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치산

덤프버전 :

파일:중국 국장.svg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 펼치기 · 접기 ]
#FFF
||<-6><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ee1c25> {{{-2 {{{#ffff00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부주석(1949년-1954년)}}}}}} ||
|| [[주더]] || [[류사오치]] || [[쑹칭링]] || {{{#000000,#ddd 장란}}} || [[가오강]] || [[리지선]] ||
||<-6><bgcolor=#ee1c25> {{{-2 {{{#ffff00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1954년-현재)}}}}}} ||
||<width=16.6%><rowbgcolor=#ee1c25> {{{-2 {{{#ffff00 제1대}}}}}} ||<width=16.6%> {{{-2 {{{#ffff00 제2대}}}}}} ||<width=16.6%> {{{-2 {{{#ffff00 제3대}}}}}} ||<width=16.6%> {{{-2 {{{#ffff00 제4대}}}}}} ||<width=16.6%> {{{-2 {{{#ffff00 제5대}}}}}} ||<width=16.6%> {{{-2 {{{#ffff00 제6대}}}}}} ||
||<|2> [[주더]] || [[쑹칭링]] ||<|2> {{{#000000,#ddd 우란푸}}} ||<|2> {{{#000000,#ddd 왕전}}} ||<|2> {{{#000000,#ddd 룽이런}}} ||<|2> [[후진타오]] ||
|| [[둥비우]] ||
|| {{{-2 {{{#ffff00 제7대}}}}}} ||<rowbgcolor=#ee1c25> {{{-2 {{{#ffff00 제8대}}}}}} || {{{-2 {{{#ffff00 제9대}}}}}} || {{{-2 {{{#ffff00 제10대}}}}}} || {{{-2 {{{#ffff00 제11대}}}}}} || {{{-2 {{{#ffff00 }}}}}} ||
|| {{{#000000,#ddd 쩡칭훙}}} || [[시진핑]] || {{{#000000,#ddd 리위안차오}}} || [[왕치산]] || [[한정(중국 정치인)|한정]]  ||
||<-6><colbgcolor=#ee1c25> {{{#ffff00 {{{-2 [[틀:역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ffff00 주석}}}]]}}}}}} ||




왕치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중화인민공화국 제10대 부주석
왕치산
(Wáng((shān(왕기산) | Wang Qishan

파일:왕치산_F201211191328593031018373.jpg}}}
국적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출생
1948년 7월 1일 (75세)
중화민국 산둥성 칭다오시
학력
시베이대학 역사학과 학사
종교
무종교 (무신론)
정당


재임기간
제10대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2018년 3월 17일 ~ 2023년 3월 10일
주요 이력
하이난 성 당 위원회 서기
베이징 시 시장
중국건설은행 행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1. 개요
2. 출생과 초기 경력
3. 중앙기율위 서기 취임과 반부패 수사
4. 국가부주석 취임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정치인. 중국의 제10대 부주석이다. 전 상무부총리 야오이린의 사위로서 태자당(?)[1][2] 으로 분류되나, 주룽지, 원자바오[3]와 가까워 계파색은 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앙기율위 서기를 맡아 시진핑의 정적 숙청을 주도하여 실세로 등극했으나, 퇴임 후에는 국가부주석으로 이동하며 실무에서 손을 떼고 류허, 리창, 천민얼습가군이 부상하며 권력 중심에서는 다소 멀어진 상황이다.


2. 출생과 초기 경력[편집]


중화민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태어났다. 본적산서성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 당시 대부분 고등학생이 그렇듯이 고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삽질을 했다. 1973년에 시베이대학에 들어갔고, 여기서 역사를 전공했다. 졸업 2년 후 당시 유배중이었던 경제관료 야오이린(姚依林, 1917-94)의 야오밍산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주된 연구 분야는 청말과 민국초였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야오이린이 유배에서 풀려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로 영전하면서, 82년 왕치산도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 채용되어 공무원 생활을 한다. 심지어는 공산당원도 아니었던지라 다른 고위간부들은 스무살 무렵에 시작하는 당원생활을 만 34세였던 83년에 시작하게 된다(...).[4] 때문에 정치적 계파는 혼맥을 통해 편입된 범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모양빠지게도 낙하산으로 장인의 직장에 채용되고 늦깍이 공산당원 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이 때부터 가는 곳마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고속출세를 했다.

1988년부터 농촌신탁투자공사 사장, 건설은행 부행장 등 금융계통에서 요직을 맡아 일했고, 93년에는 나중에 총리를 역임하는 주룽지 부총리 겸 인민은행장 밑에서 부행장직을 거친 뒤 97년까지 건설은행 행장을 맡았다. 금융계통에서 일할 때 단호한 개혁파, 시장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다. 고도성장기에 적극적으로 외자를 유치하며 서구 경제계 인사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고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주룽지 부총리가 고른 구원투수로서 광둥성의 금융담당으로 부임한 뒤, 부실기업을 선제적으로 과감히 청산하고 아시아 각국의 금융위기가 중국에 옮겨붙지 못하게 해 광둥성 부성장으로 승진하고 1998년 5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000년부터 총리가 된 주룽지가 그를 다시 불러들여 국무원에서 경제체제개혁 판공실 주임으로 일하게 되고, 2002년 11월, 1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장관급)으로 승진했으나 장관급 중에서는 한직인 변방 하이난 성 당서기를 맡아 이후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사실 그를 각별히 신임했던 주룽지는 그를 인민은행 행장으로 밀었으나 장쩌민이 반대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운이 따라줬는지 바로 기회가 찾아오는데, 부임 5개월 만에 SARS 대응에 실패하여 경질된 전임 멍쉐농[5]대신 베이징시 시장을 맡게 된 것이다. 이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베이징 시장 자리에서 SARS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시민들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의 초석을 놓아 '소방수'라는 별명을 얻는다.

3. 중앙기율위 서기 취임과 반부패 수사[편집]


2007년 10월,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국무원 부총리에 선출되어 원자바오리커창을 보좌하게 되면서 중국공산당 중심부에 진입하였다. 경제와 행정 영역에서 고루 성과를 내며 당 내외에서 능력을 널리 인정받았던지라 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은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처음에는 주로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왔던 만큼 경제부총리 격의 상무부총리 직을 맡고 현재의 류허와 비슷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당대회 이후 예상을 깨고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6]를 맡게 되었다. 이후 서술할 행보를 고려하면 사정정국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던 셈.

기율검사위 서기를 맡는 동안 저우융캉, 링지화, 구쥔산, 쉬차이허우 등 시진핑의 정적이었던 '호랑이' 고위 관료들을 줄줄이 처벌하면서 시진핑 1인 체제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덩샤오핑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당내 권력투쟁의 불문율을 깨고, 직전 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융캉의 당적을 박탈하고 수감시킨 이례적인 사건으로 왕치산은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이런 사정의 칼날은 군부에까지 미쳐 장쩌민이 심어놓고 군부 영향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던 직전 부주석 쉬차이허우, 궈보슝 둘 모두를 처벌하고 당적을 박탈해 시진핑의 군부 장악에도 큰 역할을 했다. 시진핑 1기 기율검사위를 통한 반부패 드라이브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석과 총리의 성을 따 정권을 "시-리 체제"로 부르는 전통적 호칭 대신, 시-왕 체제라는 말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2017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직에서 물러났으나, 공식적으로는 아무 직함이 없는 야인임에도 상무위원 7인에 이은 당서열 8위로 호명되었다. 외부 분석가들은 당시 중앙군사위 부주석 판창룽의 경례를 받고 경제분야를 총괄하게 된 류허와 긴밀하게 대화하는 등 여전한 힘을 과시하는 왕치산을 보고 어떤 식으로든 돌아올 것임을 확신하였는데, 2018년 3월 결국 국가부주석에 임명되며 예상이 맞음을 증명하였다. 왕치산은 69세로 이미 은퇴연령을 넘어 통상적으로는 모든 공직을 내놓고 은퇴해야 했으나, 1인체제 확립의 최고 공신에 대한 포상의 필요성,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혀 정치적 보호막이 필요했던 왕치산의 입장, 다음 당대회에서 은퇴연령에 도달하지만 은퇴할 생각이 없는 시진핑의 입장이 맞물려 공직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4. 국가부주석 취임 이후[편집]


현재 중국공산당 내에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다음으로 서열 8위이다. 중국 정치체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주석 자리가 외견상으로는 시진핑 다음의 2인자처럼 보일수 있지만, 총서기로서의 당권과 중앙군사위 주석으로서의 군권이 뒷받침되지 않은 국가주석 직위는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국가원수일 뿐[7]인 것처럼, 국가부주석 역시 마찬가지인데다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7인에는 포함되지 않아서 직함에 비해서는 권력이 약하다. 멕시코 방문에서 "나는 시진핑 주석을 도와 약간의 의전성 외교를 하고 있다"라고 스스로 언급했을 정도.

그래도 시진핑의 최측근인 만큼 취임 초기에는 외교 분야에서 실권을 휘두를 거라는 예측도 있었으나, 판빙빙에게 성상납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측근이 조사를 받는 등 본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면서 시진핑 2기 들어와서는 공식석상에 등장하는 빈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1기 시절 반부패 드라이브를 주도하며 높아진 위상 때문에 시진핑의 견제를 받는다는 시각도 있는 상황.

전인대에서도 왕치산의 직함이 유임되면서 시진핑의 사실상의 1인 독재가 확립되도록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번 전인대는 시진핑이 2012년부터 보유하고 있는 중국공산당 총서기, 중국 국가주석, 그리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3대 최고권력직을 다시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석직의 임기를 폐지하여 사실상 마오쩌둥 시절의 1인 지도체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2년 5월윤석열 당선인의 20대 대통령 취임식의 중국대표 사절로써 방한하였다. 중국이 부주석급 고위인사를 보냈다는 것은 중국이 진심으로 한중관계를 더 좋게하고 싶은 의도라는 분석이 있다. 이렇게 방한한 왕치산은 중국과 한국의 우호를 강조하며 유화제스쳐를 내놓으면서 시진핑이 윤 대통령과의 회담을 원한다며 중국에 먼저 초청하며 방중권유를 하였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측은 사의를 표해 거절하면서 역으로 시진핑의 방한을 권장하는 대응을 하였다.[8]
파일:한중만남.gif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왕치산 부주석과 만날 때 고개를 제대로 숙이는 모습을 보이면서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시진핑 앞에서도 숙이지 말아야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사람이 고작 서열 8위 수준의 부주석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는건 문제가 될만한 외교적 처사다.

2022년 10월 22일 20차 당대회에서 어느 명단에도 들지 못하면서 은퇴하게 되었다. 왕치산은 당대회 시점에서 만 74세로 퇴임 예정인 72세의 리잔수보다도 2살이 많으니 은퇴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상무위원 잔류와 부주석 임명을 두고 온갖 분석과 추측이 난무하여 사실상 주인공 행세를 했던 5년 전 당대회를 생각하면 당 원로로서의 영향력조차도 아예 증발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판이페이 인민은행 부행장, 톈후이위 자오상은행장 등 왕치산의 금융계 시절 측근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으면서 본인도 수사선상에 올랐다는 추측까지 나오는 상황. 만약 그렇게 된다면 토사구팽의 모범적 사례로 봐도 될 것이다.

5. 여담[편집]


  • 덩샤오핑의 집권기인 1980년대 이래 중국은 '7상8하', 즉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에서 67세까지는 현역이지만 68세부터 물러나는 것을 관례로 하여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도록 해왔다. 이에 따르면 당초 왕치산 정도의 나이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어야 했겠지만, 시진핑의 지지로 인해 오히려 부주석으로 옮겨가면서 공직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 점에서 그의 부주석직 임명은 7상8하 원칙이 사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 외국 물정에도 밝고 개혁개방 과정에 참여해 서구에서 당내 개혁파 인사로 평가받아왔으며, 그 중국에서 정치인의 비리에 대한 폭로성 보도(!)를 자주 하는 차이신의 편집장, '중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 후수리를 후원하는 등 대담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부패운동은 장쩌민-후진타오 시절 득세했던 기술관료 세력에 대한 태자당의 견제일 뿐이며[9] 시진핑의 정적 숙청의 일환일 뿐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후 중국에서 시진핑의 1인체제만 강화되고 유의미한 정치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봤을 때 아무래도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할 수밖에 없는 상황.

  • 최고지도부 출신 장인을 두고 태자당으로 분류되는 인사지만 정작 본인은 자녀가 없다. 기율위 서기 자리에서 사정정국을 주도할 수 있던 건 본인은 몰라도 이후 자녀의 앞길을 생각해서라도 적을 만들지 않으려 하는[11] 다른 관료들과는 달리 재산과 지위를 물러줄 자녀가 없어 후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본인도 위험한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중국에서는 4인방 숙청 이후 저우융캉을 빼면 최고지도부 출신 인사가 공식적으로 단죄된 사례가 없다.[12] 자오쯔양은 공식적 처벌 없이 행동을 감시당하는 선에서 끝났고, 저우융캉은 부패 등의 사소한(...) 죄가 아닌 정변시도 때문에 처벌당했다. 공산당 최고위 관료들은 그런 무리수만 안 두면 명절마다 후임 지도부의 문안인사를 받으며 편안한 말년을 보낸다. 다만 뒷방으로 밀려나지 않고 실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물론 별개의 문제이다.

  • 중국의 부동산 재벌 궈원구이 전 정취안홀딩스 회장이 "판빙빙에 대한 탈세 조사는 판빙빙으로부터 성 상납을 받은 왕치산 부주석이 입막음용으로 취한 조치"였으며 "두 사람의 성관계 동영상을 내가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소식을 대만의 자유시보가 보도했다. 하지만 권력핵심부에 건재한 왕치산에게 성상납을 했는데도 판빙빙이 이렇게 갑작스레 거액의 벌금을 무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더 설득력이 없다는 말도 나오기도 한다. 자유시보가 그 동영상을 보았다고 주장한 궈원구이는 미국에 망명한 중국인 망명객 재벌인데 이에 대해서 뉴욕타임즈에서는 그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는 투의 기사를 작성하였다.

  • 중국은 궈원구이를 인터폴 적색수배 명단에 올려놓고 부동산 사기 등의 혐의로 10조(...)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했다.




  • 2022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에 중국 특사로 파견되었다.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된 여왕을 조문을 하려고 했으나 웨스트민스터 홀 입장은 거부당했고, 하나의 중국으로 인해 특사를 파견하지 못한 대만은 켈리 셰 주 영국 타이베이 대표부장이 참여하여 웨스트민스터 홀의 입장이 허용되었다. [13]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19:50:11에 나무위키 왕치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정확하게는 태자당의 방계인, 데릴사위 그룹인 금거북족(金龜族)으로 통한다.[2] 한편으로 성장과정과 인맥을 고려하면 오히려 비공식 공청단이 아니냐는 설도 돈다.[3] 두 사람은 태자당이 아니라 상하이방과 공청단이다. 경제관료로서 계파를 넘나드는 배경을 갖고 있는 셈인데, 사실 계파 외에도 개인적 친분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중국 정치에서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4] 공산당 고위간부들 중에서는 시진핑처럼 업적을 남기는 대신 무난하게 임기를 보내고, 출신배경이나 운의 덕을 많이 본 인물도 적지 않다. 그에 비해 어딜 가나 빼어난 업적을 낸 왕치산의 출세가 경쟁자들에 비해 은근히 뒤쳐졌던 것은 시작 자체가 늦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리커창은 왕치산이 입당한 시기보다도 빨랐던 만 30살에 이미 차관급 공청단 서기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출발선부터 차이가 컸다. 물론 왕치산이 장쩌민이나 후진타오 등 계파 수장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으며 계파색이 옅었던 것도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5] 왕치산의 매형으로, 왕치산과는 반대로 중국 최악의 관운으로 유명하다(...) 부임 석 달만에 SARS 대응 실패의 책임을 지고 경질당한 뒤 한직에서 4년간 맴돌다 산시성 성장으로 부임하며 다시 기회를 잡았으나, 1년 만에 린펀 탄광 붕괴사고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아무튼 멍쉐농을 경질하면서 요직인 베이징 시장직을 집안사람 왕치산에게 넘겨준 건 야오이린 집안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있던 셈이다. 때문에 사실 시골동네 하이난 서기를 맡아 최고지도부 진입은 아무래도 어려울 가능성이 높았던 왕치산의 출세에는 능력과 운만큼이나 배경도 상당히 따라준 셈이다.[6]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나 당 징계위원회 위원장와 비슷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당정일치제로 기율검사위는 검찰과 법원 위에 군림하며 모든 당원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만큼 검찰총장, 대법원장, 감사원장을 합쳐놓은 수준의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장쩌민 시절부터 3개 대표론을 제창하며 자본가들의 입당도 받아들였는데, 따라서 당연히 기업가들도 기율위의 칼날을 피해갈 수가 없다. 마윈이 시진핑 눈 밖에 나서 가율위 조사를 받고 앤트그룹 상장을 포기한 것이 유명하다.[7] 심지어 국가주석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는 국가주석판공실은 당 중앙 판공실과 인적 구성이 동일해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구이다.[8] 현재 중국의 초청에 여러가지를 내포한다. 일단 윤석열 정부가 중국에 얼마나 친화적인가에 대한 테스트이기도 하다. 만약 수락을 한다면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윤 정부를 제2세계인 중국측에 어떻게 포섭해야 하는지로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외교관례상 지난번 문재인 정부가 2번이나 중국에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한 만큼 이번에는 중국측에서 방한으로 와야하는 차례인데 한국보고 또 오라고 하는 행동으로 보수성향 언론에서는 속국 새 왕 됐으니 와서 인사해라?라며 방중초청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9] 후수리도 왕치산처럼 혁명유공자 2세대인 훙얼다이, 태자당 출신이다. 든든한 뒷배가 있는 셈.[10] 하지만 사실 보시라이는 자신의 전성기에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금기사항인 문화대혁명 시절 이야기를 자꾸만 떠들고 다녀서 상하이방과 공청단 구별없이 찍혀 버린게 더 크다.(둘째로는 보시라이의 개인 사생활이 천박하고 더러웠던 거지만 사생활이 더러운 권력자는 워낙 많다. 사실 아버지 보이보의 사생활 자체도 더러웠다.) 입조심만 했어도 원래 공청단에서는 태자당 후계자로 시진핑보다 보시라이를 더 인정하는 분위기였기에 충분히 주석이 될 수 있었다.[11] 예를 들어 보이보는 후야오방 숙청을 주도했기 때문에 후야오방의 공청단파와 철천지원수 사이였고, 이 원한관계는 결국 아들 보시라이의 앞길을 막게[10] 된다. 후진타오가 시진핑과 각을 세우지 못하는 것도 지방 간부 생활을 하는 아들 후하이펑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12] 제도화된 것은 아니어도 관습적 면책특권이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정치국 상무위원에게 누군가한테 종속되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 당중앙의 방침조차 벗어나 막나가기 시작하면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결국 이 모순이 선을 넘어버린 저우융캉에 대해 당내 합의를 통해 관례를 깨고 처벌을 내리는 원인이 되었다.[13] 2021년 영국 의원들이 중국의 위구르족 집단수용과 강제교화 등을 강하게 비난하자 중국 당국은 즉시 하원의원 5명, 상원의원 2명 등이 포함된 영국인 9명에 입국 금지와 자산 동결의 제재를 내렸다. 이에 린지 호일 하원의장은 대사 등 중국 공무원의 의사당 출입을 1년 간 금지시키며 맞섰다. 금지령이 아직 안 풀리기도 했었만 호일 의장이 조문이란 명분에도 중국 외교단의 의사당 출입을 거듭 거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