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벤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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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 리히텐슈타인 공작. 오스트리아군 포병대 정예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2. 일생[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1696년 8월 10일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리히텐슈타인 공작 후르스트 필립 에라스무스이고 어머니는 크리스틴 테레지아다. 1704년, 제국 야전군 원수 직책을 맡고 있던 아버지가 살해되었다. 이 때문에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어린 시절 홀어머니 밑에서 교육받아야 했다. 1712년,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16세의 나이로 제국군에 입대했고 1717년 벨그라드에서 대위의 직책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싸웠다. 1718년,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중령으로 승진했고, 그 다음 몇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면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1723년,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27세의 나이로 벨헨 드래곤 부대에 입대했고 1725년엔 리히텐슈타인 드래곤 부대의 대령이 되었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1734년 라인강 전선에 참전했다가 특사의 자격으로서 베를린에 가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설득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체류하는 동안 황태자 프리드리히(훗날 프리드리히 대왕)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전쟁이 종결된 후,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1737년 12월 23일부터 1741년 8월 16일까지 베르사유에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대사로 근무했고 1740년에 황금 양털 기사단장에 임명되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편집]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기병대 대장으로서 중요한 지휘를 맡았다. 1742년 5월 17일, 그는 코투지츠 전투에 참가해 우익 기병대를 이끌었으나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이때 프로이센군이 대포 82문을 동원해 효과적인 포격을 가한 것을 인상깊게 본 그는 오스트리아군 포병대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대포의 성능을 향상시키고 포병대 훈련을 강화하는 등의 여러 제안이 담긴 각서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제출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흔쾌히 승인했다. 그 후 1744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리히텐슈타인 공작을 오스트리아군 전체 포병대 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포병대 강화에 온 힘을 쏟았고 예산이 부족할 때면 자신의 재산을 거리낌없이 투자했다. 1745년 가을, 야전군 원수로 승진한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이탈리아에서 작전 중인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1746년 전역에서 밀라노를 공략하고 6월 16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피아첸차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물려받은 재산 대부분을 포병 연구에 투입했고 외국인 기술자들을 초빙해 오스트리아군의 대포를 개선시키는 작업에 동원했다. 이 외국인들 중에는 프랑스 출신의 요한 테오도르 루브로이, 데인 알브손, 프로이센 출신의 슈뢰더, 이탈리아 출신의 구아스코, 스위스 출신의 티슐러, 그리고 오스트리아 대포를 획기적으로 강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프랑스 출신의 장 바티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이 있었다. 또한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스위스 목수 자케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자케는 특별히 기술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기계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안하는데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에베르가싱의 대포 주조 공장의 모든 기계들을 개량했고 몇가지 새로운 대포들을 도입했다.

리히텐슈타인 공작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포병 훈련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부드바이스 근처의 몰도트힌에서 연례 훈련 숙영지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포병 사격 훈련, 표적 연습, 박격포, 지상 작업, 포대 설치, 명령 숙지 등 다양한 훈련을 실시했다. 그는 이 훈련을 위해 매년 5만 길더에 달하는 돈을 자신의 자금으로 투자했다. 이렇듯 오스트리아 포병 강화에 정력적으로 힘을 쏟던 그는 1751년 브뤼셀의 오스트리아 대사가 되었고 1753년 헝가리 방면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병에 걸려 군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2.3. 7년 전쟁[편집]


리히텐슈타인 공작의 오스트리아 포병 개혁은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만만치 않은 전투력을 과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마련한 대포들은 이후 100여 년간 오스트리아 포병대의 표준 장비로 군림했고 7년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군이 보유한 대포 수는 1756년 202개에서 1762년 580개로 늘어났다. 1757년 콜린 전투에서 패배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 사절 앞에서 자신이 패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패한 것은 적병 때문이 아니라 포병대 때문이오. 잘 배치되어 있는 250문에 달하는 대포들이 아군을 후퇴하게 만들었소.


1760년,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파르마 총독이 되었고 1763년에 빈 궁정의 대사로서 프랑크푸르트에 있었으며 요제프 2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자택에 칩거하면서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1772년 2월 10일 빈에서 사망했다. 향년 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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