나 처음에는 야구를 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야구를 하기도 했다.[81] 포지션은 포수. 그러나 5년 후 코치가 축구를 선택하라고 촉구했고, 그는 축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 이러한 영향인지 자신이 감독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을 축구에 접목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했다.
나는 야구에서 집중적으로 배운 세부적인 부분들을 나중에 축구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했다. 투수의 투구를 결정하는 사람은 포수다. 투수는 필드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포수는 볼 수 있다. 또 포수는 투수의 공을 받아 어디로 던질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공간과 모든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감독도 나에게 공을 받기 전에 그 공을 어디로 패스할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프로 축구선수로 뛰면서 어린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 즉 언제나 경기장 전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떠올렸고 그것이 나의 강점이 되었다. 야구는 훈련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로, 축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순간 스피드, 슬라이딩, 공간 인지력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고, 한 수 앞서 생각하고 여러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는 론도 훈련[82]을 토대로 하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내가 야구를 축구에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로도 야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감독 시절 나는 야구의 교훈을 축구에 아주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축구에서 미리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야구도 그렇다. 몇 분의 일 초 사이에 공간과 가능성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야구를 잘하려면 주자와 홈 사이 거리를 판단하고 주자가 들어가기 전에 공을 홈으로 보내야 한다. 전술 면에서도 배운 바가 있다. 옳은 결정을 내렸으면 그것을 기술적으로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후략)

《마이 턴》(my turn)

  • 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스폰서이던 아디다스가 독일 기업인 것을 알고 세계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공격한 국가의 기업 스폰은 받을 수 없다면서 나홀로 삼선 유니폼이 아닌 이선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크루이프는 푸마의 스폰싱을 받는 선수였고 푸마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아디다스 삼선의 한 줄을 떼고 경기한 것이다.[83] 이는 나중에 크루이프의 아이덴티티가 되기도 했다.

  • 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크루이프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크루이프 위주로 팀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크루이프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선수들이 죄다 국가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대표격으로 PSV 에인트호번 소속의 얀 반 베베른과 빌리 판데르카윌런이 있는데 이들은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와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다혈질의 '미친 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역시 멘탈로는 어디서 절대로 지지 않았고 별명이 심지어 'animal'이었던 호마리우가 서로 팀의 넘버원이라고 투닥거렸다. 이를 보던 크루이프는 "놀고들 있네. 내가 감독이니까 내가 최고다. 그러니까 제발 말 좀 들어"라며 논쟁을 종식시키려 했으나 저 둘이 어디 말 들으라고 들을 인물들인가. 결국 서로 공을 10번 차서 크로스바 맞추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다른 선수들도 간만에 흥을 돋울 거리가 생기니 승부에 관계없이 모두 참가했다. 결과는 스토이치코프 2번, 호마리우가 3번. 이에 호마리우가 자기가 최고라고 나대자 크루이프는 단숨에 6번을 성공시켰다. 호마리우가 인정할 수 없다고 개기자 가만히 듣던 크루이프는 갑자기 왼발로 공을 냅다 갈기는데 그게 그대로 크로스바에 적중했고 호마리우는 바로 아닥했다고 하며, 몇년 후, 크루이프는 이 일화를 밝히면서 마지막 슛은 뽀록이었다고 자백했다.그럼 그 전 6번은...

  •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토탈 풋볼을 시도할 당시 워낙 전례가 없던 전술인 만큼 감독이나 선수나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는데, 특히 선수들은 빡센 체력 훈련에 죽어나는 판국이었다. 정작 크루이프는 토탈 풋볼은 체력이 아니라 테크닉과 공간이며, 체력을 아끼는 전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토탈 풋볼은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면서 체력을 아끼고 압박 시간을 줄이는 형태의 축구다. 그리고 측면, 중앙 등에서 공을 돌리다 보면 자연적으로 상대의 압박이 거세어져서 볼을 빼앗기고 마는데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이 바로 탈압박이다. 탈압박의 전제가 되는 것이 볼을 다루는 기술 즉, 테크닉인 것이다.

  •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마른 체형 때문인지 '갈비'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 자신의 축구관을 결코 굽히지 않아서 설화도 자주 일으켰다. 물론 달리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독 개인의 신념에 관한 것이니, 몇 번은 망신을 톡톡히 당하기도 하고 몇 번은 상대를 관광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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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루이프가 완벽히 농락당한 유명한 사례는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AC 밀란과의 결승전이다.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인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AC 밀란에게 0:4로 완패당하며 드림팀이 붕괴됐다. 게다가 당시 AC 밀란은 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고, 마르코 반 바스텐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생겼는지 경기 전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 같이 형편 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라는 크루이프의 어록이 떠돌기도 하는데 출처 불분명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글이다. 실제 발언은 요약하자면 "바르셀로나야말로 최고의 우승후보이며, 밀란은 그렇지 못하다. 바르셀로나는 공격적이고, 밀란은 수비적이다.[84]" 정도의 내용이었다.[85] 허나 결과적으로 특별한 점이 없는 밀란의 공격수 다니엘레 마사로에게 전반에만 2골을 먹고 후반에는 데얀 사비체비치에게 1골, 마지막으로 마르셀 드사이에게 1골 먹으며 참패했다.

  • 주제 무리뉴가 이끄는 인테르를 두고 안티 풋볼 드립을 쳤다. 과거 첼시 감독 시절부터 무리뉴와 크루이프는 설전이 이어졌는데, 무리뉴한테 "넌 그저 트로피나 수집하는 기계일 뿐이지!"라고 디스를 걸었고, 무리뉴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2010/11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한 후 "난 트로피만 수집하는 감독이 되는 게 참 좋다"라고 응수했다. 화가 난 크루이프가 "넌 스페셜 원이 아니라 선수 시절 별 볼 일 없는 듣보잡이었다"라고 응수하니 무리뉴는 "아직도 과거 속에 사는 크루이프에게서는 전혀 배울 게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4:0으로 질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라고 크루이프 속을 팍팍 긁었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예전의 브라질과 전혀 다른 수비 축구, 점유율 축구를 들고 나온 둥가 감독에게 "수비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그들은 더 이상 돈 주고 볼만한 가치가 없는 팀"이라는 디스를 날렸다. 이에 둥가 감독은 "싫으면 보지 마라"고 맞디스를 했으나 결국 네덜란드에게 2:1로 패했다.

  • 본인만의 아트 사커 축구 철학이 얼마나 철저한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조국 네덜란드조차 그의 비판을 피하진 못했다. 크루이프는 스페인결승전에 앞서 "나는 당연히 내 조국이 우승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네덜란드 축구는 아름답지 않다. 내가 만들기 위해 노력한 토탈 풋볼을 그들은 버렸다. 반면 스페인의 축구는 내 축구다.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축구가 이제 결실을 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페인이 우승하기를 바란다"라고 발언했고, 그 말이 이루어졌다. 물론 일부 네덜란드 팬들에겐 대안없이 그저 비난만 하는 늙은이라고 욕도 먹었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축구 스타일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참고로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바티스투타는 특별히 크루이프에게 밉보일만한 일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기대 미만의 성적을 내자 바티스투타에게 대놓고 "너 때문이다. 바티 너 자체가 패배다"라며 디스를 날렸다. 애초에 "바티스투타는 패스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라며 싫어했다.

  • 물론 독설만 하는건 아니라, 에르난 크레스포에 대해선 "크레스포는 2인자로 썩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재원이다. 특히 1인자가 바티라면 더더욱 아까운 재원이다. 내가 1998년 아르헨티나 감독이었다면 크레스포를 주전으로 기용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우승은 프랑스가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차지했을 것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실제로 크레스포의 스타일은 현대 축구에서 가장 희귀하다고 평가받는 컴플리트 포워드 스타일이라서 오히려 후대에 고평가받았다.


  • 2014년 들어서 바르셀로나의 축구 스타일 변화에 실망을 표했다. 크루이프는 라포르타 재임 시기인 2010년부터 명예회장으로 있었는데, 산드로 로셀이 취임하면서부터는 구단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로셀이 횡령사건으로 사임한 이후에도 구단에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구단이 재정적인 이유로 유니세프 로고를 포기하거나, 티키타카로 대표되는 토탈 풋볼을 손 보려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클럽의 진짜 문제는 팀 내부에 있어야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고, 그 부분을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난 바르사 내부의 사람들과 접촉을 이어가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는 구단 내부 복귀를 노리는 듯한데, 결과적으로 구단 내부 복귀는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 2010년대 중반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 회장 체제의 바르사 역시 그의 지적을 피할 수 없었는데, 네이마르의 이적에 관한 비판도 있었지만, 바르토메우에 대놓고 적대적이었고, 2015년 회장선거 때도 공개적으로 라포르타를 지지했다. 이 움직임에 팬들 사이에서도 간섭이 심하다 vs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리다 로 말이 갈렸지만, 이후 바르토메우와 그의 측근들이 바르사 역대 최악의 행보를 보여주고[86], 네이마르는 구단과 이사회를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87] 팬들에게도 빅엿을 먹이고 떠났기에, 결과적으론 크루이프의 말이 옳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 소위 축구계 최고 레전드 선수라는 펠레, 마라도나가 딱히 머리가 뛰어난 인상은 아니기 때문에 전술가로서도 대성한 크루이프가 뇌지컬적인 측면에선 유독 특출나 보이는 면이 있다. 펠레 같은 경우는 펠레의 저주식 망언으로 유명하며 마라도나 역시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평판이 많은데 비해 크루이프는 감독으로서도 대성했고, 무엇보다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져놓았다 보니 선수 이후의 커리어까지 생각하면 축구 현역계에선 크루이프가 나름 장수한 인물이긴 하다.

  • 1991년에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할 당시 찍은 금연 홍보 광고.

담배는 축구가 나에게 준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그가 출연한 금연 홍보 광고 대사 중에서.
선수 시절부터 매일 20개비씩 피운 담배 때문에 건강을 해쳐 결국 1991년 2월 27일에 FC 바르셀로나 감독 재임 당시 심장우회수술을 받고 난 뒤 금연하여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했지만 이 후에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라커룸에서 기자들과 인터뷰 중에도 담배를 피워대다 두 차례 심장 수술을 더 받은 후에 담배를 끊었다.

  • 츄파춥스로도 유명하다.[88] 수술을 받고 담배를 끊기 위해서 크루이프는 츄파 춥스를 물었고, 이 모습은 TV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리고 2016년 4월 3일, 바르사는 이 날의 경기를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크루이프의 추모를 위해 츄파춥스를 건내주기도 했다.

  • 페예노르트 시절 PSV 선수였던 허정무와 대결하기도 했다. 무릎팍도사에서 허정무가 과거를 회상할 때 크루이프의 거친 플레이로 코뼈 골절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팬들이 국민 영웅이었던 크루이프에게 야유를 퍼부어 감동을 먹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그의 아들 조르디 크루이프도 전직 축구 선수로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던 바르셀로나에서 데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UEFA 유로 1996에 뛰기도 하고[8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뛰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잊혀진 유망주 취급을 받다가 라리가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로 이적, 팀을 UEFA컵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90] 이름 요르디(Jordi)도 카탈루냐의 성인(聖人)의[91]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카탈루냐 대표팀으로도 뛰었다. 이스라엘마카비 텔아비브의 단장 직을 맡고 있다가 현재 바르셀로나의 국제 스카우트 이사를 맡고있다.

  • 뜬금없는 일이긴 한데 그의 사위였던 헤수스 앙고이가 월드리그 미식축구 리그의 바르셀로나 드래곤스에서 키커로 활약한 적이 있었다.

  •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할 때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하기 전 워크 퍼밋 발급 때문에 이적 과정에서 문제가 한번 발생했는데 워크퍼밋이 나오려면 2년간 열린 국가대표 경기 중 75% 이상을 뛰어야하지만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박지성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선수 보호 차원에서 부르지 않았던 경기가 여럿 있었고, 그 결과 64% 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나머지 방법인 유명 축구인 3명에게 추천서를[92][93] 받아야 했는데, 원 소속팀 감독인 거스 히딩크와 이적팀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 말고도 1명이 더 필요했는데 박지성과 조금도 접점이 없었던 크루이프가 써줬다. 그 이유는 2004-05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고 감명받아서였다고. 물론 뜬금없이 나선 것은 아니고 같은 국적인 히딩크에게서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크루이프의 평소 남 눈치 보지 않는 성격을 생각하면 꼭 히딩크의 부탁때문에 추천서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해당 경기를 보고 박지성에 대해 극찬을 하기도 했고. 어찌됐든 박지성은 워크 퍼밋 발급에 성공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

  • 젊은 시절 모습이 루카 모드리치와 닮았는데, 플레이 스타일마저 비슷하고, 자신의 조국을 준우승시킨 것까지도 똑같다. 모드리치도 크루이프를 우상으로 삼았을 정도다.[94] 비교하자면 크루이프는 좀 더 공격적이였고, 모드리치는 사비 쪽에 가까울 정도로 조율하는 쪽에 특화되어 있다.

  • 2020년 프랑스 풋볼이 선정한 발롱도르 드림팀에서 의외로 스트라이커 보직에서 호나우두에게 밀려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월드컵 우승에 비중을 둔 탓인지 크루이프의 퍼스트팀 탈락을 두고 비교적 무난한 편이라는 타 포지션 대비 가장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95] 물론 호나우두도 전성기가 짧아서 문제였을뿐 전성기 기준으론 퍼스트팀에 들만한 역대급 선수이긴 했고, 세컨드팀도 보면 알겠지만 그 위상이 결코 작진 않다. 결국 자리가 모자라다보니 이런 불필요한 논쟁도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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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1위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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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레이메이커 성향이 강한 중앙 공격수였다. 팀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했으며, 기본적으로 전방 중앙 공격수 포지션에 위치했지만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패스, 드리블, 슈팅, 태클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플레이메이커 유형의 공격수였다.[2] 공격형 미드필더[3] 당시 레반테의 임금체불로 인해 AC밀란으로 이적이 성사될뻔했으나 실패하였고 레반테에서 10경기만을 뛰고 1981년 6월 워싱턴 디플로매츠에 재입단하였다.[4]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9위.[5] 특히 그의 스승인 미헬스의 철학을 자신만의 크루이프즘으로 심화 발전시켜 현대 축구 전술사에 한 획을 긋고 바르셀로나에 그 철학을 심어놓은 공로가 크다.[6] 에레디비시 25골, KNVB 베이커 3골, 유러피언컵 5골로 트레블과 동시에 득점왕 트레블을 동시에 이루었고, 이 기록은 2019-20 시즌 레반도프스키가 달성하기 전까지 크루이프가 유일했다.[7] 이 시즌의 바르셀로나는 퍼포먼스 수치상 펩의 바르셀로나에 가까울 만큼 강력한 팀이었다. 크루이프가 대단한 점은 펩의 바르셀로나에는 메시, 세 얼간이 등 대부분의 포지션에 세계적인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 때의 바르셀로나는 그러한 퍼포먼스를 크루이프가 단신으로 구현해냈다는 것이다.# 특히나 당시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 합류 직전 시즌 공격력 수치 0.33으로 빈공에 시달리던 팀이었으나 크루이프 합류와 동시에 1.56으로 폭발적인 공격력 상승을 보인다.[8]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못한 1972년에는 트레블을 이룩했으며 득점왕 트레블을 달성하고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혼자 2골을 넣는 등 맹활약했으나, 서독의 유로 1972 우승으로 발롱도르 포디움에조차 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 마디로 1972년 발롱도르도 크루이프가 수상했으면 1970년대에 이미 발롱도르 4연패라는 대기록이 나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9] 그가 라 마시아를 개편한 이후 라 마시아에서 배출된 선수들만 해도 카를레스 푸욜,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페드로 로드리게스, 제라르 피케, 세스크 파브레가스, 빅토르 발데스, 세르히오 부스케츠, 그리고 리오넬 메시 등이 있다. 물론 이들을 길러낸건 크루이프 이후 라 마시아를 이끈 스탭들의 공이 크지만, 크루이프가 시발점이 된 건 맞다.[10] 덕분에 사후 바르셀로나에 그를 기리는 에스타디 요한 크루이프 구장이 생겼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엔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가 있다.[11] 14번을 달게 된 이유가 특이한데, 아약스 시절 동료 게리 뮤렌이 라커룸에서 경기 직전까지 자신의 7번 유니폼을 찾지 못하자 크루이프가 자신의 9번 유니폼을 주고 14번 유니폼을 입었다.[12] 최초는 1966-67 시즌 셀틱.[13] 유로화 이전의 네덜란드 화폐. 환산하면 약 200만 달러, 92만 파운드.[14] 후일 크루이프가 새롭게 기틀을 닦은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아카데미의 이름인 라 마시아의 뜻이 농장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하다.[15] 크루이프가 데뷔하지 못하는 동안 바르셀로나는 UEFA컵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만다. 크루이프가 해당 시즌 유럽 대항전을 1경기도 뛰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16] 그러나 이 때 크루이프가 발롱도르를 수상할 때는 소속만 바르셀로나지,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보단 사실상 아약스에서의 유러피언컵 우승과 네덜란드 국대에서의 월드컵 준우승 활약상으로 수상했다. 1974년 월드컵 이후 크루이프는 지금과 같은 빅클럽이 아니었던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뛰면서 코파 델 레이 하나를 드는데 그쳐 우승과 거리가 멀어졌고 발롱도르와의 인연도 끊어지는 등 아약스 시절 만큼의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다.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 우승권 팀으로 이적했다면 기록적인 면이나 수상 경력 면에서나 실제보다 더 높은 위상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이 컸고 바르셀로나를 현재 높은 위상으로 올리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정말 크루이프를 신격화시켜도 이상하지가 않다.[17]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일이 있고 나서 재산관리는 그의 장인이 해주었다고 한다. 이런 면을 보면 크루이프는 현역 시절 정말로 축구밖에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18] 그 과정에서 한 번 허정무의 코뼈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언론들이 이를 비판하자 요한 크루이프 옹 왈. "저 한국 선수가 너무 잘해서 제치려다가 그런 사고를 저질렀다"라고 한 건 유명한 일화라고 전해지지만 당시 네덜란드 현지 기사 등에서 근거자료는 찾기 어렵다.[19] 허정무는 훗날 무릎팍도사에서 "그때 내가 코를 다치고 경기장에서 나갈 때 네덜란드 관객들이 자국의 불세출의 영웅에게 야유를 하는 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라고 술회했다.[20] 설성가상 라이벌인 베켄바워의 서독은 대회 3위를 차지했다.[21] 그나마 1실점도 불가리아에게 4:1 대승을 거두는 와중에 내준 실점이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22] 한 인터뷰에서는 기자에게 "내가 올해 도대체 뭘 더 했어야 발롱도르를 받을 수 있었냐"라고 되묻기도 했다고 한다.[23] 키커, Tyc 스포츠, Dos 스포츠, 클라린, ESPN, 이콴지, 스포츠넷, 소파스코어, 캐스트롤[24] 크루이프가 자서전에서 언급하기를 만약 크루이프 자신이 1978년 월드컵에 참가했다면 자신이 그의 조국 네덜란드를 우승시켰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했다.[25] 이때 사령탑을 맡은 감독은 오스트리아 출신이자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명인 에른스트 하펠이었다.[26] 수비력을 짐작하게 해주는 자료로 1975-76 시즌 바르셀로나의 수비력 수치가 0.08이던 것을 크루이프가 후방에서 활약한 1976-77 시즌과 1977-78 시즌에는 각각 0.51, 0.61로 크게 개선되었다.#[27] 바르셀로나 시절은 리그에서 어시스트 기록이 집계되어있지 않다.[28] 그리고 감독이 된 이후엔 스승의 토탈 풋볼 이론을 더 발전시켜 이른바 크루이프이즘을 만들어낸다.[29] 여담으로 당시 PSV를 이끌며 번번이 발목을 잡은 사람이 바로 거스 히딩크다. 크루이프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축하와 격려를 하기도 했다.[30] 참고로 국내에서는 이당시 바르셀로나를 크루이프호라고 부르지만 해외 문서에서는 대부분 바르셀로나 드림팀으로 언급된다. 크루이프 감독의 지도력도 있지만 그보다 선수 자원 자체가 워낙 걸출했기에 선수들의 활약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언급하고 있다.[31] 과르디올라는 유스 시절, 미드필더로서 전임 감독들인 테리 베너블스, 루이스 아라고네스, 카를레스 렉사흐 등에게 피지컬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로 인해 17세까지 바르셀로나 3군에 박혀 있었다. 실제로 피지컬이 안좋은 건 명백한 사실이였어서 펩의 포텐을 알아본 크루이프 조차 '우리 할머니보다도 느린 미드필더.'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후 뛰어난 테크닉과 패싱 능력, 축구 두뇌를 입증해가며 1991년부터 크루이프가 1군으로 기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팀의 주전으로 성장했다. 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의 축구 철학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훗날 드림팀의 감독으로 트레블을 달성한다.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나 펩에게 크루이프는 은사인 셈. 티키타카 전술의 골자인 '짧은 패스를 통한 공의 소유와 압박으로 공간을 선점'은 크루이프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토탈 풋볼 철학을 만든 리누스 미헬스가 있다. 토탈 풋볼을 심화발전시켜 온 정통(?) 라인이 미헬스-크루이프-과르디올라인 셈.[32] 가운데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인물이다.[33] 첫 번째는 미겔 무뇨스, 두 번째는 조반니 트라파토니. 이후 카를로 안첼로티, 프랑크 레이카르트, 펩 과르디올라, 지네딘 지단이 차례대로 달성하게 된다.[34] 크루이프의 챔스 3연패와 트레블은 아약스 시절에 이룬 것이다.[35] 호마리우는 무려 펠레한테도 축구화를 입에 처박아서 주댕이 좀 다물게 해야 한다고 한 인간이다. 다시 말하지만 브라질인이 펠레에게 그런 말을 했다.[36] 그 동안 크루이프는 라우드루프를 뺄 때 마다 외국인 선수 출전시간 제한 룰을 이유로 들었지만 챔피언스 리그는 이런 제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는 라우드루프를 벤치 명단에서조차 제외했다.[37] 다만 호마리우는 자기 개인 몸관리는 성실히 했던 선수다. 구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단체훈련을 죽도록 싫어한게 문제였다.[38] 펩도 사실 크루이프와는 다른 의미로 독선적이고 불통인 성격이라서 에투, 이브라히모비치 같은 기세고 자존심 부리는 타입의 선수와는 크게 마찰을 빚고 이는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아직도 그들은 펩이라면 이를 간다. 반대로 세얼간이와 메시를 필두로 한 라 마시아 황금 유스들의 경우 즐라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선생님을 잘 따르는 기숙학교 학생' 같은 성격이라 펩이 떠나고 다른 감독들이 왔다갔다 해도 딱히 큰 갈등이 없었는데 이는 펩이 크루이프에 비해 크게 복받은 점이라 할 수 있다.[39] 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크루이프 이후의 30년 동안 거둔 트로피의 갯수가 크루이프 이전의 78년 동안 거둔 트로피보다 많다.[40] CF 2위[41] 돈 발롱 어워드[42] 링크[43] 돈 발롱 어워드[44] Real Orden del Mérito Deportivo[45] Quality without results is pointless. Results without quality is boring.[46] Toeval is logisch.[47] 15m인 이유는 축구장의 가로폭이 보통 70m 전후이기 때문이다. 좋은 테크닉을 갖고 있는 포워드들이 좋은 포지션에서 뛸 줄 아는 능력이 있다면 좌우측의 포워드들이 중앙으로 15m, 그리고 중앙의 포워드가 좌우로 15m씩만 움직여도 충분하다는 이야기.[48] 왜곡된 발언이며, 실제 발언은 '바르셀로나야말로 최고의 우승후보다. 우리는 웸블리에서 열렸던 그 때의 결승전에서보다 더 완벽하고 경쟁적이며 경험이 풍부하다. 그러나 밀란은 더 이상 훌륭한 팀이 아니다. 밀란은 수비에 기반을 두고 있고, 우리는 공격을 중시한다.'[49] 1971년은 크루이프가 처음 발롱도르를 수상한 해인데 이미 이때부터 디 스테파노, 펠레가 거론될 정도였다.#[50] 출처 19분에 등장.[51] 출처 19분 14초에 발언 등장[52]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 크루이프 팀 동료. 포지션은 골키퍼.[53] 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에서 요한 크루이프를 언급하며. 영상(3분 18초부터)[54] 과거 후추닷컴에서 활동하던 기자.[55] 1970-71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 이후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56] 유로스포르트 기자[57] 영상 7분 35초.[58] 197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CA 인데펜디엔테에서 1965부터 1973년까지 뛰었던 선수이다. 1972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크루이프를 대인마킹했다.[59] 영상 28분 32초.[60] 1976년 감독과의 불화로 크루이프가 이적한다는 소문이 돌아 기자가 만약 내년에 이탈리아 팀으로 이적한다면 이적료가 얼마일지 예상해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61] 출처 9분 56초[62] 출처 30분 12초[63] 1974 월드컵은 지금과 달리 1차 조별리그를 하고 8강을 토너먼트 대신 2차 조별리그를 치룬 뒤 각조 1위가 결승전, 2위가 3·4위전을 치르는 형식으로 치뤘다. 당시 브라질은 펠레가 없긴 했으나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등이 있고 직전 대회인 1970 FIFA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우승하여 여전히 수준급 강팀이었다. 이 대회에서도 2차 조별리그에서 앞선 두 경기를 모두 이겼기에 마지막 경기인 네덜란드전만 이기면 두 대회 연속 결승 진출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경기에 들어가자 네덜란드의 경기력에 완전히 압도당하며 패했다. 보통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이기는 경우는 브라질의 전력이 매우 약한 시기이거나 상대가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통해 이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때는 네덜란드가 디펜딩 챔피언인 브라질을 누구보다 공격적인 방식과 혁신적인 스타일을 통해 압도했고 특히나 크루이프 한 선수에게 1골 1도움을 허용하는 등 농락당하며 무너졌다. 브라질이 공격적인 축구에 무너진 경우는 이 경기가 유일했고 그 스타일이 처음보는 스타일의 축구였으며 이를 경기장 위에서 한 선수의 지휘 하에 펼쳐진다는 사실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열풍을 일으켰다. 당시 사람들은 이 경기를 근거로 결승에서 서독을 이기고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1966 월드컵부터 월드컵 관련 스탯을 정리한 옵타와 소파 스코어 모두 1974 월드컵의 메모러블 매치(Memorable Match)로 이 경기를 선정했다.[6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골키퍼. 크루이프가 1974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득점한 일명 팬텀 골로 회자되는 전설의 득점이 바로 미겔 레이나를 상대로 한 득점이다.[65] 저널리스트.[66] 스웨덴의 수비수이자 크루이프 턴을 처음으로 당한 것으로 유명한 수비수.[67] 저널리스트.[68]아약스 선수.[69]바르셀로나 선수.[70] 네덜란드 제50대 총리.[71] 참고로 마라도나는 IFFHS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5위, FIFA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3위이다. 당시는 마라도나의 도핑 여파가 아직 남아있던 시기이기도 해서 평가가 박했다.[72] 보통 리오넬 메시 다음가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이 평가는 어디까지나 '선수'로써의 평가로 크루이프는 감독으로써 바르셀로나에 라 마시아를 정착시킨 인물이기도 하므로 '축구인'으로써 바르사에서의 평가는 메시와 동등하다고 할 수 있다.[73]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란츠 베켄바워, 지네딘 지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과 함께 거론된다.[74] 다만 부트발에서 뽑은 순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름 아닌 축구 황제 펠레가 크루이프에 밀린 4위이기 때문... 네덜란드 언론임을 감안하는 것이 좋다.[75] 다만 1970년은 크루이프의 기량이 채 만개하기도 전이었다.[76] 월드컵 1회, 유로 1회.[77] 심지어 크루이프는 월드컵 단 1회 출전으로 월드컵 올타임 베스트 11에도 선정되기도 한다. 월드컵 3,4회 출전한 유명한 선수들도 올타임 베스트에는 선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단 1회 출전으로 올타임 베스트에 뽑힌다는 건 그만큼 역사에 길이남을 엄청난 활약이었다는 뜻이다.[78] 그러나 크루이프는 호마리우가 이적해오자 대놓고 라우드루프를 천대했고 라우드루프는 복수를 위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79] 중후반은 당연히 호나우두지네딘 지단.[80] 종목을 불문하고, 어떤 선수들은 은퇴하고 나서나 은퇴할 즈음해서 아쉬움을 표현하곤 한다. 젊었을 때 잔소리를 무시하고 놀던 내가, 그 때 더 열심히 했다면 훨씬 더 좋은 기록을 남기면서 오래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나이가 돼서야 소중함을 깨달아서 아쉽다고. 스포츠가 아니라 인간의 인생이란게 그렇다. 물론 그 시절 다시 돌아가도 과연 그렇게 열심히 할까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결국 정답이란건 없다. 야구계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멋도 모르고 운동만 했는데, 나이 먹고 야구가 뭔지 알게 되니까 이제 몸이 안 따라준다.'[81] 사실 네덜란드는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에서 어느 정도 야구가 인기 있는 국가에 속한다. 현재에도 MLB에는 네덜란드 국적의 선수가 꽤 있는 편이기도 하고 네덜란드 야구 대표팀은 WBC에서 2년 연속 4강까지 오르기도 했다. 다만 네덜란드 출신 선수들 대다수는 미국과 비교적 가까운 중남미 네덜란드령 지역인 퀴라소아루바, 신트마르턴 출신이다.[82] 선수들이 가깝게 모여서 패스를 주고받는 훈련 방식.[83]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푸마 역시 독일 기업이며 창업주들은 형제지간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푸마의 창업자이자 다슬러 형제의 형인 루디가 진성 나치당원이였기에 이 일화가 사실이었다면 크루이프 입장에선 뒷골 땡길만한 셈.[84] 당시 AC 밀란의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는 오늘날 무리뉴를 연상케 하는 1골 넣고 잠그기 전술을 쓰는 감독이었다.[85] 실제 발언은 "밀란이 특별한 점이 없고 수비를 중시한다"에 가까운 내용으로 당시 AC 밀란 공격진, 미들진의 브리안 라우드루프, 마르코 반 바스텐, 다니엘레 마사로, 데얀 사비체비치, 장피에르 파팽 등을 생각하면 이것도 밀란 입장에선 디스로 받아들일 수 있긴 하다. 그리고 "우리는 호마리우랑 계약했고, 밀란은 드사이랑 계약했다. 그거면 설명이 될 것이다"라며 드사이를 지목했는데, 이건 반박의 여지없이 무례한 발언이다.[86] 실제 2016년 크루이프 사후 바르토메우 회장 기간 바르셀로나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는데, 크루이프가 죽자 구단 내에서 로셀과 바르토메우 등을 견제할 인물이 없어졌기 때문도 있었다. 다른 레전드인 펩이나 사비, 이니에스타는 외국에, 푸욜은 바르셀로나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지라, 당시 보드진의 깽판을 견제하고 대립하는 건 메시 등 선수단의 몫이 되어버렸다. 결국 메시는 구단의 재정난으로 파리로 떠나버렸고 바르사는 유로파 리그로 떨어졌다. 그나마 챠비가 감독으로 돌아오긴 했다.[87] 브라질 선수 영입건, 주급 관련.[88] 참고로 츄파춥스는 카탈루냐 지역을 연고로 한 기업이며, 본사가 바르셀로나에 있다.[89] 히딩크 감독이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으며,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두리를 지도했다고 한다.[90] 2001년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리버풀과의 결승전에서 89분 극적인 동점골로 연장 승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연장 후반 막판 골든 자책골이 작렬하며 5-4로 석패했다.[91]게오르기우스의 카탈루냐식 표기이다.[92] 즉, 보증인 3명이 필요한 것.[93] 영국 축구계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리그 등에도 비슷한 워크퍼밋 규정이 있다. 참고로 차두리가 셀틱으로 갈 때 보증인으로 나섰던 건 프란츠 베켄바워였다.[94] 그만큼 원래는 바르셀로나의 팬이였으나 토트넘에서 나오려던 당시 바르셀로나는 세 얼간이가 건재했던 시절이라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95] 한준희 해설위원도 이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 1978년 첫 은퇴 후 아약스의 기술 고문으로 재임할 당시 아약스가 트벤터에게 1:3으로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다못해 전반 30분에 벤치로 내려가 당시 아약스의 감독이었던 레오 베인하커르의 옆에서 직접 선수들에게 전술 지시를 내리며 팀을 진두지휘해 5:3 역전승을 이끌어낸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탓에 크루이프와 함께 훈련을 하는 선수들은 지적 받고 욕먹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아끼고 기대를 거는 선수에게는 더욱 엄격했다고 하는데 마르코 반 바스텐은 크루이프에게 독설을 듣고 울면서 훈련장을 나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헤랄트 파넨뷔르흐는 이 때문에 팀을 떠났고 요니 렙 또한 훗날 인터뷰에서 크루이프에게 많은 걸 배웠지만 크루이프의 완벽주의 성향은 싫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완벽주의에, 괴팍한 성격 덕분에 바르사 감독 시절 길들이기 쉽지 않은 유형의 선수들인 '미친 개' 스토이치코프와 'animal' 호마리우를 통제할 수 있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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