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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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たあジュリア

1580~?
1. 개요
2. 서브컬처에서의 등장
3. 관련 저서


1. 개요[편집]


조선 출신의 전국시대, 에도 시대의 인물.

고니시 유키나가입양한 조선 아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참고로 쥬리아는 세례명인 율리아의 일본식 발음으로, 조선에서의 행적, 본명 등은 일체 불명. 그러나 2023년 공개된 그녀의 편지에 따르면 그녀는 한양에 살던 김씨 양반 출신 집의 장녀라고 한다. #
임진왜란 때 유키나가가 그녀를 입양해 그의 처한테서 가르침을 많이 받아왔다. 이때 세례명 이외에 입양되면서 지어진 일본어 이름이 오타아(おたあ)로 오다가 아니다. 사실 고니시가 그녀를 시녀로 쓴 것은 맞지만, 양녀로 입양했단 것을 증명할 사료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유키나가가 패배하고 처형당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그의 측실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도 있고[1] 가톨릭이 금지되었어도 배교하지 않자[2] 이즈 제도의 고즈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뒤에도 고니시 가에서 배운 약학 지식[3]을 살려 환자를 간호하는 등 신앙 생활과 봉사를 계속했다고 한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의 편지에 따르면, 쥬리아는 이에야스 사후(1616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일본 각지에서 가난한 떠돌이로 살면서도 복음전파를 하고 선교사를 돕는 등, 신앙활동에 열심히였다고 한다. 그녀는 1619년 나가사키에서 여자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리와 성가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1622년 오사카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산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쥬리아가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에서 가톨릭을 믿는 재일교포들은 그녀를 많이 존경하고 있다. 절두산 성지에 그녀의 무덤으로 알려진 고즈시마 섬의 무덤의 흙을 떠와 만든 그녀의 무덤이 있었으나, 후에 그녀가 고즈시마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철거되었다.

1871년에 청나라에서 출판된 '관광일본'[4]에 따르면 조선 왕족 출신이라는 듯한 글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알 길은 없다. 애초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들이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자신이 잡은 포로를 왕족으로 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2023년에 그녀의 친필 서한이 발견, 공개되었다. 왕족까진 아니지만 신분은 양반이었으며, 한양에서 살다가 포로로 잡힐 때 생이별한 남동생이 무라타라는 무사의 양자가 되어 무라타 운나키(村田安政)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어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올해 쥬리아의 서한이 일본 하기박물관에서 최초로 공개된 것은 사실이나, 위에 적힌 내용은 다소 틀린 사실이 많다. 우선 편지는 그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처인 시즈오카 슨푸성에서 지내던 1609년 8월 19일 쓴 것으로, 수신인은 마찬가지로 일본에 잡혀와 야마구치 하기에 살던 둘째 남동생 '운나키'다.(하기는 조선인 도공이 많이 살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운나키는'는 당시 야마구치 일대를 지배하던 모리 가문의 가신, 히라가 가문에서 하층민으로 지내고 있었다. '운나키'는 조선에서부터 쓰던 이름으로 여겨지며, '운락(운낙)'이나 '운학', '운악', '응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安政는 후대에 생긴 이름으로, 야스마사로 읽는 게 맞다. '운나키'로 읽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편지에서 쥬리아가 스스로 부르는 이름인 '타아' 역시 조선에서부터 쓰던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녀는 편지에서 자신이 왕의 측근인 '제운대군절도사 김세왕온'과 홍씨 부인의 5자녀 중 장녀라고 말한다. 하지만 '제운대군절도사'와 '김세왕온'은 국내 사료엔 없는 이름이라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쥬리아는 또 편지에서 자신이 임진년(1592년) 당시 13살이었으며, 이듬해 11살 짜리 동생(운나키가 아닌 다른 동생. 운나키는 당시 7살)과 몸종과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말한다. #

한편, 편지를 받고 슨푸성으로 간 남동생은 누나와 상봉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하사품도 받아 하기로 돌아갔다. 그러자 모리 가문은 그에게 200석 봉토와 함께 '무라타'(村田)라는 성과 '야스마사(安政)라는 이름을 내려줬다. 그렇게 조선인 운나키는 일본인 사무라이 무라타 야스마사가 됐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끼는 시녀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조선인 포로인 그가 무사가 될 정도로 든든한 자산이었던 것이다. 이후 대대로 하기에서 사무라이로 살던 무라타 가문은 편지를 보관해왔고, 2021년 하기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올해 박물관이 전시를 하면서 새롭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학계에선 일본 각지를 떠돌던 쥬리아가 말년에 남동생이 사는 하기로 가서 삶을 마감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

후손으로는 방계후손으로 둘째 남동생 무라타 야스마사의 직계후손인 무라타 노리오[5]가 생존하고 있다.



2. 서브컬처에서의 등장[편집]


사잔 올 스타즈의 夢に消えたジュリア(꿈으로 사라진 줄리아)의 가사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원래 사잔 올 스타즈는 오타 줄리아의 이야기는 전설상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다가 실존인물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 등장. 본래 언년이란 이름의 보잘 것 없는 시골 양반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아사하여 고아가 된 것을 고니시가 주워온다. 작중 그 시점에서 마계의 여러 마수들에 시달려 마음고생을 하던 고니시는 이 여자아이를 돌보며 어느 정도 마음의 평안을 찾고[6] 오다 쥬리아란 이름은 이미 몰락한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에 느끼는 아쉬움을 담아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오타는 성이 아니라 이름이며 발음도 조금 다르다. 한국어와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장음표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오타"로 표기되지만 장음을 반영해 표기한다면 "오타아"라고 쓰는 게 맞다. "오다"는 더더구나 아니다. 무엇보다 "오타"의 "오"는 귀부인에게 붙이던 높인말인 "오(御)"이다.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라는 이름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다.

1979년 작 일본영화 <사나다 유키무라의 모략>에 등장한다. 배우는 아키노 요코.


3. 관련 저서[편집]


  • 오타 줄리아 (이른아침, 20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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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사에 따르면 쥬리아가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여서 도쿠가와가 시녀였던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심지어 끝까지 자신의 첩이 되길 거부했음에도 '배교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그러니 제발 배교하겠다고 해서 목숨을 보전해라.'라고 부탁했다고도 하는데 사실이라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미녀였던 모양.[2] 이 때 ‘지상의 왕을 위해 천상의 왕을 배신하진 않을 것’이라 했다 한다.[3] 고니시 유키나가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가 사카이의 약종상(藥種商)이었다. 그래서 류사 - 유키나가 - 오타아로 제약 관련 지식이 계속 전수될 수 있었다.[4]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 하현덕(夏顯德)의 저술로 1871년 중국 상하이의 자모당(慈母堂)에서 상·하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5] 1941년생[6] 사실 미래에 크게 이름을 남길 인물에겐 마수들이 크게 해를 끼치기 못하기 때문이며 이 아이가 순수하고 정결한 영혼을 가졌기에 마수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