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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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다윗의 유다 왕 즉위 이전
3. 기브온 전투
4. 아브넬을 암살하다
4.1. 왜 아브넬을 죽였는가?
5. 예루살렘 정복
6. 암몬·아람 연합군과의 전쟁
6.1. 우리야의 모살
7. 압살롬의 반란
8. 세바의 반란
9. 다윗 왕 말년
10. 최후
11. 총평



1. 개요[편집]


Joab

구약 성경의 등장인물. 연합 이스라엘 왕국의 2대 왕 다윗의 조카[1]이자 군대 사령관.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

어머니는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2]이며, 동생으로는 아비새, 아사헬이 있다. 형제들과 더불어 다윗이 거느린 용사들의 주축으로 대개 '스루야의 아들'이란 호칭은 이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말이다.

다윗이 연합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 다윗의 정복전쟁을 수행하여 '다윗의 영화'를 쌓아 올리는데 일조한 유능한 명장이자 다윗의 치세 내내 그와 함께한 공신. 그리고 명장이 어떻게 흥하고 몰락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대명사격 인물.

참고로 다윗에겐 애증의 조카이기도 하다.[3]


2. 다윗의 유다 왕 즉위 이전[편집]


다윗이 유다 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성경 내에서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딱히 언급된 바가 없으며, 언제부터 다윗을 따랐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의 이름이 처음 언급되는 건 다윗이 유다 왕으로 즉위한 이후 사울 왕의 군대 사령관이자 이스보셋 파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아브넬과 맞닥뜨린 기브온 전투에서인데, 이때 이미 그는 다윗 군의 용사들을 거느리는 수장으로서 참전하고 있었다.

단순히 다윗의 조카라는 이유로 대표가 된 것으로는 볼 수 없는 게[4] 다윗 휘하에 있던 용사들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시절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이런 저런 전공을 쌓은 역전의 용사들인데다, 당장 그의 동생인 아비새만 하더라도 다윗을 따라 적진에 잠입해서 사울 왕의 물병과 창을 훔쳐내는 데 동행한 바 있는 충직한 용사였다. 이러한 아비새조차 군말않고 요압을 상관으로서 잘 따랐을 뿐만 아니라 훗날 요압 대신 아마사가 군대 사령관이 되었을 때, 도리어 자신의 형인 요압을 불러들여 아마사를 참살하는데 일조하기까지 했다!

요압이 이러한 용사들의 수장으로 군말없이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비록 성경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요압 역시 삼촌인 다윗과 동행하며 적지 않은 공훈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아비새나 아사헬처럼 전장에서 직접 싸우기보다는 전략을 짜거나 지휘하는 쪽에 더 특화된 지휘관 타입이었을지도 모른다.[5]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 진실은 저 너머에.

3. 기브온 전투[편집]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왕으로 즉위하고, 사울의 남은 아들인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추대로 이스라엘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고, 양 진영의 군대는 이스라엘의 패권자를 가리기 위해 기브온 못가에서 충돌했다.

아브넬이 지휘하는 이스보셋의 군대는 마하나임에서 출병해 기브온 못에 이르렀으며, 요압 역시 다윗 군을 이끌고 기브온으로 출병. 연못을 사이에 두고 양쪽 진영이 마주하는 판국으로 형세가 이루어졌다.

아브넬은 처음에 일종의 일기토 형식으로 요압에게 대결을 신청했으며 요압 역시 이를 받아들여 각 진영에서 12명 씩 전사들을 뽑아 내보냈으나 결과는 서로 옆구리를 찌르고 쓰러지는 바람에 동귀어진으로 끝나버렸고, 이를 신호로 양쪽 군대가 충돌했다.

처음에는 양측 모두 팽팽하였으나 이스보셋 진영이 점점 밀리기 시작하자 아브넬은 퇴각을 결심하고 도주하는데, 이를 본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재빠르게 추격한다.

다윗의 용사들 중에서 가장 빠른 준족으로 유명해 노루발이라 불린 아사헬은 금방 아브넬을 따라잡았고, 아브넬은 처음에 '나 말고 다른 녀석 군복 빼앗아서 전공이나 챙겨라!'라고 말했으나, 아사헬은 무시하고 추격을 재개.

그러자 아브넬은 '계속 쫓아오면 나한테 죽어! 나중에 니 형 볼 면목 없다!'라고 협박을 살짝 섞어서 회유도 해보나 이마저도 아사헬은 무시하고 끝까지 아브넬을 따라잡았다.

결국 아브넬은 아사헬을 향해 창을 찔렀고 창은 정확히 아사헬을 관통했다. 나름대로 봐주려는 의도였는지 날이 달린 부분이 아닌 뒷끝으로 찔렀는데도 죽었다.

아브넬과 남은 병사들은 마하나임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했고 요압은 나팔을 불어 군을 정비한다. 이때 요압은 아사헬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아사헬의 장례를 치른 후 헤브론으로 복귀한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다윗 군은 아사헬과 19명이 사망했고, 이스보셋 군은 36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다윗은 이스라엘의 패권을 쥐기 시작했고 이스보셋은 점점 세력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또한 요압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동생인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게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4. 아브넬을 암살하다[편집]


이스라엘의 패권이 점점 다윗에게로 기울어져가던 무렵, 이스보셋과 아브넬이 반목하게 되는 사건이 발발하게 되는데 전말은 이러하다.

일찍이 사울 왕에게는 리스바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아브넬이 리스바와 동침하던 것을 이스보셋한테 딱 걸렸던 것. 이스보셋은 이를 보고 기가 차서 "아니, 어떻게 나의 돌아가신 부친의 첩실과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이오?"라고 따지는데, 아무리 이스보셋이 허수아비고 실권자는 아브넬 이라지만 이런 행동은 이스보셋의 뚜껑을 열어버리기에 아주 충분했다.[6] 이에 아브넬은 왕인 이스보셋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대꾸하였다.

"내가 유다의 개 대가리란 말이오? 오늘날까지 나는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안과 그분의 형제와 그의 친구들에게 충성을 다하였고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소. 그런데도 당신은 오늘 한낱 여자에 대한 잘못을 들어 나를 꾸짖으시오? 주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일이 있는데 내가 그것을 하겠소.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이 아브넬에게 벌을 내리고 또 내릴 것이오. 그 일은 이 나라를 사울 집안에서 거두어 다윗의 왕좌를 단에서 브에르 세바[7]

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유다 위에 세우는 것이오."

...라며 반역의 기가 다분한 막말을 한다. 이는 아브넬이 다윗 편으로 전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만다. 아브넬의 전향 의사를 확인한 다윗은 증표로 자신의 전처였던 사울 왕의 딸 미갈을 데려올 것을 조건으로 전향을 허락한다.

아브넬은 발디엘에게 시집갔던 미갈을 발디엘이 보는 앞에서 억지로 끌고오는 것[8]은 물론, 이스라엘 장로들을 설득시켜 이스보셋이 아니라 다윗을 지지할 것을 설득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갈을 데리고 헤브론에 도착한 아브넬을 다윗은 크게 환영하며 그를 위한 잔치를 베풀었고, 이에 매우 흡족한 아브넬은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이 당신을 따르게 하겠다고 서약까지 하며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다윗의 환대 속에서 마하나임으로 돌아간다.

아브넬이 다윗의 환대를 받고 돌아갔다는 것을 알자마자 다윗에게로 달려가 어째서 아브넬을 살려보냈는지 따지며, 틀림없이 다윗을 속이고 정탐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윗이 요압의 직언을 듣지 않자, 요압은 자신의 동생인 아비새와 작당하여 다윗 몰래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라는 거짓 조서를 꾸며 아브넬에게 전령을 보냈고, 마침 시라 우물 가에서 쉬고 있던 아브넬은 전령을 따라 헤브론으로 돌아온다.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자 그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인 요압이었고, 요압은 아브넬에게 조용히 말할 것이 있다며 그를 성문 안으로 데리고 간다. 이미 다윗에게 환대를 받아 철석같이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아브넬은 아무런 의심 없이 요압을 따라갔지만,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요압은 그의 배를 찔러 아브넬을 죽여버린다.

아브넬의 암살 소식은 곧바로 다윗에게로 전해졌고, 다윗은 아브넬의 장례를 주관함은 물론 암살자인 요압을 저주[9]함으로써 아브넬의 암살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하지만 그 외에 요압은 다윗에게서 다른 제재를 받은 바가 없고 여전히 다윗의 군대 사령관 직을 유지했다.

이 때 이미 그는 다윗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군부의 실력자이자, 유다 지파를 대표하는 존재로 성장해 있었고, 다윗은 언젠가 요압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조금씩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 "오늘 이스라엘 내 가장 중요한 인물이 요압의 손에 죽고 말았소. 야훼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은 내가 마땅히 처벌해야 하나 세력이 약하여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한스럽소. 부디 야훼께서 그를 향해 처벌을 내리길 바랄 뿐입니다."라고 한숨을 쉬는 걸 보아 아브넬은 적이었음에도 다윗에게 명성 높은 군사령관임이 틀림없고 요압이 훗날 어떤 말로를 맞을 지 암시를 하게 만들었다.

4.1. 왜 아브넬을 죽였는가?[편집]


요압이 아브넬을 암살한 1차적 명분은 일단 기브온 전투에서 아브넬의 손에 살해당한 동생 아사헬의 복수였다. 물론 혈육의 복수라는 점에서는 인간적으로 그러려니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문제는 상대가 전향한 무장, 그것도 사울 왕대부터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무장인 아브넬을 자기네 앞마당에서 무참하게 살해한 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여기서 요압의 정치적 성향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데 요압은 다윗의 조카로서 태생부터 유다 지파였고, 다윗 일가는 룻기에서 나오듯 최소 4대조 전부터 유다 지파 내에서도 이름난 명사였다. 따라서 유다 지파 내에선 나름 기득권층에 속하던 그는 철저하게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유다 지파가 태생적으로 타 이스라엘 지파들과는 달리 약간 소외되어 있던 일종의 반발심리와도 연계가 가능한데, 판관기(사사기)의 시절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중심 세력은 야곱에게서 장자권을 부여받은 에브라임 지파였고[10] 다윗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다 지파는 타 지파에게 철저하게 소외된 일종의 왕따나 다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다윗이라는 유다 출신의 슈퍼스타가 등장해 유다 지파가 결집되고 이스라엘의 대권까지 도전할 정도로 성장하자, 요압이 다윗을 중심으로 유다 지파가 이끄는 이스라엘 왕국을 꿈꾸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과거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에브라임 지파가 결집해 이스라엘을 통치해 정복전쟁을 하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그 유다 지파만의 왕국을 이끌어야 할 다윗이, 요압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 다윗은 유다 지파만의 왕국이 아닌 전 이스라엘의 통합을 설계하고 있었고, 더 이상의 유혈 없이 평화롭게 이스라엘의 전권을 차기하길 희망했다. 앞서 언급했던 미갈과의 재결합이 그러했고, 아브넬의 전향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이는 요압이 바라던 유다 중심의 이스라엘과는 거리가 멀었던 방식이었고, 결국 요압으로서는 극단적인 방식을 쓸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요압 입장에서 아브넬이 죽으면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간의 전쟁은 돌이킬 수 없을 것이고 그 전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유다 중심의 이스라엘 왕국이 성립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테니까. 게다가 이스보셋에겐 아브넬을 대신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는 것 또한 요압의 심증을 굳히는 데 일조했을 터이다.

하지만 다윗의 발빠른 대처로 내전은 확전되지 않았고, 아브넬을 잃은 이스보셋은 결국 수하들에게 암살당함으로써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브넬의 암살로 인해 요압은 이스라엘과의 통합에 부정적이던 유다 지파로부터 지지를 얻음으로서 다윗조차 건드릴 수 없는 정계의 실력자로서 거듭나는 데에는 성공했다.

또한 요압의 아브넬 암살은 군인으로서, 군부 내에서 자신의 지위 유지와도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리 자신이 다윗 군의 실세라고 하지만 사울 왕 시절부터 군공을 쌓은 아브넬보다는 경력, 서열이 분명 뒤쳐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11] 거기다 아브넬은 앞서 언급했듯이 전 이스라엘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 정치적인 입장에서도 요압에겐 불리할 것이 뻔했다.[12]

따라서 요압이 아브넬을 암살한 것은 철저히 유다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지닌 요압이 다윗을 향한 항명이자 동시에 정치적으로서 위험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요압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인 아비새 역시 아브넬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것인데, 다분히 반항적인 끼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요압과는 달리 아비새는 다윗의 명령이라면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인물이었으며 전쟁 때마다 항상 다윗을 호위하던 충직한 용사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아비새조차 요압이 주도하던 아브넬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것은 형제인 아사헬의 복수라는 명목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역시 근본적으로는 형인 요압과 같은 의견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13]


5. 예루살렘 정복[편집]


이스보셋 암살 후, 이스보셋 정권이 무너지자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통합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다윗은 통합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로 당시 여부스 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지목하였고, 다윗은 군을 이끌고 공성에 나섰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 본디 여호수아로부터 목표로 할당받았던 베냐민 지파조차도 역량이 안 되어서 포기했던 곳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다윗조차도 예루살렘 공성에 고전을 면치 못하자, 여부스 인들은 '장님과 절름발이가 이 성을 지키고 있더라도 너흰 함락 못할걸?'이라고 다윗을 조롱했고, 이에 다윗은 '이 성을 맨 처음으로 점령하는 자는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라고 선언한다.

이 때 요압은 예루살렘 성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성 밖에 있는 수원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이는 비밀 통로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에 요압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성 내부로 진입했다. 요압의 특공대가 내부에서 호응하자 여부스 인들은 버틸 수가 없었고 결국 예루살렘은 다윗의 손에 떨어졌다.

이 공로로 요압은 이스라엘의 전군을 통솔하는 군대 사령관이 되었고, 명실상부한 다윗 다음의 이스라엘의 2인자가 되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요압이 다윗 휘하의 용사들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정식으로 군대 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건 이 시기로 추정된다.


6. 암몬·아람 연합군과의 전쟁[편집]


이스라엘의 군대 사령관으로 등극한 이후, 그는 다윗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정복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전공은 암몬·아람의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본래 암몬 왕 나하스[14]와 다윗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는데, 나하스는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도피 생활을 하던 시절, 다윗의 가족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적이 있었고 이후로도 두 사람은 서로 친교를 나누던 관계였다.[15] 그런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인 하눈이 왕이 되었기에, 다윗은 그동안의 정이 있겠다 암몬으로 조문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다윗이 보낸 조문객을 정탐병으로 판단[16]한 하눈은 조문객을 잡아다가 수염을 깎고 옷을 엉덩이 부분까지 찢는 모욕을 줘서 돌려보낸다. 호의를 베풀려 했다가 뜻밖의 모욕을 당한 다윗은 사신들의 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 돌아오게 하는 한편, 군대 사령관 요압을 소환해 암몬 정벌을 명령한다.

한편 암몬 왕 하눈은 요압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듣고 소바 왕 하닷에셀을 비롯한 아람에 있는 각 부족들을 고용했는데 대략 3만 명의 아람 용병들이 하눈 왕 앞에 집결했다. 요압이 군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암몬 군은 성문 어귀에 진을 치고 있었고 아람 용병대는 들판에 따로 진을 치고 있었다. 요압은 정예병을 따로 편성해 자신의 휘하에 둔 다음 남은 군대는 동생인 아비새에게 맡긴 후 자신이 주력인 아람 군을 칠테니 아비새더러 암몬 군을 상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한 쪽이 불리하면 다른 한 쪽이 불리한 쪽을 돕기로 연계작전을 짠 다음, 군을 이끌고 아람 군을 공격한다. 요압의 정예병들이 아람 군을 격파하기 시작하자, 이를 본 암몬 군은 사기가 떨어져 성 안으로 도망친다.

한편 자신의 군대가 박살났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소바 왕 하닷에셀은 자신의 군사령관 소박으로 하여금 아람의 전 부족을 끌어모아 헬람으로 진격했지만 다윗의 영격으로 병거 7백 대와 기마병 4만 명이 몰살당하고 군사령관 소박마저 전사하고 만다. 이 전쟁 이후 아람은 다윗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고 다시는 암몬과 동맹을 맺지 않기로 약조한다.

6.1. 우리야의 모살[편집]


그 유명한 다윗과 밧세바의 간통이 바로 이 시기에서 벌어졌던 사건인데, 당시 헷 사람[17] 우리아는 요압의 휘하에 있는 다윗의 이름난 용사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당시 암몬, 아람 연합군과 전쟁을 치루는 일선 부대의 지휘관으로 다윗 역시 그의 이름을 알 정도로 이름난 전사였다.

한편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미모를 보고 반해 그를 불러들여 간통했는데,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자신의 부정을 감추려고 우리아를 불러들여서 아내와 동침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아는 너무나 강직했던 탓인지 아니면 뼛속까지 군인이라 전쟁 외의 지식은 얕았는지, '요압 사령관님과 전우들이 전쟁터에서 구르고 있는데 나 혼자 휴가를 보낼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남기고 부하들과 위병초소에서 잤다.

하지만 다윗은 포기하지 않고 우리아를 불러다 술에 취하게 만들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부하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자, 어라 이게 아닌데 싶었던 다윗은 요압에게 밀서를 보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요압은 아람 군을 무찌르고 암몬 군을 성 안으로 몰아넣은 후 포위 중이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곳을 고른 후 우리아로 하여금 그곳을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우리아는 그 명령을 수행하다가 결국 부하들과 함께 전사한다.

요압은 우리야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까지 죽은 일을 다윗에게 보고해야했고, 다윗이 '야 이 바보들아! 위험한거 뻔히 알면서 함부로 공성을 걸면 어떡해!' 라고 질책하지 못 하도록 우리아가 죽었다는 것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이야기한다. 그러자 요압 계획대로 다윗은 '뭐, 전쟁 좀 하다 보면 누구나 죽을 수 있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음엔 잘 싸워야 한다?' 는 식으로 오히려 요압을 격려한다.

그리고 우리아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서 밧세바를 데려와 아내로 삼는다.

이 사건은 요압의 독단이 아닌 처음부터 다윗이 지시한 것을 요압이 수행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요압 역시 이 사건에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7. 압살롬의 반란[편집]


다윗의 장남인 암논이 배다른 누이인 다말을 강간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뒤 외갓집인 그술로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다윗은 암논의 잘못도 있는지라 압살롬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살인자의 몸인 압살롬을 쉽게 용서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대신 총대를 멘 것이 바로 요압이었다. 그는 드고아에서 여인 하나를 불러다 과부처럼 위장시키고 다윗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저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둘이서 서로 싸우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그만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살인자인 아들을 죽이려 하는데 그 아들마저 없어지면 남은 아들마저 사라지니 이를 어찌하련지요?

이에 다윗은 여인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명령을 내릴 것을 약조하였다. 이에 여인이 감사를 표하면서 "그런데 왕께서는 그렇게 자비로우시면서 왜 내쫓긴 아들은 집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시는지요?"라고 덧붙이자, 다윗은 이 여인이 요압이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요압을 불러와 압살롬을 데려오게 한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이 자신을 만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마 근신하고 자숙하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 압살롬은 귀국하고서도 2년 동안이나 부왕을 접견할 자격을 허락받지 못한 채 지내다가, 다시 한 번 요압으로 하여금 부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불러도 요압이 응하지 않자 압살롬은 요압의 보리밭에다 불을 질러버린다.

이에 요압이 압살롬을 찾아가 따졌으나, 압살롬은 되려 "이 따위로 푸대접을 할 거면 외갓집에서 잘 살던 나를 뭣 하러 돌아오게 했소?" 하고 강짜를 부리며 적반하장으로 따졌다. 요압은 화가 났지만 결국 다윗에게 잘 얘기를 해서 압살롬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일조한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중재하려고 했던 이유는 장자였던 암논이 사망한 현 상황에서 압살롬이 유력한 제1왕위 계승자였고, 그 왕위계승자가 자기 외가가 있는 외국으로 도피한 것을 빌미로 외국의 외척세력이 압살롬을 끼고 간섭해올 여지를 방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며, 국왕과 왕위계승자 간의 불화 역시 외척세력의 간섭을 최대한 억제하려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시기부터 이스라엘 내부의 반 다윗 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들과 압살롬이 결탁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압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기어이 아히도벨[18]을 비롯한 반 다윗 세력들과 결탁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다윗 왕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반대파들의 위협 속에서 마하나임으로 도주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윗이 예루살렘에 심어두었던 이중첩자인 후새의 계략으로 군대를 모을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한 근왕군이 마하나임에 집결했다.

다윗은 요압과 아비새, 잇대로 하여금 군을 지휘하게 하여 반란군을 토벌할 것을 명함과 동시에 수괴인 압살롬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한다.

요압은 군을 이끌고 에브라임 수풀에서 압살롬의 반란군과 싸워 2만명을 도륙냈고, 압살롬은 도주하다 상수리나무 가지에 머리가 걸려 매달리는 추태를 보이게 된다.

이를 목격한 병졸 한 사람이 즉각 요압에게 보고하자 요압은 그를 죽였다면 큰 상을 받았을텐데 왜 안죽였냐며 문책하고는[19] 손에 단창 셋을 쥐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 다음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에워싼 채로 죽였다.[20]

압살롬을 죽인 후, 요압이 수풀 가운데 큰 구멍을 판 다음 시체를 던진 후 그 위에다 돌무더기를 쌓자 이를 본 반란군은 기세가 꺾여 각자 도주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하며 크게 통곡하자 요압은 다윗에게로 가서 '오늘 모든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싸웠는데 왕이 반란군의 수괴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고 있으면 싸워 이긴 백성들[21]은 뭐가 됩니까?'라고 간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위로하길 권한다.

다윗은 요압의 말을 따라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운 장병들을 치하하고 한때 반란군에 가담했던 이들을 용서하는 유화책을 펼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요압은 군대 사령관의 직위를 박탈하고 압살롬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아마사[22]를 기용해버린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명을 어기고 자기 자식마저 죽인 요압과의 사이가 더욱 멀어진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너무 커져버린 요압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다윗이 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였을 것이다.

8. 세바의 반란[편집]


압살롬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미 한 번 들고 일어난 반 다윗 세력은 이미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 있었던데다, 마하나임에서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던 다윗을 유다 지파만이 맞이하게 되면서 타 이스라엘인들의 분개를 사는 사건까지 터진다.

여기에 대해 유다 지파에선 왜 이러신가? 우리가 그렇다고 뭐 특혜받은 거 없거든요?라고 변명하지만, 너네랑 다윗이 짜고 치면서 우릴 왕따하고 있잖아!라고 이스라엘인들의 빈축만 샀다. 아닌 게 아니라 다윗에게 반기를 든 세력 중 가장 크게 가담한 쪽이 바로 유다 지파이기 때문이다. 유다 외의 타 지파들은 그래도 왕이라고 다윗을 잘 모시고 있다가 어느 때 환궁시킬까 고심하던 차에 유다 측에서 선수를 치고 생색을 내니 열이 받을 수 밖에.

이렇게 이들은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봉기한다.[23]

다윗은 아마사로 하여금 삼 일 내로 유다 지파 내에서 군대를 소집할 것을 명령했지만 요압과는 달리 유다 지파 내에서 변변치 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아마사는 기한 내에 군대를 소집하지 못했다. 압살롬과 다윗 간의 싸움에서 다윗에게 크게 발린 쪽이 당시 총지휘관이었던 아마사였는데, 미쳤다고 아마사 밑에 또 들어갈 군사는 없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총체적 난국.

결국 다윗은 요압과는 달리 적어도 자신의 말에는 절대 충성하는 충직한 용사 아비새를 불러 세바 토벌령을 하달한다. 아마사와는 달리 아비새는 다윗 자신과 오랫동안 전장을 함께한 장수였기에 능력은 확실히 검증된데다, 자신을 향하는 충성심 역시 요압과는 수준이 다르니 나름대로 다윗으로서는 훌륭한 대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명을 하달받은 아비새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토벌군을 구성하는데 여기서 아비새는 다윗이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버렸다.

바로 세바 토벌군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다윗에게 찍혀서 쫓겨난 자신의 형 요압을 자기 손으로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그 역시 다윗의 측근으로서 늘 다윗의 곁에 있었기에 형인 요압과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다윗이 서로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새가 왜 요압을 불러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어느 정도 유추를 해보자면 그저 단순히 자신보다 형 요압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적임자라고 판단했거나, 형 요압의 자리를 가로챈 신임 군대사령관인 아마사를 용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브넬 암살 건에서 보다시피 비록 아비새가 다윗에게 충성하는 용사였지만, 맹목적일 정도로 형 요압의 뜻을 따랐다. 후에 다윗이 아비새를 처벌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아비새가 요압을 부른 건은 넘어가준 모양. 그리고 아비새가 요압을 다시 데려온 또 다른 가능성은, 새로 임명된 군사령관인 아마사의 인망과 영향력이 아무래도 이스라엘 군 내에서 시원찮은 편이다 보니 그것을 못 미더워하여 경록도 인망도 있는 요압만이 군사령관으로서 적임자라는 판단 하에 이를 독단적으로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래도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공을 혁혁하게 세우며 다윗 왕국의 건립이 앞장선 요압이니만큼 그 위상은 이스라엘 군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것은 기정사실이니 말이다.

눈치 빠른 요압이 아비새를 대신해서 지휘권을 잡자, 기존에 있던 요압의 부하들은 물론 유다 지파의 남자들이 속속 요압과 아비새의 군대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세바 토벌군이 구성되었다. 아마사와 달리 요압은 이스라엘에 널리 알려진 불세출의 명장이었으니 군사 사기 역시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기브온 큰 바위까지 진군했을 때, 마침 아마사가 부하들을 이끌고 이를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요압은 사촌 형인 아마사에게 "장군, 평안하시오?"라며 인사하는 척 가까이 갔고 아마사 역시 의심하지 않고 요압에게 가까이 갔다가 그만 요압의 손에 들린 칼을 주의하지 못한 방심을 저질렀고...[24] 그 결과 요압의 칼에 배를 찔려 죽고 만다. 얼마나 깊숙히 찔렸는지 창자가 땅에 쏟아져 다시 치지 않아도 죽었다고 할 정도였다.[25]

거기다 아마사를 살해한 직후 요압의 시동이 아마사의 시체 옆에서 '요압을 좋아하는 자와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의 뒤를 따르라'라고 하자 아마사의 얼마 안되는 병사들마저 죄다 요압에게 붙어버린 것도 모자라 인근 지역의 장정들까지 요압의 군대에 합류하면서 요압의 군대는 점점 더 불어나게 된다.

한편 요압이 군을 이끌고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기절초풍한 세바는 급하게나마 아벨 벳 마아카란 성에 들어가 대항해보지만... 요압은 공성전을 벌일 필요도 없다는 듯 시크하게 군대를 동원해 공격축대를 쌓아 바깥성벽만큼 올리고 성을 통째로 헐어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아벨 성 안에 있던 어떤 한 여인이 요압더러 '님 왜 우릴 다 죽이려고 하나요. 여긴 속담에도 나오는 현인들의 성읍인데요'라고 따지자 이에 요압의 '세바만 죽으면 그럴 일이 없다'란 말 한마디에 이 여인은 성 안의 사람들과 공모하여 냅다 세바 목을 잘라다 성 밖으로 던져버리고 항복해버림으로써 세바의 반란은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요압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이스라엘 군부의 수장이자 유다 지파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증명해보였으며, 가히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2인자라는 것을 온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각인시켰다. 이로 인해 아마사로 하여금 요압을 견제하고자 하였던 다윗의 노력 역시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렸고, 그가 죽을 때까지 다윗은 요압을 제거하지 못했다.

사실상 이 당시의 요압은 막강한 군부의 지지와 다윗의 정치적 기반이나 다름없는 유다 지파의 영향력까지 모두 손에 넣은 이스라엘 최고의 권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9. 다윗 왕 말년[편집]


세바의 반란 이후, 요압은 다윗 왕의 곁에서 이런 저런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인구 조사 건 역시 다윗 왕의 지시를 받아 수행한 업무였다. 비록 다윗에겐 미움받는 신하이자 조카였지만, 다윗에게 인구 조사의 문제점을 간언하기도 하는 등 적어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나름대로 신하로서 군주에 대한 충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다윗 왕 말년에 이르러 다윗이 병석에 눕게 되자,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26]를 지지하였는데, 특히 다윗이 가장 총애하던 밧세바의 소생인 솔로몬을 제치고 왕이 되기 위해 큰 잔치를 열어 솔로몬을 제외한 다른 왕자들과 각 고관들을 초대하였는데 그 역시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이 잔치에 참석하여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켜세우며, 사실상 대관식을 멋대로 강행해버린다.

다음 왕은 솔로몬이 될 것이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를 지지한 것을 볼 때, 요압은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자기가 왕좌 배후의 권력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는 솔로몬보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자기의 지위가 더 확실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를 다윗이 본남편 우리야에게서 빼앗는데 자신도 관여했기 때문에, 솔로몬은 적법한 왕세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27] 거기다 솔로몬은 갓 스물을 넘긴 젊은이로 다른 장성한 자들에 비해 너무 젊었다.

다윗이 가장 크게 범죄한 밧세바와의 간음, 또 그 남편인 의로운 헷 사람 우리야를 죽인 일을 상기해보면 이 의문은 해소가 된다. 우리야를 죽음의 자리로 보내라는 편지를 누구에게 보냈던가? (삼하 11:14) 우리야의 손을 통해 다윗의 그 편지를 받은 요압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래도 그 후로도 요압은 다윗의 군대대장으로서 충성스럽게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야를 죽인 다윗의 범죄는 밧세바도 몰랐을 것이고 하나님과 다윗 자신과 또 한 사람 요압이 알고 있었다. 다윗은 요압에게 큰 약점이 잡혀있었던 것이다. 그런 패역한 범죄를 알고 있던 요압이 밧세바를 또한 싫어했을 것이고, 그녀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을 좋아했을리 만무하다.

그렇기에 밧세바와의 악연 때문에 꺼림칙하고 나중에 태어난 젊은 왕자보다 통상적으로 서열 1위가 되어야 할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통성도 확보할 수 있고 본인의 군권이라면 솔로몬 정도야 눌러버릴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왕위 계승 서열로서는 아도니야가 우선권자였기에 명분으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역대기 상권에 따르면 다윗의 아들들은 헤브론 시기 이즈르엘 여자 아히노암에게서 낳은 암몬, 카르멜 여자 아비가일에게서 낳은 다니엘, 그수르 임금 탈마이의 딸 마아카의 아들 압살롬, 하낏의 아들 아도니야, 아비탈에게서 낳은 스파트야, 에글라에게서 낳은 이트르암이 있다. 예루살렘 시절 시므아, 소밥, 나탄, 솔로몬이 암미엘의 딸 밧세바에게서 낳은 자식이다(즉 솔로몬 말고도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이 있었다는 소리). 입하르, 엘리사마, 엘리펠렛, 노가, 네펙, 야피야, 엘리사마가 있었다. 그 외에 소실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이 있었다.

하지만 요압은 야훼의 말씀을 직접 내려받는 예언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나단과, 아무리 병약해졌다 하나 사무엘에게 받은 왕좌와 군부의 지주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던 다윗을 과소평가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만다.

밧세바가 솔로몬의 즉위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나단이 "빨리 가서 말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조언하고 나서야 다윗에게 찾아가 부탁했다. 후에 아도니야가 말년의 다윗을 모셨던 여인 아비삭을 달라고 했을 때도, 밧세바는 이것이 곧 선왕의 후궁을 취함으로서 본인의 '정당한 계승'을 주장하기 위함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솔로몬에게 가서 아도니야의 요청을 전하며 그렇게 해 주라고 얘기했었다. 물론 다윗이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했기에 방심한 것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밧세바의 정치력과 상황 판단력이 그다지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28] 솔로몬이 태어났을 당시부터 그가 후계자라 예언하면서 밀어주고 있었으니, 솔로몬의 즉위에는 나단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단은 다윗이 우리야를 모살하고 밧세바를 취했을 때 다윗에게 야훼의 진노와 저주를 전했고, 이에 다윗이 참회하고 두려워하며 용서를 빌었지만 "하느님이 당신은 용서하셨으나 이번에 밧세바가 낳은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이라며 저주를 거두지 않은 전력이 있다.

다만 이는 나단이 사사롭게 저주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명을 전달한 것이다. 즉, '하느님이 노하셨고, 이러저러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그는 선지자로서 야훼의 뜻을 전달할 의무와, 군주가 야훼의 뜻대로 나라를 잘 이끌도록 간언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밧세바의 아이가 죽을 것이라 말한 것도 '하나님께선 당신을 용서하였지만, 예정하신 대로 당신의 아이를 죽게 할 것입니다.' 의 뜻으로 그냥 하나님의 선지자인 본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것일 뿐이다.

아무튼 나단이 밧세바를 찾아가서는 지금 상황이 안 좋다, 당장 왕에게 가서 솔로몬에게 왕좌를 물려주라 부탁하라고 밧세바에게 말하고 상황을 확인사살하는 동시에 솔로몬이 후계자라는 것을 신하들에게 말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라며[29] 고하자 다윗은 밧세바에게 지금 물려주겠다 선언하고 즉각 대제사장 사독과 근위대장 브나야를 소집해 솔로몬에게 기혼에서 대관식을 치르게 하여 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공표하게 한다. 이 지시는 아도니야 일파가 알지 못할 정도로 신속하고 갑작스레 처리되었다.

솔로몬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으로부터 접하자마자 아도니야를 비롯한 그 일파들은 혼비백산하여 삽시간에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요압 역시 몸을 피해 집으로 도망쳐버렸다. 순식간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아도니야는 성막으로 피신하여 제단 뿔을 잡고 버텨서 솔로몬에게 간신히 목숨을 구명받았다.

솔로몬이 왕위 계승자가 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윗이 죽음에 임박하였는데, 그는 유언 가운데 요압을 들어 이렇게 당부한다.

'더구나 너는 츠루야의 아들 요압이 나에게 한 짓,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수, 네르의 아들 아브네르와 예테르의 아들 아마사에게 한 짓을 알고 있다. 요압은 그들을 죽여 전쟁 때에 흘린 피를 평화로운 때에 갚음으로써, 그 피를 자기 허리띠와 신발에 묻혔다. 그러니 너는 지혜롭게 처신하여, 백발이 성성한 그자가 평안히 저승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여라.' (열왕1 2:5,6)

한 마디로 말해 '다 늙은 몸이라고 제 명에 죽게 해 주지 마라'는 살해 당부다(...). 이런 유언을 남긴 것만 봐도 다윗이 신실한 임금일 뿐 아니라 비정한 보스 기질이 있는 양반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30]

10. 최후[편집]


자신을 지켜주던 부왕의 사망 이후 솔로몬의 가장 큰 위협은 역시 이복형 아도니야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아도니야가 태후 밧세바에게 찾아가 원래 왕위는 내 자리였는데 솔로몬에게 넘어갔으니, 대신 한때 다윗의 침대 시중을 들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달라고 주청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의 관습으로 선왕의 후궁을 취하는 행동은 곧 선왕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31] 밧세바가 별 생각 없이 이를 솔로몬에게 말하자[32] 솔로몬은 대단히 열받아서 근위대장 브나야를 보내 아도니야를 제거하고,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종교계의 거물이라 죽일 수는 없었고,[33] 부왕과 오랫동안 환난을 함께 해왔으며, 무엇보다도 그 원인이 다윗이 젊었을 때 저지른 과오의 대한 책임도 있었기 때문에 해임하여 고향인 아나돗으로 보내버렸다.

뜬금없이 다윗의 과오가 나왔는데, 이에 대한 책임 사유는 다음과 같다. 예전에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가던 다윗은 도중에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제사장 아히멜렉과 만나면서 "나 왕한테 받은 비밀 임무 수행 중인데 먹을 거랑 쓸 만한 무기 좀 없느냐"이라고 거짓을 말했고, 이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아히멜렉은 떡과 골리앗의 칼을 주어 보냈다. 이 때, 사울의 목자장이던 에돔인 도엑이 이를 보고 사울에게 밀고했고, 사울 왕의 분노를 사게 된 아히멜렉의 가문은 아들 아비아달을 제외하고 몰살당했다. 가까스로 도망간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그는 이후 다윗에게 의탁했던 것이다. 참고로 아비아달은 사무엘기에 나오는 대제사장 엘리의 현손으로, 사무엘이 어렸을 당시 아비아달의 고조할아버지인 엘리는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 때문에 대제사장직에서 박탈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바가 있었다. 현손대인 아비아달 때 그 예언이 성취되어, 엘리의 가문이 속한 이다말의 자손들은 두 번 다시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대제사장의 후예 두 계열 중 하나인 엘리 가문이 속한 이다말 계열은 대제사장의 명맥이 완전히 끊기고, 사독 가문이 속한 엘르아살 계열만이 대제사장직을 이어가게 된다. 사무엘 유년 당시의 예언이 이런 식으로 성취된 것이다.

아도니야가 처형되고 아비아달이 낙향했다는 빅 뉴스를 들은 요압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직감하고 (한 때 아도니야가 그랬던 것처럼) 장막 안의 제단 뿔을 잡고 버텨보지만, 반역의 처단 명분으로도, 종교적인 이유로도 고의적인 모살을 반복한 탓에 제단 뿔을 잡는 수단은 효력이 없었다.[34] 때문에 솔로몬은 브나야를 보내 요압의 목을 쳐버린다.[35] 브나야의 근위대는 선왕 다윗이 다른 세력의 영향을 배제하려고 일부러 (크레타·필리스티아 등지의) 이민족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요압은 브나야를 저지할 수 없었다. 요압이 죽은 뒤, 이스라엘 군의 최고사령관 자리는 브나야에게 넘어간다.

선왕의 유지도 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군부를 장악하면서 사사건건 왕명에 항거하던 그의 존재는 왕권 강화를 노리던 솔로몬의 입장에서도 굉장한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과연 요압이 처단당하면서 요압과 선이 닿아 있던 유다 민족주의자 세력은 힘을 상실해버렸고, 이들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지배 세력에 가까웠던 다윗 치세와는 달리 솔로몬 치세 내내 찍소리하지 못하고 다른 12지파들처럼 솔로몬의 무리한 건축 정책에 등골이 빠지게 부려먹히게 된다.[36]

그러나 선왕의 정치적 기반이라는 타이틀을 지녔기에 그나마 국왕의 견제가 가능했던 유다 지파[37]가 더 이상 국왕의 독주를 막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하였고 결국 절대 군주였던 솔로몬이 타락하고 그가 죽은 이후 나라가 분열되는 막장 사태까지 치닫게 된다는 점에선 아이러니한 셈.[38]

또한 요압을 대신할 만한 명장이 없는 상태에서 숙청을 감행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의 군사력 약화를 가져왔다.[39] 때문에 솔로몬 치세의 화려함의 이면에 군사력 부재라는 부실함이 내포되어 있었고 이는 솔로몬 치세에 이미 아람, 에돔이 거병해 다윗이 완성한 강역의 절반이 날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대 이스라엘은 전국에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라 수많은 이민족들을 품고 있었고 같은 이스라엘인끼리도 지파간의 대립이 존재해 조금만 틈이 있어도 붕괴할 수 있었는데 요압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들을 겨우 틀어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 요압을 아무런 대체자 없이 무작정 숙청해버렸으니 이스라엘 왕국의 붕괴는 결국 솔로몬이 자초한 셈이다. 그나마 솔로몬 입장에서도 요압을 살려두기엔 곤란한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할 필요는 있다. 거기다 요압은 왕인 다윗의 말을 여러 번 어긴 전적이 있고(압살롬 살해 등), 요압을 처결한 것은 다윗이 아닌 솔로몬이다. 솔로몬이 아니라 아도니야를 지지했기 때문에 솔로몬 입장에서 요압은 충직한 신하가 아닌 반역자에 지나지 않았고 다윗은 오래 전부터 요압 숙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다윗이 유언으로 요압의 처단 명목을 내세운 것은 이스라엘 두 장수를 평안한 때에 살해한 것이다. 애초에 이스라엘의 율법에도 무고히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이라고 한다.


11. 총평[편집]


장군으로서의 전공만 보면 정말 화려하다. 성경에 기록된 전공만 보더라도 다윗이 유다 왕에 즉위한 이후로부터 사실상의 다윗 군의 사령관으로서 크고 작은 주요 전투들을 수행하였으며, 나가서 싸웠다 하면 족족 승리를 거머쥔 뛰어난 명장.

빈말이 아니라 뭔 일이 터졌다 하면 다윗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요압이다. 다윗 역시도 산전수전 겪으면서 전쟁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의 군사적 재능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난공불락이던 예루살렘 성의 약점을 파악함은 물론 암몬&아람 연합군을 물리칠 때는 주력군만 분쇄함으로서 연합군 자체를 패퇴시키는 등, 적의 약점을 분석하는 데 뛰어난 전략안을 지녔다.

게다가 압살롬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사살상 국가의 영웅이었으며,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반란군이 항복함으로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당대 최고의 명장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사실상 다윗 왕의 개국 공신 중 최고의 공신.

그러나 분명 다윗을 향한 충성 자체는 변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계획했던 온 이스라엘의 통합과는 다른 유다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탓에 다윗 왕과 시시건건 충돌이 잦았으며,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학무도한 권력자이기도 했다.

어찌보면 자신이 암살한 아브넬과도 비슷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자신의 숙부였던 사울 왕의 첩인 리스바를 건드렸던 아브넬과는 달리 요압은 딱히 선왕의 처첩을 범하거나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의 손에 죽은 네임드급 인물들도 쟁쟁한데 그 첫번째로 꼽을만한 인물이 바로 아브넬, 거기에 비록 다윗의 명령이었기는 하나 자신의 충직한 부하였던 우리야,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어기고 참살한 왕자 압살롬, 그리고 자신의 사촌 형이었던 아마사가 있다. 개중에는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성경 내에서 이만큼 의도적인 모살을 저질렀음에도 오랫동안 자리를 유지한 특이 케이스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뛰어난 명장이자 구국의 영웅으로서 명예로운 군인이면서도,[40] 한 편으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탐한 비열한 권력자라는 이중적인 면을 지닌 독특한 인물이다.

특히 자기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해버리는 냉혹함을 지녔는데, '요압 사령관님이 전장에서 구르고 있는데 그 부하인 내가 집에서 잘 수 없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 자신을 굳게 신뢰하던 부하인 우리야를 다윗의 명령을 받자마자 곧바로 모살[41]해 버렸고, 한때 자신의 도움을 받았었던 데다 다윗이 죽이지 말라고 단단히 부탁했던 왕자 압살롬도 반란의 수괴라는 이유로 끝끝내 처형시켜버리는 모습을 보면 소름끼칠 정도.

자신을 따르던 병졸조차 요압의 처세에 불평을 표할 만큼 자기 보신과 정치적 목적에 충실하다. 그리고 본인이 왕자를 죽여놓은 당사자이면서도 슬퍼하는 다윗에게 가서 폭언에 가까운 말로 간언할 정도로 배짱이 좋고 뒷배가 튼실했다.

“임금님께서는 오늘 이 종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저희는 오늘 임금님의 목숨과 임금님 아들딸들의 목숨과 왕비와 후궁들의 목숨을 구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시고, 임금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미워하십니다. 정녕 오늘 임금님께서는 장수들과 신하들이 임금님께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저는 압살롬이 살고 저희가 모두 죽었더라면, 임금님 눈에 옳게 보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 나가셔서 임금님의 신하들에게 다정한 말씀을 건네주십시오. 주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임금님께서 만일 나가시지 않으면 오늘 밤 아무도 임금님과 함께 지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임금님께 닥친 모든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2사무 19:6-8)[42]


그렇기에 다윗 왕 말년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권신으로 살았지만, 그 동안 쌓아온 악행이 솔로몬을 통해 한꺼번에 되돌아오면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인물.

실제로 다윗의 명령으로 인구 조사 건을 대신 처리하거나, 그 압살롬이 다윗에게 용서받으려고 중재를 부탁한 사람이 다름 아닌 요압이라는 점을 볼 때, 요압이 군권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에도 깊은 관여를 하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요압을 마냥 피해자라고 하기엔 충분히 다윗의 충신으로만 이미지 좋게 남을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그것도 여러 번 과격한 방식으로 날려본인 장본인이 다름아닌 요압 본인이기도 하다. 아브넬 건까진 감안해도 압살롬, 아미사 건은 빼도박도 못한다. 즉 본인이 자초한 게 너무 많으니까 다윗이 조카 + 자기의 충실하고 쓸만한 부하라고 넘어갈 수 없는 사단에까지 이른 것이다(이 양반이 다윗의 권력체계를 무시하다시피 하는 짓도 저지르면서 다윗의 입지를 위협했던 걸 생각해보자). 차라리 이상한 데서 나대지 않고(압살롬 건 등) 그냥 평범하게 예스맨으로 있었다면 솔로몬 시절까지 잘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솔로몬 대에서는 이미 솔로몬으로 후계를 삼았음에도(왕상 1:16) 다른 후계자, 아도니야를 왕으로 삼는 것에 지지했으며 솔로몬 치세의 시작부터 반역도이자 선왕의 오점은 살려두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것 외에는 다윗의 명령을 고깝게 여기거나(우리야 살해. 물론 이 사건은 다윗의 명령에 따른 일인만큼 책임은 다윗에게 있었다.)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압살롬 살해 및 인구조사 사건)에도 저주에 가까운 꾸지람 당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둘을 살해함으로서 종교적으로도 오점을 갖는 요압을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이 끌어안고 가는 것 역시도 말이 안될 수 있다.[43] 종교적으로 질타를 받은 선왕인 사울과 다윗도 각자 자신의 저지른 일에 대한 야훼의 징벌을 당했으며, 율법(민 35:33)상으로도 요압은 이미 죽어마땅한 죄인이기도 했다.(왕상 2:32~33) 놀라운 것은 사울의 첩을 탐한 아브넬과 반역자 압살롬의 장수였던 아마사를 요압보다 의롭고 선한 자라고 기록한다. 선왕의 후예가 생존해있을 때 선왕의 첩을 탐한 이와 제 아비를 거역해 반란의 수괴가 된 자의 장수가 더 의롭고 선한 자라고 한다면 그 둘보다 못한 요압은 과연..

즉, 요압은 자신의 군주인 다윗과 솔로몬에게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기에 제거당했으므로 토사구팽이란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물론 요압이 그 동안 해온 행적을 보면 자업자득에 좀 더 가깝긴 하다.

한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보이는 인물인데, 한 왕조를 만든 국왕 밑에서 함께한 전쟁 영웅이지만, 처세술은 좋다고 하기 힘들어 왕의 견제를 받고, 왕의 사망 이후의 말년은 숙청당한 점, 이 숙청에 왕의 부인까지 개입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하지만 군사를 다루는 법을 제외하면 나머진 낙제 수준으로 문외한인 한신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정치적인 감각이 대단히 뛰어난 정치 군인이다. 한신은 전략가로서는 굉장히 유능했음에도 이상하게만큼 상전인 유방에게 두 번씩이나 군권과 직위를 빼앗기는 등 번번히 약한 모습을 보인 반면, 요압의 경우 다윗의 직위해제를 씹어버리고 도로 군권을 틀어쥐었다. 한신에 비해서 요압이 태생과 지지 기반이 탄탄했기도 했지만, 그 다윗을 상대로 이런 짓이 가능했던 걸 보면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 수완 역시 상당히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명장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운명 그대로 살다 간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 다윗의 아래에서 음지에서 벌일 법한 일을 도맡아 하다 간, 다윗의 어두운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
[1] 조카라고는 해도 실상 다윗보다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다윗이 집안의 맨 막내였고, 아들만 해도 명시된 것만 여섯명이었고 딸들은 따로 명시하지 않았기에 나이차 많은 형과 누나들이 많았으므로 다윗이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해서 요압을 낳았을 수도 있다. 실상 요압은 성경에서 내내 다윗보다 나이가 더 많고 고압적으로 묘사되며 가끔가다 주제넘게 다윗을 갈구기도(?) 하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다.[2] 가톨릭 성경에서는 "츠루야"로 표기하고 있다.[3] 실재로 다윗은 요압 덕을 많이 보기도 했지만 요압의 태도나 행실 때문에 피해를 본 적도 있었다. 압살롬 건이 대표적.[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의 가장 큰 임무는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니 왕의 일족도 자연히 전쟁 업무를 수행하기 마련이다. 하진의 사례처럼 왕의 친척이 무산계(武散階)의 최고위에 자리잡는 건 실제로도 흔했다. 사울 왕의 아들이었던 요나단이 대표적인 예로 종자 한 명만 데리고 블레셋 진영에 가서 무쌍을 찍는 등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참여했으며 사울의 조카였던 아브넬 역시 이런 식으로 군대장관 자리를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5] 그를 짐작하게 하는 예시로, 다윗이 자랑하는 30인의 맹장을 무력과 순위를 소개하는 구절에서 아비새나 아사헬은 들어가지만(특히 아비새는 무력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요압은 들어가지 않는다. 만약 요압의 무력이 상당했다면 그 목록에 들어갔을 텐데 없다는 것은 요압은 다른 두 형제와는 달리 무력쪽에 크게 특화되지 않은 지장이거나 무력이 크게 필요 없는 지휘관의 역할이나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6] 아버지의 후궁인 리스바를 건드린 것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훗날 압살롬이 반란 당시 아버지의 후궁에게 든 것만 해도 알수 있다.[7]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 끝이고 브에르 세바는 유다의 남쪽 끝이다. 즉 온 나라를 다윗에게 넘기겠다는 것.[8] 심지어 울면서 따라오던 발디엘을 억지로 쫓아보냈다.[9]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저주하였다. 특히 문둥병은 당시에는 신의 저주라 부를 정도로 지독한 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저주를 퍼부은 셈.[10] 입다 항목 참조.[11] 요세푸스 또한 요압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것을 염려삼아 아브넬을 암살했다고 사서에 기록하고 있다.[12] 성경 만화인 파워 바이블에서도 요압이 아브넬을 죽이면서 하는 말이 내 동생 아사헬의 복수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대장군은 나 하나로 족하다!라고 말한다. 그의 속마음을 한 번에 보여주는 대사라 평할 수 있을 듯.[13] 그렇지만 아비새가 단순한 복수 차원에서 아브넬을 죽였을 확률이 더 큰 것이, 아비새는 원래부터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이 다분했다. 다윗이 사울에게 도망다녔을 때에는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지 않도록 제지하여야만 하였다. 또한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처형하려는 걸 두 번이나 막아야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와서 비는 시므이를 다시 죽이려 한 것으로 볼 때, 한 번 당했던 걸 쉽게 잊는 성격도 아니다. 아마 정치보다는 자신의 혈육을 죽인 아브넬을 복수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14] 과거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했다가 막 이스라엘 왕으로 데뷔한 사울에게 탈탈 털렸던 그 사람이다.[15] 어쩌면 나하스는 사울에게 당한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사울의 정적인 다윗을 전략적으로 후원했을지도 모른다.[16] 성경에서는 하눈의 신하 중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조문객을 의심하게끔 유도하는 대목이 있는데, 하눈의 입장으로선 흘려들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 이 당시 다윗이 너무 커져버린 것과 한때 다윗이 몸담고 있던 블레셋 세력 역시 다윗에게 갈려나간 소식을 들었기에 암몬으로서 상당한 위협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17] 한때 철기 문명으로 오리엔트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히타이트의 후예로 추정되는 민족이다.[18] 다윗의 모사였으나 그를 배신하고 압살롬 편으로 전향했다. 사실 그는 밧세바의 외조부로서, 다윗이 외손녀를 강제로 취한 일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19] 여기에서 그 병졸이 요압에게 대답한 말이 걸작이다. "은 천 개를 받는대도 안 할 겁니다. 왕이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고 한데다가, 만약 내가 죽였더라면 당신(요압)도 나를 적대시할 게 뻔한데요?" 이 대답에서 요압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이 병졸은 만약 자신이 압살롬을 죽였다면 그 공은 자신의 몫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근본은 다윗의 부탁을 어기고 왕의 아들을 죽인 것인데다가, 압살롬을 죽였을 경우에 요압이 책임 회피용으로 자신을 내세워 다윗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게 만들 거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요압의 속셈을 간파한데다가 지위가 낮음에도 대장군 요압 앞에다 대놓고 독설하는 걸 보면 요압 휘하에서 오랫동안 지내본, 지금으로 치면 원사급의 병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0]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일로 다윗의 눈 밖에 났는데, 상술했듯 요압이 다윗 왕과 압살롬 왕자 사이에서 중재를 잘 해서 그 관계가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그랬는데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니, 요압 입장에서는 압살롬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고, 또 과거에 압살롬을 두둔했던 일로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과거 압살롬과 교류했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곤란해질 것을 염려해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압살롬을 죽여서 과잉 충성(물론, 왕의 명을 직접 거역하는 만큼 다윗 왕 본인에게는 충성으로 보이지 않겠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 반란의 수괴를 처단한 다윗 왕의 충신이라는 이미지를 공고히 할 수 있다)을 보이려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요압의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본다면 단순히 압살롬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뿐만 아니라, 이런 정치적 계산이 깔린 과잉충성이었을 것이다.[21] 이 날 전사자는 진영에 관계없이 모두 2만명이라고 기록된다. 약 한국 육군 2개 사단의 인원이다.[22] 다윗의 또다른 누이인 아비가일의 아들로 요압과는 이종사촌 관계이다.[23] 왕권 탈취가 목적이었던 압살롬의 반란과는 달리 세바의 반란은 반 다윗, 나아가 반 유다 지파라는 슬로건을 지닌 일종의 민란에 가까웠다.[24] 이것도 요압의 계산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사에게 인사하는 척 다가가면서 일부러 칼집에서 칼이 스스륵 빠지게 만들고 실수인 척 빠진 칼을 주웠다. 이런 꾀로 한 손에 칼을 무장한 상태로 아마사와 근접할 수 있었다.[25] 아브넬 살해 사건 이후 두 번째 비무장 동료 군인 살해 사건이다. 아브넬 때야 제 동생을 죽인 살육자에 대한 타당한 보복이라며 어찌저찌 쉴드친다해도(율법에서는 혈육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선 가족이 복수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율법상으로도 100% 살인혐의로 사형을 받아도 변호 불가다.[26] 넷째 아들이긴 하나 암논, 길르압, 압살롬이 모두 죽은 현 시점에서 명실상부한 제1왕위 계승자였다. 압살롬 못지 않은 미남이었다고.[27] 그도 그럴 것이 솔로몬이 후계자가 되면 안 그래도 다윗의 총애를 받는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의 입지가 굉장히 높아질 것은 당연했고, 요압 자신이 밧세바의 전 남편인 우리야와의 악연으로 얽힌 사이인 이상 서로 좋은 꼴을 보기 어려울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욕이 굉장히 강한 요압으로서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외척의 등장을 반길 리가 없었다.[28] 하지만 전후 상황을 볼 때 밧세바가 알면서도 속은 척을 하며 아도니야에게 함정을 팠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가서 "네 이복형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달라고 하니 그렇게 해 주지?" 하자 솔로몬이 "아예 왕위도 넘겨주라고 하시죠?" 하며 역정을 낸 뒤 아도니야 일파를 철저하게 조져버렸는데, 이게 사실은 아도니야의 요구를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그의 역심을 간접적으로 알린 것이라는 해석이다.[29] 이를 볼 때 솔로몬이 후계자라는 것은 대외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고 다른 왕족들 정도가 왕궁 내 분위기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0] 참고로 다윗이 직접 조지라고 유언한 사람은 요압과 시므이다. 시므이는 과거에 다윗을 심하게 저주했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고 '칼로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기에 죽이지 않았으나, '맹세는 내가 했지 네가 한게 아니다, 그러니까 아들인 네가 죽여라'고 당부한 것으로 보인다.[31] 압살롬 역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 다윗의 후궁을 강간한 적이 있다.[32] 하지만 전후 상황을 볼 때 아도니야의 의도를 알면서도 그대로 솔로몬에게 이야기함으로써 함정을 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33] 초기 이스라엘의 왕권은 종교적 권위에 크게 의지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사제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교단의 대표이자 킹메이커였던 사무엘과 틀어지면서 몰락했던 것을 생각하면...[34]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도 살인자를 살리는 법률은 존재했다. 다만 그게 고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연한 사고나 불운에 의한 경우에 적용되었으며 고의로 사람을 무고히 죽은 사람에게는 사형으로 처벌하라고 적혀있다.[35] 이 부분은 앞서 요압이 역시 사울 시대의 군부 지도자였던 아브넬을 직접 살해했던 것과 겹친다. 그 역시 군부 후배에 의해, 과격한 방법으로 세대교체를 당한 셈이다.[36] 사실 다윗 치세에는 유다 지파의 영향력이 타 지파들에 비해 컸기 때문에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이 쌓여있었고 그 때문에 터진 것이 바로 세바의 반란이었다. 그렇기에 솔로몬의 입장에선 선왕인 다윗의 유지였던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의 화합을 위해선 유다 지파를 억누를 필요성이 있었다.[37] 전대 왕인 사울 왕의 기반이었던 베냐민 지파는 므비보셋에 대한 다윗의 호의와 베냐민 지파 출신의 반란 수괴 세바의 진압, 그리고 훗날 솔로몬의 시므이 처형으로 인해 기세가 꺾인 상황이었고, 타 지파의 반대세력은 세바의 반란 당시 요압에게 진압당했다.[38]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 출신 왕들 중에 성군들이 여럿 나와 북이스라엘에 비해 왕조를 오래 이어갈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은 여러 지파들의 실력자들의 반란으로 왕조가 여럿 갈아치워지는 혼란상이었기 때문이다.[39] 요압의 후임으로 군대장관 자리를 차지한 근위대장 브나야는 다윗 시절부터 종군한 경력이 있었지만 요압처럼 대규모 전역을 지휘한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다.[40] 그를 향한 이스라엘 군부의 지지는 매우 확고했다. 다윗의 최측근 용사이자 그와 형제인 아비새는 말할 것도 없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다윗 군의 수장이자, 다윗의 장군들을 대표하고 있었으며, 일선 부대의 지휘관인 우리야 역시 요압과 함께 전장에서 먹고 자는 걸 원할 정도로 휘하 병졸들의 지지 역시 매우 높았다는 걸 알 수 있다.[41]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명령을 내린 다윗에게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히브리인 아이들을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을 거스르고 "히브리인 산모들이 힘이 좋아 산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를 낳아 버렸습니다"라고 둘러댄 이집트 산파들의 예가 있듯이, 요압도 우리야를 살리고자 했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막말로 자기 권력을 위해 대놓고 왕이 임명한 자신의 대타를 죽일 정도로 막 나가고 권세가 센 인물인데, 적당히 보호해 가며 “우리야가 너무 용맹해서 온갖 사선에서도 안 죽고 살아남아 버렸습니다” 정도로 보고해 버리면 다윗도 딱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42] 사실 다윗이 반란군 수괴였던 아들의 죽음에 통곡하고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가 이겨 놓고도 바닥에 가까웠다는 대목이 있다. 즉 요압이 '나가서 신하들을 위로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군대 사령관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말 그대로 다윗이 정줄 놓고 군대의 사기를 자꾸 바닥으로 깔아뭉개면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걸 말하는 방식이 "우리가 다 죽었어야 됩니까? 부하들 다 떨어져나가기 전에 분위기 좀 맞추시죠?" 하고 윽박지르는 수준으로 과격했던 것.[43]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지를 남길 때에도 요압이 자신의 말을 안들었다거나 왕자인 압살롬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발언은 없다. 요압에 관해서는 두 장수를 죽인 죄값을 치르게 하라는 말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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