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트마어 히츠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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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마어 히츠펠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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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Switzerland SFV 2010.png

38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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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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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뮌헨
47대,49대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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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월드사커 로고.png







독일의 축구인


파일:Ottmar Hitzfeld.jpg

이름
오트마어 히츠펠트
Ottmar Hitzfeld
출생
1949년 1월 12일 (75세)
독일국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프라이부르크현 뢰라흐군
국적
[[독일|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독일"
행정구
]]

신체
176cm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FC 바젤 (1971~1975)
VfB 슈투트가르트 (1975~1978)
FC 루가노 (1978~1980)
FC 루체른 (1980~1983)
감독
추크 94 (1983~1984)
FC 아라우 (1984~1988)
GC 취리히 (1988~199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1~1997)
FC 바이에른 뮌헨 (1998~2004)
FC 바이에른 뮌헨 (2007~2008)
스위스 대표팀 (2008~2014)
국가대표
없음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3.1. 스위스 슈퍼 리그 시절
3.2.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3.3. 바이에른 뮌헨 1기
3.4. 바이에른 뮌헨 2기
3.5. 스위스 대표팀
4. 기록
4.1. 선수
4.1.1. 대회 기록
4.1.2. 개인 수상
4.2. 감독
4.2.1. 대회 기록
4.2.2. 개인 수상
5. 여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ottmar-hitzfeld-autor.jpg

독일의 전 축구 선수이자 전 축구 감독.

독일을 대표하는 명문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 주제 무리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파비오 카펠로, 마르첼로 리피, 비센테 델보스케, 아르센 벵거와 함께 알렉스 퍼거슨의 라이벌이라고 불렸던 인물로, 감독 시절 총 2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우승 청부사이자 축구사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 중 한명이다. 특히 독일에서는 '고트마르(Gottmar)[2]'라 불릴 정도로 칭송받았던 명장이다. 한국 축구팬들에겐 인지도가 별로 없는 감독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유럽 축구를 시청한 팬들에게 명장을 꼽으라면 언제나 언급될 정도로 전성기의 포스는 엄청났다.

도르트문트뮌헨의 감독으로 모두 UCL을 제패하고, 7회의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획득했다.


2. 선수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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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감독 시절과는 달리, 선수 생활에는 독일인이지만 정작 독일에서는 자리를 못잡고 스위스 슈퍼리그에서 주로 활동했다. 독일 하부리그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던 히츠펠트는 1971년 22살의 나이로 스위스의 명문구단 FC 바젤에 스카웃되어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4시즌동안 92경기 출전 66득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2차례의 리그 우승과 1번의 스위스컵 우승을 기록한다. 바젤에서 활동하는 도중, 1972 뮌헨 올림픽에 서독 대표팀 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상을 바탕으로 VfB 슈투트가르트가 히츠펠트를 영입한다. 당시 슈투트가르트는 2부리그 소속이었는데 2번째 시즌인 1976/77 시즌 분데스리가 승격으로 이끌었으며, 승격 후 다음시즌 1977/78 시즌에 리그 4위를 기록하는 등 슈투트가르트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그 이후 다시 스위스로 복귀했고 FC 루가노와 FC 루체른에서도 주전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34살의 나이로 은퇴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3.1. 스위스 슈퍼 리그 시절[편집]


1983년, 은퇴 직후 곧바로 스위스 클럽인 추크 94 감독으로 부임한다. 2부 리그 소속팀이었던 추크 94를 부임하자마자 팀을 우승시켜 1부 리그로 승격시킨다.

추크 94의 놀라운 성과를 바탕으로 그 다음시즌에는 1부 리그 팀인 FC 아라우로 이적하여 전 시즌 10위였던 팀을 바로 리그 준우승과 FA컵인 스위스 컵을 우승을 차지 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비록 그 다음 시즌인 85/86시즌에는 리그 7위를, 86/87시즌에는 리그 11위를 기록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87/88시즌에는 리그 4위로 팀을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 뒤 1988년에는 스위스의 명문 구단인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로 팀을 옮긴다. 그라스호퍼에서의 3시즌 동안 2차례의 리그 우승, 1차례의 FA컵 우승을 기록하며 특히 1989/90 시즌에는 한 시즌 동시에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더블을 달성한다.


3.2. 보루시아 도르트문트[편집]



파일:hitzfeld_collage.jpg

스위스 리그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1990/91시즌 리그 10위를 기록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부름을 받아 1991/92시즌 감독으로 부임한다. FC 아라우처럼 전 시즌 10위 팀을 한 시즌만에 역시 리그 2위까지 올려놓는다. 1992/93시즌에는 리그 4위와 DFB-포칼 16강에 팀을 올려놓았고 UEFA컵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유벤투스 FC에게 일격을 당하며 준우승에 머무른다. 그 이후 1993/94 시즌에도 리그 4위를 기록하며 팀을 만든 히츠펠트는 부임 후 4시즌 만인 1994/95 시즌에 팀을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려놓았고 1995/96시즌에 리그 2연패에 달성한다. 1996/97 시즌에는 리그에서는 3위에 머물렀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는 결승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상대는 4년 전 UEFA컵 결승전에서 아픔을 줬던 유벤투스 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유벤투스를 상대로 마침내 3-1로 승리를 거두어 4년 전 복수를 하며, 첫번째 빅 이어를 들어 올린다. 하지만 팀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기술고문직으로 임명된다. 형식상 승진이지만 실제로는 도르트문트 상층부와의 갈등이 원인으로 팀을 아예 떠나는 대신 명예직인 기술고문직으로 추대하는 식으로 감독직 사임을 대신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명예직이었으니 실권은 없었다.


3.3. 바이에른 뮌헨 1기[편집]


그로 부터 1년 뒤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1998/99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부임한 첫번째 시즌에 압도적인 승점 차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달성하고, 동시에 DFB-포칼 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며 트레블 달성을 눈 앞에 두게 된다. 하지만 DFB-포칼에서는 베르더 브레멘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게 된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결승전을 치렀다. 로이 킨폴 스콜스가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에 결장을 하며 불리하게 시작한 맨유를 상대로 1:0의 스코어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는가 싶었지만 인저리 타임때 테디 셰링엄과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일격을 당하며 극적으로 우승을 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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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0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4강에 머물렀지만 리그 우승과 포칼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하였고 2000/01시즌에는 리그 3연패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결승에 진출, 발렌시아 CF를 상대로 승부차기 승리를 거둬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성공하며 히츠펠트 개인 통산 2번째로 빅이어를 달성한다. 2000년까지가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 인생의 최정점이다. 이 이후로 급변하는 축구 트렌드에 적응 하지 못하며 서서히 밀려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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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시즌인 2001-02 시즌에는 전통의 3백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4백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그 동안 3백만 사용하던 선수들이 제대로 적응 하지 못하고 메멧 숄, 파울로 팀, 슈테판 에펜베르크, 옌스 예레미스 등 미드필더에서 중심을 잡아줘야 할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결국 마티아스 자머 감독이 이끄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우승을 내줬고, 바이어 04 레버쿠젠에 밀려 리그 3위로 추락하게 된다.

바이에른 뮌헨의 수뇌부는 단순히 3백에서 4백으로 전환만 꾀한것이 아니라 2001-02 시즌 지네딘 지단루이스 피구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의 '아름다운 축구'의 매력을 느껴 바이에른 뮌헨의 축구 철학 자체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 전까지 바이에른 뮌헨의 전통적인 축구 철학이란 라인을 내린 뒤 피지컬과 체력으로 상대를 압박한 다음에 공격 작업은 그야말로 한 방으로 끝내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축구 철학은 FC 브라이트니게라고 불리던 1970년대에 정립된 전술이었고 오트마어 히츠펠트 역시 이 전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런 축구 철학을 개혁하고자 바이에른 뮌헨은 2001-02 시즌 윈터 브레이크 기간에 이미 라이벌인 레버쿠젠의 에이스 미하엘 발락제 호베르투와 당시 독일 축구의 미래라고 불렸던 세바스티안 다이슬러를 영입하며 개혁에 어울릴 만한 인물들을 영입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핵심이었지만 바이에른 뮌헨의 구상과는 전혀 다른 축구색을 지닌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방출한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미하엘 발락의 보좌 위에 제 호베르투-메멧 숄-다이슬러가 화려한 개인기와 아름다운 패스로 상대를 누르고 양 윙백인 리자라쥐와 샤놀의 오버래핑으로 상대를 몰아 붙이고 지오반니 에우베르, 로이 마카이 등 스트라이커들이 마무리하는 그런 축구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독일 축구에 화려함을 지닌 새로운 축구를 시도하면서 출발한 2002-03 시즌은 리빌딩의 핵심인 다이슬러와 메멧 숄은 부상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전통적인 독일의 축구와 바이에른 뮌헨의 리빌딩 시도는 서로 부합되지 못했다. 결국 라인을 내리고 피지컬적으로 상대를 압박한 후 한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전술과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제 호베르투, 메멧 숄 등을 보좌할 생각으로 데려왔던 미하엘 발락에게 과거 슈테판 에펜베르크처럼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기는 과거의 전술로 복귀하였다.

이것이 분데스리가 내에서는 먹혀들어 리그와 DFB-포칼 우승을 기록하지만 정작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 4위로 광탈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2003-04 시즌 팀의 에이스인 지오반니 에우베르를 방출하고 스페인 데포르티보에서 로이 마카이를 클럽 레코드를 깨면서 영입하는 등 팀 정비에 박차를 가했지만 2003-04 시즌 리그 준우승, DFB-포칼 16강, 챔피언스 리그 16강 등 무관에 그치며 상호 합의하에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유로 2004에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독일 대표팀의 감독직으로 0순위에 올랐으나 휴식이라는 명목하에 거절하였고 2년 동안 TV 해설가로 활동한다. 이 시기에 따로 영어 과외 선생을 구하여 영어 회화 수업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차기 행선지로 당시에도 고령이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후임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영입될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있었다.


3.4. 바이에른 뮌헨 2기[편집]


2년간 휴식을 취하던 히츠펠트는 다시 클럽 감독직으로 복귀하는데 행선지는 다름 아닌 바이에른 뮌헨.

오트마어 히츠펠트 사임 후 슈투트가르트 감독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줬던 펠릭스 마가트 감독을 이적료까지 지불하며 영입하여 2004-05, 2005-06 시즌 더블을 달성하는데 성공하였으나 2006-07 시즌 리그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이면서 챔피언스 리그 출전 순위인 리그 3위도 기록하기도 힘든 모습을 보여주자 중간에 해고 하기에 이르고 다시 히츠펠트에게 오퍼를 넣는다. 바이에른 뮌헨 입장에선 과거 자신들에게 영광을 가져다 준 실력있는 감독이자 또 리그 중반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였고 히츠펠트 입장에서도 2년 반 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서 현장 감각을 익힐 수 있으면서도 리그 성적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정적인 카드[3]로 서로에게 윈-윈인 셈이었다. 감독 복귀 직후 챔피언스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리그에서도 팀의 경기력이 살아나자 히츠펠트는 바이에른 뮌헨 프런트의 지지 하에 2007-08 시즌에도 감독직을 수행하기로 결정되었다.

2007-08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실패에 대한 분노의 영입으로 루카 토니, 미로슬라프 클로제, 프랑크 리베리 등을 영입하며 시즌 내에 우승할 수 있는 리그, DFB-포칼, 그리고 UEFA 컵 우승을 목표로 하며 명예 회복에 나선다. 초반 루카 토니-클로제의 투톱의 엄청난 공격력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며 연장 계약을 논의하는 설레발을 떨었으나 이후 UEFA 컵에서의 지지부진한 모습과 리그 내에서는 아예 대놓고 10백을 들고나와 무승부를 노리는 하위권의 팀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등 답답한 경기력을 보여주자 바켄바우어와 루메니게 등 바이에른 뮌헨의 수뇌부들에게 대놓고 디스를 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리그와 DFB-포칼 우승을 달성하며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3번째 더블을 달성했지만 UEFA 컵에서는 4강에서 만난 제니트에게 완패를 당하며 탈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더 이상 연장 계약을 하지 않고 바이에른 뮌헨을 떠났다.

2년 반 동안 휴식을 취한 뒤 바이에른 뮌헨으로 복귀하였어도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라인을 내리고 상대를 압박한 뒤 한방으로 결정하는 과거의 스타일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중간에 감독으로 부임한 펠릭스 마가트 역시 마찬가지. 이런 바이에른 뮌헨의 축구 전술은 2009년 루이 판할이 오고 나서야 개혁이 시작되며 2012-13 시즌 유프 하인케스에 가서야 최정점을 맞는다. 그 이후 뮌헨은 2012-13 시즌 이후 펩 과르디올라 체제의 과도기를 거치고, 힌지 플릭에 이르러 정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2021년 현재.


3.5. 스위스 대표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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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그리스, 라트비아, 이스라엘, 룩셈부르크, 몰도바와 같은 조에 배정. 예선 초반 최약체 룩셈부르크에 홈에서 패배하는 굴욕을 겪었지만 이후 승승장구하며 조 예선 1위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에서는 스페인, 칠레, 온두라스와 같은 조로 편성되었고 첫 경기에서 유로 2008 챔피언 스페인[4]을 1:0으로 잡아내는 대이변을 연출[5]했으나 2차전 칠레전에서 1:0 패배를 당해 3차전 온두라스를 반드시 잡아야했다. 그러나 3차전 최약체인 온두라스에 0:0 무승부에 그치면서 1승 1무 1패를 기록. 조 3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유로 2012 예선에서는 잉글랜드와 몬테네그로에 밀려 본선진출에 실패하였다. 2패로 출발한 예선 초반의 부진이 팀의 발목을 세게 잡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유럽 지역 예선에 알바니아, 아이슬란드, 노르웨이[6], 슬로베니아, 키프로스와 배정이 되었고 조 1위를 차지하여 본선에 진출하였다. 그룹 E조에 프랑스, 온두라스, 에콰도르와 같은 조에 배정되었고 프랑스에게 2:5로 대패하지만 에콰도르와 온두라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2승 1패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다. 16강전에서는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와 경기를 치뤘고 0:1로 패하여 16강에서 탈락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끝으로 65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에는 그냥 간간히 인터뷰로 근황을 알리고 계시다.


4. 기록[편집]



4.1. 선수[편집]



4.1.1. 대회 기록[편집]




4.1.2. 개인 수상[편집]




4.2. 감독[편집]



4.2.1. 대회 기록[편집]








4.2.2. 개인 수상 [편집]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97
  • UEFA 올해의 감독: 2001
  •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7]: 1997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96-97, 2000-01
  • 독일 올해의 축구 감독: 2008
  • 키커 올해의 감독: 1992-93, 1995-96, 1998-99, 1999-00, 2000-01, 2007-08
  • IFFHS 세계 최고의 클럽 감독: 1997, 2001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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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위스 알프스산에 본인의 이름을 딴 ''오트마어 히츠펠트 스타디움'이 존재한다. 이 경기장은 스위스 마운틴 리그 소속 아마추어 팀 FC 기스폰이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해발 2000m 고도에 위치해 있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홈구장으로 알려져있다. 18년동안 기스폰에서 뛴 디에고 압고츠폰은 축구 장소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평가했으며 고도가 높아 호흡하기가 어려워서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상대와 경기할 때 이점을 갖는다고 한다.[8] 단점도 많은데 고도가 높아 케이블카 2대를 가동해야 하며 겨울에는 스키장이 된다고 한다. 또한 공이 날라가면 언덕으로 인해 200~300m 정도 내려간다고 한다. 40년동안 공 1000여개가 분실되었다고.. 2008년 유럽 산악 챔피언십이 열렸을 당시 히츠펠트가 개막식 킥오프에 참석하기도 했다.

  • 특이사항으로는 수학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며, 1·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군단장으로 복무하며 철십자 훈장을 받은 오토 히츠펠트 장군의 친조카이다. 그 이유로 '장군(der General)'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 아버지인 로버트 히츠펠트는 치과의사였다고 한다.

  •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에펜베르크가 히츠펠트의 말은 굉장히 잘 들었다고. 히츠펠트 본인도 에펜베르크를 많이 믿어서 그라운드 위에서 그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는 등 많은 신뢰를 보여주었다.


6. 둘러보기[편집]







[1] 스트라이커[2] '신'이라는 뜻의 Der Gott과 이름 오트마어의 합성어[3] 이미 마카트가 리그 순위 자체를 추락시켰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4] 스페인 감독은 과거 챔피언스리그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비센테 델보스케였다.[5] 첫 경기를 진 스페인은 이후 6연승하면서 사상 첫 월드컵 우승에 성공했다.[6] 추첨 때 피파랭킹으로 톱시드 국가였으나 무기력하게 탈락했다.[7] 제프 헤어베어거 어워드[8] 그에 의하면 높은 고도 환경에 익숙해서 경기 중반에 5:0으로 뒤지고 있어도 다시 돌아와서 이길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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