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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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崇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한, 서진의 인물이며 익주 광한군 사람으로 자는 유원(幼遠). 정사 삼국지에는 행적이 없고 화양국지에 그 행적이 전한다. 조부는 유언, 유장 시절에 관리를 했고 마초가 날래지만 어질지 못하다는 이유로 익주에 들이는 것을 반대한 왕상이며 부친은 촉한에서 파군태수를 지낸 왕팽, 형은 서진에서 재동태수를 지낸 왕화를 비롯해 왕진, 왕대 등이 있다.
촉한 당시엔 동관랑(東觀郎)[1] 의 직위에까지 올랐으며 촉한 멸망 이후 양주의 별가로 징벽[2] 되었으며 수재로 천거되어 상서랑으로 승진하였다. 서진에서 상용태수, 촉군태수가 되었다.
일찍이 유선을 평론하길 범상한 임금이라 했고 강유를 평론하길 모략이 종회에 조반(造反)하여 능히 미칠수 있어, 한을 복귀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했다. 강유는 위나라 사람들이 장량이라 일컫는 종회의 위에 이미 있었다고 했으며 당시 등애의 피폐한 병사 2만이 강유성에서 쏟아져 나올때 강유가 만약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으로 귀환해, 직접 군대를 통솔해 고립된 등애의 군사를 통렬하게 쳐부수었다면 재차 나아가 종회를 막았을것이며 촉한의 존망을 여전히 몹시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후주 유선의 태자 유선은 강유, 종회의 난에 목숨을 잃었다. 차남인 유요(劉瑤)를 놔두고 6남인 유순(劉恂)을 후계자로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촉한의 구신 문립이 이를 지적했으나 유선 사후 안락공은 유순이 물려받게 되었다. 유순은 도의를 잃은 행동을 자주 하였으므로 상용태수 왕숭, 부릉태수 장인(張寅)과 더불어 진간하고 문립과 함께 염려하는 말을 했다.
왕숭은 촉한의 명신 수량, 이밀, 진수, 이양, 두열과 함께 경도 낙양에 같이 들어갔다. 나중에 이들간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왕숭만은 성정이 너그럽고 후하며 온화하고 순해 나머지 다섯명과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촉서를 저술했고 시와 부 수십 편이 있었으며, 진수의 책과는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그의 촉서가 후세에 남아 있었다면 진수와는 다른 관점을 가진 촉한 출신 역사가의 촉한사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가 촉한의 사관 출신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아쉬운 일.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한, 서진의 인물이며 익주 광한군 사람으로 자는 유원(幼遠). 정사 삼국지에는 행적이 없고 화양국지에 그 행적이 전한다. 조부는 유언, 유장 시절에 관리를 했고 마초가 날래지만 어질지 못하다는 이유로 익주에 들이는 것을 반대한 왕상이며 부친은 촉한에서 파군태수를 지낸 왕팽, 형은 서진에서 재동태수를 지낸 왕화를 비롯해 왕진, 왕대 등이 있다.
촉한 당시엔 동관랑(東觀郎)[1] 의 직위에까지 올랐으며 촉한 멸망 이후 양주의 별가로 징벽[2] 되었으며 수재로 천거되어 상서랑으로 승진하였다. 서진에서 상용태수, 촉군태수가 되었다.
일찍이 유선을 평론하길 범상한 임금이라 했고 강유를 평론하길 모략이 종회에 조반(造反)하여 능히 미칠수 있어, 한을 복귀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했다. 강유는 위나라 사람들이 장량이라 일컫는 종회의 위에 이미 있었다고 했으며 당시 등애의 피폐한 병사 2만이 강유성에서 쏟아져 나올때 강유가 만약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으로 귀환해, 직접 군대를 통솔해 고립된 등애의 군사를 통렬하게 쳐부수었다면 재차 나아가 종회를 막았을것이며 촉한의 존망을 여전히 몹시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후주 유선의 태자 유선은 강유, 종회의 난에 목숨을 잃었다. 차남인 유요(劉瑤)를 놔두고 6남인 유순(劉恂)을 후계자로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촉한의 구신 문립이 이를 지적했으나 유선 사후 안락공은 유순이 물려받게 되었다. 유순은 도의를 잃은 행동을 자주 하였으므로 상용태수 왕숭, 부릉태수 장인(張寅)과 더불어 진간하고 문립과 함께 염려하는 말을 했다.
왕숭은 촉한의 명신 수량, 이밀, 진수, 이양, 두열과 함께 경도 낙양에 같이 들어갔다. 나중에 이들간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왕숭만은 성정이 너그럽고 후하며 온화하고 순해 나머지 다섯명과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촉서를 저술했고 시와 부 수십 편이 있었으며, 진수의 책과는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그의 촉서가 후세에 남아 있었다면 진수와는 다른 관점을 가진 촉한 출신 역사가의 촉한사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가 촉한의 사관 출신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아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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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관은 후한(後漢) 때 모든 서적을 모아 두던 곳. 이름난 선비들을 여기에 모아 저술토록 했기에 학자들이 이 동관을 노씨 장서실(老氏藏書室, 노자의 장서각)이나 도가 봉래산(道家蓬萊山)에 비유하였음.<후한서後漢書> 한 마디로 사관들이 모인 관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한대엔 이곳의 저술을 모아 동관한기가 저술되기도 하였다.[2] 徵辟, 임금이 초야에 있는 사람을 예(禮)를 갖추어 불러서 벼슬을 시킨다.[3] 爪牙,용맹한 장수다.[4] 강유는 유선이 성도를 굳게 수비하려 한다고 듣거나 혹 동쪽으로 오(吳)로 들어가려 한다고 듣거나 혹 남쪽으로 건녕(建寧)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으니 무엇이 정확한 소식인지 몰라 동광한군 처현(郪縣)의 도로를 거쳤다. 그리고 처현에서 유선의 항복명령을 받는데 이곳은 성도, 면죽과 낙성에 가까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