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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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田(よしだ 松陰(しょういん
(1830년 8월 4일~1859년 10월 27일, 향년 29세[1])

1. 개요
2. 생애
2.1. 최후
3. 사상
4. 과대평가설
5. 가상 작품에서
6. 기타
7. 참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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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가몬

일본 조슈 번(현 야마구치현)의 에도 시대에는 인구 3만 명 정도의 하기 출신의 무사, 사상가, 교육자. '쇼인'은 그의 호이고, 본명(諱)은 '노리가타'(矩方, 구방). 통칭은 '토라지로'(寅次郎).

그의 가르침을 받은 조슈 번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일본 우익 진영 일각에서[2] 사상적 지주로 삼는 경우가 많은 인물이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20대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 점과 정한론[3] 훗날 일본 군국주의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주장도 한 점 때문에 오늘날 와선 과대평가, 미화되었다는 부정적인 평도 존재한다.


2. 생애[편집]


살림지식총서 - 《요시다 쇼인: 일본 민족주의의 원형》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야마가류 병학(兵學)[4]의 사범인 숙부(작은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그런데 양부는 그가 6세 때 죽어, 불과 여섯 살의 나이에 한 집안의 호주(戶主)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탓에 호적상으로만 양자로 하고, 원래 자랐던 부모님 집에서 자랐다. 그리고 이 시대가 그렇듯, 가독을 잇는 자는 집안 대대로 이어 온 직업을 계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장래는 병학 사범이 되는 숙명을 짊어지게 된다. 그래서 또 다른 숙부인 타마키 분노신에게서 스파르타식으로 병학을 배웠다.

전해져 오는 에피소드로 타마키 숙부와 《논어》를 읽던 중에 날파리인지 모기가 얼굴에 달라붙어서, 어린 쇼인이 이를 쫓으려고 손을 휘두르자, 타마키 분노신은 화를 벌컥내며,

"너는 공(公)을 위해 일해야 할 몸인데, 어찌하여 겨우 사(私)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거냐?"

며 심하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12세 때는 조슈 번[5] 13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 앞에서 강의(프레젠테이션)를 하고 칭찬을 받았다.[6] 19세 때부터 사무라이 자제들을 위한 공립 교육기관인 번교 명륜관(明倫館)에서 병학의 정식 사범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편 이즈음 동아시아는 서양 열강 세력의 침략으로 급변하던 시기였는데, 아편 전쟁의 사정을 알고, 자신이 배웠던 구닥다리 병학으로는 서양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1850년(20세)부터 규슈(九州)와 일본 열도 전국을 떠돌면서 여러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세상 실정을 파악했다. 나가사키 데지마로 가서는 네덜란드 선박을 직접 올라가 살펴보기도 하고, 에도(江戶)에서는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을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염려하여 도호쿠 지방을 살펴보러 갈 때는, 번의 통행허가서[7]를 기다리지 못하고 탈번을 하기도 했다.

1853년(23세) 흑선내항 시기에는 사쿠마 쇼잔과 함께 우라가를 직접 찾아가서 미국의 크고 아름다운 증기선을 보고, 숙부 타마키에게

"이제 병학자는 불학무술(不學無術)의 왜인(倭人),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 아무 쓸모도 없고 입만 번지르하게 되었다."

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현재의 일본의 국력(에도 막부)으로는 서양 세력을 물리칠 힘이나 기술도 없다고 느끼며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스승 사쿠마 쇼잔의 권유도 있고 해서 미국 유학을 결심, 1854년 3월, 제자이자 친구인 카네코 시게노스케(金子重之助)(23세)와 미일화친조약을 위해 일본으로 다시 왔던 페리 제독의 흑선 선단 중에서 해안에 당도하지 않았던 기함 포하탄(USS Pawhatan)으로 훔친 나룻배로 찾아가 밀항을 부탁했지만, 페리 제독한테 거절당하고 쫓겨난 후, 시모다 부교소에 자수하고 조슈 번으로 압송되어 14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염색업을 하던 평민 출신이었던 카네코는 위생관리가 형편없던 서민 감옥에서 수감중에 병사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감방 동료들끼리 서로 자신의 잘 아는 분야를 가르치고 배웠다고 하고, 여기서 여자 죄인인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도 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8]

1855년 12월, 감옥에서 풀려나 집에서 근신하라는 처분을 받고, 하기의 고향집으로 돌아와 유배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요시다 쇼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학생들을 위해 유배의 신분이라 정식으로 학원을 차릴 수는 없었고 (막부의 법을 위반하는) 불법 과외 같은 일대일 개인 지도를 시작하게 된다. 차차 모여드는 학생들이 많아져서 1857년 정식으로 쇼카손주쿠[9]의 숙장으로 약 2년간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선으로 치면 마을의 작은 서당훈장으로, 처음에는 2평도 안되는 자신이 거처하는 단칸방에서 찾아오는 학생들을 1대 1로 가르쳤다. 나중에 현재 남아있는 큰 교실을 지어 옮겼다. 조슈 번에게 정식으로 인정받고 숙장으로 가르친 기간은 단 5개월뿐이었다.

수업 스타일은 기본적으로는 한문암기였다. 기승전암기 수제자였던 타카스기 신사쿠는 《고사기》, 《일본서기》를 통째로 외웠다. 그러나 주입식 교육만이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 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토론하는 세미나가 자주 열렸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요시다 쇼인보다 서너 살부터 10세 차이였고 나이많은 선생과 어린 학생 사이라기 보다는 선배와 후배 비슷한 관계라 툭 하면 격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1858년, 고메이 덴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게다가 일본에게는 불리한 불평등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에도 막부에 대한 분노로, 에도 막부의 고위 관료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츠를 납치해서 덴노에게 양이를 맹세하라고 건의하고 그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암살할 계획을 세웠고 제자들 전원이 만류했다.

명나라의 명장이자 유학자인 왕양명이 일으킨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쇼인은 실천을 중시했는데, '대의를 위해 나를 희생해서 죽을 수 있느냐, 아니면 일단은 목숨은 소중하니까 죽을 필요는 없고 지금은 참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천천히 개선해도 되지 않느냐' 라는 토론에서

"죽어서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면 언제 죽어도 좋다. 살아서 대업을 이루고 싶다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 행동을 일으키면 그 뜻(志)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진다."

라며 실행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타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패거리는 양이 사상에 따라 주일영국공사관 방화사건(1862년)이라는 테러를 저질렀다.


2.1. 최후[편집]


1858년부터 에도 막부에서 난키 파에 속하는 최고 권력자였던 대로(大老,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는 (히토츠바시 파 뿐만이 아닌) 막부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안세이의 대옥사였다. 쇼인이 에도 막부를 비판하고 도막 운동을 전개하자, 번은 위험하다고 여기고, 그를 다시 노야마 감옥에 투옥시켰다.

1859년, 존왕양이파 지사였던 우메다 운빈이 막부에 의해 체포되자, 요시다 쇼인은 그가 하기에 있을 때 만났다는 죄로 에도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평정소(評定所)에서 막부가 쇼인에게 심문한 것은 우메다 운빈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쇼인은 갑자기 묻지도 않은 막부의 고관인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쓰를 암살 계획을 고백해버렸다. 결국 사형 판결을 받고 그해 10월 27일 참수되었다. 안세이 대옥의 마지막 처형이었다.

시체는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으나, 후에 격분한 제자들이 막부로부터 시체를 빼앗고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 존왕양이를 위해서라면 직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행동파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ㆍ야마토(일본)혼}

를 외쳤다고 하는데, 그가 옥중생활에서 남긴 와카(和歌),

"かくすれば かくなるものと 知りながら やむにやまれぬ 大和魂"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멈추려야 멈출 수 없는 야마토다마시이)


'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애국심'

쯤으로 의역할 수 있다.

유명한 제자로 타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가 있는데 이들은 조슈 유신지사 그룹의 중심이었다. 한편 기도 다카요시는 요시다 쇼인과는 제자라기보다는 3세 차이의 후배 내지 동생 정도되는 나이였다. 타카스기 신사쿠와 쿠사카 겐즈이는 유신 이전에 사망했지만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여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유신삼걸로 불렸다. 또한 송하촌숙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존황양이 지사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가장 나이차가 큰 이토 히로부미와도 11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장수했다면 경술국치 이후까지도 살았을 수 있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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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현 하기의 송하촌숙. 정확한 수강생 명단은 남아있지 않지만 약 50명~100명의 문하생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으로 치면 구한말 개화파의 스승으로 불린 박규수가 자기 집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김홍집 등을 가르친 것과 비슷했다. 실제 박규수와 쇼인 둘을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시다 쇼인이 죽은 후에는 숙부 타마키 분노신이 이어받아서 운영했다. 이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등재 때 군함도와 같이 등재되었다. 한국 입장에서는 국권 침탈의 원흉들이 등장한 계기가 된 장소라는 점에서 불편했을 일인데, 정작 한국에서는 군함도가 부각되었던 반면 별 반응이 없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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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카손주쿠[11] 내부에 전시된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 사진들. 그의 제자들이 이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훗날 러일전쟁203고지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로 비판받은 노기 마레스케 장군 같은 경우는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다음에 송하촌숙에 적을 뒀는데, 같은 학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메이지 정부 관료가 된 선배들한테 이쁨 받고, 일개 병졸에서 장군까지 출세한 인물로 선배들을 잘 만난 케이스였다.


3. 사상[편집]


저서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孟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

는 즉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했다. 이는 막부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당시로서는 굉장히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보나파르트주의?

<일군만민론>에 따라 기존의 교육자들과 달리 교육대상에 신분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쇼카손주쿠에서 이토 히로부미 같은 출신이 낮은 사람들도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생각은 자칫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훌륭한 논리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과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는 선민의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초망굴기(草莽崛起, 민초들이여 일어나라)

-1859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맹자》의 영향을 받아 일반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 막부를 타도하자는 혁명 사상이다. 이것을 실행에 옮긴 수제자 타카스기 신사쿠는 일반 민중으로 구성된 민병대키헤이타이를 창설했다.

<존왕양이론>자였다. 무작정 서양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

이라는 제국주의 논리를 수긍하고, 서양 열강이 일본을 노리는 것은 서양 열강이 나빠서가 아니라 일본이 약하기 때문이고, 일본은 서양의 기술과 문물을 배워(부국강병) 국력을 길러 서양 열강과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서양 열강에게 빼앗긴 것은 조선 등 아시아의 약소국에서 되찾아 오면 된다(정한론)고 생각했다.


3.1. 정한론[편집]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선민의식과 자국 우월주의, 민족주의, ‘진구 황후가 조선을 정벌했다.’는 엉터리 이야기가 담긴 『고사기(古事記)』의 내용과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에 빠져서 주변국가를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에조(蝦夷=홋카이도)를 개척하여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고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으며, 유구(琉球=오키나와)에 말하여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하여 옛날처럼 조공을 하게 만들며[13]

북으로는 만주(満州)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유수록》 (요시다 쇼인 저, 1854) 16쪽


한국에서는 <정한론>의 선구자로 유명하다. 다만 그 실상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아이자와 야스시의 신론(新論)같은 이 시절 일본에 퍼진 민족주의 침략사상에 동조한 것으로, 그가 남긴 기록에서 몇 줄이기는 하나

国力を養い、取り易き朝鮮、満洲、支那を切りしたがえ、交易にて魯墨に失うところは、また土地にて鮮満に償うべし - <獄是帳>

"국력을 키워, 뺏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복종시키고, 교역에서 러시아, 미국에게 잃은 것은, 다시 토지로서 조선과 만주로부터 이를 충당해야 한다."[14]

즉, 일본의 국력을 키워 서양한테 당한 것을 만주, 중국, 조선에게서 되찾아 오자는 주장이었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 다만, 경술국치와 같은 전면적인 식민지화같은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식민지화가 추진된 건 아무리 빨라도 청일전쟁 이후의 일이고, 최종적으로 결론이 난 건 그가 죽은 지 46년 후의 러일전쟁 이후이다. 애초에 메이지 유신도 보지 못하고 만 29세에 죽은 막말의 흔한 무사 교육자라, 제자들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가는 무사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에조지(지금의 홋카이도)를 개간하여 여러 대명들에게 봉토를 주고 틈을 봐서 캄차카, 오호츠크를 탈취하고 류큐도 타일러 내지內地의 제후와 마찬가지로 참근參勤시키고 회동會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고, 북으로는 만주의 땅을 분할하여 빼앗고, 남으로는 대만, 루손(지금의 필리핀)의 여러 섬을 우리 수중에 넣어 점차 진취의 기세를 보여야만 할 것이다.(『유수록』)

'홋카이도를 개척하자, 류큐를 일본령으로 하자, 조선의 속국화, 만주, 대만, 필리핀을 영유화하자'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 시절 일본은 다른 나라를 쳐들어갈 국력도 없었고, 서양 열강의 침략 위협에 혼란을 겪고 '내 코가 석 자'인 시기라 현실성은 없는 주장이었다.

‘조선, 만주에 진출할 때 다케시마(울릉도)는 첫 번째 발판이다.’

‘영국이 다케시마를 이미 점거했다면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언제 일본에 쳐들어올지 모른다. 조슈번은 다케시마와 조선을 급선무로 점령해야 한다.(1858년 6월 28일)’

다케시마는 겐로쿠(元祿, 1688~1704년) 시절 조선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변혁의 시기이므로 조선에게 ‘섬을 비워두면 무익하므로 우리가 개발해주겠다.’라고 교섭하면 그들도 납득할 것이다. 만약 서양세력이 다케시마를 점령하면 조슈번으로서는 대단히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1858년 7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여러 국가가 앞 다퉈 얻으려고 한다. ~ 만약 일본이 이곳을 손에 넣으면 분명히 큰 이익이 될 것이다. ~ 조선은 옛날에 일본에 속해 있지만 지금은 거들먹거리고 있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 吉田松陰, 「幽囚錄」

이 밖에도 오스트레일리아(호주)도 차지하고, 울릉도(당시 일본측이 부르던 이름은 다케시마)를 조선과 교섭을 해서 일본이 개간하자고 주장을 했다.


4. 과대평가설[편집]


아베 신조 前 내각총리대신은 야마구지현(조슈번) 출신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외무상과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자신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장례식에서도 쇼인의 글을 바탕으로 추모사를 낭독한 바 있다. 총리 재선에 성공한 직후인 2013년 8월 13일에는 쇼인의 묘지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참배하며 ‘쇼인 선생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2016년 말 국회에서 쇼인의 ‘이십일회맹사’이야기를 언급하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임하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도쿄의 헌정기념관에 걸린 역대 총리들의 좌우명이 걸려있는데 아베 신조의 좌우명은 쇼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지성’이다.(쇼인의 학생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좌우명도 이와 같았다.)

2010년대 들어서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익 진영 일각에서 그를 사상적 지주라고 치켜세우는 경우가 있다보니, 그에 따르는 반작용으로 요시다 쇼인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려는 관점도 제기되는 중이다.

당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끄는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차지했는데, 조슈 번의 라이벌이었던 사쓰마 번에는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에 비해 조슈 번이 내세울 만한 인물은 (과격한 양이운동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다들 요절했고,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의 정신적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었다. 불과 29세의 나이로 참수당한 동네 서당의 선생님이라 뭔가 이룩한 업적도 없는 인물이었다.[15]

이런데도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요시다 쇼인이 엄청 휼륭하고, 미래를 예측한 인물로 그려졌다. 요시다 쇼인은 조슈 번의 의도대로 타고난 천재이며 박학다식한 지식을 가진, 일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미래를 내다 본 선각자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에서 정권을 잡은 조슈 번 출신 세력은 이런 식으로 요시다 쇼인의 우상화 작업을 했다. 그 여파가 지금도 남아서 일본 우익 세력에서 요시다 쇼인 하면 위대한 위인이라는 이미지가 자리잡았다.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jpg
파일: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교과서에서 퇴출2.jpg
2017년경부터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실제 역사상 역할과 의미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지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는데,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확인이 필요한 부분.


5. 가상 작품에서[편집]


  • 은혼에서 그를 모티브로 한 인물로 쇼요 선생이 있다. 후학으로 실제 역사처럼 양이지사[16] 주역들을 양성했다....그러나 그의 정체는...(스포일러 주의)

  • 왕도의 개에서는 등장은 않지만 언급만 된다. 청일전쟁에 승리했으나 곧이어 삼국간섭으로 외교적 핀치에 몰리자, 때마침 병이 나서 저택에 칩거한 무쓰 무네미쓰가 죽음을 앞두고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복기하며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되뇌긴다.

  • 2015 NHK 대하드라마 <꽃 타오르다>에서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17]



6. 기타[편집]


요시다 쇼인과 타카스기 신사쿠가 살아있었으면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협력에 대한 나의 평가에 동의할 것이라 확신한다
고 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게다가
앙숙이었던 사쓰마(薩摩) 번과 조슈(長州) 번이 손잡고 메이지유신을 이뤄낸 것처럼, 한·일도 손잡으면 함께 동북아가 발전할 수 있다
라고 하기까지 했다#. 뜻이야 일본 국민들이 알기 쉽게 일본 역사에 비유한 것이라지만, 비유의 대상이 <정한론>자로 알려진 요시다 쇼인이라는 게 문제였다. 앞서의 논의에서 나온 것처럼, 문제의 아베 신조와 관련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넣었을 만한 이야기이다.

  • 영웅(2022) 중 넘버 '이토의 야망' 직전에 至誠(지성)이 언급된다. 설희가 至誠의 뜻을 묻자, 이토는 "지극 정성껏 행동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답한다. 이는 이토의 스승 요시다 쇼인의 좌우명이자 이토를 지탱케 해준 신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넘버에서 日本の大和魂(독음: 닛폰노 야마토다마시이)가 쓰인다.


7. 참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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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망 당시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위의 그림은 실제 생김새랑은 꽤 차이가 나는 그림으로 보인다.[2] 근대 이전 인물이라 딱히 좌우로 갈려서 평가받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베가 존경 드립치기 시작한 2010년대 이후부터 그런 기류가 강해진 측면도 있다.[3] 사실 조선 뿐만 아니라 홋카이도, 오키나와, 만주, 대만, 필리핀까지 먹자고 주장했다. 젊은 날의 혈기로 정복 전쟁에 미친 근대인?[4] 일반적인 군사학 뿐만 아니라, 무사도 같은 전인교육을 합친 내용[5] 조슈 번이 위치한 스오국, 나가토국 일대는 전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일본에서 문화적으로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수백년 동안 해당 지역을 다스렸던 오우치 가문은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을 자칭하며 일찍부터 선진문물을 적극 받아들이고 학문을 장려했으며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이 대부분 무(武)를 숭상했던 것과 달리 문•무를 모두 중요시했고 오히려 문치를 더욱 중요시하여 문관들을 무관들보다 우대하기도 했다. 조선과 꾸준히 교류를 시도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거의 200년에 걸쳐서 수백건의 기사가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내전(大內殿)이라고 언급된 세력이 바로 오우치 세력이다. 오우치씨가 멸망하고 모리 가문이 해당 지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그런 풍토는 상당히 남아있었고 더군다나 조슈 번은 일본의 다른 여러 제번들과 달리 사족(士族)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번이었다. 애당초 문화적으로 발달해 있었기도 했거니와 세키가하라 대전 이후 모리 가문이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감봉되고 영지가 스오, 나가토 2국으로 축소된 이후에도 기존 가신단이 그대로 잔류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당시 법도로 사족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상공업과 학술이 발달할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6] 강의한 내용은 《무교전서》라는 당시의 교범 중 하나였다고 한다.[7] 에도시대에는 특히 관서에서 관동으로 넘어갈 때, 관동에서 다른 지역으로 벗어날 때 굉장히 철저한 검문 및 통관 절차를 거쳐야 했다. 불온한 세력이 함부로 수도 에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참근교대 제도로 다이묘들의 가족들이 항시 에도에 머물게 되어 다이묘의 가족들이 에도를 벗어나서 통행하는 것을 엄격하게 차단했기 때문이다(특히, 높은 신분의 여성이 외부에서 관동 지역을, 또는 관동을 벗어나서 여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에도 막부의 통행허가서라든지 유력 다이묘가 발행한 통행허가서는 일종의 보증서 역할을 했다.[8] <감옥에서 핀 꽃>(獄に咲く花) (2010年 監督:石原興、松陰役:前田倫良)[9] 松下村塾, 송하촌숙. 원래는 숙부 타마키 분노신의 주쿠였다.[10] 군함도는 강제징용으로 한국인이 직접 피해를 입었던 장소지만, 송하촌숙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점도 있다.[11]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는 "마쓰시타 손주쿠"라고 잘못 표기했다.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한자가 같아 발음도 같을 것이라 생각한 듯.[12] 그래서 같은 조슈 번 출신의 오무라 마스지로가 서양 병법을 적절히 사용하며 도막하게 된다.[13] 조선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일본에 조공한 적이 없다. 신화적 존재로 생각되는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 고사를 철석같이 믿었거나,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오해했던 듯. 이는 역대 막부들이 통신사를 조공이라고 대내 선전한 탓이다. 사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무역하러 온 외국인은 몽땅 조공사절이요 우리 따까리다! 하던 게 보통이었다. 중국이나 조선이나 일본이나, 다같이 외국인=야만인=조공 논리를 펼쳤으니.[14] 직역. 제대로 된 해설과 번역 요청. 요시다 쇼인은 영국의 중국 침략인 아편 전쟁에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갖고, 당시 일본에 들어온 관련 서적을 모조리 읽으며 그 실상에 대해 조사했다. 아마도 요시다 쇼인이 말한 "만주, 중국, 조선의 땅으로 보상을 받자"는 말은, 영국이 홍콩을 차지한 것을 일본이 흉내내자는 뜻이라고 보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의견이다.[15] 사실 위의 행적에서 드러나듯이 체계적인 근대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인물이다. 물론 근대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사상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한 사상가라고 쳐주기에는 보여준 것도 없다. 대부분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고등 교육을 받고 스스로의 학문적 체계를 다진 후, 그 학문적 체계를 비판, 혹은 개선하고자 하면서 이론의 기반을 다져나갔다.[16] 여기서의 양이는 서양을 배척하는 게 아닌 천인이라는 외계인들을 배척하는 운동.[17] 대부분이 누군지 모르겠다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나타냈고, 결국 시청률 12.0%를 기록하며 역대 최저 시청률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