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구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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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Millennium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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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추어 라덴 춤 구텐베르크
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출생
1400년경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 대주교령 마인츠[#]
사망
1468년 2월 3일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 대주교령 마인츠[#]
국적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
직업
금세공업자
종교
가톨릭[1]

1. 개요
2. 생애
3. 인쇄기 개발
3.1. 개발사
3.2. 본격적인 인쇄술
3.2.1. 문자적인 이유
3.2.2. 민간 개발
3.3. 영향
4. 구텐베르크 성서
5. 그의 이름을 딴 것들



1. 개요[편집]


오늘날 세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모두 구텐베르크 덕분입니다. 모든 것이 이 근원으로 추적될 수 있지만 우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거대한 발명이 초래한 악은 인류가 선호하는 선에 의해 천 배나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마크 트웨인#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의 세공업자이자 인쇄업자. 그가 고안한 인쇄기는 유럽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로, 구텐베르크 이후의 유럽사회는 지식과 정보의 보급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대되었으며 덕분에 유럽사회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부와 명성을 얻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


2. 생애[편집]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1397년이나 1398년이 유력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인츠에서는 1400년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해 대대적으로 축하했지만,[2]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 정한 날짜는 아니다. 그의 이름이 요하네스인 것에 착안하여 세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을 그의 탄생일로 지정한 것.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부친은 하급 귀족 출신으로 조폐국의 관리로 일했으며[3] 모친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한편 요하네스의 부친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겐스플라이슈 추어 라덴(Friedrich Gensfleisch zur Laden)으로 성이 구텐베르크가 아니라 겐스플라이슈였는데, 요하네스가 30살 경에 구텐베르크라는 이름의 저택을 사들이면서 구텐베르크라는 성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정말 드물며 유럽 역사에 남긴 족적에 비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이동식 금속활자 인쇄기를 고안한 업적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는데, 판매용으로 제작된 인쇄물 외에는 직접 자신에 대해 남긴 문서나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의 행적은 재판기록이나 몇몇 문서에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내용에 의존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 이 한줌의 자료마저도 대부분 최근에 발굴된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태어났던 1400년대 초반 마인츠에서는 귀족들에게 대항한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가문이었던 구텐베르크 가족은 한때 마인츠를 떠나 엘트빌러라는 작은 마을로 도피하기도 했다. 1419년경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끝까지 학업을 마쳤는지는 불확실하다. 이후 부친이 사망하자 마인츠에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서 화폐주조와 야금업에 종사한다.

당시 마인츠에서는 기득권인 귀족들과 신흥 세력인 길드가 대립하고 있었다. 시는 부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금 제도를 운영했는데, 그 실상은 폰지 사기였다. 이 폰지 방식의 연금은 고객층을 계속 넓혀나가야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고객층이 마인츠 시민으로 한정되어 있던 상황에서는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고 궁지에 몰린 시가 세금을 올리자 길드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덩달아 분노한 귀족들이 도시 밖의 사유지로 이사를 가버리고 시는 파산했다. 구텐베르크도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진행되던 도중인 1429년 자신에게 지급되던 연금이 절반으로 줄자 시를 떠나버렸다.

1434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소송을 통하여 마인츠 시 당국으로부터 못받은 연금들을 다 받아냈고, 그렇게 마련한 목돈으로 사업을 하나 계획한다. 당시 독일 지역에는 7년마다 아헨 대성당에 찾아가 네 개의 성유물[4]을 눈으로 보고 오는 순례 행사가 있었다. 특히 이 무렵에는 유물들을 구경할 때 작은 거울(Spiegeln)[5]을 머리 위로 쳐들어 유물에서 뿜어져나오는 '빛살'을 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거울에 깃든 빛살이 나중에 거울을 볼 때마다 복을 준다고 믿은 것이다. 다음 순례 행사가 1439년에 있었고, 구텐베르크는 거울을 만들어 아헨으로 가는 길목의 순례자들에게 팔 생각이었다.

나름 참신한 사업 아이디어였지만 1438년 역병이 돌면서 이듬해에 열릴 예정이었던 행사는 연기되고 당연히 구텐베르크의 사업도 망했다. 다만 이 거울사업과 별도로 스트라스부르크로 이주한 이후부터 이미 인쇄업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439년 스트라스부르크 법원의 재판기록에서 구텐베르크가 출자자를 모아서 인쇄업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이때 자신의 야금기술을 이용한 금속활자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고 되어 있다.

1440년대에 구텐베르크의 행적은 불확실하나 1440년대 중반 시집을 출판했다는 것으로 보아 인쇄업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48년, 구텐베르크는 그의 누이가 죽으며 남긴 고향집을 상속받아 마인츠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자신이 개발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업을 시작하는데, 바로 이 사업이 유럽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발명한 인쇄기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항상 혼자서 인쇄기를 만들고 개량했으며 제작 기술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다.

많지 않은 기록에 의하면 구텐베르크는 당시 인쇄기 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마인츠의 부유한 금세공사였던 요한 푸스트에게 돈을 빌렸다고 한다.[6] 푸스트에게 돈을 빌리는 대신 구텐베르크는 푸스트와 일종의 동업 형태로 인쇄소를 차렸다.

1450년경 그가 새로운 인쇄법으로 처음 인쇄한 책은 당시 라틴어 교재로 널리 쓰이던 <문법학(Ars Grammatica)>이었다. 얼마 후 마인츠에 있는 장크트야코프 수도원장이 구텐베르크에게 면죄부 2,000 장의 인쇄를 주문한다. 당시 교회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는 효력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정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7] 주기적으로 발행했으며,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종이나 활자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면죄부는 인쇄품질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만족했으며 이로 인해 교회에서 계속 주문이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와 거래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구텐베르크는 독일, 아니 유럽 전역의 교회를 공략하기로 한다. 모든 교회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일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1452년부터 본격 성경 출판에 착수했으며 3년간의 노력 끝에 1455년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하는 최초의 라틴어(불가타)성서가 완성되었다. 이 성경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0굴덴이라는 거액에 팔렸다. 이 구텐베르크의 성경 초판은 180부가 인쇄됐는데, 매우 비싸긴 했지만 당시 필사로 제작된 성경이 100굴덴이 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인쇄품질도 훌륭했기 때문에 꽤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팔아서 대박을 쳤던 구텐베르크는 같은 해 채권자인 푸스트로부터 원금반환 소송에 휘말린다. 독일의 괴팅겐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에 이 소송에 대한 기록 일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자신이 빌려준 돈 상당수를 다른 용도로 유용했으며 변제하려는 의지도 없어서 소송을 걸었다고 되어 있다.

이 소송은 1456년 결국 푸스트가 승소하면서 2번에 걸쳐 빌린 원금 1600굴덴에 6% 복리이자를 합해서 합계 2,026길더를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구텐베르크는 이 거액을 갚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쇄장비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신세가 됐다.

재정적으로 파산한 이후의 구텐베르크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1468년에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계속 어려움을 겪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는 짐작만 있었는데, 최근에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말년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파산한 후 충격으로 실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특별한 정황이나 근거는 없다.

소송에서 패한 이후 구텐베르크는 다시 자택에서 작은 규모로 책을 찍어내기 시작해서 1457년과 1460년에 라틴어 사전 카톨리콘을 출판했다. 1462년에는 나사우의 대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를 점령했는데 이때 마인츠에서 쫓겨나 어린 시절에 잠시 살았던 마인츠 근처 도시인 엔트빌레로 이주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대주교 아돌프 2세는 마인츠에서 계속 인쇄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1465년에 구텐베르크에게 인쇄술을 발전시킨 공로로 연금을 하사했다. 한동안 아돌프 2세의 궁정에서도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는 1468년 70여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한편 구텐베르크의 인쇄소를 넘겨받은 요한 푸스트는 자기 사위이자 구텐베르크 밑에서 일했던 인쇄공 페터 셰퍼와 같이 인쇄소를 운영하였는데[8] 푸스트가 흑사병으로 죽자 셰퍼가 단독으로 운영하게 된다. 이후 셰퍼 집안은 유럽 각지에 인쇄소를 차려서 크게 성공했다.

인쇄업이 각광을 받자 셰퍼 외에도 구텐베르크 밑에서 일했던 인쇄공들이 유럽 각지에 인쇄소를 차리면서 인쇄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3. 인쇄기 개발[편집]



미국 유타주 크랜달 인쇄 박물관에서 시연중인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기를 통한 문서 인쇄 영상.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문서 인쇄가 가능하다.

세계사에서는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역사상 최초의 본격 대량 인쇄술로 공인되어 있다.

한국에선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9]이 구텐베르그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한건 구텐베르크가 아니라며 깎아내리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의의는 인류의 지식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켜준 것에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덕분에 당시 초고가의 사치품이었던 책이 대중화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활자화된 지식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막상 그 당시 한국에서는 금속활자는 만들었어도 보급에 실패하여 그 이후에도 조정에서 나름 대량생산해서 만든답시고 만든 농사직설, 동의보감등의 책도 모두 목판인쇄로 만들어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3.1. 개발사[편집]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의 조폐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활자 기술을 창안한다.[10] 금화, 은화의 초상화 도안을 찍어내는 펀치에다 글자를 거꾸로 새겨 철판에다 찍어 형틀을 만들고 그 위에다 철로 만든 주조기를 덧씌워 안티모니, 주석 합금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이 방식은 철로 만든 형틀 및 주조기를 쓴 덕분에 수천 번을 주조해도 모양과 크기가 일치했다. 형틀이 망가지더라도 펀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제작이 가능했다. 조판과 활자에 서로 요철(凹凸)을 만들어 꽉 물리게 하는 방식을 썼으므로 수백 장을 찍어도 활자가 밀리는 일 역시 거의 없었다. 여기에 대량 인쇄에 용이하게끔 기존의 포도주 기름 등을 짜던 압축기(프레스)를 활용한다. 활자인쇄가 잘 되려면 충분한 압력이 필요하지만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던 것이다. 현재도 신문과 언론을 press라 칭하는데, 이는 구텐베르크 인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1450년 경에 인쇄기를 발명하고, 1452년부터 3년에 걸쳐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한다. 3년에 걸쳐서 180부를 인쇄했는데, 필사본 생산 속도와 비교하여 15배 빨랐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인쇄공의 숙련도에 따라서 1분에 2~10장 가량을 인쇄할 수 있다고 한다. 인쇄 속도에 비해서 만들어진 성서의 숫자가 적은데 그 이유는 구텐베르크는 인쇄본 성서가 필사본과 같아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컬러 그림등을 넣어 상당히 고급스럽게 만들었고, 거기에 삽화나 머리말 장식등은 따로 필사의 과정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초판본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 성서 180부는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현대 인쇄기와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기술적인 면에서 크게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제본을 고려하지 않고 양적으로만 환산하면 현대 기계식 인쇄기는 1분에 800~3,200장 가량 인쇄되어 대략 80~1600배 빠른 셈이다. 어쨌든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속도는 필사에 의존하던 기존의 방식과 비교하면 혁명적으로 빨랐다. 이후 활자 인쇄술은 급속히 퍼져서 1450년부터 1500년까지 50년 동안 3만 종의 책을 총 2,000만부 인쇄했다고 한다. 이는 이전 1,000년 동안 출판된 책보다 더 많은 양이라고 한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앨 고어가 2005년에 서울 디지털 포럼에서 떡밥을 던지기도 했고. 이를 추적한 영화 직지코드를 통해 확인해 보면 그 개연성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While metal movable type printing was invented in Korea and the oldest extant metal print book had been printed in Korea, 'Korea never witnessed a printing revolution comparable to Europe's':

Korean printing with movable metallic type developed mainly within the royal foundry of the Yi dynasty. Royalty kept a 'monopoly of this new technique' and by royal mandate suppressed all non-official printing activities and any budding attempts at commercialization of printing. Thus, printing in early Korea served only the small, noble groups of the highly stratified society.


요약하면, 고려 금속활자술이 세계 최고(最古)이긴 하지만 소수 지배층만 인쇄술과 같은 첨단기술을 독점했기에 한국에 유럽의 출판 혁명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 다만 후술된 내용처럼 동양에서 출판 혁명이 일어나지 못한건 동서양의 문자 차이에 기인한 바도 크다. 서구 제어를 표현하기 위한 활자는 알파벳 대소문자 + 약간의 구두점과 조정 문자 + 숫자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아시아 전통 문자인 한자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족히 수만 자의 한자 활자가 필요했다. 개인이 이런 엄청난 양의 활자를 만들고 보관한다는건 당연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고 국가가 직접 나서야 겨우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보급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국가에서 직접 양산한 농사직설, 동의보감등의 책도 목판인쇄로 인쇄되어 보급되었다.


3.2. 본격적인 인쇄술[편집]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본격적인 인쇄술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3.2.1. 문자적인 이유[편집]


유럽에서 사용되는 페니키아 문자 기반의 알파벳 계열 문자는 기본적으로 20~30개 내외이다. 대소문자를 구분하고 장식용 글자체를 따로 둔다고 해도 만들어야 할 활자의 개수가 한정적이라 활자를 양산하기 쉽다. 실제로 처음 구텐베르크가 개발할 때 깎았던 활자는 알파벳, 문장 부호, 기타 각종 기호들을 통틀어 겨우 290종이었다. 구텐베르크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많다고 느꼈는지 다른 작업공 5명과 함께 작업했지만. 또한 음성을 바로 적을 수 있는 알파벳의 특성상 알파벳을 알고 자국어를 발음대로 적기만 하면 소통이 가능했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 비해 문맹 퇴치가 용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자는 상용한자만 수천 자에, 전체 한자는 수 만여 자에 달하므로 활자를 만들기 힘들다. 조선의 금속 활자 주조량은 구텐베르크의 열배에 달했지만, 한자 전체 숫자를 생각하면 그걸로도 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한자의 모양의 복잡성 때문에 활자 자판을 맞추는 과정도 매우 복잡하다. 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판을 맞춰야하는데, 이조차도 좌우가 뒤집힌 모양 때문에 잘못 맞춘 경우가 흔했다.

한글은 표음 문자라는 점에서 한자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모를 결합해서 하나의 글자를 만들기 때문에 인쇄는 더욱 복잡하다. 한글 완성자를 일일이 활자로 만들 경우 이론상 만들어야 되는 활자의 수가 1,638,750 개라 오히려 한자보다 훨씬 많다. 일제 시대에 주시경이 풀어쓰기를 주장한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심지어 문자가 전산화된 현재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유니코드 항목 참조


3.2.2. 민간 개발[편집]


민간인인 구텐베르크가 발명해 주로 민간 영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퍼져나갔다. 당시 유럽은 중세를 거쳐 근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으므로 상공업이 발달하는 상황이었다. 거래정보 및 시세 같은 정보를 빨리 대량으로 주고받아야 하는 상공업에서 적용되어 인쇄술이 전파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유럽의 정신세계 기반을 형성한 성경을 이전까지 가톨릭교회와 사제들이 독점했던 것을 마르틴 루터등이 자국어로 번역, 보급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종교개혁의 출발점인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통해 단 2주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후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의 보급은 종교개혁의 열기를 급속히 확산시켰다. 그것이 유럽 역사의 대격변 출발점이었다.


3.3. 영향[편집]


사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기 이전에도 인쇄 기술은 존재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14세기 경부터 목판인쇄 기술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당시 목판인쇄는 목판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를 위에 올린 후 롤러로 미는 방식으로 인쇄했는데 이 과정에서 잉크가 번지거나 종이가 찢어지기 일쑤였기 때문에 인쇄 품질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시절 유럽에서 책(Book)은 공예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목판인쇄를 통해 만들어진 싸구려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선 책이란 그냥 글자 정보를 전달하는게 본질이기에 그냥 기록매체에 글자만 주르륵 써 있고 표지는 종이나 가죽이고 실로 꿰맨 것으로 마무리됐으나, 유럽에선 책이라하면 양장본 하드커버에 그림에 금속장식까지 들어간 정말 공예품 개념이었다. 동아시아처럼 별다른 공예적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글자만 담긴 것은 팸플릿으로 아예 따로 구분이 되었다.[11]

이처럼 필사의 시대에는 책의 가격이 책의 문자수와 정비례했다. 성경 1질 값이 시골의 농노의 집보다도 비쌌고, 도시의 잘 지어진 연립 주택 1채보다 약간 낮은 가격이었다. 15세기 유럽 최고의 장서가로 알려진 제프리 초서가 보유하고 있던 책 수가 90여권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이 정도 책을 보유하려면 엄청난 돈과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순수한 글자로 정보 전달용도인 팸플릿 역시 수요가 따로 있었다. 바로 대학. 중세 유럽에서 대학이 처음 설립된 무렵에는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뒤 음독하면서 내용을 외운 다음 강의를 들어서 이해하는 식이었는데, 불과 백년도 지나지 않아서 교재의 핵심내용을 요약한 작은 책자를 강의에 가져가서 듣는 걸로 바뀐다. 그런데 팸플릿의 수요가 제일 많았던 대학에서는 필경사들을 대규모로 고용해서 자급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굳이 품질 낮은 목판 인쇄물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 당시 목판 인쇄는 성화나 공문서를 복사하는 등의 제한된 용도로만 활용되었다.

그래서 구텐베르크는 이러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책이 싸구려로 보이지 않게 하는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생산량을 제한했고 삽화가를 동원해서 그림을 그려넣었다.

인문주의자와 대학이 초기에 인쇄기를 멸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기는 책의 소비자 가격을 20%로 확 줄여버렸기 때문에 인쇄기의 가능성에 온 유럽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1470년대에는 이미 유럽 주요 대도시 12곳에 인쇄소가 열렸고, 1500년이 되면 온 유럽에는 240곳으로 확 늘어났다. 이 시대의 책은 국제 교역에도 쓰일 수 있는 고급 상품이었기 때문에 70%가 넘는 책이 라틴어로 계속 쓰였고, 국제 교역망을 따라 퍼진 염가의 책은 기존의 5배나 비싼 필사본 책들을 결국 밀어내버렸다. 발명 전 유럽에서 500~1400년대까지 필사된 책의 총량은 대략 10만 여권으로 추산된다.[12] 인쇄술 발명 후 불과 5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1,500~2,000만 권이나 되는 책이 생산되었다. 이는 이전 인류가 생산한 책의 숫자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로 인해 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빨라졌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철학이나 과학을 연구하고 발표 및 정리해서 출간하여 학자간에 새로운 발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학문상의 '촉매 작용'이 활발해졌다. 물론 학문 측면뿐만 아니라 플레잉 카드같이 비 학문 분야 역시 인쇄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또한 필사 시대에는 오·탈자 및 왜곡의 여지도 많았는데, 이것은 필사 과정에서 어느 사본이 신뢰도가 높은지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했다. 성경을 예로 들자면 요한 복음서간음하다 잡힌 여인 파트는 초기 사본에는 나타나지도 않다가 후대에 각주로 첨가된 것인데, 필사 과정에서 스리슬쩍 성경 본문으로 뒤섞이는 오류가 나타났다. 심지어 어느 필사자가 '이 문단은 내가 본 다른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며 지웠다가, 또 다른 필사자가 '옛 글을 마음대로 왜곡하지 마시오'라며 옆에 낙서를 해놓고 다시 더한 사본도 있다. 책을 생산하는 방법이 오직 필사뿐이니, 이미 유통되어서 필사되고 있는 책의 내용을 수정하는 것은 원저자도 불가능했고 어느 것이 진짜 원본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쇄로 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자 '표준적인 원본'이 생겨났고 심지어 그것을 수정한 새 판본을 찍어내서 유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렇게 서지학(書誌學)이 탄생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전까지 필사로 유통되었던 책들에 대해서도 '표준적인 원문'을 정리하는 작업도 행해졌다. 심지어 성경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욱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성경과 같은 값비싼 책보다는 값이 싼 출판물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물 중에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성경이지만 사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가치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주로 똑같은 서식과 문장이 반복해서 계속 쓰이는 행정 서류였다. 이 중에는 다름 아닌 면죄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쇄술로 인한 파급 중 제일 유명한 것은 개신교의 출현과 종교개혁일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151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교황파인 요한 에크와 공개 토론을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루터의 연설문, 논문, 논박문은 독일어로 번역 인쇄되어 광범위하게 퍼지고 전유럽으로 불길이 번지면서 이를 통해 개신교 탄생의 시작이 된다. 또 신구교간 종교전쟁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당시 분위기상 루터가 아니더라도 종교개혁은 시작되었겠지만, 짧은 시일 안에 막대한 양의 문서와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단 2주만에 전 독일의 인민을 사로잡은 종교개혁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저 독일 지역 내 한구석의 수도자들의 논쟁에 지나지 않았을수 있다.

또한 루터가 1522년 34년 발간한 '독일어 성서'는 널리 보급됨으로 인해 근대 독일어의 초석을 다졌고 민족주의의 형성에 기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독일에선 매년 100만 권 가량의 책이 인쇄되었다는데, 이 중 1/3이 루터의 저서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인쇄술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번역된 공인 성경과 기도서 미사경본[13]을 각 지방교회에 대량으로 배포할 수 있도록 해 가톨릭이 하나로 뭉치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효율적으로 개신교에 반박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대항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개신교 평신도 A가 성경을 근거로 가톨릭을 비판하고, 가톨릭 평신도 B가 성경을 근거로 개신교를 비판하는 식의 일이 가능해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종이를 대량생산후 배포할 수 있는 미디어로 만든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은 일반인들에게 비쌌다. 사실 위에도 써 있지만 이전 성경의 가격은 잘 지어진 도시의 집보다 약간 낮은 가격이었는데 그것이 20%로 줄어든 것이다. 좋은 집의 5분의 1 가격이 결코 싼 것은 아닐 것이다. 1628년 영국 기준 성경 1권은 183파운드 금화로, 일반인 농부는 몇 세대에 걸쳐 돈을 모아야 살만한 가격이었다. 1604년 발간된 돈키호테 종이 코덱스 1권의 정가는 290.5 마라베디 은화로, 금화로 치면 8.5개에 준하는 값이었다. 현대 가치랑 비교하면 몇백만원은 된다. 돈키호테 내의 묘사에서 돈키호테는 원래 귀족 가문으로서 상당히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사도 소설을 사모으려고 땅을 죄다 팔아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는데, 돈키호테가 가지고 있던 책은 불과 100권 정도였다.

책의 생산 속도는 빨라졌어도 종이 생산이 획기적으로 는 것은 아닌지라, 구텐베르크 이후에도 책의 가격은 종이의 생산량과 가격에 많이 구애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급격히 전파되고 유럽 사회를 흔든 것은 높은 도시화율과 도시민들의 높은 교육률이라는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지, 반대로 구텐베르크 때문에 이전에 교육이나 지식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농촌 대중들까지 지식 사회로 편입되는 격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보다 수백년 뒤인 나폴레옹 시대까지조차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정도의 문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부사관을 하기에 충분한 인력으로 취급되었다.

훨씬 더 후대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자서전에 적혀 있는 일화를 통해서도 산업 혁명 이전의 책의 가격을 가늠할 수 있다. 어린 링컨이 이웃 부유한 농장에 가서 일했는데, 어릴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한 어린 링컨에게 농장주가 책을 빌려줬다. 집에서도 책을 읽으며 잠이 들었더니만 비가 와서 창가에 둔 책이 비에 젖었다. 링컨은 스스로 농장주에게 다음 날, 가서 모든 걸 설명하고 책값으로 한동안 거저 농장일을 하기로 농장주와 합의했다는 것. 책값이 약 360여년전보다 많이 싸졌지만, 여전히 책값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뭐 링컨은 부지런히 다 일해서 책값을 갚았는데 농장주가 기뻐하면서 가지고 있던 책을 선물해줬다는 이야기이다. 국내 위인전에서도 해당 일화를 싣으며 1820년 초반 미국에서도 책은 매우 고급스런 물품이라 보통 사람이 책 한권 사자면 당시 평균 일당으로 며칠이나 보름 이상까지 갈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고 나올 정도였다. 또 비슷한 시기의 일화로, 종의 기원의 경우 1859년에 나온 초판 8000 부가 모두 팔린 것이 엄청난 대박으로 여겨졌다. 이외에도 1800년대~1900년대 초에 나온 베스트셀러 소설들의 경우 대다수는 이동식 도서관을 통해서 유통되었으며, 한국도 불과 수십년 전에도 교과서를 물려주거나, 대본소책방 등 책을 싸구려 종이로 찍어낸 것을 빌려주거나 중고로 사고파는 등 책은 대다수의 서민들에게는 직접 사기에는 꽤 비싼 취미였다. 산업혁명 초기 시대까지도 책의 출판량과 유통량은 2차 산업혁명 이후에 비해서 매우 적은 편이었다. 책을 기분 내키면 살 수 있는 시대는 수십년도 되지 않았다.


4. 구텐베르크 성서[편집]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로고.svg
파일:external/www.loc.gov/gb0343_enlarge.jpg
이름
한글
양피지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42행 성경』과 동시대의 배경 문서
영어
42-line Gutenberg Bible, printed on vellum,
and its contemporary documentary background
프랑스어
La Bible dite de 42 lignes de Gutenberg
국가·위치
독일 괴팅겐
소장·관리
니더작센 주립 대학도서관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01년
제작시기
1450년경

구텐베르크가 1455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불가타 성서다. 한쪽당 42줄씩 인쇄되었기 때문에 42줄 성서라고도 불린다. 상술한 바와 같이 서양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상징적인 책이기에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판본과 더불어 전세계 도서관이 소장하고 싶어하는 희귀템. 현존하는 구텐베르크 성서는 49개로 독일(13), 미국(11)[14], 영국(8), 프랑스(4), 러시아(2), 스페인(2), 바티칸(2), 오스트리아(1), 벨기에(1), 덴마크(1), 일본(1), 폴란드(1), 포르투갈(1), 스위스(1)의 도서관들이 소장하고 있다.[15]


5. 그의 이름을 딴 것들[편집]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구텐베르크 다이어그램이라는 용어가 있으며 균등하게 분할된 정보를 보게 될 때 '왼쪽 위→오른쪽 위→왼쪽 아래→오른쪽 아래' 순으로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담뱃갑 경고 그림의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71년 마이클 하트가 인류의 자료를 수집해 전자정보로 저장, 배포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공식 홈페이지

또한 마인츠에 소재한 마인츠 대학교 역시 정식 명칭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마인츠 대학교(Johannes Gutenberg-Universität Mainz, 약칭 JGU)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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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B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마인츠.[1] 가톨릭 신자였지만 자신의 발명품으로 대사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불가타 성경 등이 대량으로 인쇄되었다. 자신의 종교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당대 유럽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인물인 셈.[2] 그래서인지 70~80년대 인명대백과 사전이나 학습서에선 구텐베르크 생몰연도를 1400~1468 이라고 표기한 게 많았다.[3] 부친의 업무는 화폐의 주조였기 때문에 야금에 대한 상당한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요하네스도 야금에 일가견이 있었다. 당연히 금속활자를 개발할 때도 부친으로부터 배운 야금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4] 예수가 태어나던 날 마리아가 입었던 옷, 아기 예수를 감쌌던 포대기, 세례 요한의 잘린 머리를 쌌던 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허리에 둘렀던 천이었다.[5] 정확히는 핀을 달아 옷에 달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금속제 거울이라고 한다.[6] 재판기록에 의하면 800굴덴의 거액을 두 번 빌렸는데 중간에 갚은 돈은 없었다. 800굴덴은 당시 단순 임금노동자의 15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7] 가격에 따라 1주일, 1달, 3달, 1년 등등의 효력을 가진 다양한 면죄부가 있었다. 기간 뿐만 아니라 죄의 종류와 죄질에 따른 면죄부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기에 교회가 물욕에 찌들었다고 욕먹을 수밖에 없었다 [8] 셰퍼는 구텐베르크와 푸스트가 재판을 벌였을 때 구텐베르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면서 푸스트의 환심을 샀다. 구텐베르크가 재판에서 지고 쫓겨난 후 구텐베르크를 대신해서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푸스트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9] 다만 1200년대에 제작된 고려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것이 2020년에 밝혀졌기 때문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 지위가 바뀔 수도 있다.[10] 실재로 금속 활자 까진 아니지만 금속을 이용한 인쇄는 조폐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중국에 경우 고려의 금속활자보다 먼저 1154년부터 지폐 인쇄에 동판을 사용했다. 이를 기반으로 최초의 금속활자도 중국에서 만들었을 꺼라고 중국학자들은 추측하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 개발 타이틀은 한국이 가지고 있다.[11] 동아시아에는 아예 없는 개념인 팸플릿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유럽의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12] 현재 중소규모 지방 공공도서관의 평균 장서 수가 10만 여권 정도 된다.[13] 이때문에 트리엔트 미사가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다.[14] 영화 투모로우에서 혹한 속에 뉴욕 공립 도서관에 고립된 주인공들이 얼어죽지 않기 위해 도서관의 장서들을 태우자 도서관 사서가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이것만은 안된다'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품에서 놓지 않고 보호한 책이 바로 미국이 소장한 구텐베르크 성경 중 하나다.[15] 출판 당시 각 페이지 단위로 분리하여 판매하여 소장한 것까지 합치면 더 많은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