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혁/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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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안탈리아 3차 월드컵
3. 상하이 4차 월드컵
4. 울산 세계선수권 대회



1. 개요[편집]


파일:09오진혁.jpg
28세에 맞이한 국가대표 풀타임 1년차 시즌
오진혁2009년 국내외 대회 활약을 정리한 문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초대 월드컵 파이널 챔피언 박경모가 선발전에서 탈락한 상황에서 오진혁이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여 대표팀 내 최고참이자 마지막 사수라는 박경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1]


2. 안탈리아 3차 월드컵[편집]


  • 랭킹 라운드
국가대표 1진 선수로서 참가하는 첫 번째 랭킹 라운드에서 오진혁은 1353점으로 2위를 기록했다. 팀 동료 임동현이 1362점으로 1위, 이창환은 1338점으로 8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은 4053점으로 인도를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 남자 단체전
16강전 독일과 상대하여 216:211로 승리했고, 8강 프란길리가 빠진 이탈리아를 상대로 220:211, 9점 차이 여유 있는 승리를 가져갔다. 4강전에서 귀화 선수 출신 스카이 김이 있는 호주를 상대로도 219:216로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은 랭킹 라운드 2위를 기록한 자얀타 딸룩다르[2], 라울 베네르지[3], 망갈 싱 참피아[4]의 인도. 당시 인도 국가대표팀 이 세 선수들의 활약으로 1년 후 2010년 6월 세계 랭킹 1위,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딸 정도로 아시아에서 매우 강력한 수준의 팀이었다. 인도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듯 221점이라는 이전의 팀들보다는 고득점을 기록했지만, 대한민국이 총 225점을 쏴서 안탈리아 3차 월드컵 단체전 금메달, 오진혁은 생애 첫 월드컵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 남자 개인전
2번 시드를 획득한 오진혁은 64강전에서 벨기에의 이반 데니스를 상대로 114:107로 승리, 32강전에서 러시아의 안드레이 아브라모프를 상대로 114:107로 승리한다. 16강전에서도 117:111로 여유있게 승리한 오진혁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개인전, 단체전을 획득한 영국의 사이먼 테리를 상대로 8강전에서 접전을 벌이나, 108:110으로 2점 차로 패배한다. 1999년 6위가 최고 성적이었던 오진혁은 10년 만에 5위로 개인전 최고 성적을 갱신하게 되었다. 이 5위라는 성적은 대한민국 내에서도 최고 성적[5]이었다.


3. 상하이 4차 월드컵[편집]


  • 랭킹 라운드
지난 대회 랭킹 라운드 2위,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5위에 올랐던 오진혁은 이번 대회에서는 1366점을 쏘며 랭킹 라운드 1위를 기록한다. 이전에 8위를 기록한 2위 이창환과 15점 차 1위. 그리고 임동현은 1327점으로 7위를 기록했다.

  • 남자 단체전
대한민국은 참가국 중 유일하게 4000점이 넘어가는 4044점을 기록하며 1번 시드를 받고, 16강전 폴란드를 상대로 220:210 승리를 거둔다. 8강전에서는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229:209, 무려 20점 차 대승을 거두고 기분 좋게 4강으로 진출한다. 4강전 상대는 스페인. 한국이 일방적으로 경기를 가져갔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216:213으로 접전 끝에 3점 차로 한국이 결승에 진출했다. 대회 내내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올라온 한국의 상대는 프랑스. [6] 이전 경기와 동일하게 한국은 216점을 기록하였으나, 프랑스는 207점을 쏴 한국은 상하이 4차 월드컵 남자 단체전 금메달, 월드컵 시리즈에서 2연속 금메달을 획득한다.

  • 남자 개인전
1번 시드 오진혁은 64강전 캐나다의 존 데이비드 번스를 만나 116:100으로 확실한 실력 차이를 보여주며 32강에 진출하고, 스페인의 다니엘 모릴로를 상대로도 110:107로 승리한다. 이후 러시아의 발지니마 치렘필로프와도 115:111로 이전 대회 자신이 도전을 멈춘 8강전에 진출한다. 상대는 당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량을 가진 프랑스의 로맹 지루이. 8강전에서 오진혁은 이전과 비슷한 접전을 보이지만 결과는 같지 않았다. 최종 결과 108:107, 1점 차이로 오진혁이 국제 대회 첫 4강에 진출했다. 4강전 상대는 지루이만큼은 아니지만 세계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진 말레이시아의 쳉추시안. 오진혁은 이전 경기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역시 접전 끝에 114:112 2점 차로 승리. 결승에 진출하였다. 결승전의 상대는 임동현을 꺾고 세계 랭킹 157위지만 랭킹 라운드에서 3위를 기록한 중국의 천원위안. 이제 막 기량이 만개한 두 선수는 결승전에서 4점 차 접전을 벌이지만, 109:113으로 중국이 금메달을 가져간다. 최종 결과는 국제대회 개인전 첫 번째 메달인 은메달. 동메달을 딴 임동현과 함께 포디움에 오르게 되었다.


4. 울산 세계선수권 대회[편집]


파일:09대표팀.jpg
임동현, 오진혁, 이창환
  • 랭킹 라운드
10년만에 돌아온 세계선수권 대회. 10년 전 고교 궁사이자 막내로 출전한 오진혁은 이번 대회에는 팀 내 최고참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그리고 랭킹 라운드에서 세계 신기록 2개 포함 1386점을 기록해 10년 전보다 73계단 상승한 1위를 기록하였다. 2위는 이전과 동일하게 15점 차이로 이창환. 임동현도 등수를 4위로 끌어올렸다.
파일:양궁신 오진혁.jpg
예선 90m에서 오진혁이 342점으로 세계신기록을 달성하자 캐나다 선수 라이언과 듀에니어스가 오진혁을 향해 절을 하고 있다. 링크

  • 남자 단체전
대한민국 대표팀은 16강전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240점 만점 230점이라는 뛰어난 정확도를 보이며 20점 차 대승을 거두고, 기세를 몰아 8강전 러시아를 상대로도 222:214라는 8점 차 여유로운 승리를 가져간다. 4강전은 시즌 첫 한일전이 성사되었는데, 일본에는 오진혁이 태어난 1981년에 양궁 국제무대에 데뷔한 1962년생 야마모토 히로시가 이번에도 출전하였다. 매우 긴 양궁 경력으로 인해 올림픽에서 20년 주기[7]로, 아시안게임에서도 20년 주기[8]로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하고, 단체전에서도 아시안 게임 3연속[9] 메달을 획득하는 등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선수이다. 하지만 이런 일본을 상대로 대한민국은 올 시즌 단체전 전승의 실력을 과시하며 231:226으로 결승에 진출하였다.[10] 결승전 상대는 프랑스.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답게 두 팀은 매우 팽팽한 경기를 펼쳤으며, 한국의 2009 시즌 중 최소 점수차인 2점으로 경기가 끝난다. 최종 결과는 222:220으로 대한민국 금메달. 단체전, 개인전 모두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한 오진혁은 10년 후 돌아와 랭킹 라운드 1위로 개인전을 출전할 기회를 얻었고, 단체전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 남자 개인전
1번 시드 오진혁은 1라운드를 부전승으로 통과하고 2라운드에서 룩셈부르크의 제프 헨켈스를 만나 112:101로 승리한다. 32강전에선 3차 월드컵 단체전에서 만난 인도의 바네르지를 상대로 112:109로 16강에 진출하고, 16강에서는 114:110로 8강전에 진출한다. 8강전 상대는 4차 월드컵 오진혁의 결승 상대인 중국의 천원위안. 이 경기에서 오진혁은 109:100, 9점 차이로 승리해 이전 대회 4점 차 패배를 설욕하였다. 두 대회 연속으로 4강에 진출한 오진혁은 2009 시즌에 만난 상대 중 대한민국의 임동현이라는 가장 강한 상대를 만난다. 오진혁과 임동현은 한국 더비의 수준을 증명하듯 수준 높은 경기를 펼치고, 두 선수 모두 높은 점수인 110점과 112점를 기록한다. 하지만 오진혁보다 2점 더 높은 점수가 적힌 과녁으로 화살을 쏜 임동현이 결승에 진출하고, 오진혁은 동메달 결정전에 진출한다. 하지만 동메달 결정전 상대는 베이징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인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루반. 루반은 이전 경기 이창환에게 패배한 것을 설욕하려는 듯 경기에 임했고, 오진혁도 경기 내내 지지 않고 맞섰다. 하지만 수준 높은 접전 끝에 110:111로 오진혁의 최종 결과는 4위. 이 대회 대한민국은 전 종목 석권을 기록하였고, 남자 개인전 4강에 개인전 멤버 3명을 모두 진출시켰으며 개인전 금(이창환), 은(임동현)을 싹쓸이하였으며, 여자부도 금(주현정), 은(곽예지)를 모두 가져가는 등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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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 대표팀에서는 박경모가 빠지고, 여자 대표팀에서는 박경모의 현 배우자인 박성현이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이 자리는 92년생 고교 궁사 곽예지가 채우게 되었고, 주현정윤옥희는 그대로 본인의 자리를 지켰다. 오진혁과 곽예지는 11살 차이가 나지만, 두 선수 모두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상위 3위 안에 든 것은 처음이다.[2] 2006년 최고 랭킹 2위를 기록한 인도의 에이스. 런던 올림픽에도 참가하고 2016년까지 매우 꾸준한 기량을 보이다가 최근에 부진했는데, 2022년 9.19 11승 4패, 세계랭킹 10위로 반등에 성공하였다.[3] 2010년 16승 3패로 커리어 하이를 찍었으며,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 초반 수시로 세계 랭킹 10위권대에 진입한 선수이다.[4]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리스트 빅토르 루반과 같은 678점을 기록했다.[5] 임동현 18위, 이창환 37위.[6] 당시 프랑스에는 세계 랭킹 19위인 진 샤를 발라동이 있었는데, 이 선수는 이후 리우 올림픽 은메달과 세계 랭킹 1위를 쟁취한다.[7] 1984년 동메달, 2004년 은메달[8] 1982년, 2002년.[9] 1986, 1990, 1994[10] 히로시는 단체전 동메달을 획득하며 46세의 나이로 커리어 첫 세계선수권 메달을 획득하였다.