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3세(바이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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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비텔스바흐 왕조 국왕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
Otto III

파일:Otto_III_of_Bavaria_thurocz.jpg

출생
1261년 2월 11일
니더바이에른 부르크하우젠
사망
1312년 11월 9일
니더바이에른 란츠후트
재위
니더바이에른 공국의 공작
1290년 2월 3일 ~ 1312년 11월 9일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왕
1305년 12월 6일 ~ 1308년
배우자
합스부르크의 카타리나
(1279년 결혼/1282년 사망)
글로가우의 아그네스
(1309년 결혼)
아버지
하인리히 13세
어머니
헝가리의 에르제베트
형제자매
아그네스, 아그네스, 아그네스, 엘리자베트, 하인리히, 소피, 카테리나, 루트비히 3세, 슈테판 1세
자녀
하인리히, 루돌프, 아그네스, 하인리히 15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니더바이에른 공작,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 국왕.


2. 생애[편집]


1261년 2월 11일 니더바이에른의 부르크하우젠에서 니더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와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딸 에르제베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아그네스(1254~1315, 셀리겐탈 시토회 수도원의 수녀가 됨), 아그네스(1255~1260), 아그네스(1256~1260), 엘리자베트(1258~1314, 셀리겐탈 시토회 수도원의 수녀가 됨), 하인리히, 소피, 카테리나, 루트비히 3세, 슈테판 1세가 있었다. 1290년 2월 3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니더바이에른의 유일한 공작이 되었고, 형제인 루트비히 3세와 슈테판 1세는 그의 봉신이 되었다.

그는 슈타이어마르크를 공략하기 위해 그 땅을 점유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대적했으며,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에 대항하던 나사우 가문아돌프를 지원했다. 1292년, 슈타이어마르크에서 란츠베르크 동맹의 반 합스부르크 봉기를 지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298년 오버바이에른 공작이자 라인 궁정백인 사촌 루돌프[1]와 함께 괼하임 전투에서 알브레히트 1세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3세에 대적하는 아돌프를 도왔다. 그러나 이 전투는 알브레히트 1세-언드라시 3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아돌프는 전사했다. 그 후 그의 영지였던 파크슈타인과 바이덴을 알브레히트 1세에게 빼앗겼다. 알브레히트 1세는 이 영지를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에게 양도했다.

1301년 1월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하면서 수 세기 동안 헝가리 왕국을 다스렸던 아르파드 왕조가 단절되었다. 일부 헝가리 귀족들은 그에게 성 이슈트반 왕관을 제의했지만, 오토는 헝가리가 무척 혼란스럽고 귀족들의 권세가 너무 강해서 국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헝가리 왕위에 오른 바츨라프 3세가 알브레히트 1세와 대적하는 것을 지원했다. 그러다가 1305년 7월, 바츨라프 3세가 "헝가리 왕위를 양도하려 하니 프라하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고심 끝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니더바이에른에서 프라하로 가려면 오스트리아를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알브레히트 1세가 그의 통과를 받아줄 리 없었다. 이에 포도주를 판매하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오스트리아 영내를 통과해 프라하에 도착했다.

1305년 10월 9일, 브르노에서 바츨라프 3세로부터 헝가리 왕관과 보물 등 헝가리 왕좌에 대한 권리를 넘겨받은 뒤 헝가리로 이동해 1305년 12월 6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는 '벨러'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이 때문에 후대 학자들은 그를 헝가리 왕으로서 거론할 때 '오토 1세' 또는 '벨러 5세'라고 명시한다. 대관식은 베스프렘의 주교인 베네딕트 3세와 처나드의 주교인 안탈 1세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는 헝가리 왕이 된 이후로 연이은 실패를 맛보았다. 언드라시 3세 치세 때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며 크로아티아-달마티아 등 헝가리 남부 일대에서 지지세력을 끌어모으던 카로이 로베르트가 1306년 말부터 북상해 헝가리의 수도 부더를 압박했다. 여기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카로이를 지지하면서 오토가 헝가리 왕을 칭하는 것을 금지했다. 오토는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1307년 봄 에르데이를 순행하다가 그해 6월 오토와 카로이 둘 다 왕으로 인정하지 않던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 란슬로 칸에게 체포되었다.

1307년 10월 10일 라코스에서 열린 긴급 회의에서, 귀족들은 카로이를 헝가리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인 마테 3세 크사크, 어버 어머데, 라슬로 칸은 카로이의 권위를 무시했다. 1307년 말에 석방된 오토는 헝가리에 정나미가 떨어졌고, 1308년 헝가리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카로이를 왕으로 인정한 뒤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갈등을 벌인 끝에 1310년 전쟁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니더바이에른 공국의 수도 부르크하우젠이 초토화되었다.

1312년 2월 2일 잘츠부르크 평화협약을 맺으면서 전쟁을 끝냈지만,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막대한 빚은 공국에 큰 부담을 안겨줬다. 이에 바이에른의 지주들로 구성된 의회에 세금 승인권을 맡기는 대가로 상당한 지원을 받아냈다. 일명 '오토의 보증(Ottonischen Handfeste)'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1302년 오버바이에른 공작의 슈나이트바흐 문서와 함께 바이에른에서 의회주의가 발현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312년 11월 9일 란츠후트에서 사망했고, 란츠후트 인근의 셀리겐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2번 결혼했다. 1279년 1월 독일왕 루돌프 1세와 호헨베르크의 게르트루트의 딸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280년 쌍둥이 하인리히, 루돌프를 낳았지만, 두 자식 모두 같은 해에 사망했다. 1282년 4월 4일 카타리나가 사망한 뒤 23년간 홀아비로 지내다가 1309년 5월 18일 슐레지엔글로가우 공작 하인리히 3세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마틸다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해 아들 하인리히 15세와 딸 아그네스를 낳았다. 오토가 사망한 뒤, 아들 하인리히 15세가 니더바이에른 공작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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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의 부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