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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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한민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 이하.
[b]: 대한민국 기준으로 중학교 3학년 이하.
[c]: 대한민국 기준으로 고등학교 3학년 이하.
[d]: 대한민국 기준으로 20세(세는 나이)에 대학에 진학한 대학교 4학년생 이하 혹은 그 나이에 맞는 고졸 선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WBSC가 직접 주관하지 않지만 대회 운영에는 참여.





올림픽 야구
Baseball at the Summer Olympics


파일:2020 도쿄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_원형.svg

스포츠 정보
시범 종목 채택
1904년
정식 종목 채택
1992년
참가 자격
IOC에 등록된 대표팀 중 개최국
지역 예선을 통과한 5개국
최근 금메달 획득국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2020)
최다 금메달 획득국
파일:WBSC 쿠바 국기.png 쿠바 (3회)

1. 개요
2. 역사
2.1. 초창기
2.2. 정식 종목으로의 승격
2.3. IOC와 MLB 사무국과의 갈등
2.4. 2008년 퇴출 이후
3. 위상과 수준
3.2. 일본의 집념
4. 특징
4.1.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 사이
4.2. 소프트볼과의 관계
5. 대회 연혁
6. 역대 우승국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올림픽의 종목 중 야구 종목에 관한 문서.


2. 역사[편집]


올림픽에 참가한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으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시기는 짧은 편으로 1984 LA 올림픽 이전까지는 뜨문뜨문 야구 경기가 펼쳐졌다.


2.1. 초창기[편집]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당시 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앨버트 스폴딩[1]메이저리그 출신 사업가로, 투포환, 단거리 달리기 등과 함께 시범경기로 채택되는데 힘을 썼다.

Baseball at the Summer Olympics had its unofficial debut at the 1904 Summer Games, and it had a long history as an exhibition.demonstration sport in the Olympics.

하계 올림픽에서의 야구는 1904년 하계 올림픽에서 비공식적인 데뷔를 했으며, 올림픽에서 친선/시범 스포츠로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Historical Dictionary of Baseball 254p

하지만 이때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어떤 팀끼리의 맞대결이 펼쳐졌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후 올림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2 스톡홀름 올림픽 때로, 아이슬란드의 전통 레슬링인 글리마(Glima)와 함께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서였다. 미국 대표팀과 스웨덴 대표팀간의 맞대결이 펼쳐졌으나 제대로된 선수단을 꾸리지 않은 두팀은 마이너리거 짐 소프[2] 등을 포함시킨 미국이 13-3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를 거둔다.

이후 한동안 올림픽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야구는 야구의 세계화를 외치던 레슬리 만(Leslie Mann)[3]의 적극적인 로비로 인해 1936 베를린 올림픽에 다시금 참가하게 되었다. 레슬리 만은 일본미국간의 매치업을 구상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미국 대표팀 선발전을 개최해 21명의 대표팀 선수를 선발하고, 일본 야구계에도 접촉했으나 결국 미국 이외에는 그 어떤 국가에서도 야구 대표팀을 내보내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미국 대표팀을 청백팀으로 나누어 7이닝 야간 경기를 치렀다.[4] 아이러니 하게도 경기가 열린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을 찾은 독일인은 무려 90,000명이 들어차 유럽에는 생소한 야구라는 종목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40 도쿄 올림픽에서 본격적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예정이었고 이때는 미국과 일본뿐 아니라 중국, 필리핀, 하와이, 영국, 쿠바, 멕시코, 독일이 참가하는 올림픽 토너먼트가 구상되었다. 1944 런던 올림픽 때까지 9개국이 참가하는 토너먼트로 진행한 후 1948 올림픽 때 정식 종목으로 도입시키려고 한 것이 당시 미국 야구계의 플랜이었다. 이를 위해 레슬리 만은 국제야구연맹(IBF)를 1938년에 창설하며 이를 실현화 시키려 했다. 하지만 온 세계를 뒤엎는 화마는 올림픽 개최를 무산시키기에 이르렀고 이후 야구의 올림픽 도전 의지는 점차 시들어져 갔다.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 다시 시범종목으로 개최되었지만 이때는 정식 야구가 아닌 페새팔로(Pesäpallo)라는 핀란드식 야구가 개최되었으며 그나마도 핀란드 팀간의 친선경기만이 열렸다. 이후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호주와 미국간의 친선 경기[5], 1964 도쿄 올림픽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친선 경기가 열렸으나 모두 단 1경기만을 치른 시범 종목에 불과했다.


2.2. 정식 종목으로의 승격[편집]


이렇듯 단판 친선 경기만이 개최되던 야구가 본격적으로 토너먼트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시작이었다. 1980년 1월, 국제야구연맹일본야구협회의 제안에 따라 미국올림픽집행위원회에 야구 종목을 신청했고, 1981년 11월 6일에 공식적으로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미국 야구계의 숙원중 하나이자, 앨버트 스폴딩, 레슬리 만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으나 정작 결승에서 일본에게 우승컵을 내주며 자존심을 구겼다. 하지만 다저 스타디움에서 열린 야구 경기는 평균관중 4만명을 기록하며 호평을 받았고[6] 첫 단추가 성공적으로 꿰여진 야구는 1988 서울 올림픽에서도 시범경기로써 자리 잡았으며[7]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정식종목으로 승격, 당당히 올림픽의 한 자리를 꿰찬 종목이 되었다.
파일:2008 베이징 올림픽 우승 포토타임.png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 대표팀

이후 1996 애틀란타 올림픽,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까지 정규 종목으로 선정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996년 올림픽 이후 올림픽 야구에서 알루미늄 배트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2.3. IOC와 MLB 사무국과의 갈등[편집]


그러나 IOC메이저리그의 적극적이지 못한 모습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이전부터 이런 갈등은 조금씩 보여왔었는데 비록 대부분의 선수는 연령제한이 있지만 와일드카드 제도로 스타급 베테랑 선수들도 참가할 수 있는 축구드림팀으로 대표되는 농구와 달리 한국일본, 대만 이상 3개국만이 프로선수들을 참가시키며 관심도가 타 종목에 비해 떨어지는 것에 IOC가 불만을 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메이저리그라는 막강한 시장을 가진 미국이 올림픽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중계권료를 벌어들이지 못하는 것이 IOC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따라서 올림픽 퇴출 논란은 언젠가는 터질 화약과 같았고 미국은 이를 대비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라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국제대회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 두 단체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된 것이 바로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개최된 2007 IOC 싱가포르 총회였다. 여기서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메이저리거들이 참가 안하면 정식 종목 그딴 거 없어!"라는 엄포를 놓았고, 이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을 이끄는 수장 버드 셀릭은 "올림픽 때문에 시즌 중단은 안해 ㅅㄱ."라며 맞받아쳤다.


2.4. 2008년 퇴출 이후[편집]


그리고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IBAF와 일본 야구계의 주도로 올림픽 복귀를 꾸준히 두드렸으나 불발되었고 IOC에서 개최국에게 선택권을 준 올림픽 어젠다 2020을 도입한 2020 도쿄 올림픽에 들어서야 개최국 일본의 선택으로 올림픽에 13년만에 복귀하게 되었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올림픽 어젠다 제도로 인한 일회성 복귀에 일본이 올림픽 야구 금메달에 대한 의지가 컸기 때문이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역시 채택되지 못했다.

2023년 10월 14일,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조직 위원회가 제안한 야구/소프트볼을 포함해 크리켓, 플래그 풋볼, 라크로스, 스쿼시 5개를 IOC가 정식종목으로 승인하면서 2020 도쿄 올림픽 이후 7년만에 복귀하게 되었다.기사

3. 위상과 수준[편집]


기존 야구 국제대회로 세계야구선수권대회라고 불리던 야구 월드컵이 있었으나, 올림픽이라는 대회 자체의 무게감이 워낙 차원이 다르다보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런칭 전까지는 야구 국제대회 가운데 위상이 가장 높았다. 다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40인 로스터에 포함된 선수는 출전이 불가능하다는 난점이 잔존했고, 이로 인해 2006년 1회 WBC의 개최와 함께 최고 위상의 자리는 내려놓게 되었다.

대부분의 국제 대회를 중요시 여기는 대한민국, 일본, 대만의 경우 WBC 이전까지 올림픽을 최우선 순위 대회로 여겼으며, 단적으로 1998년 아시안 게임, 2000 시드니 올림픽부터 프로 선수의 대회 참가가 결정나자 곧바로 대표팀에 프로급 선수들을 차출하기 시작한 것도 대한민국과 일본이었다.[8] 또한 아마추어 대회 최강국이던 쿠바 역시나 올림픽을 중요시했는데, 이는 쿠바가 MLB 40인 로스터 선수 출전 제한이라는 규정과 사실상 무관했기 때문에 대표팀의 전력을 100%로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메이저리거가 다수 존재하는 미국이나 도미니카 공화국 등은 40인 로스터 규정에 따라 MLB에서 뛰는 선수들은 참여 자체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아직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지 않은 마이너리그 유망주나 대학교 소속 선수들로 대표팀을 꾸려 출전한다. 따라서 야구계에서 이 두 나라가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올림픽 대표팀의 무게감은 낮은 편. 그럼에도 마이너 리그에서 날고 기는 유망주들이 상당수 포함된 대표팀인 만큼 결코 얕볼 수 없는 전력을 지녔으며, 단적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미국 대표팀은 벤 시츠, 로이 오스왈트, 덕 민케이비치 등 나중에 빅 리그에서 족적을 남기게 되는 유망주들을 대거 차출해 금메달을 거머쥔 바 있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마이너 리그 유망주들은 물론 현재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지 않은 전직 메이저 리거들도 다수 차출되었다.

아마추어 선수들만 참가가 가능했던 1996 애틀란타 올림픽까지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서 대한민국은 프로 입단이 가능한 연령대의 아마추어 선수들을 강제로 실업 야구에 합류시켜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한채 대회를 참가토록 했으며 일본사회인 야구 선수들 중 베스트 멤버를 선별해 참가시켰다. 쿠바는 야구 월드컵 뿐 아니라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우승 횟수를 자랑하며 아마추어 야구 강국이라는 이름을 공고히 했을 정도.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프로 선수 참가가 가능하게 된 2000 시드니 올림픽부터는 양국의 프로 선수들이 대거 참여해 메달 경쟁을 펼쳤고 2004 아테네 올림픽 예선이던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9]2008 베이징 올림픽[10]에서는 메이저리거를 제외한 리그 최정예가 총 출동하기도 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WBSC 프리미어 12가 창설된 이후에도 예전 만큼 압도적인 위상을 자랑하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국제 대회에서 올림픽 금메달은 상당히 중요한 이름값을 자랑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동메달만 따도 얻을 수 있는 병역특례 때문인지 상당히 적극적인 선수 선발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게 딱 끝이라는 것. 이들이 야구를 하기 위해 퍼뜨린 소수의 국가를 제외하면 야구는 마이너 중 마이너 종목이며 그마저도 종합대회에서 야구를 종목으로 채택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압박이 따라온다. 참가국은 소수인데 경기장은 대체 용도가 없는 거대한 경기장을 지어야하고 들어가는 시설 비용도 막대한데다 끝나고 재활용조차 거의 불가능해서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개최 지자체의 허리를 휘게만들 수 밖에 없는 종목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올림픽 야구는 사실상, 야구를 하는 나라가 올림픽을 할때 자국 시청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욱여넣는 것 외에는 올림픽 정식 종목 개근이 거의 불가능한 종목이다.


3.1. 대한민국 대표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올림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일본의 집념[편집]


일본의 경우에는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집념이 있는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로 최고 성적이 1996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도 자신감을 내비쳤던 일본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대만에게 일격을 당해 동메달에 그쳤으며, 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쿠바에게 13:9라는 석패를 당하며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 일본 프로선수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구대성이 마운드에 오른 김응룡호에 동메달을 내주며 무관에 그쳤고,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삿포로 참사로 인해 김재박호가 광탈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미국 또한 팬아메리카 게임에서 광탈하는 바람에 참가하지 못해 그 어느때보다 메달 획득의 기회가 높았던 상황에서 호주의 선발 크리스 옥스프링[11]에게 꽁꽁 묶이며 1:0 석패를 당해 결국 동메달 결정전으로 내려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파일:2004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 일본 야구 대표팀.jpg
2004 동메달을 목에 건 일본 대표팀
이를 만회하고자 2008 베이징 올림픽아오키 노리치카, 와다 츠요시, 다르빗슈 유, 와쿠이 히데아키등 당대 내로라하는 스타급 선수들을 총 출동시켰음에도 대한민국에게 2번이나 패하고 심지어 동메달조차 따지 못하는 베이징 쇼크를 당하며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다[12].

그 후 2020 도쿄 올림픽 야구 종목에서 단 6개국만 참가시키고, 패자조가 존재하는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번 대회의 토너먼트 방식과 대진표가 공개된 직후부터 일부 한국 언론이 적은 국가가 참가하고, 단기 토너먼트보다는 패하더라도 한 번의 기회가 더 존재하는 방식이 홈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라는 터무니 없는 분석을 하였는데, 애초에 일본 입장에서는 객관적인 전력이 이번 대회 참가국 중 최강이고 단 한 경기라도 내줄 확률이 높지 않기 때문에 딱히 이런 방식으로 이득을 본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득을 보는 건 메달을 노릴 만한 전력은 되지만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미끄러질 우려가 있어 '보험'의 효과가 절실한 대한민국 등의 중상위권 팀이며, 이는 대한민국이 두 번의 준결승 기회를 활용하는 유일한 팀이 됨으로써 증명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미국, 도미니카 공화국과 같은 메달권 국가들을 압살 하고 5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오랜 숙원 사업을 마침내 해결했다.[13]


4. 특징[편집]



4.1.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 사이[편집]


1996 애틀란타 올림픽까지는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해 프로 선수 참가도 불가했고, 아마추어 선수들이 사용하는 반발력 높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다. 하지만 2000 시드니 올림픽부터는 프로 선수 참가가 허용되었고, 엔트리 또한 24명으로 확대되었다. 야구 장비들 또한 프로들이 사용하는 장비로 바뀌게 된다.

국가간의 편차가 큰 만큼 머시 룰(Mercy Rule), 일명 콜드 게임이 유지되고 있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부터는 성인 국제 대회 최초로 승부치기가 도입되었다.


4.2. 소프트볼과의 관계[편집]


올림픽의 야구는 남자 종목인데 반해, 소프트볼은 여자의 종목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로 인해 올림픽에서 야구가 포함되면 소프트볼도 포함되며, 야구가 제외되면 소프트볼도 함께 제외된다. 야구와 소프트볼은 2013년 협회 통합 이후 한 종목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5. 대회 연혁[편집]


연도
픽토그램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4위
시범 종목
1912
파일:스웨덴 국기.svg

미국
스웨덴
-
-
1936
파일: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기.svg

미국 A팀
미국 B팀
-
-
1952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14]
TUL[15]
-
-
1956
파일:호주 국기.svg

미국
호주
-
-
1964
파일:일본 국기.svg

미국
일본
-
-
1984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1984 LA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png
일본
미국
중화 타이베이
대한민국
198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1988 서울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png
미국
일본
푸에르토리코
대한민국
정식 종목
1992
파일:스페인 국기.svg
파일: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png
쿠바
중화 타이베이
일본
미국
1996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1996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_블랙.png
쿠바
일본
미국
니카라과
2000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2000 시드니 야구 픽토그램.png
미국
쿠바
대한민국
일본
2004
파일:그리스 국기.svg
파일:2004 아테네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svg
쿠바
호주
일본
캐나다
2008
파일:중국 국기.svg
파일: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svg
대한민국
쿠바
미국
일본
2020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2020 도쿄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_원형.svg
일본
미국
도미니카 공화국
대한민국
2028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야구 픽토그램_원형.svg





6. 역대 우승국[편집]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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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47승을 기록한적이 있던 투수 출신 사업가. 이후 헐버트와 함께 메이저리그 내셔널 리그의 창설에 주도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으며, "미국의 국기는 야구"라는 신념하에 야구 세계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기도 하다.[2] 비운의 메달리스트로 유명한 인디언계 미국 스포츠 선수.[3] 과거 전 미식축구 및 농구 코치 및 메이저리그 선수.[4] 이때 미국 대표팀의 투수 중 한 명인 빌 세일리스는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5] 이때 모인 114,000명의 관객 수치는 꽤 놀라우나 실제로는 경기 중반 이후 들어온 관객이 대다수이고 이들은 모두 야구 경기 종료 후 펼쳐질 육상 경기를 보러 온 것이다.[6] 당시 기사.[7] 이때 참가한 유명 선수로 한 쪽 손이 없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한 짐 애보트(미국)가 있다..[8] 다만 일본은 현재 아시안 게임에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로 내보낸다. 아시안 게임까지 프로팀 선수를 내보내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국가는 사실상 병역특례가 걸려있는 대한민국 뿐이었으며, 대한민국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당시의 숱한 논란을 겪으며 차기 대회부터는 연령제한을 걸고 출전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9] 삿포로 참사로 진출은 실패.[10] 예선이던 2007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때는 박찬호(뉴욕 메츠), 류제국(템파베이 레이스)가 소집되었다. 다만 메이저리그 일정과 겹쳐지는 대륙별 플레이오프와 베이징 올림픽 본선무대는 참가하지 못했다.[11] 후에 롯데 자이언츠, kt wiz에서 뛰었던 선수가 맞다.[12] 더구나 대한민국은 이 대회에서 무려 9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게다가 일본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전승 우승으로 금메달을 따겠다"고 했던 판이라 그 충격이 배가 되어 돌아왔다.[13] 공교롭게도 이 대회에서는 한국은 준결승에서 일본과 미국에게 연달아 패하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도미니카에게 패배하여 메달 획득에 실패, 한일 양국의 운명이 13년 전과 정반대로 엇갈렸다.[14] 핀란드 페새팔로 대표팀.[15] 노동자 선수 협회(Työväen Urheiluliit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