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예(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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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101위 중수장후 여마동

102위 두연장후 왕예

103위 적천장후 양희


시호
장후(莊侯)[1]
작위
오방후(吳房侯)[2]
최종직위
낭중기(郞中騎)[3]

(王)
이름
(翳) 혹은 저(翥)
생몰 기간
? ~ 기원전 183년
1. 개요
2. 생애
3. 사후



1. 개요[편집]


초한쟁패기 당시 한나라 휘하의 무장. 항우를 마지막까지 추적하여, 항우 사후 그의 시체를 다섯 등분한 중 하나.


2. 생애[편집]


고제 2년인 기원전 205년[4], 하비(下邳)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郞中騎)로 고제를 따랐고, 한신에게 속했다.

기원전 202년, 한신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한 관영휘하에 소속되어,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를 마지막까지 뒤쫓는 군대에 있었다. 오강에서 항우와 만나 싸우는데, 항우가 옛 자기 사람인 기사마(騎司馬) 여마동을 만나자 여마동에게 덕을 베풀겠다고 자결하자 이 틈에 왕예가 항우의 머리를 취했다. 이후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양희·여마동·낭중 여승·양무가 나머지 시체를 나눠가졌고.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두연후(杜衍侯) 1700호에 봉해졌다.


3. 사후[편집]


재위 18년 만인 여후 5년(기원전 183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했고, 아들 공후 왕복(王福)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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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공통으로 받았다.[2] 남양군의 속현이다.[3] 관영 휘하에서 항우를 추적할 당시의 관직[4] 혹은 3년(기원전 2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